송석석은 의자에 기대어 앉은 덕에 키가 훤칠하고 다리가 길어 보이며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혜태비가 장공주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은 점이 기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장공주는 그 방법이 쓸모가 없는 걸 보고 마음을 다잡으며 담담한 척 말했다. “그렇지요. 능력 있는 사람이 관리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송석석이 한 번 시집갔던 몸이라 싫어한다던 혜태비가 언제부터 며느리와 이렇게 각별한 사이가 된 건지 궁금하군요. 혜태비, 나는 당신이 북명왕부에서 며느리에게 억눌려서 살까 봐 걱정돼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자 송석석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만하세요. 나머지는 제가 말한 대로 할 테니 저희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잠깐!” 장공주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너도 적당히 하거라. 염치없이 굴지 말란 말이다.” 장공주의 말에 혜태비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 반면, 송석석은 애써 참았던 화를 내기 시작했다. “제가 뭘 염치없이 굴었단 말입니까? 전 돈을 받으러 온 겁니다. 서로의 감정이 틀어질까 봐 제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장공주님께서 이렇게 나오시니 저도 더 이상 참지 않겠습니다. 금루의 돈은 조천민이 횡령한 게 아니라 두 분이 저희 어머님을 어리석게 여기고 여태 헛된 말로 돈을 받아간 것이 아닙니까. 조천민이 모든 사실을 말했습니다. 전에는 어머님이 궁에 살았으니 아랑곳하지 않고 날뛰었겠지요. 하지만 어머님이 궁에서 나오자 두 분이 미리 어머님의 초상화를 그들에게 보여주고 어머님이 점포에 가시게 되면 손님들은 그저 장사를 유지하려고 부른 일꾼이라고 말하라고 시킨 게 아닙니까!” “헛소리하지 말거라.” 장공주가 냉소를 터트렸다. “점포의 돈을 횡령한 사람의 말도 곧이곧대로 믿더니.” “그런 사람의 말을 믿어도 두 분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오늘 받을 돈을 받고 물러나야 할 자리에서 물러나 주신다면 이 일은 그냥 넘어가려 했으나 이렇게 나오시니 저도 두려울 것 없습니다. 공주께서 저희 어머님께 정절문을 보내왔을
그래서 다시 돈을 세기 시작했고 은표가 부족하자 금으로 채웠다. ‘20여만 냥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내놓다니.. 공주부에 재산이 만만치 않군. 하긴, 근 몇 년 동안 부병을 키우고, 수백 명의 시종과 하인을 거느리는 것도 모자라 종종 손님까지 대접했었지. 게다가 공주부의 복장, 장신구 등은 모두 일등품이었어.’ 돈을 꺼낼 때 마음을 아파하던 장공주의 표정을 본 송석석은 이번에야말로 장공주의 급소를 정확히 찔렀다는 생각에 통쾌했다. 이번일로 정말로 그녀와의 관계가 틀어진 것 같았다.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모두 되돌려 받았으니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장공주와 사이가 틀어진 일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니 허위적인 친절을 유지할 필요 없어.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지.’ 장공주 모녀는 송석석이 올 때와 달리 아주 오만스러운 태도로 떠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했다. “송석석!” 장공주는 이를 갈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에게는 이제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가의 군주도 처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몇 년간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군요. 모두 송석석 저 천한 년 때문이니 내가 가만 두지 않겠어요!” 장공주도 송석석을 원망했지만 가의 군주가 하는 말을 듣고 말렸다. “아니다. 넌 송석석의 상대가 아니니 괜히 건드리지 말거라. 금루의 일도 네가 잘 처리하지 못한 탓 아니냐? 어떻게 장부를 전부 금루에 둘 수가 있어? 너 대체 생각이 있는 거냐?” 가의 군주는 화가 나면서도 억울했다. “저는 평양후부로 바로 가져가면 제가 금루를 운영한다는 걸 시어머니에게 들킬까 봐 무서워서 그랬던 겁니다..” “그럼 다른 저택에 다시 가져다 두었어야지. 평양후부에만 가져다 놓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 정 방법이 없으면 오래갈 장사도 아니니 매년 장부를 확인한 후 태워버릴 수도 있는 것이잖냐!”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조천민 녀석이 태우면 안 된다고 저를 계속 말렸습니다.. 공주부의 모든 가게 중 금루만 세금을 내고 있어서
사여묵과 장대성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고 뒤로 마차들이 천천히 따라왔다. 한편, 혜 태비가 송석석의 손을 덥석 잡으며 기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내가 다시 은을 돌려 받았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장공주에 대해 잘 알고 있지, 관대한 모습 뒤로 단호하기 짝이 없어.”송석석이 손을 집어넣었다.“잘 알고 계시니, 다음부터 조심하시면 됩니다.”“그러마.”하지만 몰려드는 걱정에 다시 입을 열었다.“만약 이번 일로 사이가 틀어지면 다른 부인들 앞에서 우리의 욕을 하겠지. 그럼 우리의 명성도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느냐.”“그게 큰 문제입니까?”“넌 오래전부터 명성이 좋지 않아 문제가 되지 않지. 하지만 나는 막 궁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어떻게든 명성은 지켜내야 해.”송석석은 그녀를 살짝 노려 보았다.‘자기 자신 밖에 모르다니’혜 태비는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사실에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아, 나는 그 뜻이 아니야. 한녕이 선을 보는 중이라 다른 집안들과 만남이 잦아. 자칫해서 한녕의 명성까지 더럽히면 어찌하나 싶어 한 말이네.”송석석이 답했다.“한녕 공주는 폐하와 태후가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북명황실이 그분의 배경입니다. 그 누구라도 한녕 공주의 명성을 감히 건드릴 수 없습니다.”그녀는 태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당시의 태후는 제씨 집안의 여섯 번째 아들을 마음에 들어 했다.그리고 그를 조사하면서 한녕 공주의 의견을 물어보면 되지 않은가.마찬가지로 제씨 집안의 여섯 번째 아들의 의견도 들어 볼 것이다.송석석은 실패한 혼인 경험 때문에 부모 말고 본인들의 의견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음 상했느냐?”한참을 침묵하던 송석석에게 혜태비가 물었다.“아니요.”송석석은 생각을 가다 듬었다.“다른 일을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혜태비는 관대한 태도로 말했다.“내가 말했지 않느냐, 전부 다 돌려받게 된다면 반은 꼭 주겠다고 말이야.”송석석이 실성한 미소를 지었다.“어머님이 다 가져가서도 좋
많은 생각과 추운 온도 탓에 온몸이 굳어 관절이 아파왔다.부로 돌아오고 나서 송석석이 혜태비를 챙겼다.이어서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생강차 좀 끓여 오게나, 자네들도 생강차 마시고 몸 좀 축이게.”송석석은 자신도 공주부에서 추위에 떨었지만 타인부터 챙겼다.이어서 혜태비는 자신의 행동에 창피함이 몰려왔다.사실 송석석은 혜태비가 아니라 사여묵이 걱정 되었던 것이다.곧이어 주방에서 생강차가 올라왔다.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생강차를 마시고 있었다.한편, 송석석은 고개를 돌려 사여묵을 바라보았다.그가 생강차를 두 잔 마시고 나서야 혜태비에게 시선을 옮겼다.“어머님께서 먼저 드시지요. 돌아가서 따뜻한 국물 음식을 가져달라 하겠습니다.”그들은 오늘 밤에 목적지로 출발했다. 게다가 공주부는 물 한 모금 조차 대접하지 않았다.하물며 먹을 음식이 있었으랴.“그래.”대답하는 혜태비의 코가 꽉 막혔다.그녀는 감동에 벅차올랐다.“다 마시겠네.”“네, 알겠습니다. 저는 먼저 목욕부터 하겠습니다. 다 마시고 나면 뜨거운 물로 몸을 더 녹이시는 게 좋겠습니다.”송석석은 상대방의 대답은 듣지 않았다.곧이어 뚱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여묵을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사여묵은 화가 잔뜩 났다.그의 모친이 한 짓에 경악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녀는 후궁에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가의 군주에게 은을 주고, 때로는 은을 가져가는 행동은 신중하지 못했다. 게다가 혼인 한 지 며칠도 되지 않은 송석석이 모친을 도와 두 번이나 나섰다. 그가 밤에 공주부 밖에서 대기를 한 이유는 송석석 때문이었다.그녀의 실력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자신의 모친을 위해 힘든 일을 맡아 하는 그녀가 안쓰러워서였다. 게다가 그는 송석석이 도움을 청하기 전까지 사건에 함부로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분명 장공주와 쌓인 원한을 스스로 풀고 싶어 했을 것이다.한편, 두 사람은 매화원으로 향했다. 사여묵이 송석석의 손을 잡고
결국 두 사람은 같이 목욕을 하러 들어갔다. 목욕은 끝내도 서로를 향한 사랑은 끝이 없었다. 다행히도 둘 다 무술인이라서 1-2시간만 숙면해도 문제가 없었다.그 다음 날 아침.여인 두 명이 노 집사의 지시로 방 안으로 들어가 사여묵의 시중을 들었다. 두 사람은 원래 자수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왕야의 시중을 들 사람이 없어 잠시 데려온 것이다. 노 집사가 사내 하인들이 왕야의 옷을 갈아입히는 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서다. 왕비의 하녀인 서주와 동주는 송서우를 챙겼고, 보주와 설주 그리고 명주는 왕비의 곁에서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양 마마는 매화원 전체를 신경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시중을 들게 하는 것도 부적절했다. 그리고 젊은 여인을 데려와 다른 일이 생기는 것 보다 궁녀 영씨와 옥씨에게 맡기는 쪽이 마음이 편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이미 마흔이 넘었다. 그리하여 일도, 관계도 모두 안정감이 있었다.심지어 왕야가 황실에 배정받을 때 태후가 보내온 사람들이었다. 예전에는 태후 마마의 시중을 든 궁녀들이라 그런지 더욱 마음이 놓였다.곧 연말이라 대리사도 문을 닫는지라 사여묵은 오늘 대리사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모든 일은 내년 정월 초팔일 부터 처리가 가능했다.한편, 송석석은 국공부로 돌아가야 했다.그리하여 두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아침 식사를 했다.식사를 한 후 송석석은 송서우를 국공부로 데려가기 위해 사람을 불러 아이를 데려오게 했다. 그렇게 외출 준비를 끝내고 나가려고 문을 열자 문 앞에 시만자와 몽둥이가 서있었다.시만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제 저녁에 다들 진성을 나가셨어, 바빠서 말도 못하고 가셨데.”송석석은 그녀의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아, 또 이렇게 되는구나. 역시 사부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 떠날 때도 말해주겠다고 약조했건만.”시만자가 답했다.“사부는 네가 울까 봐 그러신 거야. 날이 더워지면 너랑 같이 매산으로 갈 생각이야.”“그때까지 계속 있을 생각이야?”송석석이 그녀를 바라 보았다.“너
염구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왕비가 계시니 그대에게 소홀히 하지 않아. 그저 일만 잘 처리 하면 된다네. 이제부터 부병의 관리와 훈련 모두 자네에게 맡기겠어. 그만큼 고생을 했으면 당연히 상이 있을 거야.”하지만 몽동이는 애매한 대답은 듣고 싶지 않았다.그는 다시 직설적으로 물었다.“그래서 얼마를 주신다는 말씀입니까?”염구진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몽동이는 당장이라도 방망이를 들어 염구진의 머리를 내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왜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 거야?’그러자 사여묵이 끼어들었다.“하겠느냐?”“네, 합니다!”몽동이는 바로 대답했다.이미 하겠다고 약조를 했고, 얼마 인지는 송석석을 찾아가 물어보면 그만이었다.은을 벌지 못하고 돌아가면 신명 나게 맞아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염구진이 말했다. “그래. 병사 모집에는 자네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자네는 그저 병사들에게 무술만 알려주면 되네.”“예, 하지만 황실에 다 모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노 집사가 답했다.“이건 자네가 상관 쓰지 않아도 된다네. 황실 뒤에는 다른 공간이 있어. 은을 다시 돌려받게 되면 관리자를 부를 걸 세. 그러면 새로 지을 수 있어.”“그 기간에 제 임금은 있는 것이겠지요?”몽동이가 물었다.염구진은 돈밖에 모르는 그의 질문에 마음이 답답했다.“물론이지.”염구진은 줄 때는 확실히 주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왕비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동시에 군중에서 잠시나마 백호를 맡은 무장이기 때문에 돈은 확실하게 주어야 했다. 몽동이는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예, 알겠습니다.”한편, 밖에는 눈이 내렸다.대리사는 문을 닫았지만 현갑군의 지휘관인 사여묵은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그는 관청 호위와 연말 순찰에 관해 회의를 하러 간다고 송석석에게 알렸다.“네, 그렇게 하시지요. 저는 만자와 몽동이와 함께 청목암에 들릴 생각입니다. 제 이모님이 거기에 있습니다.”“청목암이라면 나랑 같이 가시는 게 어떻겠소?”“저들과 같이
송석석이 답했다.“병에 걸리셔서 청목암으로 옮기신 겁니다. 첫째는 깨끗한 환경에서 몸을 간호하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청목암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기 위함입니다.”한녕 공주는 이해가 돠지 않았다.“병에 걸리셨으면 더욱 연황실에 있는 게 좋다고 봅니다. 적어도 무슨 일이 생기면 하인들이 곧바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한녕 공주도 아는 도리를 연왕이 모를 리가 있으랴. 연왕이 다스리는 지역은 연주였다.하지만 송석석은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청목암과 진성이 연주에서 많이 멀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병 치료를 위함이라면 진성으로 보내는 게 더 좋지, 적어도 진성에는 태의나 단신의가 보살필 수 있는데.’단신의가 국춘과 청작을 보내 왕비를 보살피지만 주위에 친한 지인도 없어 외로움이 극에 달할 것이다.송석석이 답했다.“그럼 저는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님께 서우를 부탁드리겠습니다.”“그래, 나한테 맡기거라.”혜 태비는 송석석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발 벗고 나섰다. 그 모습에 한녕 공주가 깜짝 놀랐다.그녀는 그저 먹을 것만 생각하고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몰랐다. 하여 자신의 새언니가 자리를 뜨자마자 서둘러 물었다.“어머니께서는 새언니를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하셨습니까?”혜 태비가 한숨을 내쉬었다.“가여운 사람이야, 집안사람은 겨우 서우 하나밖에 안 남았어. 내가 시어머니이니 며느리를 딸처럼 대해야 하지 않겠느냐?”한녕 공주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궁에 있을 때는 그렇게 말씀하신 적 없으셨잖아요. 제가 말렸어도 항상 들은 척도 안 하셨던 것 아닙니까.”“내가 언제 안 들었다고 그러느냐? 그저 행동이 조금 느린 것뿐이야.”한녕 공주는 모친의 행동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송석석한테 잘 해주면 그만이었다. 한편, 송석석은 외출했다.몽동이에게 말을 맡기고, 그녀와 시만자는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하인들도 데려가지 않았다. 시만자는 그제야 운익각에서
송석석은 그때의 일을 다시 한번 더 떠올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병이 갑자기 악화된 게 나 때문일 까봐 두려워.”시만자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하지만 송석석이 알아챘다면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사실 연왕비께서는 모르고 계셨는데 측비 김씨가 일부러 알렸어. 연왕비께서 그걸 듣고 나서 바로 피를 토하셨고. 그 후로 병증이 더 악화됐어. 이 일은 운익각에서 들은 게 아니라 홍작이 이야기해 줬어. 너한테 말을 해줄지 말지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하더라.”“그럴 줄 알았어.”송석석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내 혼사는 이모님이 중매를 서 주셨어. 비록 이모님이 추천한 사람이지만 내 모친도 알아 보긴 했었어. 그 당시, 장군부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어. 게다가 민씨가 무능하고 연약했거든. 내가 그 집에 들어 가고 나서도 큰 형님한테 받는 압박은 없었어. 큰 집안과 작은 집안 사이도 그저 겉으로 화목할 뿐이었지.”“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청목암에서 연왕비를 만나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시만자는 위로에 탁월하지 않았다.어떤 일이든 해결하려면 당사자가 나타나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연왕비는 본처이지만 김씨는 결국 첩이었다. 본처가 힘이 없다고 해도 본처는 결국 본처이기 마련이었다.첩이 자식을 낳았다고 할지라도 첩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그래.”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왕야와 혼인했다는 사실을 아시면 좀 나아지실지도 몰라.”“그래.”시만자는 등에 방석을 받쳤다. 그녀의 외투의 목덜미 부분에는 하얀 여우의 털이 달려있었다. 그 덕에 외모를 한껏 더 올려 주었다. 송석석은 그녀를 보고는 다시 물었다.“내가 또 모르는 게 있어?”“아니, 내 일 때문에 그래.”시만자가 미간을 찌푸렸다.“아무 일도 아니야.”“집안 일이야?”“우리 고모가 인사하러 온대. 게다가 그 선비까지 데리고 말이야.”시만자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사실 예전에는 고모를 엄청 싫어했어. 우리 시씨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렸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