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씨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정말 요청했다고요? 아니면 속이기 위해 그리 말씀하신 겁니까? 당신도 장군부 사람인데 어찌 당신에게 요청한다는 말입니까?""왜 요청하면 안 된다는 거지? 장군부 사람이라고 해서 다 양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둘째 노부인은 뿌듯해하며 말했다."돌아가서 소환이한테 네 시어머니께 전하려고 하렴. 이 소식을 들으면 속이 괴로울 테지."이 말을 들은 민씨는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어머님과 반대편에 서실 생각이십니까?"이에 둘째 노부인이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누가 반대편에 서겠다고 했니? 난 단지 그 사람이 탐욕스럽고 무정하며 은혜를 모르는 게 싫은 거란다. 듣기 싫을 수도 있으나 들어두렴. 넌 누가 네게 잘 해주고, 잘 못 해주는 지도 모를 만큼 어리석어.""제가 어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저도 다 알고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친정은 유능하지 않습니다. 서방님도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시어머니께서는 저를 더욱 좋아하지 않으시고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뭘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물론 뭘 어찌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나쁜 짓은 돕지 않는 게 좋을 게야."둘째 노부인이 말을 이었다."네 시어머니, 왕청여, 이방, 그리고 네 시누이는 모두 좋은 사람이 아니다. 넌 그 사람들이 석석이를 괴롭히려는 걸 도와주지 않으면 된단다.""그건 당연합니다."민씨가 얼른 대답했다."가끔은 모르는 체 하는 것도 좋은 법이지." 둘째 노부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민씨는 조금 둔한 터라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깨달았다."요즘 몸이 안 좋아서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둘째 노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한 번 가보렴. 의관을 찾아 맥을 짚어 보도록 하거라. 그들이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민씨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물러갔다.민씨가 떠난 뒤 둘째 노부인이 첩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는 처음부터 갈 생각이 없었다.송석석이 옛 정을 그리고 있다는 건 잘 알지만, 그렇다고 감정에 휩쓸려 가서는 안 됐다
그녀는 매일 부내외의 일도 걱정해야 했고 자신의 돈을 생활비에 보태야 했기에 너무 힘들어서 누우면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이 아플 정도였다.그래서 그녀는 자신과는 달리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는 송석석이 너무 싫었다.한참 생각하고 있을 무렵, 시누이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어갔다."혜 태비가 전에 공개적으로 송석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 둘 사이가 좋지 않을 겁니다. 연회날에 혜 태비가 송석석을 손 봐줄 수도 있지요. 지금의 송석석의 성격대로라면 난리를 피울 것 같습니다."왕청여는 그날 그녀가 마차에서 한 말을 떠올렸다.'그렇게 오만방자하게 굴다니.'왕청여는 송석석이 혜 태비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무척 보고 싶었으나 장군부는 첩지를 받지 못해서 갈 방법이 없었다.그러다 그녀는 문득 자신의 친정을 떠올렸다. '오라버니가 현재 북명군을 장악하고 있으니 북명왕부에서 여는 연회에 평서백부도 청하지 않았을까?'생각을 마친 그녀는 시어머니가 약을 복용하는 걸 도운 후 어머니가 몸이 불편하셔서 친정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고 핑계를 대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친정에 돌아가 물어보니 그녀의 예상대로 평서백부는 연회의 첩지를 받았다고 했다.첩지를 본 후 왕청여가 바로 입을 열었다."어머니, 그날 저를 데리고 가세요."이 말을 들은 평서백부 노부인은 멍해졌다."네가 이미 장군부에 시집을 갔으니 내가 널 데리고 가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그런 걸 따져서 뭐 합니까? 어차피 탄일 연회 아닙니까. 새언니가 몸이 안 좋아서 제가 대신 같이 간 거라고 하면 됩니다.""뭐하러 가는 것이냐?" 평서백부 노부인은 왕청여를 보면서 그녀가 시집간 후에 성질이 조금 조급해졌다고 생각했다."뭐 특별한 건 없습니다. 그냥 여러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그녀는 평서백부 노부인의 팔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어머니도 아시다시피, 제가 장군부에 시집간 후부터 장군부가 곤두박질쳤지 않습니까. 서방님은 9품으로 강등되기까지 하셨습니다. 만약 제 친정의
왕청여도 하루빨리 자식을 가지고 싶었지만 그녀에겐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그녀의 서방이 그 방면에 열정적이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가끔 할 때도 체력이 모자라 보였다. 이치대로라면 그럴 수가 없을텐데 말이다. 장군이라 몸이 건장할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하물며 평소에 그의 식단도 기력 보충을 위주로 하는 거였다. 사실 의관을 찾아 맥을 짚어 보게 하고 싶었으나 그의 체면이 깎일까 봐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왕청여는 지금 자신의 심정이 어떤지 차마 표현할 수가 없었다. 생활이 순탄한 것 같은데 순탄하지 않은 것 같고. 도대체 어디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이때 마침 왕청여의 새언니, 지금의 평서백 부인 최씨가 노부인에게 약선을 전해주려고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시누이도 혜 태비의 연회에 가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좀 의외라고 생각이 들었다.노부인이 입을 열었다."가고 싶어하니 가게 내버려 두려무나. 북명왕부와 원래 알고 지낸 사이기도 하니 말이다. 비록 장군부가 첩지를 받지 못 했다고는 하나 그 애가 우리를 따라 간다고 해도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을 거다."최씨가 미간을 찌푸렸다."어머니, 아가씨는 지금 장군부 사람이고, 북명왕비는 또 아가씨 서방님의 전 부인입니다. 아가씨께서 가시면 서로 난감할텐데요."이 말을 들은 왕청여가 입을 열었다. "그럴 리 없으니 안심하세요. 전에 저희끼리 따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를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기도 하고요."이에 최씨가 되물었다."각자 혼인을 한 후에도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왕청여는 약간 켕겼지만 꿋꿋하게 말했다."네. 전에 마차를 타고 가다가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마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니 저와 친절하게 이야기를 나누더군요."최씨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사적으로 만났을 때 아가씨를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연회날에는 올 객들이 많을 테니 아가씨께서 가시면 북명왕비를 난감하게 만들 거예요."왕청여가 방긋 웃으며 안심시켰다. "안심하
송석석도 확실히 방씨 가문 사람들을 요청했다. 방씨 가문은 무장세가로 방천허는 지금도 북명군대에 있었고, 방씨 가문의 노장군은 병 때문에 2~3년간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 덕분에 지금 방씨 가문의 주인노릇을 하는 주모는 바로 방천허의 부인이다. 방계는 아들과 손자를 잃은 탓에 잘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무장세가에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아픔이 있었다.방 부인은 자신의 서방이 아직 군대에 있는 데다가 자녀가 혼인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의 혼사와 미래를 위해 나와 다녀야 했다. 그녀의 장남도 군에서 일했었는데, 전장에서 한쪽 다리를 다친 탓에 아직까지 혼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차남은 과거에 급제해 계속 시험을 봐야 했다.그리고 올해 13살인 방연이라는 딸도 있는데, 나이가 아직 차지 않긴 했지만 다른 가문의 여식을은 혼사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방연과는 달리 12, 13살에 이미 모두 정해져 있어 마음이 조금 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첩지를 받은 방 부인은 숙모를 데리고 나갈 생각이었다.그녀의 숙모는 바로 방시원의 어머니 오씨였다. 그녀는 북명왕부에서 장군부 사람들을 초청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숙모를 부를 수 있었다. 오씨는 요 몇 년 동안 줄곧 우울해 있었다. 하지만 방시원이 떠난 지가 몇 년이나 지나기도 했고, 다른 아이들도 생각해야 하기에 열심히 설득했다. 사람이 계속 과거에 묶여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녀가 몇 번 설득한 끝에 오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겠다고 답했다.그래서 방 부인은 그녀를 위해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 오라버니와 언니들을 데리고 함께 혜 태비의 탄일 연회에 갈 계획도 세우고. 어느덧 삼월이 지나가고 혜 태비의 탄일과 함께 봄내음 가득한 사월이 찾아왔다..보름동안 황실에서는 화원을 꾸미기 위해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쳤다. 현재 화원의 꽃은 혜 태비가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던 것들 외에 송석석이 더 더한 것들이었다. 벽 쪽에 핀 삼각매도 자홍색의 구름마냥 활짝 피어나 매우 아름다웠다.극단은
오늘의 날씨는 정말 좋았다. 날씨도 덥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에 비치는 햇빛이 사람을 따뜻하게 비춰 마음이 편안해지게까지 했다. 혜 태비는 의자에 단정히 앉아 손님들의 축하를 받았다. 노 집사는 하인들을 데리고 축하 선물을 받으며 다음에 같은 가치의 선물을 주기 위해서는 어느 집에서 어떤 선물을 보냈는지 반드시 기록해야 하므로 책에 적었다.오늘 온 손님들은 모두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었다.모든 부인과 처녀들이 분칠을 하고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을 했는데, 한 눈에 봐도 보통 신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도 웃느라 얼굴이 굳어진 혜 태비는 얼굴이 조금도 굳어지지 않은 채 정말 진심으로 웃는 것처럼 사람들을 맞이하는 송석석을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큰 장소에서도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대처하다니. 정말 대단하군.'남자 손님들은 사여묵과 염선생이 맞이했는데 그들은 모두 본관의 회객청에 앉아있었다. 오늘은 태비의 생일이므로 대청은 태비와 여인들의 것이기 때문이었다.태비의 신분이 특수하기도 해서 그들은 오늘 정원을 대청으로 썼다.곧이어 민지 공주와 미우 공주, 목씨 부인, 병부 상서의 부인이 도착하고 전강후부 노부인도 며느리와 손주 며느리를 데리고 왔다.그들이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장공주도 가의 군주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이때, 들어오는 사람들을 한 번 보다가 송석석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전소환이 장공주와 가의 군주를 따라왔어? 허, 좀 재밌네.'전강후부 노부인이 도착하자 송석석은 혜 태비를 부축해 함께 그녀를 맞이했다.연세가 많으셔서 이런 연회에 잘 오지 않는 사람이 이렇게 왔으니 예의상 혜 태비가 직접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강후부 노부인은 한 무리의 며느리들과 함께 들어왔는데 전강후부의 가업이 크지는 않을 수 있으나 사람이 많아 더 힘이 있어보였다.아흔이 넘은 노부인의 등장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 인사했다. 장공주 등 공주들조차도 말이다."다들 왜 이러십니까?" 전강후
덕 귀태비는 자리에 앉은 뒤 웃으며 말했다."복이 있는 걸 따지자면 전강후부 노부인 보다는 제가 못하지요."이에 전강후부 노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모두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덕 귀태비는 물론 혜 태비도 그렇지요. 현모양처 며느리를 얻고 북명왕께선 큰 군공까지 세웠으니 모두 복이 있지요."혜 태비는 이 말을 듣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것을 느꼈다. '역시 인생을 더 살아온 사람은 다르구나. 한마디로 사람의 기분이 풀리게 만들다니.'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저는 오히려 여묵이가 진왕처럼 진성에서 편안히 첩들을 들이고 자식들을 낳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아들이 바쁘게 살아야만 하는 명인 것이 아니라 그저 아침일찍 나가 해시에 돌아오는 걸 보면 마음이 아파서요."이에 덕 귀태비가 웃으며 말했다."그건 여묵이가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니겠습니까!"이어 그녀가 손자를 품에 안고 뽀뽀 하자 아이가 통통한 작은 손으로 그녀의 목을 잡고 귀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할머니." 이 한 마디에 사람들은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득의양양하던 혜 태비도 다시 질투가 났다.장공주는 그런 그녀의 안색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석석이가 들어온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 소식이 없답니까?"이 말을 듣자마자 전소환은 고개를 들어 도발하는 눈빛으로 송석석을 째려보았다. 송석석도 그런 그녀의 눈빛을 보았지만 담담하게 웃기만 할 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장공주가 차를 마시며 느릿느릿 말했다."황실의 남자들은 일찌감치 대를 이어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실의 피를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인데요. 일 따위는 널린 게 문관인데, 누가 한들 다르겠습니까?"이 말이 나오자 혜 태비의 얼굴은 더욱 굳어져 버렸다. 지금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공주가 북명왕비가 아이를 못 가진 걸 말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양쪽 모두 미움을 사기 싫었던 터라 그들은 아예 말을 꺼내지 않았다.이때, 평양후부 부인이 싸늘하게 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청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방씨 가문?'이건 방씨 가문을 거의 잊어버릴 만큼 정말 오래된 기억이었다.그녀는 방씨 가문에서 온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급하게 구석의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전 시어머니는 아닐 거야. 계속 처소에만 머물러 있어서 나오길 좋아하지 않으시니까..'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방 부인이 그녀의 전 시어머니, 오씨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의 뒤에는 방씨 가문의 여식들 몇이 더 있었다."이모님." 송석석은 급히 앞으로 나가 방천허 부인에게 인사를 한 뒤 오씨에게 인사 했다."몸은 괜찮으십니까?"오씨는 송석석을 보며 눈을 붉혔다. 동병상련을 겪은 탓에 그녀는 송석석만 보면 가슴이 아파왔다.그러나 그녀는 오늘이 어떤 자리인지 생각하고는 눈물을 애써 참고 웃으며 대답했다.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단다."말을 마친 그녀는 방 부인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앞으로 나가 혜 태비를 알현한 후 다시 자리에 앉아있는 공주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모든 걸 다 마친 후 사람들을 둘러볼 때, 그녀는 자리에 앉아있는 왕청여를 보았다.그녀는 잠시 멍해져 있다가 곧장 왕청여의 앞으로 걸어갔다."청여야, 오랫동안 보지 못했구나. 요즘 잘 지내니?"그녀는 왕청여가 혼인한 일을 모르고 있었다. 북명왕비와 같은 날 시집 간 것 때문에 한때 진성에서 떠들썩 했고, 각 부의 몸종들조차도 매일 이 일을 입에 담았지만 집안을 다스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방 부인이 누구도 그녀의 앞에서 왕청여가 전북망과 혼인을 했다는 걸 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오씨는 줄곧 몰랐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이 상황을 본 후 오씨가 이 일을 모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이건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연회장은 삽시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일부 관권 부인조차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오씨는 사실 좀 불쌍한 사람이었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둘은 일찍 죽고, 혼자 남은 방시원은 어린 나이에 이름을 날리고 용맹하게 싸움을 잘
지금 이곳의 분위기는 매우 어색해졌다. 머리가 상대적으로 둔한 혜태비조차도 알아차릴 만큼. 그녀가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며칠 전에 석석이가 저를 위해 진귀한 꽃을 많이 심었으니 모두들 가서 봅시다. 그리고 담장 쪽에 삼각매가 피었는데 정말 예쁩니다. 지금 보지 않으면 시들 거예요."송석석도 앞으로 나가 입을 열었다."맞습니다. 꽃구경을 즐기지 않아 연극을 보고싶으시거든 저를 따라 오시면 됩니다."그녀는 먼저 가서 혜 태비를 부축하고 내려온 다음 오씨의 팔을 잡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함께 꽃구경 하러 갑시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얘기를 많이 나누는게 좋겠습니다."오씨는 다소 넋이 나가있었다. 그녀는 무엇때문에 왕청여가 전북망에게 시집갔는지, 그리고 전북망에게 시집간 사람이 오늘 대체 왜 이곳에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씨 가문이 그녀를 보내준 건 그녀가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지만 전북망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오씨는 지금 파리를 먹은 것마냥 속이 좋지 않았다.그녀의 아들, 방시원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왕청여가 찾은 사람이 방시원보다 훌륭한 사람은 아닐 수는 있어도 전북망처럼 좋지 않은 사람이어서는 안 됐다.장공주는 이 변고가 매우 불쾌했다. 원래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혜 태비를 약올릴 생각이었다. 혜 태비가 질투하면서도 억지로 참는 모습이 재밌었기 때문에 계속 보고 싶었다. 방씨 가문 사람들의 출현에 혜 태비를 자극해 손주를 보고싶게 만드는 그녀의 계획은 전부 틀어졌으나 그녀는 분명히 혜 태비의 눈에 어린 질투심을 보았다. 만약 기회를 찾아 사람을 시켜 혜 태비를 자극한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사여묵에게 측비를 들이라고 할 것이다.전소환은 그렇게 장공주를 따라 꽃구경을 갔다. 하지만 만약 이곳에서 왕을 만나지 않는다면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기에 그녀는 계속 두리번 거리면 찾았다. 어젯밤 송석석과의 내기에서 진 시만자는 오늘 부중의 시녀처럼 변장을 했다. 그러나 사람을 모시지는 않겠다고 말했기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