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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Author: 정대천
이도현이 나가고 나서야 청하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신수빈이 홀로 침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청하는 머릿속이 온통 물음표로 가득했다.

"아씨, 혹시 왕야께서 화가 나서 나가신 겁니까?"

신수빈은 문 쪽을 힐끗 바라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신경 쓸 것 없다."

무슨 신분을 바꿔주겠다는 말, 결국 그녀가 이미 시집을 한 번 간 몸이니 첩으로 삼기에도 부족하다는 뜻 아니겠는가.

이름을 바꿔 새로운 신분을 내어준 뒤 왕부의 첩으로 들여보내려는 속셈이겠지.

그녀의 몸은 탐내면서 체면도 챙기려 하다니... 좋은 건 다 자기 몫으로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청하는 아씨의 태도를 보고 섭정왕에게 그다지 마음이 없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다 아씨가 섭정왕과 이런 관계가 된 것일까?

"아씨, 혹시 섭정왕과..."

신수빈은 잠시 침묵했다. 청하는 오랜 세월 곁을 지켜온 사람으로 하인이라기보다는 함께 자라온 벗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생각한 끝에 신수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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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23화

    “왜지? 저건 우리 수입의 가장 큰 부분이야. 광산을 닫아 버리면 정예 병력을 무슨 돈으로 굴린단 말인가.”“자객들이 모두 자결했지만 어젯밤 암살을 실패한 것은, 신 씨가 이미 경계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분명 무언가를 눈치챈 겁니다. 그녀 곁의 고수들은 황족이 길러 낸 최정예들입니다. 이도현이 모를 리 없지요. 이도현이 광산과 장씨 가문의 연관성을 알아차리는 순간, 반드시 끝까지 파고들 겁니다. 그러면 자금의 흐름도 드러날 것이고, 사병을 길러 온 일 역시 더는 숨길 수 없게 됩니다.”장한월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무엇이 더 중요한지도 분명했다.결국 그는 이를 악문 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태후의 말이 맞았다.그 신 씨는 정말 장씨 가문의 재앙이었다.“광산은 반드시 닫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군께서는 대신 죄를 뒤집어쓸 희생양 하나를 내세우셔야 합니다. 최근 주조한 은화도 함께 경성으로 보내 사죄하십시오.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가족이 몰래 사광을 캐고 있었다고 말하면서요. 일부러 요란하게 입경해 사람들이 직접 보게 해야 합니다. 주군께서 대의를 위해 친족까지 버렸다는 걸 말입니다.”장한월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낮게 물었다.“누굴 내세우라는 겐가?”검은 옷의 사내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세 글자를 내뱉었다.“적장자입니다.”장한월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그건 안 되네!”검은 옷의 사내는 오히려 웃어 보였다.“대업을 이루려는 분께서 어찌 작은 정에 얽매이십니까. 제가 모질어서 주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헌데 큰공자께서 그간 해 온 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 적장자가 훗날 주군의 뜻을 이을 수 있겠습니까? 큰공자 말고도 아드님은 많습니다. 그리고 적장자 정도는 되어야 사람들이 정말로 주군께서 대의를 위해 친족까지 버렸다고 믿을 겁니다.”장한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은 옷의 사내는 그의 망설임을 읽은 듯 다시 입을 열었다.“주군께서 차마 손을 쓰지 못하시겠다면, 경성으로 보낸 뒤 제가 처리하겠습니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22화

    신수빈이 조용히 그의 품으로 파고들자,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이도현의 마음을 좀처럼 가라앉지 못하게 했다.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거리낌 없이 잠옷 안쪽으로 스며드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의 숨결을 흐트러뜨렸다.이도현은 어느새 자신의 아랫배까지내려온 그녀의 손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돌려 신수빈을 바라보았다.짙고 어두운 빛이 눈동자 깊숙이 스쳐 지나간 순간, 그는 몸을 뒤집어 순식간에 그녀의 위를 덮쳤다.곧이어 잠옷조차 벗겨지지 않은 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감각에 신수빈은 미처 준비할 틈도 없었다.통증이 밀려오는 순간 그녀는 멍하니 굳었다가, 이내 낮은 신음을 삼켰다.작고 고운 얼굴이 금세 괴로움에 일그러졌다.“왕야...”몸을 웅크린 채 가늘게 떨고 있는 그녀와 눈가에 맺힌 물기를 본 이도현은 결국 차마 더 몰아붙이지 못하고 조금 물러났다.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속눈썹에 입을 맞추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천천히 닦아냈다.이어 뺨을 따라 내려가 붉은 입술과 새하얀 볼, 가녀린 목덜미까지 천천히 입술을 옮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역시 그와 같은 열기에 잠식된 듯했다.복숭아꽃처럼 붉게 물든 얼굴, 물기 어린 흐릿한 눈빛, 그리고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부름까지.점점 더 부드럽고 애틋하게 얽혀 들었다.이도현은 그녀의 뺨을 감싸 쥔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빈아, 나를 보거라...”신수빈이 눈을 뜨자, 그의 이마에는 옅은 땀이 맺혀 있었고 두 눈은 희미하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이마의 땀을 조용히 닦아 주었다.지금의 그녀는 마치 그의 손안에 완전히 붙들린 사람처럼, 손끝마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이도현은 그녀의 시선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은 채 집요하게 바라봤다.움직임은 멈추지 않았고, 그의 목소리는 쉰 숨결 속에서도 거칠고 강압적으로 그녀를 몰아세웠다.“본왕을 좋아하느냐?”“...네.”신수빈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아랫배 안쪽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타오르는 듯해 견디기 힘들었다.“직접 말하거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21화

    이도현은 맑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그 눈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끌어올리며 아이의 작은 발을 살며시 쥐었다.“네 어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아이는 몸을 일으켜 보려는 듯 이불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이도현은 녀석이 품에 싫증 난 걸 알아차리고는 아이를 안아 제 가슴 위에 엎드리게 한 채, 자신은 침상에 편히 누웠다.아이는 고개를 바짝 치켜들며 그의 머리 쪽으로 기어 올라가려 애썼지만, 아직 힘이 모자랐다.이도현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버둥거리면서도 꼼짝 못 하는 아이를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참 둔하군.”바로 그때, 온몸에 힘을 주고 있던 아이가 뽀드득 방귀를 뀌었다.이도현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가슴이 들썩일 만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웃음소리에 아이도 신이 난 듯 까르르 웃어 댔다.“재주는 그것뿐이네.”이도현은 아이를 뒤집어 제 팔 안에 눕혀 안았다.신수빈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던 참이었다.안채 안쪽에서 들려오는 아이 웃음소리에 그녀는 곧장 걸음을 재촉했다.머리도 채 말리지 못한 채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남자의 품 안에 안긴 아이를 보자마자 웃으며 허리를 숙여 아이를 안아 들었다.“우리 아들, 이 어미가 보고 싶지 않았느냐?”이도현은 그녀가 아이를 품에 안아 드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젖은 머리카락 끝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서늘한 감촉은 금세 멀어졌다.그는 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물기 어린 듯 윤기 도는 눈동자, 그 안에 가득 번지는 환한 기쁨.그래, 지금 이 순간의 그녀는 진짜였다.하지만 그것은 자신 때문만이 아니었다.신수빈은 한참 동안 아이를 품에 안고 다정히 위로해주다가, 뒤에 있던 남자가 계속 말이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잠든 줄 알고 몸을 돌려 바라본 순간, 그대로 그의 짙고 깊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그 순간, 신수빈은 살짝 멈칫했다.탐색하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혼란스러운 눈빛까지, 평소의 그답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왕야, 왜 그러세요?”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20화

    신수빈은 무의식중에 그의 옷깃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취기가 오른 사람처럼 느릿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왕야께서 전에 제게 호국부인 작위를 내리시고 삼천 식읍까지 주셨잖아요. 그때 어디를 원하는지 물으셨는데... 이제야 생각났어요. 전 정양을 갖고 싶어요.”이도현은 그녀를 안은 채 계속 안쪽으로 걸어갔다.방금 전과 다를 바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어째서 정양이냐?”“선항족이 성을 포위했을 때 정양왕이 절 그렇게 괴롭혔잖아요. 그 사람 봉지를 제가 가져야 속이 좀 풀릴 것 같아서요.”신수빈은 술기운을 빌린 듯 어린애처럼 투정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하지만 그녀 손바닥엔 이미 얇은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이 남자가 과연 허락할지, 그녀도 확신할 수 없었다.안채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시녀들이 욕실에 물을 받아 두고 있었다.이도현은 그녀를 안은 채 곧장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그녀를 내려놓고 손을 뻗어 겉옷부터 벗기기 시작했다.안쪽 옷까지 벗기려는 순간, 신수빈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왕야...”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서로의 속내까지 흐려 놓는 듯했다.남은 건 봄기운 어린 붉은 얼굴과 물기 어린 눈빛뿐이었다.이도현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고작 정양 하나가 너의 ‘청’이라는 말까지 들을 일이냐?”그 말에 신수빈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가 몸을 숙여 속옷 매듭을 푸는 틈을 타, 그녀는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고마워요, 왕야.”이도현은 그녀의 옷을 천천히 벗겨 냈다.커다란 손이 한 손에 다 들어올 듯 가는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너와 나 사이엔 그럴 필요 없다. 얼마든지 솔직해져도 된다.”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 등 뒤 배두렁 끈을 풀어 내렸다.봄빛 같은 살결이 드러나기 직전, 신수빈은 황급히 가슴 앞 자수를 붙잡았다.봉황과 모란이 수놓인 얇은 속적삼이 미끄러져 내리는 걸 겨우 막아 낸 그녀는, 그를 밀어내며 끝내 함께 목욕하길 허락하지 않았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19화

    아무리 순한 술이라 해도 술은 역시 술이었기에, 주량이 약한 사람은 결국 취할 수밖에 없었다.신수빈은 어느새 살짝 취기가 오른 얼굴로 팔을 탁자에 괸 채, 눈웃음 어린 시선으로 아직도 술을 따르고 있는 이도현을 바라보았다.몸은 앞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얇고 부드러운 상의는 그렇게 몸을 숙이는 순간 자연스레 느슨해졌고, 벌어진 옷깃 아래로 목선 밑 희고 고운 피부가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왕야께서는 저를 취하게 만들 생각이십니까?”그 남자의 시선이 어찌 그곳에 머물지 않을 수 있겠는가.잔 안의 술이 넘쳐흐르는 것조차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신수빈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왕야는 겨우 두 잔 드셨는데 벌써 먼저 취하셨나 봐요? 술병도 제대로 못 드시네...”비록 취기가 오른 상태였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지금 자신의 모습이 그의 눈에 얼마나 유혹적으로 비칠지.오라버니는 이렇게 말했다.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세상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서하랑 역시 그랬다.한 걸음 내딛어 볼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스스로를 가둬 두면 안 된다고.하지만 계산하고 손익을 따지는 일은 이미 그녀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신수빈은 이도현 앞에서 진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었고, 그에게 마음을 온전히 열 수도 없었다.심지어 무심코 흘리는 말조차, 그 안엔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그가 좋아할 만한 표정을 계산했고, 그가 빠져드는 눈빛을 계산했고, 그가 욕망에 흔들릴 순간까지 계산했다.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 같은 자신이, 어떻게 한 남자와 서로 의심 없이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그 순간 이도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그녀의 뒤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커다란 손바닥이 뒤에서 그녀의 목덜미를 천천히 쓸었다.길고 가는 목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손길을, 얇게 풀어진 옷깃 따위가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빈아, 본왕을 취하게 하는 건 술이 아니다...”등 뒤로 단단한 무언가가 닿아 왔다.그게 무엇인지 그녀는 알고 있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18화

    이제 막 등불이 하나둘 밝혀지고, 달빛이 버들가지 끝에 걸릴 시간이었다.아직 밤은 길었다.이렇게 일찍 그와 함께 침상으로 들어갔다간, 정말 밤새 시달리다 죽을지도 몰랐다.신수빈은 이도현의 무릎 위에 앉은 채 두 팔을 느슨하게 그의 어깨 위에 얹었다.힘없이 그의 품에 기대어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나직이 속삭였다.“왕야, 아이가 보고 싶어요. 아이를 데려오게 해 주시면 안 됩니까?”이도현은 고개를 숙여 품 안의 그녀를 바라보았다.별빛 어린 눈동자는 물기 어린 듯 흔들렸고, 고운 얼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며, 사람을 홀리는 목소리는 나른하고도 부드러웠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엄지손가락이 붉은 입술을 천천히 쓸었다.목소리는 어느새 살짝 잠겨 있었다.“본왕은 보고 싶지 않으냐?”이런 질문쯤은 이제 너무 익숙했다.신수빈은 눈빛을 천천히 흘리며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몸을 더 가까이 기대어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귓가에 속삭였다.“왕야는 왕야고, 아이는 아이잖아요.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밤 내내 왕야의 사람인데, 왕야께서 굳이 아이에게 질투하실 필요가 있나요?”그 말에 이도현 마음속을 슬쩍 스치던 시큰한 질투가 눈 녹듯 사라졌다.사실 그는 오늘 밤만큼은 그녀와 조용히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아이를 일부러 왕부에 두고 온 참이었다.“우선 밥부터 먹어라. 본왕이 사람을 보내 데려오게 하지.”“고맙습니다, 왕야!”신수빈은 금세 얼굴 가득 웃음을 피웠다.목소리에도 감추지 못한 기쁨이 묻어났다.그 미소에 이도현마저 따라 웃고 말았다.그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얌전히 앉아서 먹어라. 호국사 음식이 너무 담백했던 거 아니냐? 보아하니 또 살이 빠진 것 같구나.”신수빈은 옆자리로 내려앉으며 웃는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왕야는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전에 산후조리하면서 좀 살이 붙었던 거예요. 몸조리 끝나면 원래 천천히 빠지는 법이고요. 곧 봄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지금 딱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74화

    측근 내시는 명을 받고 물러났지만, 아직 마음속에서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왕야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평소 옷차림에 아무 관심도 없고, 조복 아니면 늘 단정한 평상복이나 갑옷뿐이던 사람이 언제부터 이런 걸 따지게 된 걸까 싶었다. 잠시 후, 여러 벌의 옷이 안으로 들여보내졌다.검은빛, 감청, 자줏빛 같은, 대개가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색이었다. 평상복이라고 해도 눈에 띄는 색은 거의 없었다.이도현은 문득 모후가 살아있을 때 맞춰 준 한 벌의 비단 옷을 떠올렸다. 그때 그가 그 옷을 입은 모습을 본 모후는 장안에서 가장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20화

    관사 환관은 머리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윤씨 부인은 죽지 않았사옵니다. 물에 들어간 그 시녀가 구해서 지금 춘진각에 있사옵니다.”태후의 손에 들린 옥빗이 무심결에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며 두 동강이 났다.“그 시녀가 물에 들어갔을 때, 호수 바닥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데 어째서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냐?”“죽은 것은 자객 환관이랍니다. 이미 섭정왕께서 건져 올려 뼛가루까지 흩뿌리셨사옵니다.”태후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녀는 호수 바닥에 사람을 더 배치해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신수빈 같은 연약한 여자가 물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73화

    지난번 책봉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궁에 들어가 감사의 예를 올려야 했다.다음 날 이른 새벽, 궁중에서 이미 전갈이 내려왔다. 신수빈은 서둘러 일어나 청하의 시중을 받아 고명복을 단정히 입고 마차에 올라 궁궐로 향했다. 이번에는 청하를 데리고 가지 않고 은보만 동행시켰다. 궁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은보의 침착한 얼굴빛과 신중한 거동을 살펴보던 신수빈은 자신의 추측이 점점 더 확신으로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궁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녀는 그 위에 앉아 느릿느릿 영수궁을 향해 나아갔다.그 시각 바깥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7화

    후부 내의 장부들은 모두 창란원에 모여 있었으나 신수빈은 책을 뒤적이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저쪽이 바로 분가 이후, 이십 해 가까이 이방과 삼방의 점포와 전답에서 들어온 수지 기장입니다. 옛 평양후께서 세상을 떠난 지도 십 해가 되어가죠. 그 십 해 동안은 조모님 곁을 지키던 배필 관사들이 매달, 매해의 출납을 빠짐없이 적어 두었습니다. 그중 몇몇 의복 가게들은 천하가 평정되면서 남쪽에서 진상된 촉비단과 소주 자수가 경중을 휩쓸자 진부한 양식만 내놓던 가게들은 매해 적자를 면치 못했습니다. 거기에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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