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역모 누명으로 가문과 함께 처형당한 황후 심월령. 죽음의 순간 그녀를 구하러 온 이는 남편인 황제가 아니라 냉혹한 섭정왕 위지헌이었다. 혼례 3년 전으로 회귀한 월령은 더 이상 황후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번 생, 그녀는 자신을 죽인 황실을 무너뜨리기 위해 섭정왕의 손을 잡는다.
Voir plus비가 내렸다.
그러나 비는 피 냄새를 씻어 내리지 못했다.
젖은 흙은 피를 먹은 뒤 오래된 쇠처럼 비렸다. 낮은 돌계단 틈마다 붉은 물이 고였고, 빗방울은 그 위에 닿을 때마다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형장 둘레에 몰린 백성들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 누군가의 젖은 소매에서 눅눅한 마 냄새가 났고, 멀리 황궁 쪽 붉은 담은 비안개에 잠겨 마치 아직 마르지 않은 상처처럼 서 있었다.
심월령은 그 붉은 담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무릎이 진흙 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
한때 대연에서 가장 고운 비단만 몸에 두르던 황후의 무릎이었다. 봉황이 수놓인 대례복은 오래전에 벗겨졌고, 금관도 비녀도 없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죄인의 흰 홑옷 한 벌, 빗물에 무겁게 달라붙은 머리카락, 그리고 목에 걸린 나무 죄패뿐이었다.
죄패에는 먹으로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역모 폐후.
먹은 비를 맞아 번졌지만, 그 네 글자만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마치 누군가 온 나라의 눈에 그 이름을 새겨 넣으려 한 것처럼.
월령은 웃음이 날 뻔했다.
역모라니.
아버지 심도윤은 평생 황실의 북문을 지킨 장군이었다. 열일곱 번의 전장에서 황명을 받들었고, 세 번의 겨울을 변경에서 보내며 손가락 둘을 얼려 잃었다. 오라비 심각은 황제 위명서가 즉위하던 날, 반란군의 화살을 등으로 막았다. 어린 아란은 아직 머리에 비녀도 제대로 꽂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런 심가가 역모를 꾸몄다고 했다.
그런 심가의 딸이 황제를 독살하려 했다고 했다.
비는 돌계단을 두드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누군가 거짓을 세어 보는 소리처럼.
"폐후 심씨."
높은 단 위에서 음성이 떨어졌다.
월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제 위명서가 그곳에 서 있었다.
금빛 용포에는 비 한 방울 닿지 않았다. 내관이 받쳐 든 검은 우산 아래, 그는 오늘 처형되는 사람이 한때 제 곁에서 밤을 지새우던 여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사람처럼 단정했다. 젖은 형장의 냄새가 그에게만 닿지 못하는 듯했다. 우산 아래의 공기는 비린내도, 진흙도, 사람들의 떨림도 비껴 가고 있었다.
저 얼굴을 사랑했었다.
월령은 그 사실이 이제는 남의 이야기처럼 아득했다.
그가 처음 손을 내밀던 날, 대연의 봄은 유난히 따뜻했다. 살구꽃이 바람을 타고 떨어지던 오후였다. 그는 꽃그늘 아래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고, 목소리는 햇살처럼 부드러웠다.
심월령, 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 이 황궁도 외롭지 않을 것 같소.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가벼웠는지, 그녀는 너무 늦게 알았다.
그때의 살구꽃은 달았다. 눈앞을 희게 흐리고, 마음의 문턱을 조용히 넘었다. 월령은 아버지의 걱정도, 오라비의 긴 침묵도, 황궁을 두고 사람들이 낮게 삼키던 말들도 모두 외면했다. 다정한 목소리 하나가 세상의 그늘을 가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황후가 되었다.
그리고 황후가 된 뒤에야 깨달았다.
황궁은 사람의 온기로 데워지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피를 먹고 불을 밝히는 곳이었다. 붉은 담 안의 등불은 밤마다 고왔다. 너무 고와서, 그 아래 누가 지워지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위명서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다정하게 들리도록 태어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잔혹했다.
월령은 갈라진 입술을 열었다. 혀끝에 피와 빗물이 함께 고였다.
"폐하."
군중이 술렁였다.
누군가는 애원을 기다렸을 것이다. 누군가는 한때 황후였던 여인이 마지막 순간 사랑을 구걸하는 꼴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목숨은 끝내 체면보다 질기다고, 그렇게 믿는 얼굴들이 비 사이로 희미하게 흔들렸다.
월령은 그들을 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역모를 꾸미지 않았습니다."
위명서의 눈썹이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오라비도, 아란도, 심가의 누구도 폐하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하라."
"폐하께서 그 사실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빗소리가 커졌다.
아니, 어쩌면 군중이 한꺼번에 숨을 들이켜는 소리였을지도 몰랐다.
위명서는 한참 동안 월령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황후전에서 밤늦도록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사내는 그 눈 안에 없었다. 봄밤의 온기도, 꽃그늘 아래의 다정함도 없었다. 그곳에는 황좌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태울 수 있는 군주만 있었다.
"심씨."
그가 낮게 말했다.
"그대는 끝까지 짐을 실망시키는군."
월령은 그제야 웃었다.
목 안쪽이 찢어져 피 섞인 숨이 새어 나왔지만, 웃음은 분명 웃음이었다. 입가가 조금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형장 한복판의 사람들이 더 깊이 얼어붙었다.
"제가 폐하를 실망시켰습니까?"
"그대가 가만히 있었다면 심가의 어린 목숨 하나쯤은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란.
그 이름은 혀끝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대신 별궁의 연기가 먼저 떠올랐다. 불타는 처마, 젖은 밤공기에 섞인 재 냄새, 뒤돌아보지 못하고 끌려가던 자신의 팔. 아란은 비녀도 제대로 꽂지 못하던 아이였다. 불길 쪽으로 달려가던 작은 등만 보였다. 내관들은 월령의 팔을 붙잡았고, 궁녀들은 고개를 숙였고, 위명서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부터 월령은 밤마다 조금씩 비어 갔다.
오늘 형장에 오른 것은 그 빈 껍데기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살려 주십시오."
월령이 속삭였다.
위명서의 눈에 옅은 빛이 스쳤다.
그는 그것을 승리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끝내 그녀가 무너졌다고, 사랑이 아니라도 두려움 앞에서는 모두 무릎을 꿇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월령은 진흙 속에서 손끝을 움켜쥐었다. 흰 소매 안쪽으로 손톱이 손바닥을 눌렀다.
"아란을."
위명서의 얼굴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아.
이미 늦었구나.
황제는 처음부터 누구도 살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목숨을 저울 위에 올려 두고 흥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울 자체를 제 손안에 쥔 사람이었다.
"시각이 되었습니다, 폐하."
형부상서가 젖은 관복을 끌며 머리를 조아렸다.
위명서는 더 이상 월령을 보지 않았다.
그는 젖은 소매 끝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듯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 손짓 하나에 처형인이 움직였다.
월령은 눈을 감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보리라 생각했다.
자신을 버린 황제의 얼굴을.
충신의 피를 먹고도 태연한 황궁의 붉은 담을.
비를 맞으며 고개를 숙인 백성들의 두려움을.
그리고 기억하리라.
눈을 감아도 잊지 않으리라.
칼날이 들어 올려졌다.
빗물이 칼등을 따라 흘렀다. 그 얇은 빛이 월령의 눈앞에 닿는 순간, 형장 밖에서 땅이 울렸다.
처음에는 천둥인 줄 알았다.
그러나 천둥은 그렇게 일정하게 달려오지 않는다. 천둥은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천둥은 사람들의 비명을 가르고, 말의 콧김과 군화의 진동을 데리고 오지 않는다.
"북경군이다!"
누군가 외쳤다.
군중이 갈라졌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형장으로 밀려들었다. 우산이 뒤집혔다. 호위병들이 검을 뽑았다. 형부의 관리들이 물에 젖은 종잇장처럼 새파랗게 질려 뒤로 물러났다.
그 선두에 한 남자가 있었다.
위지헌.
대연의 섭정왕.
선황의 아우이자, 현 황제의 숙부.
북쪽 변경을 침묵시킨 왕.
황궁 안에서조차 이름을 낮춰 불러야 하는 사람.
월령이 황후로 있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마음을 놓고 마주한 적 없는 남자.
그가 빗속을 가르고 달려오고 있었다.
흑마가 형장 계단 앞에서 앞발을 들었다. 위지헌은 말이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검은 장포는 빗물에 무겁게 젖어 있었고, 허리의 장검은 이미 뽑혀 있었다.
"위지헌!"
위명서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군사를 이끌고 들어오느냐!"
위지헌은 황제를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월령에게 박혀 있었다.
월령은 그 눈을 보고 숨을 멈췄다.
왜.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가.
그는 늘 차가운 사람이었다. 황제 앞에서도 등뼈를 굽히지 않는 오만한 왕. 궁중 연회에서 누구와도 쉽게 잔을 나누지 않던 고독한 권력자. 월령이 황후가 된 뒤에도 그는 그녀에게 예를 다했지만, 그 예에는 온기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위지헌은 무너진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무너지는 순간까지 자세만은 흐트러뜨리지 않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늦었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 사람처럼.
"칼을 치워라."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처형인의 손이 떨렸다.
"짐의 명이다."
위명서가 이를 악물었다.
"폐후 심씨의 형을 집행하라."
처형인이 다시 칼을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빗속에 은빛 선 하나가 그어졌다.
월령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던 칼날이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 처형인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러졌다. 그의 손목에서 피가 솟았고, 빗물이 그것을 곧장 돌계단 아래로 끌고 갔다.
위지헌은 어느새 월령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검끝에서 피가 떨어졌다.
"한 번만 더 그 아이에게 손을 대면."
위지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늘 이 형장에 살아 돌아갈 자는 없다."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월령은 그 등을 바라보았다.
넓고 곧은 등. 비를 맞아 검게 가라앉은 머리카락. 피 냄새와 철 냄새가 뒤엉킨 형장 한복판에서, 이상하게도 아주 낮은 향이 스쳤다. 젖은 나무와 식은 차, 오래된 약재 같은 냄새. 꽃향을 부르지 않는 서늘한 기척이었다.
그가 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심가가 무너질 때도, 그녀가 황후전에서 끌려 나올 때도, 아란이 불길 속으로 사라질 때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있었는데 그녀가 보지 못했을 뿐인지도 몰랐다.
황제만 바라보느라.
자신을 벼랑으로 데려간 손을 끝까지 붙잡고 있었으니.
"숙부."
위명서가 차갑게 말했다.
"그 여인은 역적이다."
"아니다."
"증좌가 모두 나왔다."
"네가 만든 것이지."
"숙부께서 어찌 그리 단정하십니까."
위지헌이 마침내 황제를 보았다.
그 눈빛에 군중이 한 걸음 물러났다. 황제를 향한 신하의 눈이 아니었다. 숙부가 조카를 꾸짖는 눈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칼집 안에서 잠들지 못한 칼의 눈이었다.
"찾았다."
위명서의 얼굴이 굳었다.
"네가 그 아이를 죽이려 덮어 둔 것들."
위지헌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옥새의 붉은 자국도, 북문을 더럽힌 명부도, 심 장군의 이름을 훔친 글씨도."
월령의 손끝이 얼어붙었다.
그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누명을 썼다는 것을.
심가가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황제에게 버려졌다는 것을.
그런데 왜 이제야.
왜 하필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거짓이다!"
위명서가 소리쳤다.
"섭정왕이 역적의 딸에게 미혹되어 황명을 거역한다! 금군은 들으라. 당장 저자를..."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북경군의 화살이 일제히 금군을 향했다.
형장은 순식간에 전장이 되었다.
비명. 쇳소리. 말 울음. 물웅덩이를 짓밟는 군화 소리. 관리들의 고함. 검은 우산이 진흙 위로 떨어져 뒤집혔다. 그 안쪽에 고여 있던 맑은 빗물이 붉은 흙탕물과 섞였다.
위지헌은 그 소란 속에서 월령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연에서 황제 다음으로 높은 남자가.
진흙탕 형장 위에서, 죄패를 건 여인 앞에.
"월령."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황후도, 폐후도, 심씨도 아니었다.
월령.
그 두 글자는 빗속에서도 이상하게 젖지 않았다. 월령은 그 이름이 제 안쪽 어디를 조용히 베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늦었다."
위지헌의 손이 그녀의 뺨 가까이에서 멈췄다. 닿기 전 한순간, 그는 허락을 구하듯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피와 빗물을 닦아 냈다.
차가울 줄 알았던 손은 뜨거웠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군사를 움직이던 왕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서질 것을 앞에 두고도, 부서졌다는 말을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제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월령은 묻고 싶었다.
어디로요.
왜요.
왜 이제야 왔어요.
하지만 입에서 나온 것은 말이 아니라 피였다.
위지헌의 얼굴에서 피가 가셨다.
그제야 월령도 느꼈다.
칼날은 아직 목에 닿지 않았지만, 형장으로 끌려오기 전 삼킨 탕약이 이미 속을 태우고 있었다. 황제는 혹시 모를 손길마저 계산해 두었다. 죽음은 칼끝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몸 안 깊은 곳에서 조용히 문을 닫고 있었다.
"안 됩니다."
위지헌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가라앉았다.
"심월령."
그가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눈 감지 마십시오."
이상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월령은 힘겹게 손을 들었다. 손가락 끝이 그의 젖은 옷자락을 붙잡았다. 검은 옷감 아래에서 낮은 약재 향이 희미하게 스몄다. 살구꽃은 아니었다. 달콤한 기억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향 아래에서는 숨이 조금 덜 흩어졌다.
"왕야."
"말하지 마십시오."
"왜..."
숨이 가늘어졌다.
"왜 저를..."
위지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제 손 안에 감쌌다. 세게 쥐지는 않았다. 빠져나갈 수 없게 붙잡는 손이 아니라, 흩어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손이었다.
월령은 그 손을 보며 뒤늦게 알았다.
그는 자신을 증오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늘 먼 곳에 서 있었다.
황후가 되어 다른 남자의 곁에 선 그녀를.
꽃그늘 아래의 거짓말을 믿고 웃던 그녀를.
황후전 깊은 곳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던 그녀를.
끝내 폐위되어 붉은 담 밖으로 끌려가는 그녀를.
그 모든 시간 동안 이 남자는 무엇을 삼켰을까.
위지헌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형장의 진흙도, 죄인의 피도, 황제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팔 안에 든 몸이 너무 가벼운 듯, 그의 숨이 한 번 멎었다.
"나는 너를 택했다."
빗소리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짧고 낮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황궁의 붉은 담보다 무거웠다.
"늦었을 뿐이다."
월령은 웃으려 했다.
입술은 피로 젖었고, 숨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다정하다 믿은 목소리는 그녀를 죽였고, 차갑다 여긴 침묵은 그녀를 살리려 황명을 거역했다.
어리석었다.
심월령.
너는 참으로 어리석었다.
월령은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위명서를 보았다.
황제는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우산을 잃은 용포 위로 빗물이 흘렀다. 금빛 실이 젖어 무거워졌고, 그 화려한 문양 아래서 그의 얼굴만 이상하게 빈약해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마지막 남은 체념이 아주 천천히 식었다.
식은 자리에는 분노가 남았다.
만약.
만약 살구꽃이 한 번 더 피어난다면.
그 꽃그늘 아래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황후의 자리에 앉지 않으리라.
그의 손을 잡지 않으리라.
심가의 이름을 진흙에 묻은 자들을 잊지 않으리라.
소연화.
독고 태후.
심서윤.
위명서.
그들이 지운 이름을 하나씩 되찾으리라. 그들이 훔친 명분을, 그들이 쓴 기록을, 그들이 황좌 아래 묻은 모든 죽음을.
그리고 이 남자.
자신의 마지막을 품에 안고도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위지헌을.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으리라.
"만약..."
월령이 피 섞인 숨으로 속삭였다.
위지헌이 그녀의 입가에 귀를 기울였다.
"봄이..."
"월령."
"한 번만 더 온다면..."
위지헌의 팔이 떨렸다.
월령은 마지막 힘을 다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저는 황후가 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빗소리가 멀어졌다.
형장의 비명도, 말발굽 소리도, 황제의 분노한 외침도 물속에 잠기듯 흐려졌다. 세상은 멀어지는 등불처럼 하나씩 꺼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위지헌의 목소리였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어둠의 문턱에 손을 걸고, 끝내 닫히지 못하게 버티는 사람처럼.
그리고 침묵이 내렸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월령은 문득 살구꽃 향을 맡았다.
너무 먼 봄의 향이었다.
방 안에는 오래도록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태후전의 붉은 봉서는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봉서의 가장자리는 아직 반듯했고, 압인은 선명했다. 마치 사람의 목숨을 요구하는 문서가 아니라, 흔한 혼례 절차를 적은 예부의 공문인 것처럼 단정했다.월령은 그 단정함이 싫었다.전생에서 그녀의 폐위 조서도 그랬다. 먹은 번지지 않았고, 글씨는 흠잡을 데 없이 바른 서체였다. 심가의 이름을 역적의 명단에 올린 문서도, 그녀의 처형일을 정한 문서도 모두 그랬다.사람은 피를 흘리는데 종이는 깨끗했다."북경군 호부라니요."청아가 숨을 죽인 채 중얼거렸다.그 말에 시종 하나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히 입에 올리기도 두려운 물건이었다. 북경군 호부는 섭정왕부의 심장이었다. 호부가 있어야 북경군이 움직였고, 북경군이 있어야 황실은 위지헌을 함부로 치지 못했다.태후는 혼인을 거절하지 않았다.대신 혼인의 이름으로 칼을 요구했다.위지헌은 봉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시선이 문장 사이를 느리게 훑었다.월령은 그 얼굴에서 무엇을 읽으려 했다.분노.멸시.망설임.그러나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가장 위험한 순간에 가장 비어 보였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깊은 곳에 잠가 두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왕야."월령이 낮게 불렀다.위지헌은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내놓으실 생각입니까."그제야 그의 시선이 올라왔다."내가 뭘 내놓는지 알고 묻습니까.""압니다.""모릅니다."짧은 부정이었다.월령의 입술이 다물렸다.위지헌은 봉서를 접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호부는 쇳조각이 아닙니다. 그것이 내 손에 있는 동안, 황실은 내게 칼을 겨누기 전에 세 번 계산합니다. 예부에 들어가는 순간 계산은 한 번으로 줄어듭니다.""그 한 번은요.""나를 죽일 수 있는가."청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월령은 고개를 들었다.그가 너무 평온해서, 그 말이 오히려 몸 안쪽을 베었다."그럼 안 됩니다."위지헌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전각 안의 침묵은 오래 갔다.위지헌이 무릎을 꿇은 채로 올린 혼서 한 장이, 옥좌 아래의 공기를 전부 바꾸어 놓았다.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붉은 기둥 아래 늘어선 대신들의 소매 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백단향은 숨 막힐 만큼 진했다.섭정왕이 무릎을 꿇었다.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기이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무릎은 항복이 아니었다. 칼을 뽑지 않은 선전포고였다.심월령은 그 곁에 서 있었다.자신의 이름이 적힌 혼서가 황실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하얀 종이 위의 먹빛 세 글자는 낯설 만큼 또렷했다.심월령.전생에서는 폐후가 된 뒤에야 제 이름을 빼앗겼다. 사람들은 그녀를 폐후라 불렀고, 역모의 딸이라 불렀고, 죽어 마땅한 여인이라 불렀다. 이름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판결문에 찍힌 흔적일 뿐이었다.그런데 지금, 누군가 그 이름을 황궁의 입구에서 빼앗기 전에 먼저 감싸 쥐었다.아니.감싸 쥔 것만은 아니었다.위지헌은 그 이름을 들고 황실의 목구멍 앞에 세웠다.태후 독고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섭정왕."그 한마디에 대신들의 허리가 더 낮아졌다.태후는 웃지 않았다. 그러나 웃음보다 더 서늘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분노할 때조차 품위를 잃지 않았다. 품위란 그녀에게 예절이 아니라 무기였다."혼인은 가문과 가문의 일이다. 더구나 황실의 일이라면 더욱 절차가 무겁지. 오늘 이 자리에서 급히 논할 만한 사안은 아니네."위지헌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래서 오늘 올렸습니다."짧은 대답이었다.태후의 눈빛이 조금 굳었다."무슨 뜻인가.""늦으면 절차가 아니라 포획이 될 테니까요."전각 안의 공기가 한 번 더 차가워졌다.어떤 대신이 숨을 삼켰다. 그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위명서는 옥좌 아래 한쪽에 서 있었다. 아직 황제가 아니었으나, 황실의 피를 이은 황자답게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손가락 하나가 느
후궁 예비 명단.그 말이 동쪽 별채에 내려앉은 순간, 촛불이 한 번 낮게 흔들렸다.월령은 숨을 멈췄다.위명서는 하루를 내주었다.그리고 바로 그 하루의 값으로 그녀를 요구했다.곁에서 직접 보호하겠다.궁중으로 불러들이겠다.후궁 예비 명단에 올리는 일을 의논하라.말은 부드럽고 절차는 공손했다. 그러나 뜻은 명백했다. 섭정왕부에 있는 여자를 다시 황궁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것. 월령을 심가의 딸로도, 섭정왕의 동맹으로도 두지 않겠다는 것.황제의 여자로 만들겠다는 것.전생의 목줄을 다시 꺼낸 것이다.위지헌의 손이 그녀의 젖은 소매에서 천천히 떨어졌다.그 움직임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방 안의 공기가 식었다.총관은 문밖에서 더는 읽지 못했다.월령은 위지헌을 보았다.그의 얼굴은 평온했다.너무 평온했다.그 평온함 아래서 무언가가 검게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분노라고 부르기에는 차가웠고, 질투라고 부르기에는 깊었다. 오래 잠겨 있던 문이 안쪽에서 열리는 소리 같았다."조서를 들여라."위지헌이 말했다.총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감히 월령을 보지 못했다. 두 손으로 조서를 받쳐 올렸다.위지헌은 조서를 받아 들었다.읽지 않았다.찢지도 않았다.그는 촛불 가까이에 조서를 가져갔다. 붉은 인장이 빛을 받았다. 삼황자의 사인과 태후전의 부인이 함께 찍혀 있었다. 아직 황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명으로 만들 준비는 끝나 있었다.위지헌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웃음은 아니었다."겁이 많군."그가 낮게 말했다.총관의 어깨가 굳었다.월령은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았다.위명서.태후.그리고 자신을 빼앗기 전에 먼저 이름으로 묶으려는 모든 사람들."왕야."월령이 입을 열었다.위지헌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아침에 입궁한다.""상처가 열렸습니다.""닫을 시간은 있다.""저 때문이라면."그제야 위지헌의 시선이 그녀에게 왔다.차가웠다.그런데 그 차가움은 그녀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었다.오히려 너무 깊게 붙드는
위지헌은 새벽이 되어서야 열이 내렸다.월령은 그의 손목을 놓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잠든 사람의 손은 의외로 정직했다. 낮 동안의 명령도, 냉정한 계산도, 사람을 베듯 짧은 말도 없었다. 다만 손가락 끝이 때때로 그녀의 맥을 더듬었다.살아 있는지 확인하듯.월령은 그 손길을 밀어내지 않았다.비 맞게 두지 않겠다.그 말은 밤새 방 안에 남아 있었다.처형장의 비.전생의 마지막 품.그리고 지금, 동쪽 별채의 낮은 침상 위에서 상처를 안고 잠든 남자.그는 현생의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는 비 속에서 죽어 가던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늦었고, 놓쳤고, 그래서 이번에는 늦지 않으려 했다.월령은 그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이 사람은 나를 강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다.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그는 그녀가 칼을 쥐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한다. 웃어도 되고, 단것을 좋아해도 되고, 아무것도 모른 채 아란과 마당을 뛰어다녀도 되는 삶.그런데 그런 삶을 돌려주려는 방식이 피와 감시와 계책뿐이다.그래서 더 슬펐다.청아가 조용히 들어와 찬 찜질 물을 갈았다. 그녀는 침상 위의 위지헌과 그 곁의 월령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가가 붉었다."아가씨, 장부는 숨겨 두었습니다."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사본은?""말씀하신 대로 한 장만 옮겨 적었습니다."청아가 품에서 얇은 종이를 꺼냈다.독고가 서북 상단.흑수곡 보급 지연.심가 호송로 차용.그리고 작은 인장 하나.병부 부인.병부에서 정식으로 찍은 인장이 아니었다. 부인의 친정 쪽에서 쓰는 사인. 장부를 직접 움직이는 손은 독고가였지만, 병부 안쪽에 문을 열어 준 사람이 있었다.월령은 그 종이를 접었다.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독고가를 찌르기 전에, 심각의 출정 명부터 늦춰야 했다. 흑수곡에 병력이 움직이는 순간, 증거보다 부고가 먼저 도착할 것이다.월령은 위지헌의 잠든 얼굴을 보았다.그를 깨울 수 없었다.그가 깨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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