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24
Par:  moominkillerEn c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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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모 누명으로 가문과 함께 처형당한 황후 심월령. 죽음의 순간 그녀를 구하러 온 이는 남편인 황제가 아니라 냉혹한 섭정왕 위지헌이었다. 혼례 3년 전으로 회귀한 월령은 더 이상 황후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번 생, 그녀는 자신을 죽인 황실을 무너뜨리기 위해 섭정왕의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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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itre 1

1. 흰

비가 내렸다.

그러나 비는 피 냄새를 씻어 내리지 못했다.

젖은 흙은 피를 먹은 뒤 오래된 쇠처럼 비렸다. 낮은 돌계단 틈마다 붉은 물이 고였고, 빗방울은 그 위에 닿을 때마다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형장 둘레에 몰린 백성들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 누군가의 젖은 소매에서 눅눅한 마 냄새가 났고, 멀리 황궁 쪽 붉은 담은 비안개에 잠겨 마치 아직 마르지 않은 상처처럼 서 있었다.

심월령은 그 붉은 담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무릎이 진흙 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

한때 대연에서 가장 고운 비단만 몸에 두르던 황후의 무릎이었다. 봉황이 수놓인 대례복은 오래전에 벗겨졌고, 금관도 비녀도 없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죄인의 흰 홑옷 한 벌, 빗물에 무겁게 달라붙은 머리카락, 그리고 목에 걸린 나무 죄패뿐이었다.

죄패에는 먹으로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역모 폐후.

먹은 비를 맞아 번졌지만, 그 네 글자만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마치 누군가 온 나라의 눈에 그 이름을 새겨 넣으려 한 것처럼.

월령은 웃음이 날 뻔했다.

역모라니.

아버지 심도윤은 평생 황실의 북문을 지킨 장군이었다. 열일곱 번의 전장에서 황명을 받들었고, 세 번의 겨울을 변경에서 보내며 손가락 둘을 얼려 잃었다. 오라비 심각은 황제 위명서가 즉위하던 날, 반란군의 화살을 등으로 막았다. 어린 아란은 아직 머리에 비녀도 제대로 꽂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런 심가가 역모를 꾸몄다고 했다.

그런 심가의 딸이 황제를 독살하려 했다고 했다.

비는 돌계단을 두드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누군가 거짓을 세어 보는 소리처럼.

"폐후 심씨."

높은 단 위에서 음성이 떨어졌다.

월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제 위명서가 그곳에 서 있었다.

금빛 용포에는 비 한 방울 닿지 않았다. 내관이 받쳐 든 검은 우산 아래, 그는 오늘 처형되는 사람이 한때 제 곁에서 밤을 지새우던 여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사람처럼 단정했다. 젖은 형장의 냄새가 그에게만 닿지 못하는 듯했다. 우산 아래의 공기는 비린내도, 진흙도, 사람들의 떨림도 비껴 가고 있었다.

저 얼굴을 사랑했었다.

월령은 그 사실이 이제는 남의 이야기처럼 아득했다.

그가 처음 손을 내밀던 날, 대연의 봄은 유난히 따뜻했다. 살구꽃이 바람을 타고 떨어지던 오후였다. 그는 꽃그늘 아래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고, 목소리는 햇살처럼 부드러웠다.

심월령, 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 이 황궁도 외롭지 않을 것 같소.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가벼웠는지, 그녀는 너무 늦게 알았다.

그때의 살구꽃은 달았다. 눈앞을 희게 흐리고, 마음의 문턱을 조용히 넘었다. 월령은 아버지의 걱정도, 오라비의 긴 침묵도, 황궁을 두고 사람들이 낮게 삼키던 말들도 모두 외면했다. 다정한 목소리 하나가 세상의 그늘을 가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황후가 되었다.

그리고 황후가 된 뒤에야 깨달았다.

황궁은 사람의 온기로 데워지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피를 먹고 불을 밝히는 곳이었다. 붉은 담 안의 등불은 밤마다 고왔다. 너무 고와서, 그 아래 누가 지워지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위명서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다정하게 들리도록 태어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잔혹했다.

월령은 갈라진 입술을 열었다. 혀끝에 피와 빗물이 함께 고였다.

"폐하."

군중이 술렁였다.

누군가는 애원을 기다렸을 것이다. 누군가는 한때 황후였던 여인이 마지막 순간 사랑을 구걸하는 꼴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목숨은 끝내 체면보다 질기다고, 그렇게 믿는 얼굴들이 비 사이로 희미하게 흔들렸다.

월령은 그들을 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역모를 꾸미지 않았습니다."

위명서의 눈썹이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오라비도, 아란도, 심가의 누구도 폐하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하라."

"폐하께서 그 사실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빗소리가 커졌다.

아니, 어쩌면 군중이 한꺼번에 숨을 들이켜는 소리였을지도 몰랐다.

위명서는 한참 동안 월령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황후전에서 밤늦도록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사내는 그 눈 안에 없었다. 봄밤의 온기도, 꽃그늘 아래의 다정함도 없었다. 그곳에는 황좌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태울 수 있는 군주만 있었다.

"심씨."

그가 낮게 말했다.

"그대는 끝까지 짐을 실망시키는군."

월령은 그제야 웃었다.

목 안쪽이 찢어져 피 섞인 숨이 새어 나왔지만, 웃음은 분명 웃음이었다. 입가가 조금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형장 한복판의 사람들이 더 깊이 얼어붙었다.

"제가 폐하를 실망시켰습니까?"

"그대가 가만히 있었다면 심가의 어린 목숨 하나쯤은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란.

그 이름은 혀끝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대신 별궁의 연기가 먼저 떠올랐다. 불타는 처마, 젖은 밤공기에 섞인 재 냄새, 뒤돌아보지 못하고 끌려가던 자신의 팔. 아란은 비녀도 제대로 꽂지 못하던 아이였다. 불길 쪽으로 달려가던 작은 등만 보였다. 내관들은 월령의 팔을 붙잡았고, 궁녀들은 고개를 숙였고, 위명서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부터 월령은 밤마다 조금씩 비어 갔다.

오늘 형장에 오른 것은 그 빈 껍데기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살려 주십시오."

월령이 속삭였다.

위명서의 눈에 옅은 빛이 스쳤다.

그는 그것을 승리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끝내 그녀가 무너졌다고, 사랑이 아니라도 두려움 앞에서는 모두 무릎을 꿇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월령은 진흙 속에서 손끝을 움켜쥐었다. 흰 소매 안쪽으로 손톱이 손바닥을 눌렀다.

"아란을."

위명서의 얼굴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아.

이미 늦었구나.

황제는 처음부터 누구도 살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목숨을 저울 위에 올려 두고 흥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울 자체를 제 손안에 쥔 사람이었다.

"시각이 되었습니다, 폐하."

형부상서가 젖은 관복을 끌며 머리를 조아렸다.

위명서는 더 이상 월령을 보지 않았다.

그는 젖은 소매 끝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듯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 손짓 하나에 처형인이 움직였다.

월령은 눈을 감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보리라 생각했다.

자신을 버린 황제의 얼굴을.

충신의 피를 먹고도 태연한 황궁의 붉은 담을.

비를 맞으며 고개를 숙인 백성들의 두려움을.

그리고 기억하리라.

눈을 감아도 잊지 않으리라.

칼날이 들어 올려졌다.

빗물이 칼등을 따라 흘렀다. 그 얇은 빛이 월령의 눈앞에 닿는 순간, 형장 밖에서 땅이 울렸다.

처음에는 천둥인 줄 알았다.

그러나 천둥은 그렇게 일정하게 달려오지 않는다. 천둥은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천둥은 사람들의 비명을 가르고, 말의 콧김과 군화의 진동을 데리고 오지 않는다.

"북경군이다!"

누군가 외쳤다.

군중이 갈라졌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형장으로 밀려들었다. 우산이 뒤집혔다. 호위병들이 검을 뽑았다. 형부의 관리들이 물에 젖은 종잇장처럼 새파랗게 질려 뒤로 물러났다.

그 선두에 한 남자가 있었다.

위지헌.

대연의 섭정왕.

선황의 아우이자, 현 황제의 숙부.

북쪽 변경을 침묵시킨 왕.

황궁 안에서조차 이름을 낮춰 불러야 하는 사람.

월령이 황후로 있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마음을 놓고 마주한 적 없는 남자.

그가 빗속을 가르고 달려오고 있었다.

흑마가 형장 계단 앞에서 앞발을 들었다. 위지헌은 말이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검은 장포는 빗물에 무겁게 젖어 있었고, 허리의 장검은 이미 뽑혀 있었다.

"위지헌!"

위명서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군사를 이끌고 들어오느냐!"

위지헌은 황제를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월령에게 박혀 있었다.

월령은 그 눈을 보고 숨을 멈췄다.

왜.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가.

그는 늘 차가운 사람이었다. 황제 앞에서도 등뼈를 굽히지 않는 오만한 왕. 궁중 연회에서 누구와도 쉽게 잔을 나누지 않던 고독한 권력자. 월령이 황후가 된 뒤에도 그는 그녀에게 예를 다했지만, 그 예에는 온기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위지헌은 무너진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무너지는 순간까지 자세만은 흐트러뜨리지 않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늦었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 사람처럼.

"칼을 치워라."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처형인의 손이 떨렸다.

"짐의 명이다."

위명서가 이를 악물었다.

"폐후 심씨의 형을 집행하라."

처형인이 다시 칼을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빗속에 은빛 선 하나가 그어졌다.

월령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던 칼날이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 처형인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러졌다. 그의 손목에서 피가 솟았고, 빗물이 그것을 곧장 돌계단 아래로 끌고 갔다.

위지헌은 어느새 월령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검끝에서 피가 떨어졌다.

"한 번만 더 그 아이에게 손을 대면."

위지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늘 이 형장에 살아 돌아갈 자는 없다."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월령은 그 등을 바라보았다.

넓고 곧은 등. 비를 맞아 검게 가라앉은 머리카락. 피 냄새와 철 냄새가 뒤엉킨 형장 한복판에서, 이상하게도 아주 낮은 향이 스쳤다. 젖은 나무와 식은 차, 오래된 약재 같은 냄새. 꽃향을 부르지 않는 서늘한 기척이었다.

그가 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심가가 무너질 때도, 그녀가 황후전에서 끌려 나올 때도, 아란이 불길 속으로 사라질 때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있었는데 그녀가 보지 못했을 뿐인지도 몰랐다.

황제만 바라보느라.

자신을 벼랑으로 데려간 손을 끝까지 붙잡고 있었으니.

"숙부."

위명서가 차갑게 말했다.

"그 여인은 역적이다."

"아니다."

"증좌가 모두 나왔다."

"네가 만든 것이지."

"숙부께서 어찌 그리 단정하십니까."

위지헌이 마침내 황제를 보았다.

그 눈빛에 군중이 한 걸음 물러났다. 황제를 향한 신하의 눈이 아니었다. 숙부가 조카를 꾸짖는 눈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칼집 안에서 잠들지 못한 칼의 눈이었다.

"찾았다."

위명서의 얼굴이 굳었다.

"네가 그 아이를 죽이려 덮어 둔 것들."

위지헌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옥새의 붉은 자국도, 북문을 더럽힌 명부도, 심 장군의 이름을 훔친 글씨도."

월령의 손끝이 얼어붙었다.

그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누명을 썼다는 것을.

심가가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황제에게 버려졌다는 것을.

그런데 왜 이제야.

왜 하필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거짓이다!"

위명서가 소리쳤다.

"섭정왕이 역적의 딸에게 미혹되어 황명을 거역한다! 금군은 들으라. 당장 저자를..."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북경군의 화살이 일제히 금군을 향했다.

형장은 순식간에 전장이 되었다.

비명. 쇳소리. 말 울음. 물웅덩이를 짓밟는 군화 소리. 관리들의 고함. 검은 우산이 진흙 위로 떨어져 뒤집혔다. 그 안쪽에 고여 있던 맑은 빗물이 붉은 흙탕물과 섞였다.

위지헌은 그 소란 속에서 월령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연에서 황제 다음으로 높은 남자가.

진흙탕 형장 위에서, 죄패를 건 여인 앞에.

"월령."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황후도, 폐후도, 심씨도 아니었다.

월령.

그 두 글자는 빗속에서도 이상하게 젖지 않았다. 월령은 그 이름이 제 안쪽 어디를 조용히 베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늦었다."

위지헌의 손이 그녀의 뺨 가까이에서 멈췄다. 닿기 전 한순간, 그는 허락을 구하듯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피와 빗물을 닦아 냈다.

차가울 줄 알았던 손은 뜨거웠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군사를 움직이던 왕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서질 것을 앞에 두고도, 부서졌다는 말을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제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월령은 묻고 싶었다.

어디로요.

왜요.

왜 이제야 왔어요.

하지만 입에서 나온 것은 말이 아니라 피였다.

위지헌의 얼굴에서 피가 가셨다.

그제야 월령도 느꼈다.

칼날은 아직 목에 닿지 않았지만, 형장으로 끌려오기 전 삼킨 탕약이 이미 속을 태우고 있었다. 황제는 혹시 모를 손길마저 계산해 두었다. 죽음은 칼끝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몸 안 깊은 곳에서 조용히 문을 닫고 있었다.

"안 됩니다."

위지헌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가라앉았다.

"심월령."

그가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눈 감지 마십시오."

이상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월령은 힘겹게 손을 들었다. 손가락 끝이 그의 젖은 옷자락을 붙잡았다. 검은 옷감 아래에서 낮은 약재 향이 희미하게 스몄다. 살구꽃은 아니었다. 달콤한 기억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향 아래에서는 숨이 조금 덜 흩어졌다.

"왕야."

"말하지 마십시오."

"왜..."

숨이 가늘어졌다.

"왜 저를..."

위지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제 손 안에 감쌌다. 세게 쥐지는 않았다. 빠져나갈 수 없게 붙잡는 손이 아니라, 흩어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손이었다.

월령은 그 손을 보며 뒤늦게 알았다.

그는 자신을 증오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늘 먼 곳에 서 있었다.

황후가 되어 다른 남자의 곁에 선 그녀를.

꽃그늘 아래의 거짓말을 믿고 웃던 그녀를.

황후전 깊은 곳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던 그녀를.

끝내 폐위되어 붉은 담 밖으로 끌려가는 그녀를.

그 모든 시간 동안 이 남자는 무엇을 삼켰을까.

위지헌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형장의 진흙도, 죄인의 피도, 황제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팔 안에 든 몸이 너무 가벼운 듯, 그의 숨이 한 번 멎었다.

"나는 너를 택했다."

빗소리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짧고 낮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황궁의 붉은 담보다 무거웠다.

"늦었을 뿐이다."

월령은 웃으려 했다.

입술은 피로 젖었고, 숨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다정하다 믿은 목소리는 그녀를 죽였고, 차갑다 여긴 침묵은 그녀를 살리려 황명을 거역했다.

어리석었다.

심월령.

너는 참으로 어리석었다.

월령은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위명서를 보았다.

황제는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우산을 잃은 용포 위로 빗물이 흘렀다. 금빛 실이 젖어 무거워졌고, 그 화려한 문양 아래서 그의 얼굴만 이상하게 빈약해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마지막 남은 체념이 아주 천천히 식었다.

식은 자리에는 분노가 남았다.

만약.

만약 살구꽃이 한 번 더 피어난다면.

그 꽃그늘 아래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황후의 자리에 앉지 않으리라.

그의 손을 잡지 않으리라.

심가의 이름을 진흙에 묻은 자들을 잊지 않으리라.

소연화.

독고 태후.

심서윤.

위명서.

그들이 지운 이름을 하나씩 되찾으리라. 그들이 훔친 명분을, 그들이 쓴 기록을, 그들이 황좌 아래 묻은 모든 죽음을.

그리고 이 남자.

자신의 마지막을 품에 안고도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위지헌을.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으리라.

"만약..."

월령이 피 섞인 숨으로 속삭였다.

위지헌이 그녀의 입가에 귀를 기울였다.

"봄이..."

"월령."

"한 번만 더 온다면..."

위지헌의 팔이 떨렸다.

월령은 마지막 힘을 다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저는 황후가 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빗소리가 멀어졌다.

형장의 비명도, 말발굽 소리도, 황제의 분노한 외침도 물속에 잠기듯 흐려졌다. 세상은 멀어지는 등불처럼 하나씩 꺼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위지헌의 목소리였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어둠의 문턱에 손을 걸고, 끝내 닫히지 못하게 버티는 사람처럼.

그리고 침묵이 내렸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월령은 문득 살구꽃 향을 맡았다.

너무 먼 봄의 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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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 향
살구꽃 향이 났다.빗물에 젖은 진흙 냄새도, 목 안쪽을 태우던 비린 독향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희미했다. 오래 닫혀 있던 창문 틈으로 먼 봄이 숨을 죽이고 들어오는 듯했다.심월령은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곧바로 기침을 토했다."아가씨!"누군가 비명을 질렀다.월령은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칼날이 닿기도 전부터 속을 태우던 열기가 아직 목 안쪽에 남은 것 같았다. 피와 비가 뒤섞이던 형장의 냄새가 혀끝에 되살아났다.아니.칼이 아니었다.그녀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던 것은 칼날보다 조용한 것이었다. 탕약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숨을 들이킬 때마다 장부 안쪽을 긁던 독. 마지막 순간까지 몸 안에서 문을 닫던 냄새.그런데 손끝에 닿은 목은 멀쩡했다.상처도 없었다.쇠사슬이 쓸고 간 자국도, 죄패가 눌렀던 거친 흔적도 없었다.월령은 천천히 눈을 떴다.붉은 황궁의 담이 아니었다.차가운 돌계단도 아니었다.머리 위에는 옅은 청색 비단 천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비단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구름무늬가 수놓여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살구나무 가지가 흔들렸다. 가지마다 연분홍 꽃잎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꽃잎 몇 장이 창살에 닿았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래로 떨어졌다.탁자 위 향로에서는 은은한 침향이 피어올랐다. 먹 냄새와 마른 종이 냄새, 햇볕에 덥혀진 비단 이불의 냄새가 차례로 돌아왔다.이 방을 알고 있었다.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심가의 동쪽 별채.황후의 금관을 쓰기 전, 그녀가 열여섯 해를 살았던 방.창가 낮은 서안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먹이 남아 있었다. 붓끝은 흰 산수 화첩 위에 기대어 있었고, 그 옆에는 절반쯤 펼쳐진 병법서가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전장에서 보내온 군보를 따라 그리던 산맥과 강줄기. 어린 아란에게 가르쳐 주다 만 바둑판. 흑돌 셋과 백돌 다섯이 끝내기 자리에서 묘하게 맞물린 채 멈춰 있었다.이 방은 그녀가 가장 아름답게 꾸며지던 곳이 아니었다.가장 오래 생각하던 곳이었다."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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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틈
"월령 언니, 여기 계셨어요?"문밖의 목소리는 봄비처럼 부드러웠다.심서윤은 늘 저렇게 말했다. 조심스럽게. 다정하게. 마치 자신이 누군가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그때의 월령은 그 목소리를 좋아했다.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촌이라 믿었고, 어머니의 방 앞에 흰 천이 걸린 뒤에는 서윤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운 적도 있었다. 등을 토닥이던 작은 손의 감촉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그리고 황후전의 어느 밤, 비녀함 안쪽에서 밀서를 꺼내던 그 손도.그 손등에 비치던 차가운 등불도.그래도 월령은 그 손을 기억할 때마다, 먼저 작은 온기를 떠올렸다.어머니를 잃고 울던 날 등을 토닥이던 손. 아란에게 꽃잎을 접어 주던 손. 칼을 쥐기 전에는 분명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어 했을 손.그 손을 끊어 내는 일은 쉬울지도 몰랐다.그러나 쉬운 일은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월령은 약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은매는 바닥에 엎드린 채 숨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청아는 문 앞에 서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약로 위의 사기그릇에서는 탕약의 김이 가늘게 올라왔다. 감초와 진피의 달큰한 냄새 밑으로, 조금 전까지 적련초가 남겼던 불쾌한 단내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떠돌았다.지금 문을 열면 안 된다.심서윤은 영리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웃을 때는 눈꼬리가 먼저 접혔고, 울 때는 반드시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눈물을 흘렸다. 손끝은 작고 희었지만, 무엇을 어디에 숨겨야 하는지 너무 일찍 배운 아이였다.들키지 않는 법을 아는 아이.그러니 지금 이 약방 안의 공기만으로도 이상함을 눈치챌 수 있었다.월령은 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렸다.청아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월령은 은매에게 다가가 몸을 낮췄다. 은매의 떨리는 손을 붙잡고, 그 손안에 작은 약봉지를 쥐여 주었다."이것을 넣어라."은매가 젖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아가씨, 이것은...""감초와 진피다. 독은 없다.""그럼...""향만 비슷하게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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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
해시가 가까워질 무렵, 남쪽 연못에는 안개가 내려앉았다.봄밤의 안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얇고 희어서, 손을 뻗으면 손바닥 위에서 곧장 풀어질 듯했다.그러나 그 안에 오래 서 있으면 숨이 조금씩 낮아졌다.물 위의 달도,버드나무 아래 그림자도,멀리 별채 처마에 걸린 등불도 한 겹씩 지워졌다.소리가 먼저 숨었다.벌레 우는 소리는 물가의 돌 틈으로 잦아들었고, 회랑 아래 고인 밤공기는 젖은 약재처럼 싸늘했다.월령은 회랑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흰 장삼 위에 짙은 남색 겉옷을 걸쳤다. 밤 안으로 스며들기 위해 고른 빛이었다. 머리는 낮게 틀어 올렸고, 귀밑으로 흘러내린 잔머리 한 올만이 안개에 젖어 뺨에 붙었다.곁에 선 청아는 자꾸 소매 끝을 만졌다.낮 동안 본 것들이 아직 어린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독향이 남은 탕약.은매의 젖은 눈.서윤의 치맛자락에 번졌던 검은 흔적.어린 시녀가 하루에 다 삼키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었다.그래도 청아는 도망가지 않았다.그 사실이 월령의 가슴 한쪽을 아프게 했다.청아는 겁이 나면 먼저 입술을 깨물었다.그러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다. 조금 전에도 월령의 겉옷 끈을 두 번 매만지고,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코의 흙을 털고, 혹시 몰라 소매 안에 얇은 먹끈까지 숨겨 두었다.책사의 손은 아니었다.곁에 남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의 손이었다."아가씨."청아가 입술만 움직이듯 속삭였다."정말 여기 계셔도 괜찮을까요?""괜찮은 일을 보러 온 건 아니야."월령은 연못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누가 오면 소매를 잡아. 소리는 내지 말고."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겁먹은 얼굴인데도 눈동자만은 끝까지 월령 쪽에 붙어 있었다.해시.은매가 남긴 종이에는 그 두 글자만 선명했다.남쪽 연못가.서윤의 처소에서 온 사람.그 사람이 한씨의 심복인지, 서윤의 하녀인지, 아니면 더 먼 곳에서 내려온 손인지 보아야 했다.월령은 오래 늦었던 사람처럼 숨을 골랐다.어머니의 흰 천이 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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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뼘
그 말은 아직 공중에 있었다.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이 황궁도 외롭지 않을 것 같군요.위명서의 목소리는 살구꽃잎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너무 가벼워서, 처음 듣는 사람은 그것이 칼집에 숨은 소리라는 것을 모를 터였다.한때의 월령도 몰랐다.그녀는 그 말을 오래 품었다. 황궁의 붉은 담 안에 한 사람의 온기를 들이면, 그 외로움이 조금은 녹을 줄 알았다.높은 처마와 긴 회랑과 밤마다 닫히는 문들 사이에 자신이 봄을 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이제는 안다.황궁의 외로움은 사람 하나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사람 하나를 삼켜도, 그곳은 계속 비어 있었다."전하."월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위명서는 웃고 있었다."말씀하십시오.""황궁은 많이 외로운 곳입니까?"뜻밖의 물음이었는지, 그의 눈동자에 아주 얇은 파문이 생겼다.곧 사라졌다."높은 담 안에 있으니, 때로는 그렇지요.""그 외로움을 사람 하나에게 모두 맡기셔도 되는 것입니까?"회랑 뒤에서 서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월령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겉으로는 예를 잃지 않은 채, 손끝만 소매 안에서 가만히 접었다."소녀는 아직 제 집안의 근심도 다 품지 못합니다. 병중의 어머니가 계시고, 북문을 지켜 온 아버지가 계시고, 아직 어린 식구들도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그들을 두고 누구의 외로움을 달래러 갈 만큼, 제가 넉넉한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위명서의 미소가 옅어졌다.예전 같았다면 월령은 이쯤에서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외로운 황자의 마음을 밀어냈다는 생각에 밤새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그녀의 가슴에 남은 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다.너는 외로워서 나를 원한 것이 아니었지.심가가 필요했을 뿐이다.아버지의 군권,오라비의 충성,북문관 너머 눈보라와 경안 저잣거리의 잠자리까지 묶어 둔 심가라는 이름.그리고 황궁의 빈자리를 가장 아름답게 채워 줄 장군가의 딸."그 말씀은."위명서가 낮게 물었다."나를 거절한다는 뜻입니까?"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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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늘
이번에는.내 손을 놓지 마라.위지헌의 말은 한참 동안 측백나무 잎 사이에 머물렀다.봄빛은 잘게 부서져 내려왔고, 먼 연회장의 웃음소리는 얇은 비단 몇 겹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흐렸다.월령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놓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다시는 다른 손을 잡지 않겠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심가를 살리겠다고,당신을 이용하겠다고,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겠다고.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는,당신을 믿고 싶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모두 참이었다.그래서 어느 하나도 먼저 꺼낼 수 없었다.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주인을 바꾼다.어느 날의 월령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배웠다.다정한 말은 사랑이 되었고,사랑은 약점이 되었으며,약점은 죄가 되었다.위지헌은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그가 진정 바란 것이 대답뿐이었다면, 기다렸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월령의 입술보다 먼저 그녀의 숨을 보았다.가늘어진 목선,소매 안으로 접히는 손끝,속눈썹 아래 젖은 눈동자가 늦게 숨는 순간.그 모든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더 조심스러웠다."답은 지금 내지 마라."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두고 보아도 늦지 않다."월령은 눈을 들었다.다른 이가 했다면 미루는 말이었을 것이다.위명서가 했다면, 다시 생각할 틈을 주는 척 손목을 감는 말이었을 것이다.그러나 위지헌의 말에는 끈이 없었다.그는 대답을 끌어당기지 않았다.다만 대답이 월령의 입술에서 너무 이르게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너무 이른 것은,대개 빼앗긴다."왕야."월령은 아주 낮게 불렀다.소저가 왕족에게 올리는 예법으로는 조금 가까운 호칭이었다.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고서야 깨달았다.하지만 위지헌은 바로잡지 않았다.그저 한쪽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깊어졌다.그 작은 변화 하나가 월령의 숨을 더 낮게 만들었다."남쪽 담의 사내는."그녀가 묻자, 위지헌의 시선이 돌아왔다."창고에는 없다."그 말은 죽었다는 뜻도,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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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숨
심가의 아침은 낮은 소리들로 가득했다.지하 창고가 비었다는 말은 아직 누구의 입에서도 크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물동이가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내려앉고, 회랑을 쓸던 하인의 빗자루가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멈추고, 부엌의 계집종들이 죽 솥을 젓다 말고 서로의 눈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큰 집의 소문은 늘 사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쌀을 씻는 물소리,말에게 여물을 붓는 소리,행랑채 문고리가 바람도 없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그 작은 것들이 밤사이 심가에 무엇이 지나갔는지 먼저 알렸다.안에서 잠긴 문.끊어지지 않은 밧줄.사라진 사내.사건은 사라졌는데, 의심은 남았다.월령은 그 의심이 어디로 번지는지 보았다. 호위들은 서로의 허리끈과 신발 밑창을 살폈고, 안채의 사람들은 둘째 부인의 처소 쪽으로 눈을 주었다가 황급히 거두었다. 한씨는 평소보다 늦게 문을 열었고, 심서윤의 하녀 금지는 새벽 물을 뜨러 가며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빈 방은 말을 오래 한다.위지헌의 말은 사실이었다.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는 기쁨보다 월령의 안쪽에는 다른 감정이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는 심가를 구했다.동시에 심가를 속였다.두 가지가 함께 성립한다는 사실이 월령을 오래 붙들었다. 선한 일과 옳은 일은 늘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높은 단 위의 그 사람은 악행을 왕조의 질서라 불렀고, 위지헌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에게 진실을 감추었다.월령은 아직 그 차이를 완전히 판단할 수 없었다.다만 하나는 알았다.위지헌은 자신을 깨끗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그런 사람의 손은 때로 더 믿기 어렵고,더 놓기 어려웠다.서원당 뒤 작은 창고에는 은매가 숨어 있었다. 청아가 아침 죽에 생강즙을 아주 조금 풀어 가져갔다. 병든 어미와 어린 동생 이야기가 나오자 은매는 그릇을 잡은 손을 떨었다고 했다. 월령은 보고를 듣고도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담장 안의 사람 하나를 숨기는 일과,담장 밖의 삶 하나를 건지는 일은 전혀 달랐다.경안의 장마는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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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문턱
아침빛은 얇았다.밤새 창을 열어 두었기 때문인지 방 안에는 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연꽃 향도, 난향도, 사람의 판단을 늦추던 희미한 쓴내도 모두 빠져나가고 없었다.대신 창가에는 말린 살구꽃 한 줌이 놓여 있었다.누가 두고 갔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청아는 그것을 보자마자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웃음을 참는 얼굴과 울음을 참는 얼굴이 이상하게 닮을 수 있다는 것을, 월령은 그때 처음 알았다."왕부에서 보낸 거예요."청아는 아주 작게 말했다.왕부.그 두 글자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다시 낮아지는 듯했다. 월령은 시선을 돌려 탁자 위를 보았다. 꿀물이 담긴 백자잔, 향 없는 비단 수건, 말린 살구꽃, 그리고 작은 종이 한 장.글씨는 위지헌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둥글고, 지나치게 단정했다.윤백.왕부의 근시가 쓴 글이었다.찬 것은 올리지 말라 하셨습니다.향은 빼라 하셨습니다.단것은 조금이라도 드시라 하셨습니다.문장마다 `하셨습니다`가 붙어 있었다. 누구의 명인지 모를 리 없게, 그러나 정작 그 이름은 한 번도 쓰지 않은 채.월령은 종이를 접었다.어이없어야 했다. 섭정왕부의 근시가 심가의 아가씨 방 앞까지 꿀물의 온도를 재고 간다는 일이 어찌 자연스러울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모든 배려가 너무 조용하고 익숙해서, 마치 왕부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이런 명을 받아 온 것처럼 보였다.이것은 다정함인가.아니면 감시인가.혹은 심가의 문턱에 세워 둔 섭정왕부의 표시인가.월령은 답을 정하지 못했다.정하지 못한 답은 늘 두려움 쪽으로 기운다.손목이 먼저 뜨거워졌다. 어제 위지헌의 손이 맥을 누르던 자리. 독향 사이에서 몸보다 먼저 숨을 붙잡힌 것 같던 감각. 월령은 천천히 소매를 내렸다.숨은 아직 조금 무거웠다.몽혼향 자체는 오래 남는 독이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향. 죄를 흐리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향. 그래서 더 교묘했다. 누군가 쓰러지면 병약함이 되고, 판단이 늦으면 피로가 되며, 기억이 흐릿하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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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잔
태후의 초대장은 향이 없었다.그 사실이 먼저 심가를 조용하게 만들었다.아침 부엌에서는 멥쌀 씻는 물소리가 나고, 무쇠솥 가장자리에는 지난밤 끓여 둔 닭죽의 기름이 얇게 굳어 있었다. 행랑 쪽에서는 하인들이 장작을 패며 낮은 농담을 주고받았고, 마구간에서는 젖은 짚을 갈아내는 냄새가 느리게 흘러왔다.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그런데 검은 칠을 한 죽간 하나가 대문을 넘자, 집 안의 모든 소리가 반 박자씩 늦어졌다.칼을 갈던 호위가 손을 멈췄고, 죽을 푸던 계집종은 국자의 끝을 솥 가장자리에 대고 오래 움직이지 못했다. 살구꽃잎이 후원 돌길 위로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듯했다.죽간에는 자녕궁의 금니 봉인이 붙어 있었다.향낭도 없고, 향지로 감싼 흔적도 없었다.무향.향을 빌리지 않아도 누구의 것인지 모두 알게 만드는 권력.월령은 그 앞에서 숨을 조금 접었다.심도윤은 봉인을 오래 보았다. 북쪽 전장에서 흘러온 군보를 읽을 때보다 얼굴이 더 굳어 있었다. 칼과 화살은 방향을 보인다. 그러나 궁에서 온 초대는 언제나 방향을 숨겼다."자녕궁에서 다과를 내리셨다."그가 낮게 말했다.방 안에는 유씨와 한씨, 월령과 서윤이 함께 있었다. 어머니 유씨는 아직 기침 끝이 가늘었고, 한씨는 눈 밑을 분으로 덮었으나 밤새 잠을 설친 흔적을 다 지우지는 못했다.서윤은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 있었다.너무 반듯했다.반듯하려고 애쓰는 아이의 어깨는 작게 굳어 있었다."소녀들까지 말입니까?"월령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심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심 부인과 둘째 부인, 심가의 두 아가씨를 함께 들라 하셨다."함께.그 한마디가 비단 위에 얹힌 얇은 칼날처럼 방 안에 놓였다.거절할 수 없는 명령은 차라리 간단했다. 명령은 이름을 가진다. 불복하면 죄가 된다. 그러나 초대는 웃는 얼굴을 하고 문 앞에 선다. 거절하면 불효가 되고, 받아들이면 발이 안쪽으로 묶인다.월령은 죽간 끝에 남은 금니의 마른 빛을 보았다.황궁의 붉은 담이 눈앞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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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붓끝
심서윤은 그 밤 잠들지 못했다.자녕궁에서 받은 작은 붓은 베개맡에 놓여 있었다. 흰 붓대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떠 보였고, 끝에 매인 금실은 등잔불이 사라진 뒤에도 혼자 빛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서윤은 옆으로 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는 밤새 젖은 살구꽃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멀리 행랑채 쪽에서는 늦게 돌아온 하인이 물동이를 내려놓는 낮은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그런 소리들이 집의 숨처럼 느껴졌을 것이다.오늘은 모든 소리가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았다. 마마께서 다시 부르실까.서윤은 붓을 손에 들었다.손바닥에 닿는 붓대는 차갑고 매끈했다. 너무 가벼워서 도리어 무거웠다. 누구도 자신에게 이렇게 곧장 물건을 내려 준 적이 없었다.어머니 한씨는 늘 말했다. 얌전해야 한다고, 월령 언니보다 먼저 나서면 안 된다고, 큰어머니 앞에서는 웃음을 낮추고 대장군 앞에서는 말을 줄이라고 했다. 손님 앞에서는 서두르지 말고, 글씨는 곧게 쓰고, 눈물은 고운 때에 흘려야 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서윤은 그 말들을 모두 외웠다.외우면 사랑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그러나 집 안의 모든 길은 이상하게도 월령에게 먼저 닿았다. 부엌에서 새로 찐 약식도, 포목점에서 들어온 고운 비단도, 친척 어른들의 칭찬도, 심도윤의 짧은 눈길도.월령 언니는 애쓰지 않아도 그렇게 되었다.말을 부드럽게 하면 사람들이 더 다정하다고 했고, 눈을 내리깔면 더 가련하다고 했다. 웃지 않아도 품위가 있다 했고, 아파 보여도 마음이 깊다 했다.서윤은 거울 앞에서 그 표정을 몇 번이나 따라 해 보았다.속눈썹을 조금 천천히 내리고, 목소리를 한 치 낮추고, 손끝을 소매 안으로 넣었다. 그런데 같은 표정을 지어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말은 달랐다.어린것이 벌써 꾀를 부린다.얌전한 듯해도 속이 많구나.서윤은 붓을 꼭 쥐었다.자녕궁에서는 달랐다.태후마마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글씨를 배웠느냐 물었고, 부끄럽다면서도 손은 곧다고 했다.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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