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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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에서 제일 곱다는 얼굴이, 항아리 속에 있었다. 십 년을 담 안에서만 살다 죽은 육가의 정실 심명주. 무엇을 잘못했는지 끝내 몰랐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 몸에서 다시 눈을 뜬 것은 독과 약을 읽는 여자다. 다시 유월 초닷새, 모든 것이 시작된 아침. 「가마는 둬. 걸어갈 거야.」 얼굴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다르다. 십 년 만에 아내가 낯설어진 남자는 뒤늦게 묻기 시작하고, 처음 만난 날부터 묻는 남자가 담 밖에서 그녀를 알아본다. 십 년을 기다린 남자는, 끝내 얻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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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화 유월

차일 아래로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그림자가 명주의 무릎을 스쳤다.

명주는 정청 가운데 앉아 있었다.

아침에 그 자리에 방석이 놓였고 그 뒤로 아무도 방석을 옮기지 않았다.

마당에는 차일이 셋 섰다.

굵은 기둥에 줄을 매어 넓은 무명천을 하늘처럼 팽팽히 당겨 둔 것이라, 유월 볕이 거기서 한 번 걸러져 마당 절반이 옅은 그늘에 잠겼다.

그 그늘마다 상이 들어차고 상 위에 그릇이 놓이고 그릇마다 뚜껑이 덮였다.

뚜껑 틈으로 김이 새고, 기름에 지진 것들이 노랗게 포개지고, 꿀에 재운 과실이 볕에 윤을 냈다.

부엌 쪽에서 기름 냄새가 밀려왔다가 바람이 바뀌면 장독들 쪽의 짠 냄새로 바뀌었다.

무슨 연회인지 분명 누군가가 말해 주었으나, 말해 준 사람의 얼굴만 옅게 남고 정작 말은 기억나지 않았다.

치마가 연둣빛이었다.

아침에 시녀 둘이 들고 와 펼쳐 보인 것 중 육정이 고른 색.

소매 끝에 은실로 넝쿨을 놓았는데 그 실이 빛을 받으면 물처럼 흘렀다.

머리는 낮게 틀어 백옥 비녀 하나를 질렀고, 귀 뒤로 내려온 잔머리 한 올이 목의 푸른 기 위에 얹혀 있었다.

치맛자락이 움직일 때마다 백단에 매화 향이 얕게 번졌다.

가슴 아래를 두른 치마허리에서 은실 넝쿨이 가는 줄기를 치고 올라, 숨이 들 때마다 잎사귀 한 장이 옅게 부풀었다가 숨이 날 때 가만히 가라앉았다.

상 사이를 지나던 여자들이 정청 앞에서 걸음이 늦어졌다가, 일행이 소매를 당기고 나서야 두어 번 더 돌아보며 지나갔다.

명주는 그것이 제 외모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곱다는 말을 들었으니, 시집온 후에도 온 집안 식구들이 자신의 외모를 아름답다 하였으니, 나리도 내게 아름답다 하였으니.

"부인이십니까."

낯선 여자가 상 너머에서 몸을 기울였다.

명주가 그쪽을 향해 반박자 늦게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이미 웃고 있었다.

"소문이 과하다 했더니 오히려 모자랐습니다.

그늘에서 기른 옥이 이런 빛일까요.

희다는 말만 듣고 왔는데 희기만 한 것이 아니라 푸른 기가 돌고, 눈매가 관자놀이까지 이리 길게 흐르는 줄은 아무도 말해 주지 않던데요."

여자가 제 말에 취해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부채 위로 눈이 명주의 얼굴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명주는 웃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웃으면 웃었다고 할 것 같고 안 웃으면 안 웃었다고 할 것 같았다.

목이 마르다고 느끼고 옆을 돌아보자 가까이 서 있던 삼월이 바로 잔을 들어 왔다.

잔을 입술에 대어 주고 두 모금 넘기자 삼월이 다시 잔을 입술에서 떼었다.

입가에 흐른 것을 단이가 수건으로 눌렀다.

명주는 잔이 어디에 놓이는지 보지 않았다.

볕이 차일 무명 위에서 느리게 끓었다.

기름 냄새와 단내가 섞인 더운 바람이 정청 안까지 늘어지게 드나들었고, 상 사이 어디선가 나른한 웃음소리가 일었다가 잦아들었다.

낮 동안 종 둘이 와서 차일 줄을 두 번 고쳐 맸다.

두 번째에는 상째 반 자를 옮겼다.

해가 마당을 건너가는 동안 명주의 자리에는 그늘이 그대로 있었다.

누가 시킨 일인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손이 등 뒤로 왔다.

육정이었다. 언제 왔는지 명주는 몰랐다.

그의 손이 등 아래쪽, 옷끈 매듭이 있는 자리에 놓였다.

손바닥이 닿은 데서 옷이 얕게 눌리고, 그 아래로 숨이 한 번 들어갔다 나왔다.

손의 온기가 비단 두 겹을 지나 살에 닿기까지, 잠깐이 걸렸다.

"먼 길에 고단하셨겠습니다."

육정이 여자 쪽을 보고 말했다.

"안사람이 사람 많은 데를 오래 못 견딥니다."

"아이고, 그럼 제가 실례를."

"실례랄 것 있습니까.

저기 새 상을 봐 두었으니 그리로 가시지요."

여자가 웃으며 물러갔다.

명주가 고개를 들었다.

육정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썹 사이가 조금 좁아져 있었다.

십 년 동안 그가 무언가를 살필 때 그랬다.

"덥소?"

"아니오."

"목이 마르오?"

"아니오."

"그럼 뭐가 하고 싶소."

명주가 잠시 생각했다.

"들어가고 싶습니다."

육정이 손을 뗐다.

그리고 종을 불렀다.

명주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안채로 걸었다.

지나가는 자리마다 이야기가 끊겼다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이어졌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섬돌 앞에서 신을 벗었다.

삼월이 받아 들었다.

치맛단이 흙에 닿을 뻔했으나 단이가 먼저 걷어 올렸다.

해가 기울고 손님이 다 빠진 뒤에도 명주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마당에서 상 걷는 소리가 났다.

그릇이 포개지고, 차일 줄이 풀리고, 천이 접히는 소리.

소리가 하나씩 줄다가 마지막에는 비질 소리만 남았다.

비질 소리는 오래 갔다.

등이 켜졌다. 행랑 쪽에 둘, 중문에 하나.

중문에서 소리가 났다.

내다보니 육정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반 걸음 떨어져, 아이 하나가 그의 그림자를 밟듯 붙어 왔다.

여자아이였다. 열대여섯쯤.

적삼 어깨가 젖어 있었고 신도 젖어 있었다.

비는 오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신에서 찌걱, 찌걱, 소리가 났다.

물 밟은 신이 마른 흙을 디딜 때 나는 소리.

그 소리가 하나씩 마당을 건너와 마루 앞에서 멎었다.

명주가 마루로 나갔다.

아이가 마당 가운데서 멈췄다.

중문의 등이 아이의 왼쪽에 있어서 얼굴 반이 어두웠다.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흙이 한 줄 묻어 있었다.

왼쪽 뺨, 광대 아래로.

손등으로 닦은 자국.

육정은 명주를 보지 않았다.

등 뒤의 아이도 보지 않았다.

중문과 안채 사이 어디쯤에 시선을 둔 채로 입을 뗐다.

"오늘부터."

"이 아이가 이 집에 있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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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챕터
1화 유월
차일 아래로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그림자가 명주의 무릎을 스쳤다.명주는 정청 가운데 앉아 있었다.아침에 그 자리에 방석이 놓였고 그 뒤로 아무도 방석을 옮기지 않았다.마당에는 차일이 셋 섰다.굵은 기둥에 줄을 매어 넓은 무명천을 하늘처럼 팽팽히 당겨 둔 것이라, 유월 볕이 거기서 한 번 걸러져 마당 절반이 옅은 그늘에 잠겼다.그 그늘마다 상이 들어차고 상 위에 그릇이 놓이고 그릇마다 뚜껑이 덮였다.뚜껑 틈으로 김이 새고, 기름에 지진 것들이 노랗게 포개지고, 꿀에 재운 과실이 볕에 윤을 냈다.부엌 쪽에서 기름 냄새가 밀려왔다가 바람이 바뀌면 장독들 쪽의 짠 냄새로 바뀌었다.무슨 연회인지 분명 누군가가 말해 주었으나, 말해 준 사람의 얼굴만 옅게 남고 정작 말은 기억나지 않았다.치마가 연둣빛이었다.아침에 시녀 둘이 들고 와 펼쳐 보인 것 중 육정이 고른 색.소매 끝에 은실로 넝쿨을 놓았는데 그 실이 빛을 받으면 물처럼 흘렀다.머리는 낮게 틀어 백옥 비녀 하나를 질렀고, 귀 뒤로 내려온 잔머리 한 올이 목의 푸른 기 위에 얹혀 있었다.치맛자락이 움직일 때마다 백단에 매화 향이 얕게 번졌다.가슴 아래를 두른 치마허리에서 은실 넝쿨이 가는 줄기를 치고 올라, 숨이 들 때마다 잎사귀 한 장이 옅게 부풀었다가 숨이 날 때 가만히 가라앉았다.상 사이를 지나던 여자들이 정청 앞에서 걸음이 늦어졌다가, 일행이 소매를 당기고 나서야 두어 번 더 돌아보며 지나갔다.명주는 그것이 제 외모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어릴 때부터 곱다는 말을 들었으니, 시집온 후에도 온 집안 식구들이 자신의 외모를 아름답다 하였으니, 나리도 내게 아름답다 하였으니."부인이십니까."낯선 여자가 상 너머에서 몸을 기울였다.명주가 그쪽을 향해 반박자 늦게 고개를 돌렸다.여자는 이미 웃고 있었다."소문이 과하다 했더니 오히려 모자랐습니다.그늘에서 기른 옥이 이런 빛일까요.희다는 말만 듣고 왔는데 희기만 한 것이 아니라 푸른 기가 돌고, 눈매가 관자놀이까지 이리 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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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향
아이의 이름은 '서란'이라 했다.명주는 그 이름을 세 번이나 되물었다.처음에는 못 알아들어서,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정확히 기억하고 싶어 재차 물었다."서란아."명주가 아주 애처롭고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서란은 다소 고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예, 부인.""손을 이리 다오."서란이 주저하며 두 손을 내밀었다.열 손가락 중 여섯의 손끝이 갈라져 있었고, 그 자리에 피가 말라붙어 검게 남아 있었다.겨울에 찬물을 많이 만지며 제때 돌보아지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 흔적들.그 흉터들을 보며 명주는 얼른 소매 안에서 작은 합을 꺼냈다."이거 궁에서 쓰는 연고라고, 여인은 손이 고와야 해.이걸 바르면 금방 나을 거다.""이런 귀한 것을.""나는 손이 트지 않는데, 나리께서 궁에서 하사받으신 물건을 나에게 주셨다."서란이 합을 받으며 그녀의 드러난 손을 바라보았다.명주의 손은 갓 깎은 백옥을 물에 헹궈 낸 듯한 손이었다.손가락 마디에는 주름 한 겹 잡히지 않았고 손등에는 힘줄 한 올 서지 않았는데, 손톱만이 안에서부터 배어 나온 것처럼 옅은 분홍으로 물들어 있었다.쥐어 본 적도 짜 본 적도 없는, 평생 찬물 한 번 만져 본 적 없는 손.합이 건너올 때 손끝이 잠깐 스쳤다.눈으로 볼 때보다 서늘하고, 물속에서 갓 건진 것처럼 매끄러운 살이었다.서란은 제 갈라진 손끝을 저도 모르게 오므렸다.서란의 시선이 명주의 손 위에 오래 얹혀 있었다.명주는 서란의 시선 끝에 제 손이 달린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다만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른다고 생각했다.그 모습이 꽤나 귀엽게 느껴져 서란에게 함께 밥을 먹자 청했다.밥상이 들어왔다.서란은 숟가락 한 번 제 손을 거치지 않고 시녀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서 앉아 있는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씻은 배꽃처럼 맑은 낯에, 물기 어린 눈은 상 위 어디에도 닿지 않는 얼굴.소문으로만 듣던 절세가인이 눈앞에서 밥 한 술 뜨는 일조차 남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수저가 물러날 때마다 아랫입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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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믐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는 사이 서란은 명주에게서 글을 배웠다.처음에는 주먹으로 붓을 쥐던 아이.명주가 그 손등을 위에서 잡아 쥐는 법부터 고쳐 주었고, 서란은 한 번 배운 것을 두 번 묻지 않는 영특한 아이였다.서란은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자 편지를 쓸 수 있었고 이듬해 봄에는 명주가 쓴 것과 나란히 놓으면 어느 것이 명주의 글씨인지 얼른 가려지지 않았다.명주는 그것을 보고 기뻐했다.유월 그믐이었다.그믐이라 달이 없는 밤.별빛만이 마당의 윤곽을 희미하게 잡아 주었다.그날 밤 명주는 자리에 누워 오래 뒤척였다.낮에 잠깐 잠이 들었던 탓인 것도 같았고 아침부터 무언가 어긋난 것 같기도 했다.오늘 아침에 육정이 방에 들르지 않았다.그녀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평소라면 주인이 절대 깨어 있을 리 없는 시간이기에 시녀들도 깊은 단잠에 빠져 있는 그런 시각이었다.조용히 마루로 나가자 육정의 서재에 불이 켜져 있었다.명주는 맨발로 마당을 가로질러 서재 쪽으로 향했다.밟는 자리마다 흙이 서늘하게 발바닥을 간질였다.중간에 발바닥이 무언가에 찔리고 나서야 신을 신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을 때 서재 안에서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사람이 앓는 것 같은 짙은 숨소리가 들려왔다.사르륵, 비단이 마룻바닥을 쓸었다.그 위로 삐걱, 삐걱, 나무가 무게를 받는 소리가 일정한 사이를 두고 되풀이되었다.서재의 문틈으로 새어 나온 촛불이 가늘게 흩어졌다가 모아졌다.문틈으로 본 광경은 명주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바닥에 떨어진 연둣빛 옷자락.그것은 작년 유월에 육정이 골라 준, 소매 끝에 은실이 수놓아져 있는 명주의 연회복이었다.구겨진 비단 위에 사내의 검은 겉옷이 아무렇게나 겹쳐져, 두 벌의 옷이 바닥에서 먼저 몸을 섞고 있었다.시선을 조금 위로 들자, 촛불 하나가 만드는 좁은 빛 속에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땀에 젖은 살갗이 불빛을 받아 물에 헹군 도자기처럼 번들거렸다.여인의 풀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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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첩
사흘 뒤 아침이었다.마당에는 아직 차일 자국이 남아 있었다.기둥을 박았던 자리 넷이 젖은 채 검었다.온어멈이 향낭을 갈았다.명주의 소매 안에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주머니가 들어 있었고, 온어멈이 아침마다 헌 것을 꺼내고 새것을 넣었다.십 년째 하는 일이라 손이 빨랐다.명주는 제 소매에 남의 손이 들어왔다 나가는 것을 잘 느끼지 못했다."오늘 것은 매화를 조금 더 넣었습니다."명주가 고개를 끄덕였다.명주의 코에는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나지 않은 지 오래되어, 향이란 남에게만 나는 것인 줄로 살았다.온어멈은 헌 것을 들고 나가지 않았다.장 아래 서랍을 열고 넣는 눈치였는데, 명주는 돌아보지 않아서 소리로만 알았다.몸단장을 끝낸 삼월과 단이, 버들이 물러가고 나자 육정이 문가에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명주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는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웃는 낯으로 그에게 돌아섰다."나리…."육정은 눈 밑이 검었고 옷깃이 한쪽만 접혀 있었다.이틀쯤 자란 수염 아래로 죄책감 같은 것이 스쳤으나, 명주는 사흘 전 밤의 일도, 그 무엇도 마음에 길게 남지 못했다.다만 그가 아침에 다시 제 처소에 들른 것이 기뻤다.가만히 그의 품에 기대자 먹 냄새가 흘러들어왔다.그의 접힌 깃을 풀어 주려 손을 올리다가 멈추었다.남편의 옷에 손을 대 본 적이 없었다.멈춘 손을 가만히 감싸 쥐고 육정이 입을 떼었다."부인."맑은 명주의 두 눈이 육정을 올려다보자 육정은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내가…."그의 손이 옷자락 아래에서 한 번 오므라들었다가 펴졌다.십 년을 보아 온 그의 습관.명주에게 해야 할 말을 숨기려 할 때마다 그랬다.다만 무슨 말을 숨기는지 단 한 번도 명주는 알지 못했다."뒤채 아이를 이 집에 둘 것이오."서란이라 다정히 부르지 않고 뒤채 아이라고 설명하는 육정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명주가 아끼고 분명 그도 그 아이를…, 사흘 전 밤에….명주는 그 기억이 조금 늦게 떠올랐다."…첩으로 들일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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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안태
아침마다 손이 여섯 개 붙었다.머리를 빗는 손, 옷끈을 잡는 손, 버선을 신기는 손.명주의 단장을 돕는 손길이 계속되는 동안 그녀는 창호지 얼룩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재작년 장마에 생긴 것이라고 누가 그랬고, 그 뒤로 단장을 할 때 늘 그 얼룩에 시선을 두었다.빗이 정수리에서 허리께까지 물 흐르듯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내려가기를 되풀이했다.늘 스물여덟 번이었다.검은 머리카락이 빗살을 따라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누웠고, 아침 빛이 들 때마다 그 위로 윤이 물결처럼 흘렀다.결이 어긋난 데가 한 올도 없었다.옷끈을 매는 손이 가슴 앞에서 잠깐 분주하다가 물러났다.매듭은 늘 왼쪽으로 조금 기울었다.매는 사람의 손버릇이었으나, 제 옷끈을 매어 본 적 없는 명주는 그 기울기가 남의 것인 줄도 몰랐다."다 되셨습니다."명주가 일어서자 낮게 틀어 올린 머리 아래로 흰 목덜미가 드러났다.그늘에 오래 둔 백자처럼 푸른 기가 옅게 도는 살빛이라, 빗을 들고 물러서던 삼월이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귀 뒤로 흘러내린 잔머리 한 올을 괜히 오래 매만지다 내려왔다.뒤채에서 사람이 왔다."부인. 아기씨가 드셨다 합니다.""아기씨.""서란 아기씨께서요.두 달이라 하옵니다."명주가 기다렸다. 아무도 더 말하지 않았다."어디 아픈 게냐.""아니오, 부인. 경사이옵니다.""경사."명주가 손을 폈다가 오므렸다."그럼 무얼 해 주어야 하느냐."방 안의 사람들이 무심코 서로를 마주 보았다가 이내 다들 바닥으로 눈을 내렸다.웃음을 누르느라 입가에 힘이 들어간 이가 둘 있었다.곁에 섰던 온어멈이 나섰다."안태약이나 한 제 지어 보내시지요.정실 이름으로 내리시면 그보다 좋은 낯이 없습니다."명주는 안태가 무엇인지 몰랐으나 고개를 끄덕였다.무얼 해 주어야 하는지 처음으로 누가 일러 준 참이었다.약방은 뒤뜰 끝에 있었다.명주가 그 문을 연 것은 시집온 뒤 처음이었다.안쪽 공기가 바깥보다 서늘했다.마른 냄새가 났다.나무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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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이름
가을에 비가 많았다.시월 초이레, 낮부터 오던 비가 저녁에 가늘어졌다가 밤에 그쳤고, 처마 끝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만 아직 남아 있었다.그 밤, 뒤채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명주가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었다.시녀들이 침상으로 달려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였다.밖은 사람이 뛰는 소리, 누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명주가 조심히 마루로 나가자 물을 나르던 하인 몇이 명주를 지나쳐 뒤채로 달려가고 있었다."부인은 들어가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시녀가 명주의 팔을 잡아끌었다."무슨 일이 있느냐?""들어가 계십시오, 부인."명주가 팔을 흔들어 뿌리치자 시녀가 놀라 손을 놓치고 말았다.십 년 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명주는 맨발인 채로 뒤채를 향해 걸었다.등이 지나갈 때마다 젖은 마당이 번들거렸고, 발가락 사이로 흙이 들어왔다.차가운 것이 먼저 오고 미끄러운 것이 나중에 왔다.문 앞에 선 사람들이 명주를 보고 고개를 숙이며 길을 텄다.방 안에는 의원 둘, 여자 하인 여럿이 분주했다. 더운 냄새. 비릿한 쇠 냄새.방 안에 서란이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이불 아래가 온통 붉었다."피… 피가…."명주는 서란이 걱정되어 침상으로 몇 걸음 더 다가갔다.그때 서란이 눈을 번쩍 뜨며 그녀를 보고 울기 시작했다."언니."명주가 붉은 이불 앞에 무릎을 꿇고 서란의 손을 찾았다.땀에 젖어 머리칼이 이마에 가 붙어 있는 창백한 서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명주를 향해 물었다."언니가… 왜 그러셨어요."서란의 손을 찾던 명주의 고운 손이 멈춰 섰다."응? 내가 무얼….""약을…."명주의 소매를 움켜쥐는 서란의 손이 이제 갈라져 있지 않고 매끈한 분홍빛이 돌았다."제가 언니를 얼마나 믿었는데…."방 뒤쪽에서 누군가 흐느꼈다.명주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 채로 멍하니 서란을 바라보았다.그때 육정이 다급하게 문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명주도 서란도 바라보지 않았다.그저 하인에게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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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별채
별채는 마당 서쪽 끝에 있었다.원래 곳간으로 쓰던 자리에 방을 들인 것이라 창이 하나였고 그 창이 북쪽을 봤다.해가 들지 않아 낮에도 벽이 찼다.벽 아래쪽에 가마니 자국이 남아 있었다.무언가를 오래 쌓아 두었던 자리만 색이 옅었다.방을 들이면서 종이를 새로 발랐는데 그 자리만 풀이 덜 먹어 귀가 들떠 있었다.바닥은 아침에 데워지지 않았다.화덕이 멀어서 불기가 오다가 마는 방이었다.밤이면 벽지의 들뜬 귀가 제 숨에도 바스락거렸고, 이불 밖으로 나온 코끝이 시렸다.쪽창으로 담이 걸쳐 보였고 담 위로 하늘이 한 뼘 있었다.아침에는 그 한 뼘이 희고 저녁에는 붉었다.붉은색이 사라지고 나면 방 안의 하루는 그것으로 끝이었다.그 방으로 명주의 세간살이가 모두 옮겨졌다.옮기는 데 꼬박 반나절이 걸려서 장이 셋, 궤가 넷, 옷이 스무 벌 남짓 넘어왔으나 별채로 장은 들이지 못해 되돌아갔다.되돌아가는 장이 마당을 건널 때마다 안에서 무엇인가 데구루루 구르는 소리가 났다.명주는 단지 자리가 옮겨진 것 외에는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시녀가 연둣빛 치마를 가져다 궤짝 위에 올려 두었고 명주는 그 옷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란을 떠올렸다.별채에는 시녀가 한 명 붙었다.이름을 세 번이나 물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아 명주는 조금 슬펐다.아이는 물그릇이며 밥을 문지방 안에 내려놓고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처음 며칠은 그것이 곤욕이었으나 익숙해지자 아침에 몸을 일으키면 먼저 문지방으로 물을 마시러 갔다.밤새 식은 물은 이가 시리게 찼고, 명주는 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천천히 마셨다.생선을 발라 주는 이도 없었고 머리를 빗겨 주는 이도 없었다.십 년 동안 복기하듯 기억해 두었던 그녀의 일상이 뒤바뀐 것이 명주는 그저 어려웠다.명주는 사흘째에 젓가락으로 생선을 헤집어 보았다.하얀 살 속에서 잔가시가 은침처럼 일어섰다.가시를 삼켰고, 목에 걸린 것은 밤에야 내려갔다.그 뒤로는 등뼈를 먼저 걷어 내는 법을 혼자 익혔다.탕이 뜨거우면 식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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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심가
동짓달에 사람이 왔다.별채 문밖에서 시녀가 누군가와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았고, 명주가 가만히 창에 귀를 댔다."…심 대인이 하옥되셨다는데.""쉿.""세곡이라던가. 삼 년 치가 비었다고.""심가가 저리 되면 이 댁 뱃길은 어찌 된대.""그걸 우리가 왜.""쉿, 안에서 듣는다."명주가 문을 열었다.시녀가 놀라 돌아섰다."우리 아버지가.""부인.""우리 아버지가 어찌 되었다고."시녀는 대답하지 않고 물러갔다.명주는 문 안에 가만히 서 있었다.심가, 하옥, 세곡.들은 말들은 서로 이어지지 않은 채 흩어지고, 아버지가 옥에 있다는 것만 남았다.옥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명주는 알 길이 없었지만 아버지에게 나쁜 일이 생긴 것임엔 틀림이 없었다.갑자기 마음이 까닭 모르게 조급해졌다.명주는 비뚤어진 옷끈 채로 안채로 달려 나갔다.별채에서 안채까지는 마당을 두 번 건너야 했다.바람이 담을 훌쩍 넘어와 마당에서 휘 돌았고, 서리 앉은 흙이 내딛는 자리마다 신 밑에서 버석버석 부서졌다.명주는 안채로 가는 그 길을 쭉 따라 허둥지둥 걸으며 아버지. 하옥.두 단어를 입으로 되뇌었다.지금 육정에게 고해야만 아버지가 괜찮을 것 같았다.안채에서 서재로 꺾어 드는 길목에서, 서재를 지키던 종이 명주를 가로막고 섰다."나리께서 안 계십니다."명주는 그제야 육정을 찾아서 아비의 일을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기다리겠다."종은 고집을 부리는 옛 안채의 주인을 향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땀만 뻘뻘 흘렸다.명주는 다시 한 번 고집스럽게 말을 이었다."나리를 여기에서 기다리겠다."명주는 서재 앞 섬돌 위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섬돌은 얼음장처럼 찼고 그 찬 기운이 치마를 지나 스멀스멀 허리께까지 올라오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해가 뉘엿뉘엿 기울었다.오가던 계집종들이 명주를 흘끔 돌아봤다가는 이내 눈을 돌렸다.추위에 핏기가 가신 낯이 저무는 빛 속에서 서리를 맞은 배꽃처럼 희게 피어났고 젖은 속눈썹이 깜빡일 때마다 남은 빛이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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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초순
별채 문밖에서 웅성웅성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서재 앞에서 밤을 새워 육정을 만나고 온 지 사흘째 되던 아침.본디 명주의 머릿결은 타고나기를 물기를 머금은 탄력 있는 까만 머릿결이었다.제법 동경을 바라보며 스스로 머리를 빗어 내리는 그녀의 손이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명주가 문을 열자 찬 아침 빛이 확 밀려들었다.마당에 손님이 와 있었다.심가에서 온 애어멈이었다.그녀가 어릴 적, 작고 여린 명주를 늘 업어 재워 주던 사람.등에 업히면 마른 쑥 냄새가 나던 사람이었다.그 등이 이제 굽어져 더는 아이를 업을 수 없겠다고 명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어멈의 발이 온통 흙투성이에 한쪽 신끈이 끊어져 새끼줄로 묶여 있는 것은 명주에게는 보이지 않았다.명주의 까맣고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보자 어멈은 가슴이 저렸다."아씨!"어멈은 그만 무릎이 꺾여 흙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대인께서….""아버지가?"명주가 버선발로 문지방을 넘어 어멈 앞에 서자 섬돌의 찬 기운이 발바닥에 쨍하게 올라왔다."대인께서 어제 새벽에 가셨습니다…. 흑… 끄윽….""어디로?"어멈은 그 물음에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어디로 가셨느냐?"끅끅 삼키다 터진 어멈의 울음이 이른 아침 별채를 지나 온 마당에 낮게 퍼져 나갔다.행랑 쪽에서 문이 하나 열렸다가 이내 다시 닫혔다.명주는 어멈이 왜 우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어멈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빗어 내리다 만 까만 머리카락이 아침 바람에 물결치며 흘러내렸다."나리께서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셨다."명주가 밝은 얼굴로 어멈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약을… 누가 옥에 약을 넣어 드렸다 하옵니다."어멈이 고개를 들어 명주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명주는 고개를 머리칼이 흘러내린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약을?"서리 내린 아침 빛 속에 선 아씨는 여전히 고왔고 여전히 맑았다.아비가 죽었다는 말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이 곱고 맑음이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어멈은 알고 있었다.어멈은 명주를 업어 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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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지워지는두자
정월에 족보를 손보는 자리에 명주가 불려 나갔다.장독들 옆방에서 정청까지 가는 동안 시녀가 붙지 않았다.길은 물을 것도 없었다. 십 년을 산 집.정청에 병풍이 둘러쳐지고 화로가 넷 놓였다.화로는 전부 어른들 쪽에 있어 명주가 선 가운데 자리에는 볕도 불기도 오지 않았다.육가 사람이 스물 남짓 모였고 명주는 가운데 섰다.누가 긴 글을 읽었으나 명주는 웅얼거리는 소리로만 들렸다.종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명주의 이름을 짚으며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심씨.그 두 자가 나올 때마다 어른들 쪽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났다.명주는 절반쯤에서 듣기를 그만두었다.칠거라는 말이 나왔다.일곱 가지를 버린다는 것인지, 일곱 번을 버린다는 것인지 명주는 한참을 고민했다.무자라는 말도 나왔는데 그것은 알아들었다.읽기가 끝나자 문중 어른 하나가 말했다."할 말이 있느냐?"스물 남짓한 얼굴이 명주를 빤히 바라보았다."저는."명주가 입을 떼자 모두 숨을 죽였다."저는… 무엇을 잘못했습니까?"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던 어른이 이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명주의 이름에 힘을 주어 읽었던 사람이 이내 상 위에 펼친 족보를 쭉 훑다가 어느 부분에서 붓을 움직여 두 번 한 일 자를 그렸다.가로로 한 번, 또 한 번.먹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문진을 치우고 책을 덮자 또 한 어른이 말했다."이제 나가 보거라."명주가 단정히 절을 올렸으나 절을 받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날 밤 명주는 별채에서 또다시 처소를 옮겼다.뒤뜰 끝, 장독들 옆에 붙은 방.원래 장 담그는 사람이 겨울에 자던 자리였을 그곳.문이 낮아서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었다.방에서는 시고 짠 장 냄새가 났다.천장이 낮아 일어서면 작은 명주의 키조차 정수리가 닿았다.명주가 그 안에 들어가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바닥에는 자리 한 장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이불 같은 것이 널브러져 있었다.쉰내가 올라왔고 이불귀는 해져서 솜이 비쳤다.명주는 그 이불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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