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하지율은 고지후를 맞이하기가 무섭게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고지후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이야기가 흘러 하지율이 연상진의 밑바닥까지 털어버릴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말하자 그제야 고지후는 낯선 기시감을 느낀 듯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이 계획, 정기석 씨가 짜준 거야?”하지율 같은 비즈니스 입문자의 머리에서 나올 법한 전략이 아니었다.설령 그녀가 꾸준히 경영 지식을 쌓아왔다 한들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거친 풍파를 겪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발상이었다. 이 수를 던진 사람은 분명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고수일 터. 강병주일 리는 없었다. 그 역시 세상 물정 모르는 신출내기에 불과하니까. 함우민도 제외였다. 그가 이토록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위인이었다면 손형원의 덫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지도 않았을 테니. 그러니 남은 가능성은 정기석뿐이었다.하지만 고지후는 직감적으로 정기석도 아닐 거라 확신했다. 정기석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는 태생이 정파에 가까운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수단을 가리지 않는 편이라고 해도 연상진의 뒤통수를 쳐서 밑바닥까지 긁어내겠다는 건 단순히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니었다. 반드시 어둡고 더러운 수법이 동원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정기석 씨는 아니야.”하지율은 짧게 대답할 뿐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고지후 역시 그녀가 입을 닫자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저 단종건이 돕고 있거나, 강병주가 제 아버지에게 부탁해 짜낸 묘책일 거라 짐작할 뿐이었다.“하지율,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일러둘 게 있어. 연상진을 네가 판 함정으로 끌어들이려면 너 역시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만 해.”고지후는 이 계획의 핵심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네가 놈의 계략에 완전히 말려들었다고 믿게 만들어야 다음 수를 끌어낼 수 있다는 뜻이야. 다시 말해 연상진이 마음 놓고 너를 공격하게끔 판을 깔아줘야 한다는 거지. 만약 연상진이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거나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 계획은 시작도 못 해보고 무너질 거야
연경 그룹이라는 거대한 상업 제국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하지율 역시 연경의 일원이었기에 그룹 본체가 흔들리는 것은 그녀에게도 살을 깎아 먹는 손해일 뿐이었다.하지만 연상진이 개인적으로 거느린 계열사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연씨 가문 삼 형제는 그룹 내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각자 여러 개의 기업을 독자적으로 운영해 왔다. 이는 사업 다각화를 꾀하는 동시에 그룹 본체의 리스크를 분산하려는 전략이었다.당연히 이 회사들은 그들의 사유 재산으로 분류되어 그룹 전체의 수익과는 무관했다. 현재 하지율과 연정미가 맡고 있는 회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를 번듯한 상장사로 키워 내느냐, 아니면 파산의 구렁텅이로 내모느냐는 전적으로 본인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세 형제가 재계에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이유도 직접 경영한 회사들을 모두 상장시키며 자신들이 단순한 재벌 2세가 아님을 실력으로 증명해 왔기 때문이었다.하지율은 주용화의 제안이 꽤 매력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남자의 날카롭고 매끈한 옆얼굴을 바라보았다.“화야 씨, 무슨 좋은 수라도 생각난 거예요?”주용화는 시선을 정면에 둔 채 무심히 대답했다.“괜찮은 계획이 하나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육진 그룹에 대체 어떤 문제가 생긴 건지 정확히 파악해야 그에 맞는 처방을 내릴 수 있겠죠.”“그럼 바로 표서준 씨에게 조사를 시킬게요.”고개를 끄덕인 하지율이 휴대폰을 꺼내 들자 주용화가 그녀를 만류했다.“표서준 씨에게 맡기느니 차라리 고지후 씨에게 묻는 게 빠를 겁니다. 함우민 씨와는 워낙 막역한 사이니 육진 그룹에 사달이 났다면 분명 그가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섰을 테니까요. 고지후 씨만큼 육진의 내부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도 없을 테죠.”육진 그룹이 위기에 처한 마당에 해묵은 개인적 감정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하지율은 주용화의 제안을 곧장 받아들였다.“좋아요. 돌아가서 바로 연락해 볼게요.”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하지율이 주용화를
주용화가 의미심장하게 대꾸했다.“참 기막힌 타이밍이군요.”하지율은 더 입을 열지 않은 채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침묵이 이어지던 그때 주용화가 불쑥 말을 건넸다.“함우민 씨가 R이 맞다면 지금 그쪽 사정이 저 지경인데 도와주지 않기도 어렵겠어요.”하지율이 고개를 돌려 주용화를 바라보았다.“화야 씨는 정말 함우민 씨가 R이라고 생각하세요?”“글쎄요, 저야 알 수 없죠. 하지만 지율 씨가 대놓고 물었는데도 부정하지 않았다면 그건 시인한 것과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왜 굳이 오해를 사게 입을 닫았겠어요? 게다가 비서와 비서실장까지 나서서 그 난리를 치는 걸 보면 함우민 씨가 아니라고 한들 그들이 당신을 가만두겠습니까? 당신이 함우민 씨의 돈을 쓴 것도 아닌데 말이죠.”남자의 말에도 하지율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100조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고 이런 거액의 돈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그들이 모를 리도 없었으니까.하지율의 속내를 읽어낸 주용화가 말을 덧붙였다.“R의 정체가 누구든 간에 함우민 씨가 하지율 씨를 도우려 했던 건 사실입니다. 비서나 조력자들이 나중에라도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당신을 비난하지 못하게 하려면 빚은 하루빨리 청산하는 게 좋습니다. 연경 그룹에 입성하면 신경 쓸 일이 산더미일 텐데 육진 그룹이 저 지경이면 지율 씨가 온전히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겠습니까?”주용화의 말에 틀린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함우민이 R이든 아니든 그가 자신 때문에 손형원의 타깃이 되었다면 모른 척 등 돌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잠시 고민하던 하지율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원래 계획대로 연경 그룹의 초기 지분 1%를 매각해서 자금을 마련할 생각이에요. 연씨 가문 사람들이 훼방을 놓긴 하겠지만 며칠 시간이나 끌 뿐이지 나를 완전히 막아서지는 못할 거예요.”연경 그룹 초기 지분은 연씨 가문이 사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다고 해서 포기할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동안 투자자들이 연씨 가문의 눈치를 본 건 그들의 권력이 무서워서라기보다
손형서에게 손화 그룹의 기밀문서를 훔치게 하여 손형원에게 복수하려 했던 일은 함우민의 독단적인 행동이었기에 회사 내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은 비밀이었다.그렇기에 일이 틀어진 지금 곁에 있는 비서와 보좌진들은 그저 자금줄에 문제가 생겨 위기가 닥친 줄로만 알고 있었다.실상은 그가 손형원이 파놓은 덫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이었음에도 말이다. 양재혁 역시 육진 그룹이 하지율 때문에 휘말려 고초를 겪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함우민은 아니라고 부정하려 했으나 막상 입술을 떼려니 묘한 욕심이 앞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만약... 하지율이 육진 그룹의 위기가 자기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면 나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까? 그럼 나를 더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지 않을까?’혹시라도 하지율이 그 100조가 함우민이 육진 그룹의 주식까지 팔아가며 마련한 돈이라 여긴다면 앞으로 그가 어떤 요구를 하든 거절하지 못할 터였다.물론 함우민도 섣불리 인정했다가는 나중에 거짓이 탄로 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만약 진짜 R이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공들인 탑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찰나의 고민 끝에 함우민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괜찮아요, 지율 씨. 육진 그룹은 이 정도 시련쯤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요.”무거운 마음을 안고 함우민의 집무실을 나선 하지율은 도시락통을 들고 서 있던 연유나와 마주쳤다.연유나는 하지율을 발견하자마자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비아냥거렸다.“박원 그룹의 주식을 인수할 능력도 없으면서 남에게 뒤처리를 맡기다니, 참 대단하시네요.”연유나의 목소리엔 날 선 가시가 돋쳐 있었다.“당신만 아니었어도 손형원이 육진 그룹을 건드릴 일은 없었어요! 우리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위기를 겪을 이유도 없었다고요! 하지율 씨가 손형원한테 무슨 원한을 샀든 그건 당신 사정이잖아요! 그런데 왜 아무 상관 없는 육진 그룹까지 이 진흙탕에 끌어들이는 거죠? 우리 대표님은 대체 무슨 죄가
마음 한구석에 피어오른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 하지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안내해 주세요. 직접 가서 봐야겠어요.”양재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감사합니다, 하 대표님.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집무실 안, 함우민은 피로로 가득한 미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탓에 잘생긴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권태로움과 지친 기색이 서려 있었다.그때, 비서 연유나가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대표님, 요청하신 자료입니다.”“음.”나직하게 대답하며 서류를 받아 든 함우민은 바로 자료를 살피려 했다.“대표님.”연유나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참지 못하고 말을 건넸다.“잠시라도 쉬시는 게 어떨까요.”하지만 돌아온 함우민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필요 없으니 이만 나가봐요.”“대표님...”“나가라고 했습니다.”함우민의 음성이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연유나는 눈동자에 어린 안쓰러움과 애틋한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방을 나섰다.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함우민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도 들지 않고 내뱉었다.“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별일 아니라면 방해하지 말고 나가세요.”“...”그러나 집무실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뿐, 문 앞에 선 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불쾌한 기색으로 고개를 든 함우민은 눈앞의 상대를 확인한 순간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렸다.“하지율 씨? 지율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그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무언가 짐작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설마 양재혁이 지율 씨한테 뭐라고 한 거예요?”하지율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함우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함우민 씨가 최근 쉬지도 않고 식사도 거른다던데요.”그 말에 함우민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지율 씨도 바쁜 사람인데 재혁이 그놈이 쓸데없는 소리를...”하지율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손형원이 왜 갑자기 함우민 씨를 공격하는 거예
‘손화 그룹이 곧 손형원이라면...’하지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손화 그룹이 왜 갑자기 육진 그룹을 공격한 거죠?”하지율은 손형원이 단순히 함우민이 자신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육진 그룹을 공격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손형원이 잔인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지언정 결코 무모하거나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그가 자신을 혐오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아무런 명분 없이 함우민을 적대시할 이유는 없었다. 더욱이 함우민보다 고지후나 정기석이 자신을 도운 적이 훨씬 많았으니 손형원이 고지후를 제쳐두고 함우민을 먼저 공격할 리는 만무했다.‘설마... 고지후 쪽에도 무슨 일이 생긴 건가?’불안한 예감이 스친 하지율은 곧장 내선 전화를 들어 올렸다.“서준 씨, 지금 당장 최근 한 달간의 주요 경제 뉴스들을 정리해서 제게 가져다줘요.”표서준은 십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정리된 자료를 들고 나타났다.유능한 비서답게 그가 갈무리한 정보들은 핵심을 찌르고 있어 한눈에 파악하기 쉬웠다.하지율은 표서준이 연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그의 업무 능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표서준이 가져온 자료를 훑어 내려가던 하지율의 시선이 멈췄다. 육진 그룹의 경영 판단 착오에 관한 기사였다.‘손형원은 이 실책을 빌미 삼아 육진 그룹을 몰아붙이고 있던 거였어!’다행히 고성 그룹과 유심 그룹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주식 시장의 흐름도 평온했다.혼란의 중심에 선 곳은 육진 그룹뿐이었다.그때, 양재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하 대표님, 제발 저희 대표님 좀 말려 주세요! 최근 한 달 동안 매일 서너 시간밖에 못 주무시고 끼니도 거르세요... 이러다가 몸이 버텨내지 못할 겁니다! 하 대표님만 아니었다면 저희 대표님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텐데...”“...”“!”순간 말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양재혁의 목소리가 급히 잦아들었다.하지율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죠?”“그,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