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레이싱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면서 성휘재랑 연정미한테 덤빈 거라면 그건 자신감이 넘치는 게 아니라 그냥 생각이 없는 거지.”“잠깐만. 아까 그 여자는 완전히 초보라며? 그런데 보니 전혀 아닌 것 같은데?”“정말 레이싱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이면 출발에서 벌어진 차이만으로도 진작 멀리 뒤처져야 했잖아.”“그런데 불리한 차를 골랐는데도 안 떨어지고 계속 앞차를 따라붙고 있어. 저 정도 실력은 단지 운이 좋다고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일반 관중들은 자세한 사정을 몰라 그 차이를 알아채지 못했다.하지만 프로 선수들의 눈은 예리했다.고작 출발 장면만 보고도 하지율이 평범한 실력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그때 누군가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설마... 진짜 고수인가?”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소리쳤다.“미쳤어. 코너에서 추월했어! 그것도 한꺼번에 두 대나...”“코너 진입 각도랑 빠져나오는 움직임 봐. 저게 어디 초보야?”“쟤가 진짜 너희 말대로 신인이면 내가 손을 지지겠어!”처음에 하지율을 구경거리 삼아 웃고 있던 사람들도 그녀의 차가 첫 번째 코너부터 두 대를 추월하는 모습을 보자 하나같이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레이싱에서 추월은 운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뒤차들이 한꺼번에 사고를 내는 바람에 운 좋게 1위를 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하지만 운이 좋아서 다른 차를 추월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었다.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은 차를 한 번도 제대로 몰아보지 않은 입만 산 사람이거나 아니면 판단력이 없는 사람이었다.조금 전까지 연정미와 성휘재의 이름을 외치며 응원하던 관중들도 일제히 멈칫했다.아무래도 경기가 예상했던 방향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그 시각, 선두권에서 달리고 있던 성휘재 역시 뒤쪽 상황을 확인하고 순간 멈칫했다.연정미에게서 주용화가 만만치 않은 상대일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다.그래도 연정미가 주용화에게 마음이 있는 만큼 주용화에게 1위를 양보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다고
그때 현장에서는 순식간에 엄청난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성휘재! 성휘재! 성휘재!”“연정미! 연정미! 연정미!”성휘재와 연정미는 역시 이곳의 스타 선수답게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했다.사람들은 모두 두 사람의 이름만 외쳤고 다른 목소리는 전부 묻혔다.정식 경기였다면 이렇게 한쪽으로 쏠린 응원은 다른 선수들의 멘탈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하지율은 차 안에 앉아 있었는데도 바깥의 함성이 또렷하게 들릴 정도였다.온갖 스캔들에 휘말린 연정미가 여전히 이렇게 높은 지지를 받는 걸 보면 단순히 허울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연정미는 어릴 때부터 재벌 가문에서 자라며 수많은 자원을 누린 사람이었다.정말 아무 능력도 없었다면 어떻게 최고 명문 가문의 아가씨라는 명성을 얻었겠는가.하지만 하지율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담담한 얼굴로 헬멧을 단단히 착용했다.이번 경기에서 하지율에게 가장 중요한 상대는 주용화였다.트랙 위에는 10대의 레이싱카가 각자의 출발선에 가지런히 멈춰 있었다.하지율과 주용화, 성휘재, 연정미 외에도 여섯 명의 참가자가 더 있었다.“탕!”출발 신호와 함께 10대의 차가 일제히 튀어 나갔다.하지율의 차는 시작부터 조금 뒤처졌다.하지율이 고른 차량은 코너링 성능은 뛰어났지만 순간 가속력은 다소 떨어지는 모델이었다.차를 선택하기 전에 하지율은 외부 트랙의 지도를 미리 확인해 두었다.실제로 성휘재가 말했던 대로 코너가 많았고 고저 차도 컸다.나무와 각종 식물이 시야를 가리는 구간도 적지 않았다.이런 코스일수록 선수의 기술뿐 아니라 계산 능력과 판단력이 중요했다.새로 합류한 여섯 명의 참가자도 경기의 난도와 변수를 크게 높였다.선수마다 주행 스타일과 강점이 달랐다.누구를 어느 구간에서 추월하고 어디서부터 격차를 벌릴지까지 전부 계산해야 했다.레이싱 같은 경기에서는 몇 초는커녕 0.1초 차이만으로도 순위가 크게 갈릴 수 있었다.어떤 경기는 마지막 결과를 0.001초 단위까지 따져야 할 정도였다.하지율
하지율에게는 주용화를 이기면 그야말로 남는 장사였고 설령 져도 손해 볼 건 없었다.최악의 경우라고 해 봐야 지금 상황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뿐이었다.게다가 이런 경기는 실력만으로 승부가 결정되는 것도 아니었고 머리와 운도 절반 가까이 차지했다.레이싱이라는 종목은 지형을 읽을 줄 모르고 머리를 쓸 줄 모르면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다만... 머리싸움이라면 내가 화야 씨에게 더 불리한 거 아닌가?’연정미는 하지율과 주용화를 넓은 주차장으로 데려갔다.그곳에는 성능 좋은 레이싱카들이 여러 대 세워져 있었다.연정미는 차마다 어떤 장점이 있는지 자세히 설명하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또 한 번 드러냈다.그러자 주용화가 웃으며 손뼉을 쳤다.“연정미 씨는 정말 대단하시네요. 자동차 영업사원보다 차를 더 잘 아는 것 같습니다.”그 말에 연정미의 미소가 몇 초간 굳었다.‘이게... 칭찬이... 맞나? 왜 묘하게 이상하지?’두 사람이 차를 고르고 나자 사장이 다가왔다.사장은 먼저 호탕하게 말했다.“여기 있는 차들은 마음대로 골라 타셔도 됩니다. 망가지든 폐차가 되든 전부 제가 책임지죠.”그러다가 잠시 말을 멈추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다만... 여러분이 고른 외부 트랙은 제가 조금 전에 다른 팀에 빌려주기로 약속했어요.”“혹시 다른 실내 트랙을 이용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휘재 씨가 저쪽과 한번 이야기해 보게 할까요? 같이 사용하셔도 되고요.”“저쪽도 다섯, 여섯 명밖에 안 됩니다. 외부 트랙이 워낙 넓어서 차량이 열 대 가까이 더 들어가도 충분합니다.”하지율은 그 말을 듣고 눈썹을 살짝 올렸다.보아하니 성휘재가 어떻게든 연정미를 도와 자신이라는 초보자를 짓밟고 싶은 모양이었다.그래서 사장을 시켜 일부러 트랙이 이미 빌려 나갔다고 말하게 한 뒤, 자연스럽게 자신도 끼어들 생각인 듯했다.하지율은 성휘재의 계획을 알아차렸지만 굳이 폭로하지 않았다.“그러면 성휘재 씨한테 부탁할게요.”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이 다시 돌아왔다.“저쪽도 괜찮
그러자 주용화는 조금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그건 좀 곤란하지 않은가요? 두 분이 실력이 부족해서 사고라도 나면 누가 책임지죠?”‘실력이 부족하다니...’성휘재는 화가 치밀었다.주용화는 꼭 경기 전에 상대 멘탈을 흔들려고 쓰레기 같은 말을 쏟아 내는 비열한 선수 같았다.실력은 어떤지 몰라도 입 하나는 정말 독했다.하필 성휘재는 예전에 상대 선수의 도발에 제대로 흔들렸다가 결국 2위에 그친 적도 있었다.그래서 성휘재는 저렇게 말로 사람 신경을 긁는 부류를 가장 싫어했다.성휘재가 차갑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사고가 나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라도 쓸 테니까. 제가 죽어도 당신한테 책임 안 물을게요.”하지만 주용화는 곧바로 거절했다.“그건 안 되죠. 혹시 두 분이 저희를 없애려고 일부러 만든 함정이면 어떡합니까? 성휘재 씨야 죽어도 상관없겠지만 저희까지 그럴 수는 없잖아요.”그 말에 성휘재는 결국 제대로 폭발했다.“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지금 일부러 시비 거는 거죠!”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연정미가 얼른 나서서 말렸다.“휘재 오빠, 화내지 마세요. 용화 씨는 그냥 농담한 거예요.”그러고는 주용화에게도 말했다.“용화 씨, 휘재 오빠도 방금 농담한 거예요. 클럽 매니저가 제 친구니까 차량 수리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연정미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용화 씨, 어떤 코스로 달리고 싶어요? 경기장 안쪽 트랙이요? 아니면 외부 트랙이요?”주용화가 하지율을 바라보자 하지율이 대답했다.“외부 트랙으로 할게요.”그러자 성휘재가 코웃음을 쳤다.“지금 외부 트랙은 난도가 가장 높은 산악 코스 하나밖에 안 남았어요. 나무가 빽빽해서 시야도 안 좋고 연속 코너에 터널까지 있어요. 오르막도 있어서 고저 차도 꽤 크고요.”“프로 대회에서도 웬만하면 잘 안 쓰는 난도 높은 코스예요. 길도 잘 모르는 초보자가 저런 데서 달리겠다는 건 그냥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죠.”하지율은 성휘재를 한번 바라봤다.“성휘재 씨가 그렇게
X처럼 타고난 천재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묻혀 사라질 리는 없었다.성휘재는 X에게 무슨 사고가 생긴 게 아닐지 짐작했다.레이서라는 직업은 워낙 사고 위험이 높았다.어떤 사고는 선수의 실력과는 아무 상관 없이 여러 우연한 요인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벌어지기도 했다.성휘재는 그런 천재가 너무도 허무하게 사라진 게 못내 아쉬웠다.결국 X에게 쏟던 관심을 연정미에게 돌릴 수밖에 없었다.성휘재는 자기 손으로 강력한 경쟁자를 하나 키워 내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연정미는 성휘재의 친구였다.그런 연정미를 매번 곤란하게 만들었던 하지율이 모처럼 자기 영역까지 들어왔는데 성휘재는 이 기회를 그냥 넘길 리 없었다.연정미뿐만 아니라 친구로 지내던 단보현과 단성훈을 위해서라도 하지율에게 한 번쯤 제대로 갚아 주고 싶었다.성휘재는 하지율이 거절하면 다음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까지 이미 생각해 둔 상태였다.그런데 그때 하지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직접 태워 주실 필요는 없어요.”“대신 성휘재 씨가 비슷한 사양의 레이싱카 두 대를 준비해 주시고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트랙 하나만 빌려주세요. 저희가 직접 타 볼게요.”그러자 성휘재가 곧바로 말했다.“너무 빨리 거절하지 말고 일단 한번 타 보면...”말하던 성휘재가 뒤늦게 멈칫했다.“잠깐만요. 뭐라고요?”주용화가 성휘재를 힐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레이싱카 두 대만 빌려 달라는 겁니다.”연정미는 놀란 얼굴로 하지율을 바라봤다.“지율아, 너도 직접 운전하려고? 레이싱카는 일반 차량이랑 운전하는 방법이 달라.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실제로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아.”“레이싱을 처음 접하는 거라면 누군가 옆에서 가르쳐 주는 게 좋아.”연정미와 하지율은 겉으로만 예의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남들에게 구경거리를 만들어 주지 않기 위해서였지 굳이 모든 일에 서로 좋은 척할 필요까지는 없었다.연정미도 하지율을 직접 태워 줄 생각은 없었고 하지율 역시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그때 연정미가 제법 현실적
연정미는 그 말을 듣고도 미소를 잃지 않았고 오히려 목소리를 한층 더 부드럽게 낮췄다.“용화 씨, 제 경기를 그렇게 꼼꼼하게 봐 주고 이런 귀한 조언까지 해 줘서 고마워요.”하지율은 속으로 할 말을 잃었다.‘꼼꼼하게 봤다고? 그냥 게임만 열심히 한 거겠지...’하지율은 아까 주용화가 굳이 자신에게 경기 평가를 물었던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경기가 끝나면 연정미가 틀림없이 감상을 물어볼 거라고 예상했다.그런데 직접 말을 지어내기도 귀찮았던지 주용화는 하지율이 한 말을 그대로 복사해서 갖다 붙였다.그때 성휘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둘이 구경만 하면 재미없잖아. 직접 한번 타 볼래? 레이싱할 줄 모르면 내가 태워서 한 바퀴 돌아도 되고... 한번 타 보면 이 짜릿한 느낌에 분명 빠질걸?”성휘재는 이미 연정미를 도울 방법을 생각해 둔 상태였다.잠시 후 자신이 하지율을 태우고 속도를 내면 됐다.겁에 질려 실수를 하게 만들든 멀미해서 토하거나 쓰러지게 만들든 병원으로 보내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하지율을 이 자리에서 치울 수 있었다.정말 간단한 방법이었다.하지율이 거절한다면 주변 사람 몇 명을 시켜 분위기를 몰아가면 됐고 그러면 거절하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성휘재에게 하지율처럼 연약해 보이는 여자를 골탕 먹이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성휘재는 오히려 이해가 안 갔다.‘단보현과 연정미는 대체 어떻게 저런 여자에게 당한 걸까? 약한 척을 너무 잘해서였을까? 아니면 순진한 척하며 사람을 속이는 데 능한 걸까?’성휘재처럼 프로 레이서로 살아온 사람은 늘 울고 약한 척하는 여자를 가장 싫어했다.성휘재는 연정미와 알고 지낸 시간이 짧지 않았다.처음에는 성휘재도 연정미의 레이싱 실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그래도 연정미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재벌 가문의 아가씨가 취미로 레이싱하면서 아마추어 수준까지 올라왔다면 그것만으로도 꽤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레이싱에서는 남녀 간에 체력과 근력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고 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