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비에 젖은 풀밭과 흙, 멀리 침엽수림에서 흘러온 송진 향이 차가운 공기 사이로 섞여 들었다.
“으…….” 선우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춥죠.”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 에단이 물었다. 눈치 하나는 귀신같았다. “조금요.” 선우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에단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벗어드릴 옷은 없는데.” 그가 장난스럽게 코트 자락을 잡았다. 정말 벗어줄 것처럼 상체를 살짝 움직이는 시늉까지 했다. “푸흡.” 선우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이 사람. 농담 따먹기도 할 줄 알고. “5월의 스코틀랜드입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 사이로 스며들었다.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젖은 나뭇잎을 흔들 때마다 싱그럽고 묵직한 냄새가 따라왔다. 선우가 낯선 공기를 가만히 들이마셨다. 한국에서 맡던 공기와 달랐다. 차갑고, 습하고, 낯설었다. 그리고 어쩐지 위스키와 닮아 있었다. “차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가 뒤를 돌아봤다. “바로 이동하시죠.” 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 가느다란 빗줄기가 쉬지 않고 떨어졌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회색 하늘이 길게 번졌다. “…….” 선우는 우산 아래에서 무심코 에단을 바라봤다. 비행기 안에서 보여주던 느긋한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코트 깃을 세운 그는 빗속에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에단은 부차적인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 선우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제 발걸음도 조금 빨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 반나절이 넘는 비행 끝에 도착했지만 시차 때문인지 본사에 들어선 시각은 고작 오후 두 시였다. 로비를 지나려던 순간이었다. “Ethan!” 낮고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우도 함께 돌아봤다. 회색빛 머리칼에 짙은 수염을 기른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Good to see you.” 오랜만이라는 인사와 함께 남자가 에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Long flight?” “Could’ve been worse.” 에단은 짧게 대답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 특유의 편안함이 있었다. 남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에단의 옆으로 이동했다. “And you are…?” 에단이 선우를 바라봤다. “She’s with me.” 잠시 뒤 그가 말을 이었다. “Her name is…” 선우에게 시선을 건넸다. 자신을 직접 소개하라는 배려였다. 선우가 자연스럽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My name is Sunwoo Kim.” 차분하게 이름을 밝히며 손을 내밀었다. “I’m a brand manager at the Korea branch.” (한국지사 브랜드 매니저입니다.) “Callum Fraser.” 캘럼의 손바닥은 거칠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수없이 많은 캐스크를 밀고, 굴리고, 열어온 사람의 손이었다. “I run the warehouse operations here.” (저는 캐스크 웨어하우스 운영을 맡고 있습니다.) 캘럼이 선우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Didn’t know we had someone coming from Korea.” (한국에서 오신 분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때 에단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She’s the one shaping HEARTBEAT.” (하트비트의 방향을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에단이 선우를 소개한 건 단 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선우의 위치가 달라졌다. 본부장을 따라온 한국 지사의 직원이 아니라, 이번 프로젝트의 방향을 쥔 사람이었다. 캘럼의 눈빛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Good.” 인사를 마친 일행은 외부 문을 지나 또 다른 건물로 향했다. 캘럼이 녹슨 소리를 내는 묵직한 철문을 밀어젖혔다. 끼이익—. 녹슨 문이 열리는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 선우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수십 년간 고여 있던 나무의 숨결, 젖은 오크통, 그리고 그 안에서 증발하며 응축된 술의 영혼. 일명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 불리는 달콤하고 쌉쌀한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 선우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천장까지 차곡차곡 쌓인 캐스크들이 어둠 속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수십 년의 시간이 나무통 안에 갇힌 채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Welcome to the warehouse.” 캘럼이 말했다. 에단이 짧게 목례한 뒤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구두 밑창이 오래된 나무 바닥을 밟을 때마다 낮은 소리가 울렸다. “……대단하네요.” 선우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천장 끝까지 천천히 쌓인 캐스크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의 행렬이었다. 캘럼이 피식 웃었다. “Not all of them are good.” (다 좋은 건 아닙니다.) 선우가 그를 돌아봤다. “……네?” 캘럼이 어둠 속의 캐스크들을 바라봤다. “Some are just… waiting.” (어떤 건 그냥,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기다리고 있는 것들. 선우의 시선이 다시 캐스크로 향했다. “The oak takes what it needs. The angels take their share. And whatever survives…” (오크는 필요한 것을 가져가고, 천사들은 제 몫을 가져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견뎌낸 것만이…) “…….” “…earns the right to be called whisky.” (…비로소 위스키라 불릴 자격을 얻죠.) 수십 년을 버틴다고 모두 좋은 위스키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People say time is fair. It isn’t.” (사람들은 시간이 공평하다고 말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결과까지 공평하게 주지는 않았다. “Every cask loses something.” (모든 캐스크는 무언가를 잃습니다.) 캘럼이 이어 말했다. “To the oak. To the air. To the angels.” (오크에게, 공기에게, 천사들에게.) 그곳에는 수천 개의 캐스크가 있었다. 어떤 것은 세월을 견뎌 명작이 되고, 어떤 것은 그저 잊히기만을 기다리며 부패해간다. 선우가 대답했다. “That’s the angel’s share.” (천사의 눈물 말씀이시죠.) 캘럼이 고개를 끄덕였다. “A beautiful name for a cruel thing.” (잔인한 일을 참 아름답게 부르는 이름이죠.) 이곳은 시간이 심판을 내리는 공간이었다. 수천 개의 캐스크가 내뱉는 보이지 않는 변화들이 공기 중에 금가루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앞서 걷던 에단이 멈췄다. “…….” 에단의 시선이 어둠 속 한곳에 꽂혀 있었다. 수많은 캐스크 사이. 다른 것들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오크통 하나. 에단이 천천히 다가가 손을 뻗었다. 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캐스크의 표면에 닿았다. 툭. 손끝으로 나무를 두드렸다. 나무를 가볍게 두드린 에단의 손바닥이 거친 결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 선우가 그 모습을 바라봤다. 눈빛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는 답을 이미 알고 찾아온 사람처럼. “But every once in a while…” (하지만 가끔은…) 캘럼의 시선이 에단이 손을 얹은 캐스크로 향했다. “…you find a cask that stole more than it lost.”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훔쳐낸 캐스크를 만나기도 합니다.) 캘럼이 이번엔 에단에게 물었다. “Found something?” 에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술과 나무와 시간이 부딪히며 만들어낸 흔적을 읽듯, 손바닥이 캐스크의 표면을 느릿하게 따라갔다. “…….” 장난스러운 미소도, 여유로운 표정도 없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이 오크통 하나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Thief.” 낮은 울림이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 위스키 시프(whisky thief). 캐스크 안에 잠든 원액을 한 모금씩 훔쳐내기 위한 도구였다. “Let’s see what this thief has been hiding.” (이 도둑이 뭘 숨겨왔는지 한번 보죠.)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윤오의 검은색 SUV가 선우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김선우.” 운전석 문이 열리고 윤오가 내렸다. 단정한 셔츠에 소매를 두어 번 걷어 올린 차림이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선우가 대답하지 않자 윤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괜찮아.” 웃는 얼굴이 영 어색했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가가 무거웠고,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에는 좀처럼 생기가 돌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두고 몇 번이나 화면을 확인했는지 몰랐다. 혹시 새벽에라도 연락이 왔을까 싶어 눈을 뜰 때마다 손부터 뻗었다. 알림은 없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금세 깨어났다. 에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상하이에서 무슨 문제가 벌어진 건지. 물어볼 곳도,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괜찮기는. 눈 밑이 다 꺼졌구만.” 윤오가 선우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손끝이 관자놀이를 가볍게 스쳤다. “가는 길에 좀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아빠 상태는 어때?” “오전 검사 결과는 다 좋대. 어제보다 안정적이고, 담당 교수님도 회복 경과를 괜찮게 보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마.” 그제야 선우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다행이다…….” “그래. 이제 한시름 놔도 돼.”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에 걸렸다. 윤오가 운전하는 서울의 도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익숙했다. 출근길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횡단보도 앞에는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는 밤새 술을 마신 듯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도로변 카페에서는 직원이 야외 입간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자신만 어딘가 잘못 도착한 사람 같았다. “…….” 상하이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했으면서. 물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없이 바쁠 수 있었다. 지사에 문제가 생겨 직접 날아
고요하던 정원에 진동음이 길게 번졌다. 선우를 바라보던 시선이 잠시 휴대폰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받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에단이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가 놓았다.“Ethan Lowell speaking.”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영어가 쏟아졌다.“Slow down. Start from the beginning.”(천천히 말하세요. 처음부터.)조금 전까지 선우를 바라보던 눈빛에서 부드러운 기색이 빠르게 걷혔다. 그는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다만 손에 들린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에단의 얼굴만으로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몇 차례 짧게 질문했고, 마지막에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Don’t send anything else. Preserve every original file. I’ll review it myself.”(추가로 아무것도 보내지 마세요. 원본 파일은 전부 보존하고요.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통화가 끝났다. 에단이 휴대폰을 천천히 내렸다.“무슨 일이에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들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리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일정이 바뀌었습니다.”“네?”“오늘 오전 비행기로 서울에 돌아가세요. 항공편은 변경해 뒀습니다.”***공항 전용기 터미널 앞에 차가 멈췄다.“큰일은 아니죠?”그의 얼굴을 살폈다. 상하이 지사에서 걸려 온 전화, 통화 내내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 전화를 끊은 뒤 평소보다 빠르게 이어지던 지시들. 에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정을 정리했지만, 그럴수록 선우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전화하셨을 때 표정이…….”“선우 씨.”에단이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걱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다독이려는 듯, 그녀의 뺨
“여기 있었군요.”에단이었다.선우는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가오는 동안 화면을 끄지도, 억지로 웃지도 않았다.에단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든 휴대폰에 잠깐 머물렀다.“연락이 왔습니까?”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윤오한테서요.”에단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무슨 일 있습니까?”“그냥 안부요.”작게 끄덕인 에단은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에단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그럼 나와 조금 더 걸을까요?”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의 손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깊게 들어왔다.“오늘 밤은 제가 독점해도 되겠습니까?”선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본부장님.”“네.”“질문이 많으세요.”에단이 낮게 웃었다.테라스 끝에는 작은 정원이 이어져 있었다.연회장의 음악은 유리문 너머로 물러나 있었다. 현악기의 선율이 간간이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고, 정원에는 낮에 내린 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짙은 녹음을 머금은 잎사귀마다 물방울이 맺혀 달빛을 받아냈다. 이름 모를 흰 꽃들이 돌담 아래 소담하게 피어 있었고, 젖은 풀과 꽃잎에서 우러난 싱그러운 향이 밤공기 속에 번졌다.정원 너머로는 코모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산자락을 따라 늘어선 마을의 불빛이 수면 위에 길게 번졌다. 검푸른 물결이 바람에 밀려왔다가 조용히 흩어질 때마다 불빛도 함께 잘게
그때였다. 셔츠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선우가 걸음을 늦추며 화면을 확인했다. [윤오] ㄴ선우야, 아버님 수술 방금 잘 끝났어. 경과도 아주 좋대. 이제 걱정 마. 한순간, 거리의 소음이 멀어졌다. “…….” 선우는 화면을 다시 읽었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 경과가 좋다고.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는데도 안도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이, 그제야 몸에 와닿았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참으려고 할수록 눈물이 차올랐다. 이곳에서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아버지가 괜찮아졌다는 말.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선우 씨?” 몇 걸음 앞서가던 에단이 돌아봤다. 선우가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죄송해요. 잠깐만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에단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진열대의 조도와 설치 일정을 따지던 눈빛에서 날카로운 업무의 기색이 걷혔다. 그가 선우에게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무슨 일이에요?” 선우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루카 씨,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번역가가 말을 옮기자 루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객들이 익숙한 싱글몰트를 찾는 이유가 뭘까요? 정말 새로운 제품을 원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를 확신할 수 없어서일까요?” 루카의 손이 멈췄다. 선우는 서두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트비트는 익숙한 브랜드의 이름을 바꿔 붙인 제품이 아닙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원액의 역사에 무라노 장인의 기술을 더했어요. 이 병의 곡선은 단순히 눈에 띄기 위해 만든 형태가 아닙니다. 유리를 다루는 장인이 어느 각도에서 빛을 받아야 가장 깊은 색이 살아나는지 계산한 결과죠.” 선우는 시안을 펼쳐 병의 측면을 가리켰다. “이탈리아 고객에게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를 하나 더 소개하는 거라면, 루카 씨 말씀이 맞습니다. 이미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은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를 가진 제품입니다. 원액의 역사와 유리 공예의 미학이 하나의 물건 안에서 만났다는 것. 고객은 위스키를 구매하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번역가의 손짓이 커졌다. 선우의 말이 이탈리아어로 옮겨지는 동안 루카의 시선은 다시 병의 형태를 따라 움직였다. “물론 모든 고객이 새로운 이야기에 돈을 지불하지는 않겠죠.” 선우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중 시장을 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취향에 확신이 있고, 남들과 같은 것을 고르는 데 만족하지 않는 고객부터 공략하는 겁니다. 하트비트는 익숙함을 대체하는 제품이 아니라, 익숙한 선택만으로는 부족해진 사람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제품이니까요.”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루카는 선우를 바라보다가 시안을 다시 집어 들었다. “Una nuova storia, dunque.” (그러니까 새로운 이야기라는 건가.) “Esattamente.” (정확히 그렇습니다.) 선우가 대답했다. 루카는 병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는 디자인의 결점을
무라노의 아침은 수로를 가르는 바포레토의 엔진음으로 시작됐다.물살을 밀어내는 둔중한 소리가 오래된 건물 사이를 돌아 들어왔다. 창틀에 걸린 햇빛은 밤새 식지 못한 방 안의 공기를 무심하게 밀어냈다. 여섯 월의 햇살은 유난히 투명했다. 어젯밤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말과 입맞춤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침대 위로 떨어진 빛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선우는 홑이불을 걷어 내고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았다.눈을 감으면 어젯밤이 떠올랐다.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에단의 목소리. 입술이 닿기 직전, 마지막까지 대답을 기다리던 눈빛. 그리고 그가 자신을 안아 주었을 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그의 품을 찾아 들어갔던 자신의 몸.무엇보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서로를 끌어 안았던 순간이 자꾸만 생각났다.에단.입안에서 소리 없이 이름을 굴려 본 선우는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 올렸다.미쳤나 봐.어제까지는 본부장님이었는데.물론 지금도 회사에서는 본부장님이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어젯밤 이후로 그 호칭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이었다.그렇다고 아침부터 달라진 얼굴로 마주할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할수록 사소한 것까지 의식하게 될 게 뻔했다.선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평소보다 꼼꼼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 얼굴은 다행히 멀쩡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일어났습니까?”거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선우의 발걸음이 멎었다.에단은 테라스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완벽하게 갖춰 입은 수트에 단정한 셔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넥타이. 한 손에는 에스프레소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