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Still like the old way, I see.”
(여전히 예전 방식을 좋아하는군.) 캘럼이 뒤편 작업대로 향했다. 잠시 후, 길고 가느다란 금속관 하나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에단이 손을 내밀었다. “Give it to me.” 에단이 직접 캐스크 안으로 시프를 밀어 넣었다. 오래된 오크를 통과해 금속관 끝이 원액에 닿았다. 툭. 투둑. 금빛 액체가 유리잔 안으로 떨어졌다. 한 방울. 그리고 또 한 방울. 창고의 희미한 빛을 머금은 위스키가 잔 안에서 깊은 호박색으로 출렁였다. 에단은 곧장 마시지 않았다. 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잔을 천천히 기울여 빛을 통과시키고 유리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 잔 속의 색을 좇는 감청색 눈동자가 고요하게 움직였다. 그가 천천히 잔을 코끝으로 가져갔다. 두 번째 숨을 들이마신 순간, 에단의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서두르지 않고 아주 작은 양을 입안에 머금었다. 그리고 이내 두 눈을 느슨하게 감았다. 입안에 퍼지는 향과 맛을 하나하나 짚어내듯, 아주 천천히 음미했다. 단맛. 오크. 스파이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올라오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이. “…….” 에단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Got something?” 캘럼이 물었다. 에단은 삼킨 뒤에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 선우도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봤다. 에단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의 눈. 그리고 그것을 놓칠 생각이 없는 사람의 눈이었다. 에단이 잔을 내려놓았다. “Try.” 그의 시선이 곧장 선우에게 꽂혔다. “……저요?” 짧은 한마디였지만 뜻은 분명했다. 네가 가진 감각을 직접 증명해 보라는 것. 선우가 되묻자, 곁에 서 있던 캘럼이 투박한 웃음을 흘렸다. “Go on.” 선우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끝없이 이어진 캐스크. 수천 개의 시간이 잠든 숲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래된 나무와 젖은 흙의 냄새가 발끝을 따라왔다. 손에 쥔 Thief의 차가운 금속이 긴장한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투둑. 나무의 틈 사이로 도구를 밀어 넣자 둔탁한 마찰음이 고요를 갈랐다. 곧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황금빛 액체가 가느다란 물줄기를 그리며 잔으로 흘러내렸다. “…….” 희미한 창고의 빛을 통과한 위스키는 짙은 호박색이었다. 잔을 살짝 기울이자 벽면을 타고 흐르는 액체의 속도가 눈에 들어왔다. 묵직했다. 향이 먼저 올라왔다. 농축된 건포도. 진하고 달큰한 건과일의 향 뒤로 은근한 스파이스가 따라왔다. 처음부터 강하게 치고 들어오는 향이 아니었다. 한 겹, 또 한 겹. 맡을수록 다른 결이 드러났다. “…….” 선우는 잔을 천천히 입술에 가져갔다. 혀끝에 닿은 순간, 아주 조금 굴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묵직한 질감이 혀 위를 부드럽게 감쌌다. 단맛이 먼저 퍼지고, 곧이어 오크에서 온 깊은 풍미와 스파이스가 겹쳐졌다. “…….” 선우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달았다. 하지만 단순히 달기만 한 술은 아니었다. 끝이 있었다. “셰리 캐스크네요.” 선우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런데 건과일에서 끝나지 않아요. PX 계열의 짙은 단맛인데…….” 잠시 잔을 내려다봤다. 머릿속에 남은 향을 하나씩 더듬었다. “말린 망고.” 그리고. “아주 잘 익은 파인애플.”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에 트로피컬 계열이 올라옵니다.” 감평이 끝났다. “…….” “…….” 웨어하우스가 다시 조용해졌다. 수천 개의 캐스크 사이로 선우의 목소리만 잔향처럼 남았다. “Then.”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에단이었다. 그가 한 걸음 가까워졌다. “Heart-beat.” 혀끝을 낮게 굴리는 스코틀랜드식 발음. 에단의 감청색 눈동자가 선우를 똑바로 향했다. “기억에 남는 순간과, 그때 함께한 사람이 동시에 떠오르는 위스키라면…….”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버번이 좋겠습니까, 셰리가 좋겠습니까?” 선우가 잔을 내려다봤다. “…….” 질문은 위스키에 관한 것이다. 이제 자신을 증명할 시간이었다. “셰리는 기억을 붙잡아두는 쪽이에요.” 선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향이 강하고 레이어가 많아서 한 번 각인되면 쉽게 지워지지 않죠. 대신 무거워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사람보다 순간을 더 오래 남깁니다.” “…….” “버번은 반대예요.” 선우가 잔을 손끝으로 가볍게 돌렸다. “복잡하게 여러 겹을 쌓기보다는……더 직선적이고, 더 솔직하죠.” 선우는 자신의 말을 고르는 것처럼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을 기억하게 하고 싶다면.” 그녀가 에단을 바라봤다. “버번.” “…….” “순간을 영원하게 남기고 싶다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셰리입니다.” 상사의 눈빛은 몹시도 고요했다. “…….” “…….” 이게, 아닌가? 방금까지 자신 있게 내놓았던 답이 순식간에 의심스러워졌다. 선우는 애써 침착한 얼굴을 유지했다. 설마 틀렸나? 내가 맡은 향이 분명 셰리였는데. 그래도 저 사람은 마스터 블렌더잖아. 내가 놓친 게 있나? “…….” 선우의 손끝이 괜히 잔을 고쳐 잡았다. 그때였다. 에단이 한 걸음 다가왔다. 창고 천장에 매달린 희미한 등이 입체적인 옆얼굴을 비스듬히 스쳤다. “Good.” 선우가 눈을 깜빡였다. “……네?” 그제야 에단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 “Keep that.” (그 감각 유지하세요.) 그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울렸다. “Don't let anyone refine it out of you.” (누구도 당신의 그 감각을 깎아내지 못하게 하세요.) *** 밤이 깊은 숙소 라운지의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스코틀랜드의 밤이 검게 내려앉아 있었다. 빗물이 유리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고, 멀리 보이는 불빛은 젖은 도로 위에서 길게 번졌다. 선우는 소파 한쪽에 앉아 있었다. “…….” 한참 전부터. 낮의 일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웨어하우스의 눅눅한 공기. 수천 개의 캐스크. 나무와 오크, 오래된 위스키가 뒤섞인 냄새. 그리고. 그 사이를 마치 제 영토인 양 유연하게 걸어 들어가던 한 남자. “…….” 선우가 무심코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자꾸 떠올랐다. 위스키 잔을 들고 있던 손. 길고 단정한 손가락. 잔을 기울이던 각도. 빛을 확인하듯 잔을 들어 올리던 손목. 그리고 한 모금 머금은 뒤 천천히 눈을 감던 얼굴. 짙은 눈썹 아래로 길게 내려앉던 눈매. 곧게 뻗은 콧날. 웃을 때마다 올라가던 입꼬리. “…….” 선우의 기억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목선. 그리고 위스키를 삼킬 때마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목울대. 목울대. 코트 깃을 세워도 목이 한참이나 길어서 더 잘보이는 목선. 위스키를 삼키는 순간, 매끈하게 이어진 목을 따라 목울대가 느리게 한 번 올라갔다가ㅡ “…….” 선우의 시선이 허공에 멈췄다. “김선우. 정신 차려.” 혼잣말까지 하고 나서야 더 이상했다. 그냥 위스키를 마신 거잖아! 무려 상사와 함께 온 출장에서. 그것도 업무 중에. 하나씩 읊어보니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선우가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왜 목울대가 떠오르는 순간마다 말이 막히는데? “너…….” 선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까지 머릿속에서 뭘 생각했는지 떠올리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목울대 성애자였냐?” 그때였다. “아직 안 주무십니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환청처럼 등 뒤에서 들렸다. “악!” 환청일 확률보다는……. 까다다닥. 선우의 고개가 소리가 난 쪽으로 느리게 돌아갔다. “…….” 에단이 서 있었다. “뭘 그렇게까지 놀라요?” 샤워를 마친 듯 젖은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셔츠의 첫 단추는 풀려 있었고, 소매는 팔꿈치까지 자연스럽게 걷혀 있었다. “…….” 선우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하여간에 등장 타이밍 참 기가 막히다니깐. “본부장님은 안 주무ㅅ…….” 안 주무시고 뭐하러 내려왔냐고 물으려던 찰나였다. “내 목울대가 그렇게 마음에 듭니까?” 삐이이이이이익—. 뇌내 비상경보가 울렸다.선우가 휴대전화를 귀에 바짝 가져다 댔다. 세 번째 신호음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ㅡ “선우 씨?”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꾹 눌러 두었던 감정이 느슨해졌다. “……네.” ㅡ “아버님은 뵙고 왔어요?” 인사보다 먼저 안부를 묻는 목소리.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낮고 차분한 음성이었다. 선우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네. 방금 뵙고 나왔어요. 본부장님 말씀대로 손도 꼭 잡아 드렸고요.” ㅡ “잘했네.” 짧은 대답 뒤에 부드러운 숨소리가 이어졌다. ㅡ “많이 걱정했을 텐데, 조금은 마음이 놓이겠어요.” “……네. 검사 결과도 괜찮대요.” ㅡ “다행입니다.” 말을 마치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선우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울음을 참으려는 순간, 수화기 너머로 에단의 낮은 웃음이 들렸다. ㅡ “연락 기다렸습니까?” 잠깐의 여유가 흘렀다. 그 사이로 어딘가 낯선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 에단은 분명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선우가 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걸 아는 사람이 왜 연락 안 하셨어요?’ ……너무 따지는 것 같았다. ‘저 문자 기다렸는데.’ 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이유로 전화를 걸었는지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병실에서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했는지, 윤오의 다정함 앞에서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윤오의 검은색 SUV가 선우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김선우.” 운전석 문이 열리고 윤오가 내렸다. 단정한 셔츠에 소매를 두어 번 걷어 올린 차림이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선우가 대답하지 않자 윤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괜찮아.” 웃는 얼굴이 영 어색했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가가 무거웠고,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에는 좀처럼 생기가 돌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두고 몇 번이나 화면을 확인했는지 몰랐다. 혹시 새벽에라도 연락이 왔을까 싶어 눈을 뜰 때마다 손부터 뻗었다. 알림은 없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금세 깨어났다. 에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상하이에서 무슨 문제가 벌어진 건지. 물어볼 곳도,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괜찮기는. 눈 밑이 다 꺼졌구만.” 윤오가 선우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손끝이 관자놀이를 가볍게 스쳤다. “가는 길에 좀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아빠 상태는 어때?” “오전 검사 결과는 다 좋대. 어제보다 안정적이고, 담당 교수님도 회복 경과를 괜찮게 보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마.” 그제야 선우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다행이다…….” “그래. 이제 한시름 놔도 돼.”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에 걸렸다. 윤오가 운전하는 서울의 도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익숙했다. 출근길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횡단보도 앞에는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는 밤새 술을 마신 듯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도로변 카페에서는 직원이 야외 입간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자신만 어딘가 잘못 도착한 사람 같았다. “…….” 상하이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했으면서. 물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없이 바쁠 수 있었다. 지사에 문제가 생겨 직접 날아
고요하던 정원에 진동음이 길게 번졌다. 선우를 바라보던 시선이 잠시 휴대폰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받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에단이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가 놓았다.“Ethan Lowell speaking.”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영어가 쏟아졌다.“Slow down. Start from the beginning.”(천천히 말하세요. 처음부터.)조금 전까지 선우를 바라보던 눈빛에서 부드러운 기색이 빠르게 걷혔다. 그는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다만 손에 들린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에단의 얼굴만으로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몇 차례 짧게 질문했고, 마지막에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Don’t send anything else. Preserve every original file. I’ll review it myself.”(추가로 아무것도 보내지 마세요. 원본 파일은 전부 보존하고요.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통화가 끝났다. 에단이 휴대폰을 천천히 내렸다.“무슨 일이에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들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리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일정이 바뀌었습니다.”“네?”“오늘 오전 비행기로 서울에 돌아가세요. 항공편은 변경해 뒀습니다.”***공항 전용기 터미널 앞에 차가 멈췄다.“큰일은 아니죠?”그의 얼굴을 살폈다. 상하이 지사에서 걸려 온 전화, 통화 내내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 전화를 끊은 뒤 평소보다 빠르게 이어지던 지시들. 에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정을 정리했지만, 그럴수록 선우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전화하셨을 때 표정이…….”“선우 씨.”에단이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걱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다독이려는 듯, 그녀의 뺨
“여기 있었군요.”에단이었다.선우는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가오는 동안 화면을 끄지도, 억지로 웃지도 않았다.에단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든 휴대폰에 잠깐 머물렀다.“연락이 왔습니까?”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윤오한테서요.”에단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무슨 일 있습니까?”“그냥 안부요.”작게 끄덕인 에단은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에단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그럼 나와 조금 더 걸을까요?”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의 손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깊게 들어왔다.“오늘 밤은 제가 독점해도 되겠습니까?”선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본부장님.”“네.”“질문이 많으세요.”에단이 낮게 웃었다.테라스 끝에는 작은 정원이 이어져 있었다.연회장의 음악은 유리문 너머로 물러나 있었다. 현악기의 선율이 간간이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고, 정원에는 낮에 내린 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짙은 녹음을 머금은 잎사귀마다 물방울이 맺혀 달빛을 받아냈다. 이름 모를 흰 꽃들이 돌담 아래 소담하게 피어 있었고, 젖은 풀과 꽃잎에서 우러난 싱그러운 향이 밤공기 속에 번졌다.정원 너머로는 코모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산자락을 따라 늘어선 마을의 불빛이 수면 위에 길게 번졌다. 검푸른 물결이 바람에 밀려왔다가 조용히 흩어질 때마다 불빛도 함께 잘게
그때였다. 셔츠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선우가 걸음을 늦추며 화면을 확인했다. [윤오] ㄴ선우야, 아버님 수술 방금 잘 끝났어. 경과도 아주 좋대. 이제 걱정 마. 한순간, 거리의 소음이 멀어졌다. “…….” 선우는 화면을 다시 읽었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 경과가 좋다고.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는데도 안도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이, 그제야 몸에 와닿았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참으려고 할수록 눈물이 차올랐다. 이곳에서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아버지가 괜찮아졌다는 말.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선우 씨?” 몇 걸음 앞서가던 에단이 돌아봤다. 선우가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죄송해요. 잠깐만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에단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진열대의 조도와 설치 일정을 따지던 눈빛에서 날카로운 업무의 기색이 걷혔다. 그가 선우에게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무슨 일이에요?” 선우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루카 씨,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번역가가 말을 옮기자 루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객들이 익숙한 싱글몰트를 찾는 이유가 뭘까요? 정말 새로운 제품을 원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를 확신할 수 없어서일까요?” 루카의 손이 멈췄다. 선우는 서두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트비트는 익숙한 브랜드의 이름을 바꿔 붙인 제품이 아닙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원액의 역사에 무라노 장인의 기술을 더했어요. 이 병의 곡선은 단순히 눈에 띄기 위해 만든 형태가 아닙니다. 유리를 다루는 장인이 어느 각도에서 빛을 받아야 가장 깊은 색이 살아나는지 계산한 결과죠.” 선우는 시안을 펼쳐 병의 측면을 가리켰다. “이탈리아 고객에게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를 하나 더 소개하는 거라면, 루카 씨 말씀이 맞습니다. 이미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은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를 가진 제품입니다. 원액의 역사와 유리 공예의 미학이 하나의 물건 안에서 만났다는 것. 고객은 위스키를 구매하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번역가의 손짓이 커졌다. 선우의 말이 이탈리아어로 옮겨지는 동안 루카의 시선은 다시 병의 형태를 따라 움직였다. “물론 모든 고객이 새로운 이야기에 돈을 지불하지는 않겠죠.” 선우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중 시장을 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취향에 확신이 있고, 남들과 같은 것을 고르는 데 만족하지 않는 고객부터 공략하는 겁니다. 하트비트는 익숙함을 대체하는 제품이 아니라, 익숙한 선택만으로는 부족해진 사람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제품이니까요.”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루카는 선우를 바라보다가 시안을 다시 집어 들었다. “Una nuova storia, dunque.” (그러니까 새로운 이야기라는 건가.) “Esattamente.” (정확히 그렇습니다.) 선우가 대답했다. 루카는 병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는 디자인의 결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