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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부정맥 메이커: Chapter 1 - Chapter 10

66 Chapters

Prologue.

어둡게 가라앉은 바 안에서는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오래된 위스키 배럴 속에 갇혀 있던 공기처럼 눅눅했고, 한여름의 열병처럼 묘하게 뜨거웠다. 낮은 조명 아래 잔을 기울일 때마다 금빛 액체가 천천히 흔들렸다. 낡은 스피커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목소리가 먼지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ㅡ Elvis Presley - Can’t help Falling in Love. 느리고, 달콤하고, 그래서 더 사람 심장을 긁어대는 종류. “…….” 선우가 턱을 괸 채 잔을 빙글 돌렸다. 잔 안쪽을 타고 흘러내리는 위스키의 흔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ㅡ 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 현명한 사람들은 사랑에 쉽게 뛰어들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 바보들만이 앞뒤도 재지 않고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법이라고. “하.” 선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잔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툭. “난 바보다.” 잠시 뜸을 들인 뒤, 선우가 덧붙였다. “똥멍청이.” “또 시작이네.” 맞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 흰 셔츠. 단정하게 여민 카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옷차림. 이런 낡고 어두운 바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반듯한 얼굴. 권윤오. “네가 뭘 알아?” 괜히 시비나 한 번 털어보기. “또 똥차야?” 윤오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이번엔 뭔데.” 선우의 연애사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바람.” “또?” 또는. 선우가 눈을 흘겼다. 첫 연애도 그랬고. 바로 전 연애도 그랬고. 끝은 늘 비슷했다. 그러니까, 바람만 세 번째라고. “…….” 윤오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확률적으로 네 문제일 가능성이 높은데.” “닥쳐.” 선우가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독한 알코올이 목구멍을 긁고 내려갔다. 그제야 억눌러두었던 비참함이 뒤늦게 역류했다. 하지만 자신을 이토록 별볼일없게 만든 건 전남친의 배신 따위가 아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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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낯익은 천장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선우는 한참을 눈만 깜빡였다. 천장이 세 번쯤 흔들리고 나서야 시야가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억도. 아니. 기억 비슷한 것이 돌아왔다. 낮게 가라앉은 눈빛. 바짝 가까워졌던 숨결. 제 뺨을 감싸던 뜨겁고 단단한 손. 그리고— ‘……선우야.’ 쿵.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너 부정맥인 것 같아.’ “뭐?” 선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잠시 정적. “아…….” 꿈이 아니었다. 선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머릿속에 들어 있던 납덩어리가 한 박자 늦게 따라 올라왔다. 우욱. “…….” 누가 머리채를 양손으로 휘어잡아 흔드는 것 같았다. 숙취였다. 아니. 숙취라는 단어로는 부족했다. 어제의 자신이 오늘의 자신에게 저지른 테러였다. 선우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꿈이야.” 그래. “꿈이겠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제발.” 선우가 이불 속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기억은 친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선명했다. 권윤오의 품에 기대었던 감각. 눈앞까지 내려왔던 짜증나는(잘생긴) 얼굴. ‘너 부정맥인 것 같아.’ Replay. ‘너 부정맥인 것 같아.’ “아아아악!” 선우가 이불을 걷어차 버렸다. 침대 위에서 미친 몸부림이 시작됐다. “미친 김선우!” 퍽. “왜 그랬어!” 퍽. “왜 하필 권윤오야!” 베개가 무고하게 구겨졌다. 선우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괴로웠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키스할 뻔했다. 그것도 누구와? 십이 년째 좋아하는 친구와. 그런데 더 끔찍한 건 그 순간 불쑥 들었던 불결한 생각이…… “……미쳤나 봐.” 선우가 손가락 사이로 천장을 노려봤다. 이건 사고였다. 술이 저질렀고. 감정이 공범이었으며. 자신은 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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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왔네.” 권윤오가 있었다. 흰 가운 차림으로 차트를 넘기고 있었다. 저는 혼자 이불 속에서 스무 번쯤 죽었다 살아났는데.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곳도 없었다. “앉아.” 예. 선우가 의자에 앉았다. 윤오가 차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 “…….” 눈이 마주쳤다. 머릿속으로 어제의 장면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쿵. 선우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꺾었다. 제발. 제발 아무것도 묻지 마. 십이 년이었다. 십이 년 동안 숨소리 하나, 눈짓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해왔던가.​ 권윤오의 두 눈이 저를 향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가슴께가 간질거렸고, 귓가를 울리는 맥박 소리가 소음처럼 의식되는 것 같았다. “……야.” 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있잖아.” 용기를 냈는데. “심전도 검사 한번 하자.” 선우의 해명이 허공에서 맥없이 잘려 나갔다. “……뭐?” “금방 끝나.“ 권윤오가 너무 태연하게 말했다. “나 멀쩡해.” “확인만 하는 거야.” 선우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확인이라니. 지금도 네 앞이라고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이 심장을, 기계로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맥박도 불규칙했고.” “…….” “심전도 한 번 찍어보자.” 윤오가 차트를 덮었다. “금방하고 점심이나 같이 먹자. 배고프잖아.” 어르고 달래는 투였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챙긴다. 걱정한다. 밥을 먹인다. 이 모든 행동에는 단 한 번도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 이 뻔한 술래잡기는 제 속만 시커멓게 태웠다. “갑자기 왜 난리인데.”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윤오의 손이 멈췄다. 툭. 차트가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 “…….” 눈이 정면으로 선우를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동시에 가장 피하고 싶은 눈. “어제 심박 이상 있었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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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뭐야?” 목소리에 당혹감이 잔뜩 묻어났다. “…….” “…….” 회사 정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선우야.” 선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김민재. “너 여기까지 왜 왔어?” “선우 네가 전화도 안 받고, 카톡도 안 보고…….” “차단했어.” “그래도 얘기는 해야 할 거 아니야.” “무슨 얘기?” “선우야, 나 진짜 이번에는—.” “됐어.” 선우가 단호하게 잘랐다. “끝났어.”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바닥까지 드러낸 관계에 미련 따위 남아있을 리 없었다. 남이야 그러던 말던 김민재는 끈질겼다. “내가 설명할게.” “싫어.” “왜!” 민재의 목소리가 커졌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 선우의 얼굴이 굳었다. 회사 앞이었다. “나 진짜 너 사랑해.” “그 말 지겨워.” “선우야.” 민재가 다시 손을 뻗었다. “일단 가서 얘기하자.” “손대지 말라구.” 선우가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김민재는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선우와 민재 사이로 그림자가 하나 끼어들었다. “그만하지 좀.” 낮고 건조한 목소리. “권윤오?” 언제 따라왔는지,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서 있었다. 윤오가 선우의 상태를 짧게 살폈다. 얼굴. 손. 그리고 다시 민재. 눈빛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회사까지 찾아와서 뭐 하는 짓이야.” 김민재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왜 끼어들어?” “김선우가 싫다잖아.” “그러는 너는 좋대?” 그 질문에 선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민재가 윤오와 선우를 번갈아 보더니 비웃듯 말했다. “나랑 헤어지고 바로 붙어먹는 게 또 권윤오야?” “뭐? 김민재, 너 말 똑바로 해.” “맨날 권윤오, 권윤오 하더니 결국 이거였네.” “김민재!” 선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봐. 아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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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쏟아지는 오후의 역광을 등진 남자가 한 사람 서 있었다. 처음에는 얼굴의 윤곽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리는 순간. “…….” “…….” 넓게 떨어진 어깨와 군더더기 없이 곧게 뻗은 몸선. 흐트러짐 하나 없는 검은 머리칼 아래로 선명하게 자리 잡은 눈썹. 날렵하게 뻗은 콧날과, 쉽게 웃음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단정하게 다물린 입술. 그리고. 빛을 받아 깊어진 눈동자까지. 묘하게 푸른 빛이 나는 듯했다. “김선우 과장님?” 낮고 매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멍하니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네.” 대답이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남자가 선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에단 로웰입니다.” 선우가 손을 맞잡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본부장님.” 순간. 짧은 접촉 사이로 제 맥박이 그대로 들킨 것 같은 기묘한 착각. 선우가 먼저 손을 빼려는 순간, 에단이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놓았다. “아시아 태평양 브랜드 총괄로 파견 왔습니다. 이번 분기 신규 위스키 론칭부터 김선우 과장님과 함께하게 될 겁니다.” 그가 말했다. “좋은 기획안이더군요.” 선우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 “지켜보겠습니다.” 에단의 시선이 천천히 선우에게 돌아왔다. “김 과장님이 이걸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인지.” 쿵. 선우의 심장이 이상하게 한 번 뛰었다. 아까부터 왜 이러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본부장님.” 이 남자의 눈동자는 꼭 잘 숙성된 위스키의 원액처럼 깊고, 속을 알 수 없는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남자의 시선이 제 얼굴 어디쯤 머물고 있는지 몹시도 신경이 쓰였다. “그럼……. 저는 이만 업무 복귀해 보겠습니다.” 서둘러 몸을 돌린 찰나였다. “김선우 씨.” 선우의 발이 멈췄다. 천천히 돌아봤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 위스키 말입니다.” 남자가 웃었다. 감청색 눈동자가 먼저 풀리고, 그 뒤를 따라 입술 끝이 천천히 호를 그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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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보세요?”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ㅡ “김선우 씨.” 선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제 예상을 완벽히 빗나간 탓이었다. 분명 오늘 처음 들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낯설지 않은 음절의 무게. ㅡ “에단 로웰입니다.” 아, 이 기시감의 원인은 역시나였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가깝게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ㅡ “뒤 돌아보시겠어요.” 선우가 삐걱거리는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 곳에, 그가 서 있었다. “…….” 낮은 조도가 일렁이는 바 한가운데, 낮의 정갈한 수트 차림과는 전혀 공기를 두른 남자. 그는 마치 이 공간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어둠 속에 녹아 있었다. 그리고 시선이 허공에서 정확하게 맞물린 순간, 바 안의 소음들이 먼 곳의 일처럼 아득해졌다.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도, 나른하게 흐르던 음악도 베일 너머로 사라지고 오직 그가 몰고 온 긴장감만이 폐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선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머물던 공간의 밀도가 순식간에 진득하게 바뀌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느낄 뿐이었다. 찰나의 짧은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길게 늘어졌다. 본부장이, 여길 왜?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벙찐 선우의 앞으로 에단이 터벅, 터벅 걸어왔다. 느릿한 발걸음인데도 이상하게 주변의 공기까지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발걸음이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놀란 건 비단 선우뿐만이 아니었다. 수정 역시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인중을 길게 늘어뜨리고 그 광경을 관조했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을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머릿속 계산기가 멈춘 듯했다. “놀라셨죠.” “……여기까지 어떻게.”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거래처 리스트 보다가 알았습니다. 한국에서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신 거예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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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런데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멈췄다. [윤오] “…….” 에단을 향해 짧게 눈인사를 건네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ㅡ “어디야.”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목소리. 스물일곱 해를 들어온, 지나치게 익숙한 음성이었다. “……밖.” ㅡ “밖 어디.” “왜.” ​수화기 너머로 짧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ㅡ “차. 점심에 병원에 두고 갔잖아.”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답답함이 배어 있었다. ㅡ “지금 어디야.” 선우는 무심코 에단을 힐끗 바라봤다. “……압구정.” ㅡ “압구정? 누아르 오크?” 척하면 척이었다. “응.” ㅡ “거기 있어.” ​툭. 대답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진짜.” 선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 작게 혀를 찼다. 우리 아빠도 이 정도는 아닌데. “바쁘신가 봅니다.” 에단이 잔 속 얼음을 천천히 굴리며 물었다. “……그냥, 차 때문에요.” “그럼 가보셔야겠네요.” 그는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 *** “야.” ​공기를 가르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선우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익숙한 차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권윤오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기다리고 있던 그는 선우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턱을 들었다. “빨리 와.” 왜 명령이야. 선우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왜.” “차 타.” “나 걸어갈 건데.” 또 오기였다. 윤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성큼. 단 한 걸음. “말 길게 하게 하지말고.” 참 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묵직한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이건 짜증보다 훨씬 더 비겁하고 축축한 감정이었다. 권윤오의 저 말투, 저 태도, 저 확신. 나를 다 안다는 듯한 그 눈빛이, 결국 나를 한 발짝도 도망가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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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로얄 살루트 어때요?”선우가 자리로 돌아오자 수정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부터 훑었다. 헝클어진 감정은 감추려 할수록 티가 나는 법이었다.잠시 선우를 바라보던 수정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진열장에서 짙은 코발트블루 도자기 병을 집어 들었다.Royal Salute 38 Year Old Stone of Destiny.영국 왕실 대관식에서 왕이 앉는 '운명의 돌'을 기리며 탄생한 블렌디드 스카치.“…….”선우는 잔을 바라봤다. 호박빛 액체가 유리 벽을 타고 천천히 번져 나갔다.천천히 잔을 들어 코끝에 가져가자 3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오크통의 숨결을 들이마신 액체의 묵직한 향이 피어 올랐다.선우는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럽게 혀끝을 감싼 액체가 천천히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역시 좋은 술은 사람의 기분을 달래는 재주가 있었다. 가득 엉켜 있던 머릿속이, 오래 숙성된 술 한 모금에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같은 걸로 주시죠.”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에단이 바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간 줄 알았는데.에단은 잔을 들어 조명을 향해 기울였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자 잘 재단된 슈트가 미세한 마찰음을 냈다.호박빛 액체가 유리 안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그 빛이 감청색 눈동자에 스며들자 차갑던 눈빛에 순간 금빛 온기가 번졌다.“이 정도 숙성의 블렌디드는…….”그가 나직이 입을 뗐다.“시간이 맛을 정리했다기보다는, 층을 쌓아 올린 쪽에 가깝습니다.”낮고 일정한 목소리.조급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말을 할 때마다 움직이는 입술의 선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서, 선우는 저도 모르게 또 그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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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망설이면 원액까지 오염됩니다.” “…….” “김선우 씨라고, 다르진 않을텐데요.”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비켜갈 틈도 없이 정확하게 맞물렸다. “…….” ​잔을 내려놓은 건 에단이 먼저였다. 유리와 나무가 닿는 소리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정숙한 움직임이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던 사적인 공기가 수평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에단이 흐트러짐 없는 동작으로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내일 오전, 신제품 런칭 회의가 있습니다.” ​지극히 사무적인 문장이었다. 그는 잔을 가볍게 밀어두었다. 마침표를 찍듯, 더 이상의 흐트러짐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이쯤에서 정리하시죠.” *** 문을 나서자, 날 선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훅 끼쳐왔다. 선우가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가슴 안쪽을 어지럽히던 열기와 소음들이 비로소 정돈되는 기분이었다. 옆에 선 에단은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위치 보내드리겠습니다.” 그가 외투 포켓에 휴대폰을 밀어 넣으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대리 불렀습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물리 법칙이 처음부터 그를 위해 설계된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 다음 단계를 밟았다. “같이 가시죠.” “……괜찮은데요.” 선우가 다시 한번 희미한 선을 그어보았다. 하지만 그 벽이 그리 견고하지 못했다. “굳이 따로 갈 이유라도 있습니까?” 선우가 시선을 잠깐 떨구었다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중력에 끌리듯 자연스럽게 그의 차로 향했다.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 (Maserati GranTurismo) 가로등 불빛을 매끄럽게 흘려보내는 붉은 차체. 군더더기 하나 없는 유선형의 실루엣은, 정지해 있는데도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듯한 맹수의 근육을 연상시켰다. 딱 봐도 억 소리 나는 차였다. '진짜라니까요. 분명 말은 안하는데 후계자 냄새남.' 불현듯 민지가 던졌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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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오전부터 신제품 런칭 회의가 있었다. 선우는 가장 먼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회의 자료를 띄우고, 메모장을 여는 손끝은 평소처럼 정확했다.몸은 출근해 있었다. 그런데 정신은 아니었다. 의식은 자꾸만 제멋대로 탈선을 반복했다.'상관없어?''어. 상관없어.'우리는 대체 어제 왜 그렇게도 날을 세웠나.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의 집 앞에 세워져 있던 자신의 차.선우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일하자, 일.잡념을 털어내려 고개를 저을 때쯤 문이 열렸다.“다들 모이셨네요.”아르벨라 코리아의 새로운 본부장, 에단 로웰. 어젯밤 바에서 마주한 남자와 지금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단정했고, 정확했고, 빈틈이 없었다.회의실에 들어선 순간, 그의 목소리에서는 사적인 감정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는 단순한 신제품 출시가 아닙니다.”​회의가 시작되고, 프로젝트 제목이 화면을 메웠다.ㅡ아시아 지역 타겟 싱글몰트 위스키 런칭ㅡ“아시아 프리미엄 싱글몰트 시장의 기준을 우리가 새로 쓰는겁니다.”웅성거리던 회의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단순히 가격이나 패키지를 만지는 수준으로는 부족합니다. 껍데기는 본질을 이길 수 없으니까요.”​에단의 말은 면도날처럼 짧고 명확했다. 팀원들이 아시아 시장의 두터운 블렌디드 소비층과 싱글몰트의 한계를 언급하며 난색을 표하자, 에단이 그 흐름을 날카롭게 끊어냈다.“우리가 파는 건 단순한 액체가 아닙니다. 왜 이걸 마셔야 하는지, 그 이유가 명확해야 합니다.”​그의 시선이 자석처럼 선우를 향해 미끄러졌다.​“김과장님 의견은요?”​“타겟을 좁혀야 합니다. 대중적인 입문층이 아니라, 이미 자신만의 취향이 확고해질 대로 확고해진 사람들로요.”​선우는 피하지 않았다. 윤오와의 일로 엉망이 된 속과는 별개로, 일에서만큼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에 에단의 눈매가 아주 미묘하게 가늘어졌다.​“구체적으로요.”“향의 선을 더 선명하게 그어야 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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