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너 지금 뭐라고 했어?”“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왜 이렇게 애처럼 징징거리는 거야? 투정을 부리겠으면 네 엄마한테 가란 말이야.”“우리 가문에서 주최한 연회에서 감히 나를 건드려? 당장 이곳에서 나가.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네까짓 게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 거지?”두 여자아이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그저 말싸움에서 그칠 줄 알았지만 갑자기 큰 싸움으로 번졌다.다른 사모님과 얘기를 나누던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옆에 서 있던 나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그쪽으로 달려갔다.처음에 조하민과 하은진은 서로 손가락질하다가 갑자기 밀기 시작했다. 하은진이 가볍게 밀었을 뿐인데 조하민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그녀는 넘어지면서 식탁 위에 놓인 하얀 천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샴페인 잔과 그릇이 바닥에 떨어졌고 산산조각이 났다.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성노을은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나타나서 보호해 주었다.비록 열몇 살밖에 안 된 아이지만 성유리보다 키가 더 컸다. 성유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을은 키가 이만큼 자랐구나.’그녀는 성노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미소를 지었다.“나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성노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은진이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은진의 엄마는 조하민을 부축하면서 사과했다.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조하민이 다쳤으니 사과해야 하는 사람은 하씨 가문이었다.성노을은 그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엄마, 먼저 가는 게 좋겠어요.”이런 분위기 속에서 연회를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자 성유리는 하은진을 가리키면서 물었다.“저 여자아이는 네 친구잖아. 가보지 않아도 괜찮겠어?”그녀는 조금 전에 성노을과 하은진이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비록 성노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하은진을 신경 쓰고 있었다.만약 그와 아무런
성유리는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조하민을 따라서 앞으로 걸어갔다.한편, 성노을은 연회장의 구석에 디저트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긴 책상 위에 하얀 천이 덮여 있었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케이크가 있었다.성노을은 케이크를 집에 가져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집에 가져간다고 해도 월요일이 되면 케이크가 상해서 노예린에게 주지 못할 것이다.집에 디저트를 만드는 가사도우미가 있었지만 부탁할 수도 없었다. 평소에 케이크를 잘 먹지 않는 성노을이 갑자기 만들어달라고 하면 이상하게 느낄 것이다.박한빈은 이미 성노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노을이 케이크를 쳐다보면서 멍때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성노을?”여자아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노예린의 친구 하은진이었다.성노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은진은 가까이 다가오면서 물었다.“너 혼자 이곳에 온 거야?”“아니. 엄마랑 같이 왔어.”“아, 박씨 사모님도 왔구나.”하은진은 말하면서 책상에 놓인 케이크를 집어 들었다.“예린이 이곳에 왔다면 아주 좋아했을 거야. 원래 디저트를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녹차 케이크를 제일 좋아하거든.”그녀는 성노을을 힐끗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하지만 예린이 연회장에 오는 일은 없겠지. 예린의 이모가 귀국한 후에 가끔 데리고 오긴 했어. 평소에 그런 기회가 있어도 할머니는 예린의 여동생만 데리고 간대. 예린이 어쩌다가 집에서 그런 대우를 받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도와주고 싶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어.”성노을은 그녀의 옆에 서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듣기 싫었다면 자리를 떠났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하은진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예린은 집에서도 배불리 먹겠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케이크를 선물해 준다면 아주 좋아하지 않을까?”그러자 성노을은 먼 곳을 내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하은진은
얼마 후, 성유리와 성노을은 연회장에 도착했다. 이번 연회는 예전에 참석했던 것처럼 규모가 크지 않았다.조씨 가문 사모님 나연은 자신의 명의로 된 자선 기금회를 설립했다.자선 기금회의 설립을 축하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다고 했지만 사실 자선금을 모으는 자리였다.성유리는 며칠 전에 이미 돈을 기부했다. 연회장으로 들어가자 나연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사모님, 만나서 반가워요.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나연과 악수했다. 인사를 나눈 뒤, 나연은 그녀와 함께 온 성노을을 쳐다보면서 물었다.“이 아이가 바로 사모님의 아들이죠? 정말 잘생겼네요.”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나연은 환하게 웃었다.“노을아, 내 딸이 너랑 같은 학교에 다니거든... 혹시 조하민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어? 아는 사이일 수도 있겠어.”성노을은 단 일 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아니요. 처음 들어봐요.”“이제부터 서로 친하게 지내면 되지. 하민아, 이쪽으로 와보렴.”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하민은 오늘 핑크색 원피스를 입었다.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옅은 화장을 해서 그런지 아주 예뻤다. 그녀는 당당하게 걸어오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노을아, 여기에서 또 만나네.”그 말에 성유리와 나연은 움찔했다. 조금 전에 성노을은 분명 조하민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다고 했었다.눈치를 살피던 조하민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 작년 개교 기념 공연 때 나는 춤을 추었어. 피아노를 연주하기로 했던 친구가 사정이 생겨서 빠지는 바람에 너한테 부탁했었잖아.”성노을은 그때 피아노를 연주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을 듣고 춤을 춘 사람이 조하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이렇게 보니 하민과 노을은 인연이 있는 것 같네요.”나연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하민은 쑥스러움을 타는 편이라 학교에서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한 모양이야. 노을아, 혹시 학교에서 하민과 친하게 지
성유리는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돌리고 맞은편에 앉은 성노을을 쳐다보았다.성노을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묵묵히 밥을 먹고 있었다.그러자 성유리는 박한빈을 노려보더니 그의 팔을 있는 힘껏 꼬집었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성유리를 놓아주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성노을을 향해 물었다.“노을아, 오늘 다른 일정은 없어?”“펜싱 수업이 있는데 시간을 미루면 돼요.”그는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엄마, 오늘 연회에 같은 학년 친구도 참석한다고 들었어요.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만 친구가 있으니 괜찮을 것 같아요.”그의 말에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옆에서 듣고만 있던 박한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 친구라고? 그 친구 이름이 뭐지?”박한빈은 식사를 마쳤지만 성유리가 아직 먹고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성노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성노을은 가볍게 기침하고는 대답했다.“하은진이라는 친구예요. 아마 하은진의 아버지와 연회에서 마주친 적이 있을 거예요.”“들어보니 알 것 같기도 해.”박한빈이 진짜 기억 났는지 아니면 대충 대답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성유리는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박한빈은 지금껏 성노을의 친구에 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성유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박한빈은 조금 전에 그녀가 팔을 꼬집은 것 때문에 속상했는지 눈길을 주지 않았다.“네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유리는 눈치를 보면서 뒤따라가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박한빈이 손을 내밀자 그녀는 외투를 건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성유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조금 전에 말한 하은진은 누구예요?”“누구인지 궁금하면 노을한테 물어보지 그래?”성유리는 답답해서 입술을 깨물었다.“뜸 들이지 말고 빨리 알려주세요.”그녀가 아
주말 아침.성노을은 늦잠을 자는 습관이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그는 수영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밥을 먹으려고 했다.일을 보러 나간 줄 알았던 성유리는 박한빈과 같이 식사하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창문을 뚫고 두 사람을 밝게 비추었다.하얀색 셔츠를 입은 박한빈은 소매를 접어 올렸고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겼다. 셔츠 아래로 단단한 전완근이 드러나서 그런지 남성미가 돋보였다.그는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세월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여전히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고 남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박한빈은 눈빛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압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남자가 아내를 위해 새우 껍질을 바르고 있었다.가사도우미한테 지시하면 될 일이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성유리는 그의 옆에 앉아서 미소를 지었다. 아침에 일찍 깨어나는 것이 힘들긴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그녀는 박한빈을 지그시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때 위층에서 내려오는 성노을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성노을은 다정하게 말했다.“엄마, 잘 주무셨어요?”“그래. 너도 잘 잤어? 얼른 와서 같이 밥 먹자.”말을 마친 성유리는 박한빈이 껍질을 발라준 새우를 그릇에 담아 성노을 앞에 놓아주었다.성노을이 고개를 들자 마침 박한빈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주춤하더니 그릇을 성유리한테 주면서 말했다.“엄마, 저는 아침에 새우를 먹지 않아요.”“그렇구나.”성유리는 고개를 돌리고 박한빈을 쳐다보았다.“한빈 씨, 이제는 그만 발라도 되니까 손을 씻고 오세요.”그러자 박한빈은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자리로 돌아온 그는 성노을을 향해 물었다.“저번에 내가 말한 걸 잊은 건 아니지?”“기억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그 말에 성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무슨 일이기에 그래요?”“오늘 조씨 사모님을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 나는 업무를 보러 가야 해서 곁에 있어 주지 못할 것 같아. 노을과
노예린은 주말에 하씨 가문에 가서 닭 다리를 먹을 생각에 들떠있었다. 식당에서 나올 때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하은진은 입을 열었다.“주말에 엄마랑 연회에 참석하기로 했는데 이제야 생각났어. 교외 지역에 갔다가 일요일쯤 되어야 집에 돌아올 거야. 이번 주는 같이 놀지 못하겠다.”“아, 괜찮아. 나중에 시간이 되면 만나서 놀자.”두 사람이 함께 놀러 갈 수 있는 기회는 많았기에 별로 아쉽지 않았다. 그들은 팔짱을 낀 채 매점으로 향했다.노예린은 또래 아이들보다 어렸지만 몇 살이나 차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태어나자마자 노씨 가문에 입양된 것이 아니었다. 노씨 가문에서 골격 연령을 검사해 보았지만 정확하게 어느 날에 태어났는지 알지 못했다.하은진은 그녀를 친한 여동생으로 여기면서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매점에 들어간 하은진은 노예린에게 간식을 가득 쥐여 주었다. 두 사람은 줄을 서면서 연회에 관한 얘기를 이어갔다.“사실 나도 연회에 가고 싶지 않아. 그곳에서 모두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잖아. 사람들이 왜 지루한 연회에 참석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노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예린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어른들의 대화는 지루한 편이지. 하지만 연회에 가면 맛있는 디저트를 먹을 수 있잖아.”그 말에 하은진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앞에 선 아이들이 계산을 마친 후 하은진과 노예린의 차례가 되었다.노예린은 한가득 들고 있던 간식을 내려놓고는 카드를 꺼냈다. 이때 누군가가 들고 있던 음료수를 그 옆에 놓았다.고개를 돌려 보니 성노을이었다. 하은진은 노예린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팔목을 붙잡았다.그녀는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눈치를 살피면서 입을 다물었다.노예린은 성노을의 음료수를 들이밀면서 말했다.“같이 계산할게요.”그녀는 카드를 건네고는 성노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오늘 아침에 도와줘서 고마워. 이건 내가 살 테니 부담가지지 마.”성노을은 카드를 꺼내려다가 도로 넣었다.“알겠어.”노예린은 만족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