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친 성유리를 실은 구급차는 얼마 안 지나 바로 병원에 도착했다.성유리의 얼굴에 흐르던 피는 이미 멈췄지만 의사는 봉합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마취주사 때문에 얼굴에 감각이 없는 상태였음에도 성유리는 의사가 자신의 피부를 바늘과 실로 꿰매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봉합 수술이라 성유리의 치료는 응급실 안에서 진행되었고 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 응급실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지금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성유리조차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가 봉합을 끝마칠 때까지도 박한빈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 반면 연정우는 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유리가 응급실 밖으로 나오자 연정우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괜찮아? 많이 아프진 않아?” 성유리는 묻는 연정우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 집에 데려다줄게.” 연정우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가던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을 본 연정우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정우는 내색하지 않았고 이내 미소를 띠며 물었다. “왜 그래?” “유효정 씨 일은 처리 안 해도 돼?” 침묵하던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 “지금쯤 경찰 손에 잡혀 아무것도 못 할 텐데 너는...”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연정우는 화를 억누르는 듯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원래대로라면 성유리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그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효정 씨 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연정우는 빠르게 표정을 바꾸며 다시 말을 이어갔고 성유리는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이번에 유효정이 건드린 사람이 너니까 박한빈 씨가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근데 박한빈 씨는 오늘 밤 왜 안 왔을까?” 그의 말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이 왜 안 왔는지는 모르겠어. 근데 이제 보니 유효정 씨가 대체 왜 그렇
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에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채 정리할 틈도 없이 성유리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죽었다는 그 사람이 혹시 최정민 씨야?” ... 연정우가 말한 죽은 자는 정말로 최정민이었다. 그녀는 아파트 단지 21층 발코니에서 추락해 현장에서 즉사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녀가 죽었을 당시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바로최정민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집 안에는 그녀외에 오직 박한빈만 있었다. 늦은 시각, 다 큰 성인인 남녀 단둘만 남겨진 상황.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미 사람들의 온갖 추측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박한빈의 신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각종 소문이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최정민과 박한빈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는 최근 그들 사이에서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그녀가 옷차림이 흐트러진 채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두 사람이 지나치게 방탕한 놀이를 하다 사고로 발코니에서 떨어져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살을 결심한 여자가 그런 상태로 죽을 리 없으니까 말이다. 원래 재벌가의 이야기는 연예계의 가십보다 더 자극적이다. 그렇기에 대중의 관심은 더욱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이 성유리에게 연락을 시도해 이번 사건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얼마 전 박한빈이 성유리의 결혼식에서 그녀 대신 칼을 맞아준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때 그의 행동에 충격받는 한편 또 많은 감동을 받았다. 모두가 박한빈이 성유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진 일은 이 모든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박한빈과 최정민의 관계에 대해 그녀가 남들보다 더 아는 것도 없었으니 최정민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성유리는 그때 자신이 김서영에게 무슨 대답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통화를 끝낸 후, 그녀는 방에 혼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요즘 성유리는 기자들이 자신을 행여나 쫓아오며 귀찮게 할까 봐 무서워서 지난 며칠 동안 외출을 하지 않았다. 청소하러 온 도우미도 분명 뉴스를 봤을 테니 요즘 성유리를 볼 때마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가사도우미는 조심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성유리를 어딘가 동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성유리는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만나기보다는 방에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됐다. 성유리가 다른 일에 자신의 주의를 돌리려고 태블릿을 열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러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윽고 도우미가 올라와 성유리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사모님, 박 대표님 남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만나시겠습니까?” 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표정만으로 도우미는 감히 어떤 것도 추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네. 만날게요.”결국 만나겠다는 결정을 내린 성유리는 바로 몸을 일으키며 방 밖으로 나갔고 도우미는 곧 박세빈을 집안으로 들였다. 전과 달리 박세빈은 최근 아주 잘 지내는 것 같아보였고 여전히 단정하고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는 더욱 꼼꼼하게 빗어 넘겼다.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박세빈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형수님.” 그의 말에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바로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형수님, 최근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습니다. 제 형이 너무 걱정되어서 그런가요?” “할 말이 있으면 그냥 바로 말하세요.” 성유리는 그와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형수님은 역시 제 의도를 알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박세빈이 옅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성유리는 어딘가 기뻐 보이는 그를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이건 다 박세빈 씨가 계획한 거죠?” “최정민 씨의 목숨을 앗아가
“최정민 씨가 전에 그러더군요. 형이 가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볼 때가 있다고. 마치 그녀에게서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를 보는 것처럼요. 제 추측이 맞다면 그 사람은 아마... 형수님이겠죠?” 박세빈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의 형수님이겠죠. 지금의 형수님은 너무 이성적이고 차분하니까요. 이번 일만 봐도 그렇습니다. 다른 여자라면 남편이 이런 사건에 연루됐다는 걸 듣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을 겁니다. 아니면 최소한 남편을 위해 무언가를 도모하든지 아니면 화를 내든지 했겠죠. 그런데 형수님은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박세빈의 말투는 가볍다 못해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점은 형이 저보다 더 잘 알 테고 그걸 더 직접적으로 느낄 테니 다른 여자에게서 그런 감정을 찾으려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가 마치 같은 남자 입장에서 박한빈이 이해가 된다는 듯한 태도로 이야기하자 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갑작스러운 웃음에 박세빈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해버렸다. “그래서요? 오늘 여기 온 이유가 이 얘기를 하려고 온 거예요?” “물론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박세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형수님께 한마디 해주려고 왔습니다. 형수님, 진지하게 하는 얘긴데 형이랑 이혼하세요.” 그의 말투는 사뭇 진지했다. “그런 남자와 더는 무슨 미련을 두고 계시는 겁니까? 이번 기회를 틈타 이혼하시고 자유로워지세요.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성유리는 미소를 억지로 띠며 조용히 박세빈의 말에 반박했다. “우리가 이혼하든 말든 박세빈 씨하고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당연히 있죠.” 박세빈은 웃으며 대답했다. “곧 박씨 그룹 소유의 그룹은 제가 이어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죠.” 그는 조금 더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이런 말을 덧붙였다. “형이 형수님 태도에 얼마나 실망하고 상처받았는지 알잖아요. 그래서 다른 여자에게서 위안을 구했겠
여론이 가장 뜨거웠던 며칠 동안, 박한빈은 경찰서에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며 상황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지만 박한빈의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언론 기사들이 쏟아지며 발칵 뒤집혔다. 그날 아침, 경찰서 정문 앞은 이미 기자들로 가득했다. 마이크와 카메라가 준비된 채, 모두가 박한빈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최신 뉴스를 잡으려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서훈은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 박한빈에게 다른 시간이나 경로로 나가는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서훈은 박한빈이 무언가 계획이 있음을 깨닫고 더는 자신의 의견을 내지 않았고 대신 경찰의 절차에 따라 모든 과정을 마쳤다. 문밖의 기자들은 숨을 죽인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박한빈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들은 마치 상어가 신선한 피를 발견한 듯 일제히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박한빈을 둘러싸자 경찰서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박 대표님, 이번 사건에 대해 해명하실 부분이 있습니까?” “고인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재 고인의 부모님이 지화 본사 앞에서 울부짖으며 박 대표님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지화의 향후 경영은 누가 맡게 될 것 같습니까?”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쏟아지는 마이크들은 마치 박한빈의 머리를 조준하고 있는 총구처럼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그런 선 넘는 질문들에도 놀라운 침착함을 보였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자들이나 사람들을 한 바퀴 쓱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 저는 경찰이 공정한 판단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이어 이런 말을 덧붙였다.“또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고인과 어떠한 부적절한 관계도 없었으며 제 아내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도 없습니다.” 기자들은 그가 이 사건과 지화의 미래에 대해 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
얼마 안 지나 박한빈은 실은 차는 도연제에 도착했다. 박한빈은 요 며칠 머릿속으로 항상 성유리의 상황을 생각하고 걱정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그는 박세빈이 설계한 “덫”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진즉에 눈치챘다. 필경 그날 밤, 만약 그 전화 한 통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곳에 성유리가 최정민과 함께 있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박한빈은 늦은 시간에 최정민을 만나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박한빈은 그 사람들이 행여나 성유리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까 봐 걱정되었다. 경찰서에 있는 내내 불안하고 급한 마음에 안절부절 하던 박한빈이었지만 항상 성유리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고 어떻게 해야 빨리 벗어날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막상 집에 도착하니 박한빈은 망설였다. 한참을 현관에 서 있던 그는 가사도우미가 문을 열어줘서야 집으로 들어섰다. 박한빈을 발견한 도우미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미소를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오셨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도우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박한빈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성유리는요?” 입을 여는 순간 박한빈은 지금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즘 유리는 어떻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사모님 아주 잘 지내고 계셨어요.” 분명 박한빈이 원하던 대답이었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성유리의 근황을 듣자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도우미는 박한빈의 기분을 눈치 차렸는지 말을 덧붙였다. “제 말은 걱정하실 필요 없다는 말이었어요. 사모님은 요즘 무탈하게 지내고 계셨으니까.” 말을 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심각해졌고 도우미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닫아버렸다. 박한빈은 그런 도우미를 쓱 쳐다보고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성유리는 자신의 방에 있었다. 그녀는 컴퓨터를 켜 미리 그려놓은 그림에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하도 평온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저녁에는... 누가 나한테 전화가 왔더라고. 네가 최정민이랑 같이 있다는 소식을 알려줘서 급히 그곳으로 간 거야.” “근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최정민을 만나지도 못했어. 걔가 자기 자신을 방안에 가두고는 바로 발코니에서 뛰어내린 거고.” “나는 도대체 왜 걔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어!” “나랑 걔 사이는 정말 결백해.” 박한빈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성유리에게 그날 상황을 설명해 줬다. 성유리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박한빈의 말을 듣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박세빈이 짜놓은 판이야.” “전엔 내가 너무 방심했어. 난 걔가 최정민을 죽음으로까지 내몰 줄은 몰랐어. 근데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다 해결할게. 넌 먼저...” “됐어요.” 박한빈은 다른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그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 가벼운 한마디일 뿐이지만 박한빈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 갔다. 그는 성유리를 가만히 쳐다보다 물었다. “무슨 뜻이야?” “박한빈 씨 스스로 말했잖아요. 이건 박세빈 씨가 짜놓은 판이라고. 그럼... 이건 두 형제지간의 싸움 아니겠어요?” “전 이런 일에 참견하는 것은 딱 질색이에요. 이번엔 그냥 얼굴을 다쳤을 뿐이지만 다음에는요? 혹시나 죽을지 누가 알아요?”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일은 꽤 심각하지 않나요? 요즘 지화 그룹의 주식들을 확인해 보세요. 그냥 풍비박산 났다고 볼 수 있어요. 투자자들이나 이사회 쪽 사람들은 박한빈 씨에게 대가를 치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지금 당신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박한빈 씨가 제일 잘 알 거예요.” “그래서?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성유리는 평온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박한빈이 갑자기 묻자 순간적으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
그 눈빛에는 성유리의 진심이 가득 담겨있었고 마치 박한빈에게 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익의 평행. 이건 박한빈이 어릴 때부터 배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늘 이 방면에서 자신은 우수하다고 생각했다. 업계에서나 다른 방면에서 박한빈은 자신의 실력으로 높은 위치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는 꿈에서도 지금 자신이 평행한 이익 관계에서 질 줄은 몰랐고 이렇게 처참하게 버려질 줄도 몰랐다. 박한빈은 꼭 잡고 있던 성유리의 손을 놓아주더니 뒤로 물러섰다. “무슨 뜻이야?”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성유리에게 계속 물었다. “나를 떠나려는 이유가 바로 이거야?” “성유리. 지금 네가 최정민 때문이라고 한마디만 했으면 나는 널 용서할 거야.” “그 말을 하면 네가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확실하니까. 내가 다른 여자랑 이런저런 구설수에 올랐다는 사실에 불쾌해한다는 거니까. 안 그래?” 박한빈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야. 네가 어떻게 질투했겠어? 정말 나를 신경 썼다면 요즘 이렇게 잘 지내지도 못했을 거야. 유리야, 내가 경찰서에 있던 며칠 동안 넌 나를 걱정이나 했어?” “아니면 넌 내가 그 안에서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었니? 며칠 동안 넌 나랑 어떻게 해야 이혼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웃고는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끝없는 냉랭함과 음침함, 그리고 눈빛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낯선 감정도 보였다. 성유리는 박한빈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박한빈이 말한 것대로 성유리는 그를 속일 생각마저 없는 것 같았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보며 이빨을 꽉 깨물었다. 요즘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또다시 위가 아팠지만 신기하게도 지금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지금 지화 그룹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지. 원래 난 바로 회사로 갔어야 하는데 그래도 난 회사가 아닌 너를 먼저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