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차 안에는 적막만이 흘렀고 침묵하던 하늘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엄마, 나는 하나 이모랑 더 놀고 싶어.”“응.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자고 약속했어.”“연정우 아저씨도 와?”하늘이가 물었다.아이의 말에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박한빈을 슬쩍 쳐다보았다.다른 이유에서가 아닌 행여나 박한빈이 갑자기 화를 낼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운전만 했다.성유리는 그제야 하늘이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아이는 잔뜩 신나 하며 말했다.“와! 너무 좋아. 난 연정우 아저씨랑 같이 노는 게 제일 행복해.”“왜?”“왜냐하면 정우 아저씨는 잘생겼거든. 그리고 아저씨는 엄마를 잘 보호해 줄 것 같아.”하늘이의 말에 운전만 하던 박한빈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조롱 섞인 눈빛으로 성유리를 쳐다보았다.성유리는 그의 눈빛을 애써 못 본 체했고 시선을 하늘이에게만 고정했다....성유리는 그날 저녁, 연정우와 밥 약속이 있었다. 필경 전에 갑자기 연정우와의 약속을 취소해 버린 죄가 있으니 말이다.게다가 곧 금성을 떠날 성유리기에 오늘 밤이 아니라면 아마 만날 기회가 더는 없을 것이다.하지만 성유리는 하늘이까지 데리고 그와 만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세 사람이 같은 장소에 있으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저번에 놀이공원을 가려고 한 날에도 성유리는 사실 사하나와 함께 가려고 약속을 한 상태였다.사하나는 성유리가 자신과의 약속을 깨고 박한빈과 함께 놀이공원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잔뜩 화가 나 씩씩거리기도 했다.그녀는 한결같이 성유리가 얼른 박한빈과 하늘이 사이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빨리 불필요한 관계를 끊으라고 재촉하고 있었다.생물학적인 아버지라는 존재는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성유리가 누누이 말한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는 말 또한 사하나는 전혀 새겨듣지 않았다.사하나는 박
“내일 몇 시 비행기예요? 전 내일 바빠서 아마 공항까지는 못 데려다줄 것 같아요.”사하나는 말을 하면서도 연정우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그녀는 지금 너무나도 티 나게 연정우에게 무언의 암시를 주고 있었다.연정우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사하나의 말에 대답했다.“그래요? 유리야,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 몇 시 비행기야?”성유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그럴 필요 없어. 우리가 알아서 택시 타고 갈게.”“그래도 내가 데려다줄게. 다음엔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연정우는 성유리를 조금 원망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고 옆에 있던 사하나도 맞장구를 쳐줬다.“연 대표님 말이 맞아요. 성유리 씨? 이번엔 결정을 너무 빨리 내리신 것 같아요. 저희한테 반응할 틈도 안 주시고.”성유리는 두 사람의 말에 그저 옅은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그때, 연정우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하늘이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건 아저씨가 주는 선물이야.”하늘이는 핑크색으로 정교히 포장돼 있는 선물 상자를 보고는 성유리의 눈치를 쓱 살폈다.성유리는 단번에 상자 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로고를 발견했는데 어린아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귀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이 선물을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하는 와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어머,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사하나가 먼저 뒤돌아 소리가 나는 쪽을 봤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음료를 뱉을 뻔했다.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한빈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던 안희연이었다.꽤 잘나가는 인플루언서인 안희연은 멀리서 봐도 자태가 아름다웠지만 금성에서는 내놓을 정도의 미모가 아니었다.그래서 사하나는 박한빈이 안희연이 바람을 피우는 사실을 알고 나면 당연히 그녀를 내팽개칠 줄 알았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러지 않았다.안희연의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박한빈이었다. 그녀는 그의 팔짱을 꽉 끼고 있었는데
사하나는 그런 안희연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안희연 씨 맞으시죠? 전에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모습 본 적 있는 것 같아요.”“아, 그래요?”안희연은 그제야 사하나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환하게 웃으며 대답을 이어갔다.“사하나 씨 제 팬이신가 봐요?”‘팬? 누가? 별꼴이야. 정말!’사하나는 속으로 안희연을 몇 번이나 욕했지만 입 밖으론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그러다 감정을 추스르고는 입을 열었다.“팬은 아니고 그냥 몇 번 본 것뿐이에요. 근데 제가 알기론 남자 친구 있으시지 않았나요? 안희연 씨랑 친구라고 한 것 같은데.”“맞아요. 그렇지만 저희는 이미 헤어졌어요.”안희연은 사하나의 말을 깔끔하게 인정하며 계속 말했다.“이 시대에 연애 좀 하는 것도 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잖아요. 누구나 다 과거는 있는 법이죠. 안 그래요?”안희연은 성유리를 쓱 쳐다보며 이런 말을 했는데 마치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유리는 그저 박한빈의 과거일 뿐이라는 말을 전하려는 의도 같았다.그 모습에 겨우 화를 억누르던 사하나가 폭발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표정 관리를 못하던 사하나를 본 연정우는 먼저 술잔을 들며 말을 꺼냈다.“이제 보니 박 대표님이랑 이렇게 같이 식사하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이 기회를 빌어 제가 한 잔 따라드릴까요?”박한빈은 연정우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좋습니다.”두 사람은 그렇게 술잔에 가득 담긴 술을 단번에 마셨다.한잔, 두잔, 세잔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음주에 놀란 사하나가 낮은 소리로 성유리에게 말했다.“지금 이게 뭐 하는 거예요?”“혹시 누가 먼저 취하는지 붙어보려는 건가? 연 대표님 주량이 어떻게 돼요?”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뚫어져라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기만 했다.솔직히 말하면 성유리는 지금 두 사람이 이러는 게 너무 싫었다.
“이제 그만 마셔요. 너무 속상하니까!”성유리가 방에서 나왔을 때, 마침 사하니의 목소리를 들었다.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한 손으로 목을 꽉 잡은 채로 애써 안희연의 목소리를 따라 하고 있었다.원래부터 안희연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하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밥을 같이 먹다 보니 더더욱 안희연이라는 사람이 극도로 싫어졌다.성유리는 사하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먼저 물었다.“안희연 씨가 너한테 무슨 큰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싫어해?”“왜 싫어하냐고요?”그녀의 말에 사하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싫어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저 연기하는 꼴 좀 보세요! 게다가 방금도 언니를 막 조롱하려고 했잖아요. 언니는 그저 박한빈 씨 과거 애인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밝히고 비웃은 거잖아요!”“어떻게 보면 정말 대단해요. 과거 일로 말하자면 저도 말할 게 많다고요. 전에도 막 다른 남자랑 쇼핑하고 호텔도 갔잖아요. 박한빈 씨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여자를 도대체 왜 좋아하는 거죠?”“언니, 내 생각엔 박한빈 씨가 일부로 저러는 것 같아요. 언니 질투심을 유발하려고 저러는 게 분명해요. 그게 아니면 전 이해가 안 돼요. 좀 잇다 돌아가서 그 여자 얼굴 볼 생각만 하면 토 나온다니까요! 근데 언니는 왜 자꾸 저를 쿡쿡 찌르세요?”말문이 한번 트이기 시작한 사하나는 멈출래야 멈출 수가 없었다.그녀가 말하는 동안 성유리는 몇 번이나 끼어들려고 했지만 기회를 다 놓쳐버렸고 어쩔 수 없이 사하나의 손을 잡거나 쿡쿡 찔러야 했다.그러자 사하나는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을 한 채 미간을 찌푸리며 성유리를 쳐다보았다.성유리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뒤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하나는 순식간에 등골이 싸해졌다.뒤를 천천히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안희연이 미소 띤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전에 화장실에서 사람들이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거나 욕을 하는 모습을 많이 봤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이
안희연은 아주 담담한 말투로 대답하며 두 눈으로는 사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자신의 아이큐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것 같은 안희연의 발언에 사하나는 화가 나 부들부들 떨었다.‘그러니까 박한빈 씨도 이런 식으로 달랬다는 거지?’사하나는 딱 봐도 거짓말인 안희연의 설명을 박한빈이 믿었다는 사실이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만약 박한빈이 안희연을 믿어준 게 사실이라면 사하나는 박한빈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다.‘미친놈이 아니라 바보였나?’성유리는 사하나의 손을 재빨리 잡으며 안희연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그 순간, 안희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성유리 씨, 저 할 말 있어요.”“뭐라고요?”사하나가 먼저 고개를 돌려 안희연을 당장이라도 때릴 듯 째려보며 말했다.“지금 본인이 뭐라도 됐다고 착각하시나 본데 당신은 저희랑 대화를 나눌 자격도 가치도 없는 사람이에요.”“사하나 씨, 저는 성유리 씨랑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그쪽이 아니라.”“저...”사하나는 치가 떨려 당장이라도 다가가 안희연의 머리채를 잡으려 했지만 성유리가 급히 말렸다.그리고는 안희연을 바라보며 차분히 물었다.“하실 말씀이 뭐죠?” “아, 네. 곧 경운시로 돌아가신다고요?” “네.” “정말 잘됐네요.” 안희연은 더욱 밝게 웃으며 계속 말했다.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박한빈 씨를 옆에서 잘 챙길 테니까.““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성유리는 아주 차 분한 어조로 대답했다.“두 분이서 만나시든 말든, 누가 누구를 챙기든 저랑은 이제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제가 경운시로 돌아가려는 이유 또한 당신들이랑 상관없고요.”그녀의 대답에 안희연은 말문이 막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성유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하나의 손을 잡고는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사하나는 기분이 많이 좋아졌는지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맞아요! 제가 바라던 게 바로 이런 거라고요. 언니 정말 멋졌어요! 오늘에서야 저는 비로소 알 것
연정우가 하늘이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성유리는 결국 받아들였다.그러나 반짝이는 보석이 붙어있는 머리 집게가 하늘이의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몇 번 보고 나서는 서랍 안에 넣어버렸다.“이건 안 가지고 갈 거야?”성유리가 묻자 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별로 마음에 안 들면 엄마가 이 선물 연정우 아저씨한테 돌려줄까?”“응,”너무도 빠르게 대답하는 하늘이의 모습에 성유리는 의아해졌다.“아저씨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왜 아저씨가 준 선물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야?”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하늘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러더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연정우 아저씨 좋아. 그냥 나한테 준 선물이 마음에 안 드는 것뿐이야.”성유리가 여전히 의미심장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하늘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어갔다.“난 인형이 더 좋아. 엄마가 나중에 아저씨한테 말해서 나한테 인형 하나 사달라고 해. 나는 토끼 인형 갖고 싶어.”피와 살이 찢기는 고통을 느끼면서 직접 낳은 아이의 감정을 성유리가 못 알아차릴 리가 없다.하지만 그냥 모르는 척 연기하며 자세한 원인은 묻지 않았고 하늘이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했다.원래는 약속한 대로 연정우가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줄 알았지만 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도 와 있었다.게다가 박한빈의 신분은 연정우와는 다르지 않는가?아이와 피가 섞인 가족이자 아버지인 박한빈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오더니 성유리와 하늘이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성유리는 생각지 못한 그의 등장에 멍해 있다 정신을 다잡고는 박한빈을 막으려했다.그리고 그 순간, 연정우의 차 또한 두 사람이 머물던 집 밑에 세워졌다.박한빈을 발견한 연정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차에서 내려 한 손으로 캐리어를 꼭 잡더니 물었다.“하늘이는요? 아직 안 내려왔습니까?”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연정우의 행동에 박한빈은 자신이 마치 짐을 날라주는 짐꾼이 된 기분이 들었다.아직 아이의 캐리어를 손에 넣지 못한 연정우가 다시 손을 뻗자 박한빈은
마치 자신을 왕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이런 상황이 죽도록 싫었다.한참을 망설이던 성유리는 박한빈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캐리어를 손에 넣으려 했다.박한빈은 멍하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다 성유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손에 들려 있던 캐리어를 꽉 쥐었다.성유리 또한 박한빈의 힘을 느낄 수 있었기에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이거 놓으세요.”힘을 세게 쓰고 있는 바람에 박한빈의 팔에는 핏줄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연정우와 자신 사이에서 연정우를 선택한 성유리의 결정이 박한빈은 믿기지 않아 성유리를 쳐다봤다.옆에 있던 김서영은 박한빈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성유리에게 다가가더니 말했다.“유리야, 그래도...”“박한빈 씨, 이 손 놓으라고요.”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을 올려다보며 방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쳐다보다 문득 어젯밤 안희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녀는 성유리의 심장이 더는 박한빈을 위해 뛰지 않는다는 말을 했었다. 처음에 박한빈은 안희연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성유리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을 보니 안희연이 했던 말이 다 사실 같았다.캐리어를 꽉 쥐고 있던 박한빈은 서서히 손에 힘을 풀었고 성유리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캐리어를 휙 낚아챘다.이런 상황을 지켜만 보던 연정우는 살짝 미소 지으며 성유리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돌려 하늘이를 보며 말했다.“가자. 엄마랑 같이 지하철 타고 갈까?”하늘이는 성유리의 말에 잔뜩 신나 하며 폴짝폴짝 뛰었다.“좋아!”성유리는 아이의 순수한 웃음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고 고개를 돌려 김서영과 마지막 인사를 한 뒤, 하늘이의 손을 잡고 떠나려 했다.그러나 뒤에 있던 연정우가 서둘러 두 사람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지하철 타고 갈 거야?”“응. 지하철 타고 가면 공항이랑 연결된 길이 있어서 사실 내가 더 편해.”“여기서부터 지하철역까지 가려면 거리가 좀 있을 텐데? 내가 데려다.
경운시에 있는 집은 이미 장시간 방치돼 있는 상태였다.성유리가 집에 돌아간 뒤, 며칠 동안 열심히 청소를 했고 그제야 집은 그나마 깨끗하게 치워졌다.집을 청소하는 와중에 하늘이는 마치 바삐 움직이는 한 마리의 꿀벌처럼 성유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도왔다.성유리가 이제 드디어 안정적인 삶을 다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인터넷에 갑자기 사과 영상 하나가 올라왔다.그 영상은 몇 달 전 성유리와 이우빈의 사이에 대해 해명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영상 속 상대는 사실 그때 자신은 한 번도 직접 성유리가 이우빈에게 대시하거나 일부러 말을 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사실대로 토로했다.그와 동시에 이우빈이 성유리와 함께 일을 하는 것이 질투가 나 나쁜 마음을 품고 거짓 소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사람들은 이 일을 거의 다 잊고 있었지만 그래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연예인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자 인터넷은 다시 뜨겁게 달궈졌다.게다가 이우빈 또한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자신과 성유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문장을 올리는 동시에 몇 달 전 왜 직접 나서서 해명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덧붙였다.회사에서 이우빈에게 조용히 있으라는 말을 해 아무 해명도 하지 못한 사실에 지금 성유리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말,이우빈이 올린 마지막 문장에는 자신을 몰래 찍는 사생팬들을 나무라는 말이었고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이내 성유리는 이우빈 회사 측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죄송해요. 성 선생님. 이번 일은 저희 책임도 있어요. 저희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도 큰 죄죠.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그 팬이라는 사람 저희가 알아서 처리했고 인터넷에 사과 영상도 올리라고 했어요. 경찰도 그 여자에게 마땅한 벌을 내리겠다고 약속했고요.”“지금까지 저희가 후기 작업을 거의 다 마쳤어요. 이제 두 달만 있으면 정상적으로 방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성유리 선생님 이름은 꼭 제일 위에 잘 보이는 위치에 적을게요.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