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남자는 소나무처럼 반듯하고 늠름하게 서 있었다.강민아를 향해 쏟아지는 꽃과 박수를 바라보며 심은호의 눈동자는 웃음으로 빛났다.여러 교수가 강민아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강민아는 정신을 차리고 학계 거물들을 맞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그녀는 이들과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인파를 헤치고 심은호를 향해 걸어갔다.심한기도 거기 있었다.강민아는 심한기 앞에 가만히 서서 심호흡한 뒤 심한기에게 말했다.“교수님, 저 돌아왔어요!”심한기가 두 손으로 뒷짐을 진 채 숨을 참는 걸 보니 표정 관리를 하는 게 분명했다.“쳇, 난 너 필요 없다!”심한기가 입을 삐죽거리자 강민아는 아직 장기명에게 성과를 빼앗긴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걸 알았다.“교수님...”강민아가 해명하려고 입을 열려고 할 때 심한기가 말했다.“그냥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 네가 여전히 빛나는 존재인지 나도 지켜볼 테니까.”심한기의 말에 강민아는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녀를 원망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그녀가 잘되길 바라고 있었다.몇 명의 교수들이 더 모여들었다.“강민아 양, 제17회 이노베이션 서밋 포럼의 추천서인데 서경대를 대표해서 포럼에 초대하고 싶습니다.”강민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특허받은 것을 좋은 가격에 팔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이노베이션 포럼에 참석하는 것이 최적의 선택이었다.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교수들이 투덜거렸다.“하여튼 권 교수 빠르다니까.”또 다른 교수는 같은 추천서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강민아 양, 고연대를 대표해서 과학기술 서밋 포럼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고연대에서 보내드리는 추천서이니 이걸로 꼭 포럼에 오시길 바랍니다.”서경대 교수는 즉시 고연대 교수의 손을 제지했다.“이봐, 내가 먼저 추천서를 줬어. 받아도 우리 서경대 추천서로 포럼에 가야지.”두 교수가 논쟁을 벌이는 동안 다른 대학의 여러 교수가 강민아에게 추천서를 전달했다.수십 장이 넘는 추천서가 눈앞에 다가오자 강민아는 어떤 추천서를 받아들여야 할지
심은호가 손을 들어 심한기의 침이 강민아에게 튀는 것을 막았다.심한기는 코를 훌쩍거리며 중얼거렸다.“어디서 구린내가 나.”다른 교수들은 그의 말에 코를 킁킁거렸다.“구린내? 난 모르겠는데?”정신을 차린 강민아가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몇몇 교수들에게 보여주었다.“이미 공식 초대장을 받았어요.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말하는 순간 귀신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방연석이 사람들 틈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강민아와 눈이 마주친 방연석은 고양이를 본 쥐처럼 뒤돌아 도망치듯 달려갔다.방연석은 본선에서 100위 밖에 안착해 자격 미달로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지 못했다.결선에서 2위를 차지한 참가자가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 때까지도 방연석은 조직위원회가 결선 2위를 차지한 참가자에게 금상을 수여해 주기를 기도하고 있었다.그에겐 그 참가자가 강민아도 훨씬 뛰어나 보였으니까.강민아가 금상 트로피를 쥐는 순간 방연석은 당황했다.자신과 강민아의 내기가 떠올라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황급히 현장을 벗어나 그는 어디든 숨을 곳을 찾으려 했다. 이 열기가 지나가면 아무도 그와 강민아의 내기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악!”그러다 복도에서 누군가 부딪혔다.덩치가 크고 돌처럼 단단한 상대와 부딪힌 방연석은 그대로 튕겨 나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정작 당사자는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방연석은 욕설을 중얼거리면서도 비틀비틀 일어나 부딪힌 사람을 미처 살펴보지도 못했다. 어깨를 부딪쳐 그를 넘어뜨린 사람이라면 분명 자신이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벽을 붙잡고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온 방연석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어느새 거기에 약봉지 하나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당황한 방연석이 약을 꺼내 뒷면에 적힌 설명을 확인했다.변비 해결...‘설마 설사약?’그의 주머니에 대체 언제 이런 약이 들어가 있었던 걸까.방연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이런 젠장!”그는 바닥에
반하준의 전화가 뚝 끊어지고 회의실 전체에 죽음의 침묵이 감돌았다.반하준의 주위로 겹겹이 두꺼운 얼음이 쌓여갔다.강민아가 또다시 그와 대치하고 있다. 대체 언제까지 소란을 피울 작정인지!반하준의 차가운 얼굴과 어두운 동공엔 억눌린 격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는 다시 강민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건 기계적인 음성이었다.“고객님의 전화가 꺼져 있어...”강민아가 또 그를 차단했다.반하준이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드는데 주주들이 서로 눈치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내가 민아한테 연락해 볼게.”반용화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다.반용화가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고 스피커 모드로 돌리자 주주들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이며 전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이윽고 통화가 연결되었다.“연구원님, 저 상 받은 거 알고 전화하셨어요?”기쁨에 가득 찬 강민아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반하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렇듯 들뜬 강민아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다.“축하해.” 반용화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강민아!”반하준이 살벌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너 방금 내 전화 끊었어?”강민아는 3초 동안 전화기 너머로 침묵을 지켰다.“연구원님, 전에 제가 말씀드린 것 다시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반하준의 날카로운 턱이 굳게 다물리며 그의 얼굴은 그을린 냄비보다 더 어둡게 변해갔다.강민아는 지금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그것도 일부러!‘그래, 꼭 내가 먼저 달래는 말을 듣고 싶다는 거지?’반하준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강민아, 밥 한번 먹자.”한 번도 자신이 먼저 한발 물러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이는 강민아와 이혼한 후 그가 베푸는 최대한의 용서와 친절이었다.반용화의 휴대폰에서 강민아의 목소리가 들린다.“연구원님, 저랑 같이 식사 한번 하실래요?”반하준은 강민아가 부끄럼을 타서 굳이 다른 사람까지 부른다는 생각에 우스웠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게 두려
처음에야 아이들도 신기해하지만 며칠 동안 계속 얘기하니 무척 지겨웠다.게다가 지난주부터 민이는 루나가 자기 집에 온다고 말했지만 지금까지도 기다리기만 하니 민이를 대하는 다른 아이들의 태도도 시큰둥해졌다.민이는 정이에게 다가가는 아이를 보고는 바로 소리를 질렀다.“강윤정이랑 한 팀인 애들은 수업 끝나고 남아서 장비 정리하고 장비실 청소할 거야!”민이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아무도 감히 강윤정에게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체육 선생님은 늘 민이에게만 관대하게 대하며 체육 반장을 시켜서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 남아서 청소하는 아이들을 정하게 했다.체육 선생님은 민설윤과 강윤정만 한 팀을 이룬 것을 보고는 바로 소리쳤다.“5인 1조로 배구 경기할 거야. 너희 둘은 다른 팀으로 들어가.”그가 두 아이를 각기 다른 팀으로 들여보내니 민설윤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팀으로 갔다.“선생님, 저희는 강윤정이랑 팀 안 할래요!”정이가 새 팀에 들어가려는 순간 팀에 있던 아이들이 손을 들고 외쳤다.체육 선생님은 다른 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강윤정은...”“선생님, 우리 팀에는 사람 다 찼어요.”“우리도 강윤정이랑 같은 팀 하기 싫어요!”“강윤정은 자기 엄마처럼 반칙할 텐데 같이 놀기 싫어요.”상대적으로 정보에 뒤처진 아이들은 부모님으로부터 강윤정 엄마에 대해 어렴풋이 들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듣지는 못했다.학교에 와서 서로 집에서 들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민이의 영향까지 받으니 당연히 아이들은 정이를 따돌리며 아무도 한 팀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교실에서도 쉬는 시간이 되면 민설윤과 반연주 외에 아무도 정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체육 시간에 선생님은 몸이 약한 반연주를 옆에서 쉬게만 하면서 체육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정이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강윤정이 된 후부터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여린 분홍빛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엄마와 약속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로.정이는 체육 선생님을
함께 팀을 이룬 아이 중 누구는 손으로 땅을 지탱한 채 혀를 내밀었고 누구는 바닥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반현민, 우린 일어나지도 못하겠는데 재경기?”민이는 옆에서 체육 선생님이 정이에게 꽃 스티커를 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체육 선생님이 스티커 다섯개를 가져왔고 정이가 혼자 5인 팀을 상대해 1등 했으니 꽃 다섯개는 전부 정이 몫이었다.민이는 심술 가득한 얼굴로 정이에게 삿대질하며 명령했다.“1등 한 사람이 도구 정리해!”“대체 왜?”민설윤이 정이 대신 나서자 반연주도 물었다.“왜 1등 한 사람이 도구 정리해야 하는데?”민이가 말했다.“다른 애들은 다 쟤 때문에 지쳤는데 쟤는 땀도 안 흘리잖아. 쟤가 안 하면 누가 해?”민설윤이 중얼거렸다.“반현민 너도 힘이 넘치는구먼.”민이는 친구의 팔을 어깨에 둘렀다.“난 반장이니까 지친 친구들을 데려다줘야지.”민이가 친구를 부축하며 가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붉어진 얼굴로 아이는 이를 갈며 조용히 윽박질렀다.“걸어. 내가 널 부축해 줘야 해?”다른 친구들은 전부 교실로 돌아가고 민설윤과 반연주만 남아서 정이와 함께 체육 도구를 정리했다.“꺄아악, 살려줘!”갑작스러운 비명에 민설윤과 반연주는 깜짝 놀라고 정이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았다.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어린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마구 뛰어다녔다.검은 운동복에 마스크를 쓴 성인 남자가 손에 나무 막대기를 들고 아이들을 쫓고 있었다.민설윤과 반연주는 제자리에 굳어 있는데 정이가 뛰어갔다.“정아, 돌아와!”“정아, 저쪽으로 가지 마!”두 소녀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정이는 손에 쥔 배구공을 힘껏 던졌고 날아간 배구공은 가면남의 등을 제대로 가격했다.“윽!”가면남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그 가면남이 일어나려 하자 정이는 가면남의 등을 밟고 한 손으로 나무 막대기를 잡고 있던 가면남의 손을 꽉 잡았다.손을 뒤로 꺾자 두둑 소리가 들렸다.“끄아악!”비참한 비명이 운동장 하늘
한 학부모가 그녀에게 속삭였다.“강민아 씨, 유교장 쫓아줘서 감사해요. 지금 원래 있던 교감이 교장이 되고 나서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올해 우수 학생 평가는 공정하게 진행될 것 같아요.”강민아는 겸손하게 말했다.“그건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그날 유영호 씨가 정이를 퇴학시키겠다고 난리를 부리지 않았어도 언젠가 이렇게 됐을 거예요.”오랫동안 유영호에게 불만이 많았던 학부모와 교사들은 강민아에게 고마워했다.“민아야.”반진경이 반연주의 손을 잡은 채 웃으며 다가왔고 그녀의 옆엔 장기명도 있었다.반진경은 얼굴을 허옇게 칠하고 가는 눈썹을 날렵하게 세웠으며 꽤 넉넉한 핏의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채 손에는 은색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10억이 넘는 옥 펜던트를 차고 있었다.과거 반씨 가문에 있을 때도 반진경은 일부러 그 펜던트를 꺼내 강민아에게 과시하곤 했다.장기명은 배운 사람이기에 굳이 옆에 있는 사람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지는 않았다.“민아야, 큰일 났어! 정이가 또 사람을 때렸대!”반진경의 목소리는 날카로워 주변 학부모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반진경은 강민아에게 다가와 눈썹을 치켜세우고 흥분한 표정으로 수다를 떨었다.“연주가 그러는데 네 딸 강윤정이 수업 시간에 또 사람을 때려서 골절시켰대.”이 말을 들은 주변 학부모들은 긴장한 채 서둘러 강민아에게서 아이들을 떼어놓았다.몇몇은 이렇게 당부하기도 했다.“앞으로 강윤정 보면 멀리해. 알았지?”“엄마, 난 강윤정이 부러워요!”강윤정의 이름만 나와도 아이들은 신이 나서 부모에게 이렇게 말했다.“강윤정 엄청 멋져요!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학부모는 아이의 말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왜 강윤정을 따라 해? 하지 마!”그런데 아이들은 여전히 떠들어댔다.“강윤정 혼자 반 애들 다 이겼어요. 혼자서 애들 다 쓰러뜨렸어요.”부모들은 자녀의 설명을 들으며 보디빌더와 비슷한 근육을 가진 소녀를 상상했다.반 아이들이 전부 대자로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는 모습이 떠올랐다.그들은 문득 현기증
강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네, 맞아요.”선생님이 자기소개를 했다.“저는 2반 담임 선생님이에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반진경이 소리를 질렀다.“강민아, 네 딸이 오늘 2반 애들도 때렸어?”주위 학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등 뒤로 숨기기 바빴다.이내 선생님이 손을 내저었다.“아니에요! 오늘 강윤정 어린이가 학교 안전교육 활동에서 가면을 쓴 악당을 물리치고 2반 친구들의 안전을 지켜줘서 강윤정 어린이에게 커다란 꽃 스티커를 줬어요.”“엄마, 봐요.”정이가 받은 스티커를 귀한 보물처럼 강민아에게 보여줬다.옆에서 듣고 있던 반진경은 당황했다.강민아가 물었다.“정이 담임 선생님께선 오늘 안전 교육 활동이 있다는 얘기 없으셨던 것 같은데요.”“그래요.”반진경이 거들었다. 정이가 갑자기 커다란 꽃 스티커를 받은 게 미심쩍었다.그러자 선생님이 말해주었다.“그건 2반에서 진행하는 활동이었는데 강윤정 어린이가 용감하게 나서줬어요. 나쁜 사람과 용감히 맞서는 건 칭찬해 줘야 할 행동이죠.”그렇게 말하며 선생님은 강민아에게 다가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악당을 연기한 아저씨 병원비인데 윤정 어머니께서...”강민아는 이내 알아차리고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제가 부담할게요.”선생님은 강민아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자리를 떠났다.다른 아이들은 학교를 떠나기 전에 모두 달려가 정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반연주는 반진경에게 말했다.“정이가 그 사람을 때려눕혀서 이제부터 어린이반 수호신이 됐어요.”“...”불쾌한 마음에 반진경의 얼굴엔 경멸하는 기색이 번졌다.정이는 미안한 듯 강민아에게 말했다.“엄마, 죄송해요. 오늘 힘을 조절하지 못해서 그 아저씨 손을 부러뜨렸어요.”강민아는 부드럽게 아이를 달랬다.“선생님께서 정이가 용감하게 나섰다고 했잖아. 악당을 연기한 아저씨는 실수로 다치게 했지만 어린이 친구들은 지켜줬어. 주말에 엄마랑 같이 그 아저씨 보러 갈까?”정이는 강민아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투박한 노란색 코트를 입은 장기명은 마치 꼬리를 흔드는 두더지처럼 보였다.강민아는 침묵하며 그가 어떤 연기를 펼칠지 지켜볼 작정이었다.장기명은 강민아가 대꾸하지 않자 심각한 표정으로 한탄했다.“국내는 뛰어난 인재가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운 환경이지. 나만 해도 그래요. 온 힘을 다해서 겨우 시골 마을을 벗어났잖아요. 민아 씨, 저도 안타까운 마음에 하는 말이에요. 학술과 연구에 종사하고 싶으면 해외에 가서 해요. 우리나라처럼 꽉 막힌 곳보다는 거기가 자유로워요.”“전 그냥 제 가족만 챙기면 돼요.”별다른 야망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장기명의 두 눈엔 미소가 번졌다. 강민아는 머리만 똑똑하고 대회에 참가할 뿐 사업적으로 큰 성과를 이루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어쨌든 여자니까.곧 장기명이 제안했다.“취업을 원한다면 외국계 기업에 가야겠네요. 휴가도 두 배로 주고 육아휴직도 있는데 국내 기업에 들어가면 혼자서 일하느라 정이를 언제 돌보겠어요.”마치 정말 그녀를 위하는 것 같은 모습에 강민아는 장기명이 진작 꿍꿍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그를 유도했다.“7년 동안 주부로 살아서 업계에 잘 알려진 회사들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장 교수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실 텐데 지금 제 상황에서 어떤 회사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장기명은 그녀의 유도에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민아 씨, 옴 테크 알아요?”옴 테크는 M국 회사인데 그 배후에는 기술업계 거물인 아비타가 있다.오늘날 아비타는 세계적으로 시가총액 1위 기업이었다.강민아가 모르는 척 고개를 흔들자 장기명이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강민아 씨가 상을 받은 후 옴 테크에서 나에게 연락이 왔어요. 그쪽이랑 연결해 달라는 의미로. 옴 테크가 서경대와 협력관계를 맺고 있고 내 연구 프로젝트에 투자도 해서 얘기하는 거예요. 옴 테크는 강민아 씨에게 후한 연봉을 제시했어요. 연봉 2억에 프로젝트 보너스가 수억에 달하고 주식 배당금과 각종 수당도 다 챙겨줘요. 무엇보다 옴 테크는 103일의 휴가가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
심은호의 말을 들은 반하준은 얼굴이 일그러졌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과 갈비뼈가 아팠다.지금 강민아에게 온몸을 맡기듯 기대어 있는 저 남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다.그런데 지금 오염된 브로치를 손에 들고 강민아에게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해도 해도 너무했다.“강민아, 저놈한테 속지 마!”참을 수 없어 소리를 내지른 반하준은 입안에 온통 피 맛만 감돌았다.그는 복부를 감싼 채 개미 수만 마리가 갉아먹는 듯한 통증을 참고 있었다.바닥에 깨진 유리잔을 바라보며 강민아의 동공은 이미 싸늘해졌다.“심은호 씨 몸에 묻은 레드 와인, 당신이 쏟았지?”묻는 게 아닌 반하준의 짓을 단정하는 어투였다.반하준은 입술을 달싹이며 목구멍에서 진동하는 피 맛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실수로 그런 거야.”심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약한 꽃으로 둔갑했다.“그래요. 반하준은 실수로 그런 거니까 나 때문에 화내지 마요.”반하준은 심은호의 그런 모습에 이가 갈렸다.‘저 개자식은 연기를 왜 저렇게 잘해?’남들 몰래 연기 학원이라도 다니는 건지.“민아야, 저 자식이 일부러 불쌍한 척 연기하는 거야. 아까 날 때리는 거 못 봤지? 내 갈비뼈와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어! 콜록콜록.”반하준의 가슴속에는 차마 내뱉지 못한 뜨거운 열기가 여러 가닥으로 뭉쳐서 이리저리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기침할 때마다 온몸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뼈가 다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있는 공작새 모양의 브로치를 바라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살짝 붉게 물든 코끝으로 훌쩍이며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반하준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그러더니 자신의 소매로 브로치 표면을 살살 닦으며 브로치에 묻은 와인 얼룩을 닦아내려 애썼다.반하준은 감시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올려다봤다.젠장!그는 심은호를 골탕 먹이기 위해 강나현에게 감시카메라를 끄라고 시켰다.카메라가 켜져 있었다면 강민아가 심은호의 본색
“삼촌, 다 됐어요?”육성민은 체육관 밖 공터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 막대기로 타서 재가 돼버린 낙엽을 헤집고 있었다.그는 단열 장갑을 끼고 호일로 감싼 고구마를 불에서 꺼냈다.육성민이 호일을 뜯어내자 뿜어져 나오는 꿀고구마 향에 정이의 입안에는 금세 군침이 돌았다.“빨리 줘요!”정이가 손을 뻗어 가져가려는데 육성민이 말했다.“뜨거워.”그는 쌓아놓은 벽돌 위에 고구마를 올려놓고 숟가락을 생수로 헹군 뒤 정이에게 건넸다.정이는 숟가락으로 고구마를 파서 호호 불었다.서둘러 한입 베어 물던 아이의 두 눈이 휘어지며 통통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정이가 유난히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육성민의 눈가에도 흐뭇함이 가득했다....강승 테크. 인수식이 끝나고 뒤풀이가 진행될 때, 심은호가 화장실에서 막 나오려던 순간 마주 오던 반하준과 부딪혔다.반하준은 한발 물러서고, 심은호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장이 와인으로 얼룩진 게 보였다.장밋빛 붉은 액체가 강민아가 조금 전 선물한 공작 브로치 위로 쏟아졌다.반하준은 자신의 걸작에 감탄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눈이 없어? 자꾸 안하무인으로 굴면 다음에 더러워지는 건 옷뿐만이 아닐 거야.”반하준은 기세등등하게 손가락을 휙 돌려 잔을 아래로 뒤집었다. 남은 레드 와인이 전부 심은호의 신발 끝으로 쏟아졌다.그는 비웃으며 말했다.“복도 카메라는 고장 났지만 민아한테 찾아가 울면서 일러바쳐도 돼. 너 연약한 척 잘하잖아. 어디 계속해 봐. 미리 말하는데 민아는 단순히 호기심에 널 갖고 노는 거야. 하루 종일 자기 뒤에 숨어서 징징거리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반하준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심은호는 주먹을 휘둘렀다!주먹이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을 가르더니 그대로 반하준의 복부를 강타했다. 갑자기 손을 쓸 줄 몰랐던 반하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손을 뻗어 막으려 했지만 그대로 심은호의 주먹에 맞고 말았다.그 탓에 반하준의 손에 들려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산산조각
심은호의 공개 고백에 사람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반하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번개와 천둥이 몰아칠 것처럼 검은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 있었다.강민아는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심은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옆모습은 부드러운 얼굴선과 높은 콧대, 깊은 눈매를 자랑하며 마치 장인이 정성스럽게 조각한 것처럼 보였다.천장에서 비추는 조명이 그의 눈가를 비추자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움직이더니 그가 고개를 돌려 강민아를 바라보았다.남자가 강민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순간, 호수처럼 맑은 그의 눈동자에는 오랜 세월 강민아를 향해 쌓아온 감정이 가득했다.강민아의 숨결 하나하나가 뜨거웠고, 남자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파도가 밀려와 그녀를 감쌌다.마치 용암이 발밑에 흐르듯 빠르게 위로 올라오는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꽉 쥐었고 마른침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긴장하지 마요.”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강민아를 달랬다.“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떻게 긴장을 안 해요?”“미안해요.” 심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가 말했다.“계속 말해요. 듣기 좋으니까.”강민아의 칭찬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심은호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두 눈이 반짝이며 마음을 다잡은 그가 마이크를 마주한 채 아래에 있는 반하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심은호에게만 있었고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민아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할 겁니다. 결혼하든, 누군가를 떠나든 무엇을 하든지 늘 뒤에서 지키고 있다가 필요할 때 나타날 겁니다. 전 앞으로도 여전히 민아 씨의 모든 결정을 지지합니다. 태산 그룹에서 정식으로 강승 테크를 인수했으니 두 회사는 더욱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할 겁니다.”반하준은 입가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며 손등에는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갑자기 뚜껑이 열린 탄산음료처럼 동시에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마치 그의
“설마 심은호가 부사장이 반씨 가문 사모님일 때부터 좋아한 건 아니겠지?”“왜 그렇게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냈나 했더니, 남의 아내를 탐낸 거였어?”가십거리에 사람들은 흥분하며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설마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하기 전에 두 사람이 이미...”“어쩐지 둘이 그렇게 빨리 만나더라니.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시그널 주고받은 거 아니야?”“설마 반 대표가 바람피우는 걸 알고 강민아와 이혼한 건가? 세상에!”다들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파격적인 소문에 재벌가 인사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반하준의 어두운 눈동자에 살기가 번뜩였다.심은호가 그의 평판을 망칠 작정이라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심은호를 끌고 갈 것이다!‘심은호, 너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감히 내 여자를 노렸으니 너도 똑같이 당해봐.’지유빈은 반하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강민아 씨 말로는 대표님께서 적극 이혼을 원했다고 하던데요. 왜 이혼하고 나서는 강민아 씨가 누굴 만나는지 이렇게 신경 쓰는 거죠?”강민아는 반하준이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고, 반하준은 지유빈을 우습게 여겼다.“기자로서 아직도 모르겠어? 심은호가 내 아내를 오랫동안 탐냈다고! 5년 전부터 내 아내를 지켜봤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이혼까지 했는데도 왜 계속 아내라고 말하는 거죠? 그 결혼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대표님 혼자인 것 같은데요.”거대한 스피커가 반하준의 몸속에서 울려 퍼지듯 그의 심장을 뒤흔들고 오장육부에 고통을 선사했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더 잘 안다. 강민아가 이혼한 뒤 지유빈은 기자로서 업무 때문에 줄곧 강민아를 지켜봤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세 사람의 가십거리에 집중하는 동안 지유빈만 그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리는 반하준의 눈동자를 보며 남자가 단순히 강민아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때 반하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무시하고 싶었지만 지유빈의 말에 궁지로 몰린 그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가 구세주처럼
심은호가 헤어지겠다는 말에 반하준은 악랄한 눈빛을 드러냈다.비록 연기라는 걸 알지만 저렇게까지 말해놓고 어떻게 수습할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심은호, 이미 말했으면 지켜야지.”반하준은 심은호에게 강민아와 헤어지라고 강요할 생각이었다.“난 심은호 씨랑 헤어질 생각 없어.”강민아가 말하며 심은호의 큰 손을 감싸더니 반하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당신이 우리 사이에서 수작을 부린다고 심은호 씨와 안 헤어져.”반하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심장이 저 깊은 나락으로 던져진 듯했다.“민아 씨...”심은호가 부드럽게 그녀를 부르자 강민아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두 집안 인수식에서 소란을 피운 건 이 사람이에요. 나가도 그쪽이 아니라 반하준이 나가야 한다고요!”심은호는 입꼬리를 씩 올렸고, 반하준은 누군가 몽둥이로 세게 내리치듯 심장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심은호는 강민아의 말에 위로받았는지 두 눈이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했다.“민아 씨는 나한테 참 잘해주네요.”강민아의 단호한 말 한마디면 그는 만족할 것 같았다.강민아가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내 남자 친구니까요.”“강민아!”보다 못한 반하준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여기 있는데!’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강민아와 심은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맞닿은 두 사람의 시선이 끈적했다.“민아 씨, 아직 말하지 않은 게 하나 더 있어요.”심은호는 큰 결심을 한 듯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예쁜 두 눈에는 슬픈 기색이 묻어났다.“반하준이 우리 둘을 헤어지게 하려고 병원 시스템을 해킹해 내 진료기록을 훔쳐 갔어요. 내가 병원에 다니는 걸 알고 병이라도 있을까 봐 내 진료기록으로 나한테 헤어지라고 협박했어요!”강민아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녀가 먼저 심은호에게 반하준이 한 어리석은 짓을 널리 알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지금 심은호는 일부러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이런 말을 하는 거다.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십거리를 직감한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심은호의
강나현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쳤다.“나 저 사람 알아! 강승 직원이야!”그녀는 연설문이 바뀐 것이 반하준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증명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그 순간 장면이 전환되고 연설문을 바꾼 사람이 복도에서 반하준과 단둘이 만나는 게 보였다.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혔다.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강나현은 표정이 확 바뀌며 말문이 막힌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반하준을 돌아보았다.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게 정말 반하준과 관련이 있을 줄이야.하지만 반하준이 했다기엔 너무 저급한 수작이 아닌가.강승의 직원을 시켜서 연설문을 바꾼 것도 모자라 감히 회사 안에서 직원과 따로 만나다니.그런 짓을 하면서도 반하준은 카메라를 피할 생각조차 못 했던 걸까.강나현은 놀란 표정으로 반하준을 바라봤지만 남자는 다 들키고도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마치 대형 스크린에서 강승 직원과 공모한 사람이 전혀 아닌 것처럼.강민아는 시치미를 떼는 반하준의 모습에 입을 열었다.“그럼 저 직원에게 반 대표님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보죠.”카메라에 찍힌 직원은 당황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의 시선을 마주한 채 눈에 띄게 두 다리를 덜덜 떨었다.“부사장님, 반 대표님이 저한테 시켰어요! 저한테 2천만원 줬는데 이 돈 다 드릴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경악하며 말했다.“정말 반하준이 한 짓이야? 심은호를 노리는 건가?”“심은호와 강민아가 만나니까 전남편이 질투가 나는 건 당연하지. 근데 너무 비열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폭로 당한 반하준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너한테 들킬 줄 알았어. 그냥 네가 어떻게 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야. 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걸 알고도 아무 말 안 하길래 난 네가...”반하준은 말을 꺼내며 입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그는 수치심도 모르는 듯 이렇게 물었다.“그래, 내가 시켰어. 그게 뭐? 강민아, 심은호 때문에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