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가만히 있던 서해금이 물었다. “어딜?”남자가 말했다. “해외 어디든. 송병천이 친딸을 찾았어. 그때 그 일을 조사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여기 있지 말고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해. 지금 우리 손엔 가람이가 남은 평생 아무런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있잖아. 우린 더 이상 이렇게 살얼음판 위를 걷듯 불안한 생활은 그만 해도 돼.”서해금이 남자의 손을 떼어놓으며 대답했다. “당신은 여전히 너무 단순해. 돈은 있지만 사회적 지위와 인맥은? 우리가 이렇게까지 고생한 게 겨우 그깟 돈 때문이라고 생각해? 돈은 언젠가 바닥이 날 거야. 나중에 우리가 죽으면 가람이가 스스로 그 돈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남자가 다시 서해금의 손을 잡았다. “우리가 가람이를 위해 신탁 기금을 만들어 지출을 제한하면 되잖아. 그럼 나중에 우리가 죽어도 가람이를 걱정하지 않아도 돼.”서해금이 손을 빼며 차갑게 말했다. “난 절대 신탁 기금 따위로 우리 딸을 병 X처럼 키우지 않을 거야. 내가 지금껏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여 깔린느를 지금 이 자리까지 올려놨는데. 나더러 돈만 가지고 볼품없는 꼴로 여길 떠나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왜 내가 내 피눈물로 만든 회사를 한아람의 딸에게 넘겨줘야 하는 거냐고.”남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람이는 강한서 그 자식과 결혼할 생각밖에 없어. 걔 마음은 애초부터 일에 없었다고. 네가 깔린느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대체 가람이를 위한 거야, 아니면 널 위한 거야.”“날 위한 거라고?”서해금이 이를 악물었다. “내가 정말 날 위했다면 애초부터 왜 당신을 만났겠어!”남자는 말이 없었다. 평정심을 되찾고 말이 지나쳤다는 것을 느낀 서해금이 날카로웠던 말투를 바꾸며 나지막이 말했다. “안수 씨. 그런 뜻으로 한 얘기가 아냐. 난 한 번도 당신을 만난 걸 후회한 적 없어.”남자의 눈빛이 삭막하게 변해갔다. 그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넌 포부가 있는 사람인 거 알아. 절대 쉽게 고개를 숙일
남자는 더는 말이 없었다. 그는 서해금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해금은 야망이 크고 승부욕도 강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면 절대 쉽게 도망가지 않을 것이었다.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오늘은 날 왜 부른 거야.”상대방에게 의도를 들킨 서해금 역시 불쌍한 연기는 넣어두고 옆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 박안수에게 건넸다. “이 사람 국내에서의 행적을 좀 알아봐 줘. 누굴 만나는지도 전부. 최대한 자세하게.”박안수가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도일준이라는 남자의 신상 자료였다. 자료를 넘기던 박안수는 사진 속 남자의 눈매가 어쩐지 눈에 익은 것 같았지만 좀처럼 어디서 본 얼굴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가 서해금에게 물었다. “누구야?”“회사와 새로 계약한 클라이언트야. M 국의 교포래. M 국에서의 신분도 확인할 거야. 하지만 국내에서 누구와 연락을 주고받는지도 알아야겠어. 만약 신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날 도와 깔린느가 해외로 진출할 수 있도록 M 국과 연결해 줄 다리가 될 거야.”M 국은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 그들의 의료 체계는 국내와 달라 실력이 뛰어난 의사일수록 상류층의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것이 바로 서해금이 직접 도일준을 에스코트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가 노린 것인 의사라는 신분 뒤에 따라올 수많은 도일준의 자원이었다. 택시에 앉아 시트에 기댄 도일준이 장갑을 벗었다. 온전하지 않은 손가락이 공기 중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손을 뻗어 무명지를 슬며시 어루만졌다. 그 행동은 마치 반지를 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무명지는 텅 비어 있었고 남은 것이라곤 끊어진 손가락이 남긴 공허한 공기뿐이었다. 차가 병원을 지나치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고층 건물이 산을 이루고 인파가 물밀듯 몰리며 차가 물살처럼 쌩쌩 지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이미 기억 속의 모습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비슷한 것이라곤 병원 맞은편 건물엔 여전히 깔린느의 광고가 걸려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와 똑같은 모습 그대
택시 기사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 아는 사이예요?”민경하는 말없이 웃는 얼굴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도일준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가시죠.”그런 도일준의 태도에 민경하는 화조차 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희 대표님께서 26년 전 한주 병원에서 근무하시던 조예단이라는 분에 관해 여쭤볼 게 있다고 하셨어요. 조예단이라는 분을 아세요?”주먹을 꽉 움켜쥔 도일준이 홱 고개를 돌려 민경하를 바라보았다. 민경하는 여전히 단정하고 격식 있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어떤 공격성도 보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던 도일준이 몇 초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쪽 대표님이 누군데요.”민경하가 대답했다. “만나면 아실 겁니다.”도일준은 허락도, 거절도 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가만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 함께 멈춰 선 차들이 하나둘 클랙슨을 울리는 탓에 도일준의 마음도 따라 복잡해졌다. 교대 시간이 가까워지자 택시 기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갈 거예요, 말 거예요. 이거 지금 업무 방해예요.”숨을 깊게 들이쉰 도일준이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풀었다. 민경하는 택시 기사에게 사과를 건네며 재킷 안쪽에서 현금 몇 장을 꺼내 택시 기사에게 건넸다. 택시 기사는 그중 한 장을 뽑으며 말했다. “이건 그쪽이 내 담뱃값 대준 거로 해요. 앞으로 운전 조심해요. 초보 운전자가 겁도 없이 험하게 운전을 해. 오늘 날 만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크게 한 방 털렸을 거예요. 이건 인생 수업 들은 수강료라고 생각해요. 조심 좀 하고.”민경하가 웃으며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택시 번호를 한 번 확인한 민경하는 반대편으로 돌아가 도일준의 차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오른 도일준이 다시 한번 민경하에게 물었다. “그쪽 대표님이 누구예요.”민경하의 대답은 여전히 똑같았다. “도착하면 알게 되실 거예요.”그러자 도일준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30분 후, 민경하가 운전한 차가 구시가 근처에
“그러는 강 대표님은 제가 탄 차를 멈춰 세워서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뭐죠?”도일준을 힐끔 쳐다본 강한서가 대답했다. “제가 도일준 씨를 여기에 모신 건 도일준 씨께 어떤 분에 관해 여쭤볼게 있어서예요.”도일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한주 사람도 아닌데요. 저를 통해 누군가를 뒷조사할 생각이라면 사람을 잘못 찾은 것 같네요.”강한서가 반문했다. “제가 여쭤보려는 사람이 누구라고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도일준 씨는 어떻게 본인이 모르실 거라고 확신하시는 거예요? 정말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강한서에게 낚였다는 것을 눈치 채고 울컥 화가 치민 도일준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굴 알아볼 생각이든 전 몰라요.”“모르시면 어쩔 수 없죠.”강한서는 도일준의 건강 상태가 그리 좋지 않으니 최대한 자극하지 말라던 한현진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오늘 도일준 씨를 모신 건 제 아내를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예요.”미간을 찌푸린 도일준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장모님이 살아계실 때 후원하시던 고아원이 있었어요. 작년부터 지금까지 도일준 씨도 여러 차례 그 고아원에 후원하셨더라고요. 절대 적은 금액도 아니었고요.”“그래서 제 아내가 직접 만나 뵙고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줄곧 얘기했었어요.”도일준은 고아원에 후원한 것을 조금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당시의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그 아이와 마주치고 꼬리가 밟히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굳은 얼굴의 도일준이 대답했다. “그 돈은 제가 친구 대신 후원한 거예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말하며 도일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가볼게요.”도일준이 민경하를 따라나선 건 그가 서해금의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한현진 쪽 사람이었다니, 도일준의 예상 밖이었다. 그는 송씨 가문 사람 앞에서 태연하게만 행동할 수는 없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예준이 룸을 나서며 문을 꼭 닫았다. 조예준을 향한 도일준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조 셰프님은 진미가에서 마지막으로 모신 셰프님이세요. 다른 셰프님들과는 달리 다른 일을 하시다가 셰프로 전향하신 케이스예요. 아마 이쪽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던 것 같아요.”“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말처럼 지금은 진미가에서 제일 예약하기 어려운 셰프님이세요.”강한서는 말하며 계란술국 한 그릇을 떠 천천히 도일준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계란술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일준 씨, 드셔보세요.”계란술국을 바라보는 도일준의 눈앞에 과거의 장면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너져가는 집, 돈 새는 구멍이라며 학교도 못 가게 하더니 고기 한 점 더 먹었다는 이유로 잔소리를 늘어놓던 부모.그리고 계란술국을 들고 몰래 방으로 들어와 앞으로 술국은 전부 누나에게 줄 테니 울지 말라며 달래던 어린 남자 아이...이젠 전부 잊혀 전생의 기억 같던 그 모든 일들이 그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도일준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어와 그를 흔들었다. 하지만 눈 깜짝 할 사이 모든 걸 집어삼킬 것 같은 화재가 기억을 덮쳤고 눈을 뜨자 보이던 상처투성이의 자신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역경들이 또다시 뱀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끊어진 약지에서 다시금 통증이 느껴졌다. 그 고통은 절단된 손가락에서부터 몸으로 퍼져나갔고 그로 인해 오장육부마저도 누군가에 의해 칼로 다져지듯이 아팠다. 도일준을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죽을힘을 다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강한서가 나지막이 도일준을 불렀다. “도일준 씨, 도일준 씨. 괜찮으세요?”도일준이 고개를 들자 빨개진 그의 눈이 보였다. 얼굴은 심각하다고 느껴질 만큼 창백했고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잠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하자는 거예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고.”강한서는 오히려 차분한
“셰프님처럼 좋으신 분이 40세가 되어서야 결혼하셨어요. 진미가 대표님 말씀으로는 그동안 누나 소식이 있기만 하면 진짜든 가짜든 본인이 직접 가셔서 확인하셨다고 해요.”“그래서 혹시라도 결혼 후 가정을 돌보지 못해 아내 될 분에게 부담이 될까 줄곧 결혼하지 않으셨대요.”“처음엔 다들 셰프님께서 누나를 찾는 일에 집착하는 이유가 어머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어요. 하지만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셰프님은 여전히 누나를 찾는 걸 멈추지 않으셨죠.”“20여 년이 지나 세상도 사람도 전부 예전 같지는 않은데 어느 날 누나를 만난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문밖에서 가슴을 쿡쿡 찌르는 강한서의 말을 듣고 있던 민경하는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천재는 달라. 안 하셔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해내시잖아.’민경하가 강한서에게 건넨 자료는 몇 마디 글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강한서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가족 찾아 삼만 리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하지만 조예단의 부모가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들은 전형적인 남아선호 사상이 있고 우매하며 독단적인 사람들이었다. 10살이 어린 남동생을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명령을 따라 돌봐온 탓에 남동생은 누나와 살갑게 지냈다. 젊었을 땐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누나를 찾아 헤맨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누나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고 안 그래도 여유롭지 않던 가정 형편은 더 이상 그가 누나를 찾는 일에 몰두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든, 생활은 결국 이어나가야만 했다. 아들밖에 모르던 부모는 곁에 있을 때도 좋아한 적 없던 딸을 실종되었다고 해서 걱정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어쩌면 아들 장가 밑천이 되어줄 딸의 예물을 받을 수 없어 그녀를 더 원망했을지도 모른다.그런 생각이 들자 민경하는 강한서의 스토리텔링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천재는 어떤 면에서도 천재인 법이지.’울컥한 도일준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왜 저에게 이런
도일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입 안에서 녹슨 비린 맛이 날 때까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가 겨우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강 대표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그 말에 강한서는 실망하는 기색 없이 여전히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모른 척한다고 달라지지 않아요.”도일준은 아무런 말없이 문을 열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도일준이 나가고 몇 분이 지나자 민경하가 들어왔다. “대표님, 차에 타셨어요.”알겠다며 대답한 강한서는 의자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경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예단 씨를 너무 늦게 찾은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죠. 안 그래도 시한부 판정을 받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저였어도 남은 인생은 조용히 보내고 싶을 것 같아요. 당시의 사건이 다시 수면에 떠오르면 그동안의 명성을 포함한 모든 걸 잃게 될 테니까요.”강한서가 말했다. “도일준 씨는 더 이상 그때의 도일준이 아녜요. 성별 인지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게 가장 절망적인 문제일까요?”멈칫하던 민경하는 강한서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저희와 협력하는 것이 제일 좋은 선택이잖아요. 조예단 씨가 본인에게 손을 쓴 사람이 누군지 털어놓고 그 사람이 또 서 대표님을 주범으로 지목한다면 서 대표님을 법정에 세울 수 있잖아요. 그러면 도일준 씨의 복수도 할 수 있는 거 아녜요?”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말했다. “조예단 씨 남편은 불에 타 죽었어요.”민경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강한서가 민경하에게 물었다. “당시 화재로 죽은 건 분명 도일준이예요. 하지만 왜 그의 부모님은 그걸 부인했을까요?”그 점 역시 민경하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 화재로 사망한 건 본인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왜 대외적으로는 며느리가 죽었다고 얘기를 하는 걸까? 그리고 며느리는 왜 죽은 아들의 얼굴로 성형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걸까?조예단이
충격에 빠진 민경하는 순간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싶으면서도 또 저도 모르게 강한서의 추측이 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느리에게 복수하기 위해, 또는 아들을 그리기 위해 그들은 며느리를 아들로 만들어 곁에 남겼다. 조예단은 왜 반항하지 않은 걸까? 아니, 어쩌면 반항했거나 반항을 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애초부터 반항하기를 포기했던 걸지도. 마음에 남은 죄책감 때문에 그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도일준의 부모는 한 분이 이미 돌아가셨고 다른 한 분은 2년 전부터 점점 심각해져 가는 치매증상 때문에 요양원에 보내졌다. 그리고 그녀는 부부의 통제를 벗어나 고작 2년 동안의 자유를 누린 후 불치병을 판정 받았다. 귀국 후 도일준이 후원을 위해 들르는 고아원과 정기 치료를 위해 가는 병원을 제외하면 제일 자주 다니는 곳은 바로 사찰이었다. 매번 백팔 배를 올리며 치성을 드리는 것을 보면 인과응보를 믿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당시 돈을 받고 했던 짓들은 천리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남편이 그런 험한 일을 당한 것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부처님에게 기도를 드리며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동안만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강한서가 이어놓은 이야기와 그동안 조사했던 것들을 연결시키니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그동안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상상도 못할 고통을 겪었는데 원망스럽지 않을까요?”“원망스럽겠죠. 왜 아니겠어요. 특히 당시의 동료들이 전부 그런 운명을 맞이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당시의 화재도 어쩌면 단순한 사고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겠죠.”“그럼 왜 본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 걸까요? 당시 자신에게 돈을 건넸던 사람을 제보한다면 범인을 검거할 수 있을 텐데요.”민경하가 던진 질문에 강한서는 또 다시 처음의 대답으로 돌아갔다. “조예단 씨의 남편은 불에 타 죽었어요.”민경하가 멈칫
예민한 서해금은 단 한 마디로 짜증 섞인 홍혜림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멈칫한 그녀는 진윤의 안부부터 물었다. “사모님, 진윤 씨 퇴원했다면서요. 몸은 좀 어때요? 퇴원했어도 물리치료가 중요해요. 아직 어리니까 더 조심하는 게 좋아요. 물리치료 센터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필요하시면 소개해 드릴게요.”홍혜림이 심호흡으로 가슴 한 편 자리 잡은 분노를 꾹 눌렀다. “물리치료사를 고용해서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서 대표님.”잠시 침묵하던 홍혜림이 말을 이었다. “아, 윤이 일은 해결됐어요. 서 대표님이 오 교수님과 다리를 놔주신 덕분이에요. 서 대표님이 아니었으면 어려웠을 거예요. 제가 너무 큰 신세를 졌어요.”그 말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세라뇨. 사모님께서 깔린느와 함께 한 세월이 얼만데요. 전엔 작은 오해로 사모님 기분을 상하게 해드린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었는데 이번 일로 도움을 드리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서해금의 의도를 눈치 챈 홍혜림이 한껏 여유로운 태도로 의례적인 감사 인사를 전했다. 원하는 말이 나오지 않아 서해금이 애간장을 태울 때쯤, 홍혜림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가람 씨도 이번 조향 대회에 참석하셨다면서요?”서해금이 움찔했다. 홍혜림이 자신보다 더 직설적으로 그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던 서해금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네. 이번 대회를 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요즘 대회 준비에 여념이 없어요. 결승 시간이 다가오니까 좋은 성적을 따내지 못할까 봐 부쩍 조바심을 내고 있더라고요.”홍혜림이 말했다. “젊은이가 욕심이 있는 건 좋은 거죠. 가람 씨가 서 대표님을 닮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요. 결승전엔 저도 참석할 예정이에요. 가람 씨가 기대 이상의 실력을 보여줄 거라 믿어요.”아는 사람끼리 굳이 대놓고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서해금은 충분히 홍혜림의 말의 의미를 눈치 챘다. “말씀 고마워요, 사모님. 그럼 그날 현장에서 뵐게요.”전화를 끊은 서해금이 고개
[부정행위 같은 건 내부 조사로 진행해봤자 무슨 결과가 있겠어요? 학교 입장에선 당연히 부정하겠죠. 창피하잖아요.][부정행위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여기로 모이세요!]...댓글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던 그때, 그 대학원생은 좋아요가 제일 많이 눌린 댓글에 다시 댓글을 달았다. [진윤 학생의 루머가 퍼진 그날, 전 바로 해명 글을 올렸었어요.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피드는 계속 비공개로 전환이 되었어요. 서버 문제인가 싶어 물어봤더니 규정 위반이라는 이유로 피드를 업로드 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며칠 사이 계정을 바꿔가며 계속 피드를 작성했지만 결과는 똑같았어요. 계속 업로드가 되지 않더라고요. 실체가 없는 압박 때문에 전 진윤 학생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없었어요. 그더라 오늘 점심이 되어서야 계정이 정상적으로 활성화되었고요.][전 대학원 2학년생이에요. 솔직히 얘기하면 적지 않은 학생에게 과외를 해줬어요. 하지만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대부분이었어요. 진윤 학생은 제가 가르쳤던 학생 중 유일한 대학생이었어요.][과외비도 많이 챙겨줬고 사교성도 좋아서 다른 과외는 전부 거절하고 진윤 학생 한 명만 했었어요. 다들 아시겠지만 공대의 많은 수업은 고등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진윤 학생은 기초도 좋은 편이었고 본인 스스로도 노력을 많이 했어요. 새벽 2, 3시까지 공부하는 것도 기본이었어요. 그러니 그 정도 난이도의 시험은 통과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죠.][인터넷에선 다들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진윤 학생이 부정행위를 했다고 하던데 솔직히 얘기하면 만약 진윤 학생이 부정행위로 그 정도 성적을 받은 거라면 정말 제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요.][제가 하고 싶은 말을 여기까지예요. 앞으로 악플에 더는 대응하지 않을 거예요.]그는 설명과 함께 캡처 여러 장을 함께 공개했다. 그 중에는 업로드에 실패했던 여러 개의 피드와 늦은 새벽 진윤과 문제집을 토론하던 대화기록 그리고 진윤이 그에
어두운 표정으로 이번 일의 경위를 할 번 곱씹은 홍혜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해금은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 번도 어긋난 적조차 없었다. 조금만 먼저 얘기를 꺼냈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조금만 늦으면 도와줄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서해금은 늘 홍혜림이 더는 손 쓸 방법이 없는 타이밍에 나타났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당연히 홍혜림은 평소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의 손길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서해금이 어떤 인간인데?’서해금은 이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거지도 아버지로 모실 수 있었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친아버지도 아버지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와줄 리가 없어.’‘애초부터 이 모든 것이 서해금이 꾸민 짓이라면 말이 되긴 하지.’‘하지만 대체 왜?’홍혜림은 순간 자신에게도 조향대회의 투표권이 있다는 사실을 또 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서해금 의도를 파악하게 된 홍혜림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가식적인 X. 감히 날 두고 수작을 부려?’생각에 잠긴 홍혜림이 인상을 폈다 찌푸렸다를 반복하며 가끔은 이를 악무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윤이 걱정스레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홍혜림이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역겨운 일이 떠올라서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아직 어린 나이라 홍혜림 말의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한 진윤이 말했다.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전 부정행위도 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제가 신고까지 했으니 저희가 여기저기 부탁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저희에게 사정을 해야겠죠. 엄마도 이젠 회사로 나가 보세요. 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너만 괜찮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회사에는 네 아빠와 형이 있어. 내가 할 일은 널 지키는 거야.”그 말에 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떠올렸다.“너한텐 좋은 부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