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형의 말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나연아, 네 말이 뭔 뜻인지는 알아. 우리 엄마가 널 싫어하는 건 네가 뭘 해도 안 바뀔 거야.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힘들어지니까.”조나연은 한참 고민한 끝에 그런 결론을 내린 듯했다.하지만 강유형의 사과는 지나치게 비굴해 보였다.솔직히 조나연도 딱히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없었다.굳이 꼽자면 너무 사랑한 죄밖에 없었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런 굴욕까지 견디고 있으니 말이다.“내가 힘든 건 상관없어. 내 선택이니까. 근데 너까지 이렇게 힘들 필요는 없어.”강유형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짜증이 섞여 있었다.“그게 무슨 뜻이야? 네가 뭘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어.”조나연은 여전히 연약한 모습을 보였고 강유형 앞에서는 그 모습이 더 심해졌다.그녀가 정말로 그런 사람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이며 동정을 얻으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조태혁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강유형의 입에서 조태혁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그의 의도를 단번에 깨달았다.“태혁이? 뭐가 어쨌다는 건데? 또 사고 쳐서 네가 뒷수습이라도 해야 해?”조나연은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그러자 강유형이 비웃으며 말했다.“너 진짜 몰라?”“몰라.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조나연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조태혁이 윤지원을 쫓아다니고 있어.”강유형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 순간 진정우가 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그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난 뭐라도 말하려던 참에 조나연이 급히 말했다.“그럴 리 없어.”강유형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윤지원 사무실로 꽃까지 보냈대.”조나연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용히 말했다.“아마 그냥 장난쳤겠지. 태혁이는 원래 그런 애잖아. 그리고 전에 윤지원이 태혁이한테 이상한 짓 했다면서...”“뭐?”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그 일은 이미 끝났고 경찰 조사 결과도 조태혁의 거짓말로 밝
“좀 지나갈게요. 두 분 비켜주시겠어요?”나는 자연스럽게 다가가며 말했다.강유형은 미동도 없이 나를 응시했고 조나연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옆으로 물러나 길을 내주었다.그녀가 강유형의 팔을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내가 그를 데려가 버릴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지원아, 어서 와서 먹자.”내가 룸에 들어서자 아줌마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나는 자리에 앉으며 일부러 물었다.“아줌마, 우리 둘만 남은 거예요?”“원래부터 우리 둘만 있는 자리였지. 근데 눈치 없이 끼어드는 사람들이 문제야.”아줌마의 말엔 조나연과 강유형에 대한 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줌마,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줌마와 아들 사이가 더 멀어질지도 몰라요.”사실 나도 이들을 감싸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삼촌과 아줌마가 나를 얼마나 아껴줬는지 알기에 그들이 화목하길 바랄 뿐이었다.“그건 자기가 자초한 짓이지.”아줌마는 여전히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였고 더 이상 끼어들지 않고 눈앞에 있는 음식에 집중하기로 했다.“근데 화장실 간다더니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정우 씨를 만났어요.”내가 솔직히 대답하자 아줌마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웃으며 말했다.“혹시 내가 널 데려갈까 봐 쫓아온 거 아니야?”“아니에요. 회사 대표님이랑 같이 식사하러 왔더라고요.”나는 간단히 설명했다.아줌마는 식탁을 돌리며 맛있는 음식을 내 앞으로 가져오며 말했다.“지원아, 진정우는 사람도 좋고 조건도 괜찮아서 나랑 네 삼촌도 마음이 놓여. 그런데 말이야...”말끝을 흐리는 아줌마의 의도를 금방 알아챘다.“아줌마는 진정우의 집안이 조금 약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그렇지. 아줌마랑 삼촌은 네가 힘들게 사는 걸 보고 싶지 않거든. 돈 없고 집안이 어려우면 정말 고생스러운 삶을 살게 돼.”아줌마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말에는 아줌마가 젊은 시절에 겪은 고생이 담겨 있었다. 강유형의 말에 의하면 삼촌과 아줌마는
난 자신이 딸로서 정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사실만 알았지만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자 아줌마는 살짝 굳은 표정을 짓고 내 손목을 꼭 잡으며 말했다.“지원아, 우리 이 얘기하지 않기로 했잖니? 다 지난 일이야.”“아줌마, 저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감당할 수 있어요. 그냥 말씀해 주세요.”내가 아줌마의 손을 반대로 꼭 잡자 아줌마의 손이 약간 떨렸다.“이미 지난 일이야. 왜 굳이 이걸 다시 꺼내는 거야?”몇 초간 침묵한 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 부모님이에요. 이 세상에서 제게 유일한 가족이잖아요.”나의 부모님은 고아원에서 자랐고 그분들이 돌아가신 후 나도 고아가 되었다.아마도 내가 했던 말이 아줌마를 자극한 것 같았다.아줌마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나랑 네 삼촌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땐 네 엄마는 이미 숨이 멎어 있었고 네 아빠는 겨우 숨만 붙어 있었어. 네 아빠는 네 삼촌 손을 붙잡고 네 이름만 되뇌었지...”아줌마는 목소리가 떨렸고 하던 말을 멈췄고 내 마음도 그녀의 말에 아프게 얼어붙은 것 같았다.그건 정말 끔찍한 상처였다.아줌마가 이 이야기를 꺼내기 싫어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아줌마는 내가 또다시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했다.“우린 네 아빠가 줄곧 널 걱정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우리에게 널 부탁한 거겠지.”아줌마가 낮게 속삭였다.아줌마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난 마음이 더욱 쓰렸다.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단순히 슬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나는 가슴속의 고통을 꾹 참으며 나는 다시 물었다.“그 사고가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나요? 다른 차와 부딪힌 건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아줌마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차가 대형 탱크로리 트럭을 들이박았어.”아줌마의 말을 들으니 예전에 인터넷에서 본 그런 사고 영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숨
아줌마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그래. 당시 계약서에 곧 서명할 예정이었어.”바로 아버지의 노트북에서 발견한 그 계약서였다.“그럼 사고 때문에 서명하지 못한 건가요?”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숨이 턱 막히고 가슴속에서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그때 아줌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계약은 네 아빠와 네 삼촌이 함께 사업하면서 맺는 첫 번째 계약이었어.”‘뭐라고? 그 계약서는 원래 삼촌의 몫도 포함된 것이었단 말인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네.’“네 아빠랑 네 삼촌이 광화 그룹의 용진표랑 계약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 같이 낚시도 하고 레이싱도 하고 심지어는 용진표가 미친 듯이 제안한 스카이다이빙도 따라갔어.”아줌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용진표는 원래 조폭 출신이라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걸 잘했어. 그런데 네 아빠랑 네 삼촌은 사업을 위해 용진표를 잡아야만 했기에 목숨 걸고 그와 어울렸지. 한 번은 용진표가 네 아빠와 네 삼촌을 데리고 바다로 나가 낚시를 했는데 갑작스럽게 태풍을 만났어. 배에는 구명조끼가 두 개밖에 없었고 네 아빠와 네 삼촌이 서로 자신이 입지 않겠다고 다투며 용진표와 상대방에게 줬어. 그 일이 있고 난 뒤, 용진표는 더 이상 네 아빠와 삼촌을 괴롭히지 않고 계약을 주기로 했어. 계약서를 받은 후 네 삼촌이 네 아빠더러 계약서 내용을 꼼꼼히 살피라고 했어. 네 아빠가 뜻밖으로 정말 계약서의 이상한 내용을 발견한 거야. 그래서 용진표는 내용을 수정해 다시 계약서를 우리한테 주었고 네 아빠와 네 삼촌이 서명하러 가는 길에 네 아빠가 사고를 당한 거야.”아줌마는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말해주며 당시 상황을 되짚어 주었다.‘모든 것이 이렇게 된 것이었구나. 내가 두려워했던 그런 일은 아니었네.’그러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내가 두려워했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삼촌과 아줌마는 내가 내 부모님처럼 여길 정도로
이렇게 친근한 모습의 그는 나의 상사라기보다는 친구처럼 느껴졌다.나는 웃으며 허진호를 바라보다가 진정우에게 물었다.“정우 씨, 허진호 씨랑 엄청 잘 통하는 것 같네. 나는 면접 끝나자마자 대표님이랑 밥 먹는 사람 처음 봐.”내가 이 말을 한 건 예전에 신지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허진호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성이 진 씨라는 사실 때문이었다.나는 다시 의심이 피어올랐다.“허 대표님이 나랑 밥을 같이 먹는 건 나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거죠. 결국...”진정우가 말을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연봉 6억이라는 금액이 작은 건 아니니까.”나는 깜짝 놀랐다.‘연봉이 그렇게 높다고?’나는 진정우가 이렇게 가치 있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왜 내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그가 솔직하게 묻자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 건 아니야.”그리고 이어 물었다. “그럼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얼마 받았어?”“월급으로 600만 원.”진정우의 대답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진호가 제시한 금액은 예전보다 10배나 많았다.“허 대표님은 정말 대단하시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내가 먼저 제안했지만 나도 허 대표님이 받아줄 줄은 몰랐어." 진정우가 설명을 덧붙였다.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허 대표님이 인재에 대한 욕심이 대단하시네.”그러면서 나는 감탄했다.“정우 씨는 참 대단하네. 그 정도 금액을 제시할 용기도 있다니.”심지어 우리 회사 삼촌 밑의 부대표급들도 연봉 6억을 받는 사람은 드물었다.“내 능력을 알아줄 뿐이야. 게다가 돈을 벌어야 결혼도 할 수 있잖아.”진정우가 그렇게 말하니 내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나는 헛기침을 하며 이내 시동을 걸고 화제를 돌리려 했다.“좀 이따 어디로 가? 내가 태워다줄게.”“넌?” 그가 되물었다.“정우 씨를 태워다주고 회사로 돌아가야지.”“허 대표님이 반나절 휴가를 주셨어.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고 말이야.”진정우의 말에 나는
‘큰일 났어 그걸 깜빡하다니.’하지만 별로 난 찔릴 건 없으니 바로 부인했다.“그런 추잡한 짓을 한 적은 없어. 누명이야.”“응?”진정우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내가 더 자세히 설명해주 길 바라는 듯했다.나는 조태혁을 우연히 넘어뜨렸고 그가 나를 무고한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마디 더 덧붙였다.“그런 꼬맹이는 그냥 자기밖에 모르는 애야. 난 전혀 관심 없어.”“그럼 어떤 스타일을 좋아해? 아저씨 같은 스타일? 아니면 성숙하고 조용한 사람?”진정우는 아주 솔직했고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듯했다.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니 갑자기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의 옆으로 살짝 다가가며 말했다.“정우 씨처럼... 거칠고 단단한 사람이 좋아.”말이 떨어지자마자 진정우의 목젖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나는 또 한 번 그를 놀려버렸다.다음 순간 나는 몸을 빼려 했지만 진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단단한 걸 어떻게 알았어?”“...”그 순간 내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나는 진정우가 순수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이 한마디로 그는 남자의 본성을 드러냈다.“얼굴은 왜 빨개 진 거야?”하필이면 진정우가 또 물었다.‘정우 씨도 만만치 않네. 내 장난에 바로 반격하다니 말이야.’내가 감탄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말했다.“술 마셨어?”“아니!”내가 부인하자마자 그가 말했다.“차를 옆에 세워봐.”“왜?”나는 이렇게 물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차를 길가에 세웠다.차가 멈추자마자 진정우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내 얼굴을 돌려 잡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나는 눈을 크게 뜨고 첫 반응은 그가 나를 키스하려는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대낮인데... 그것도 길거리에서 부끄럽지도 않아? 아니면 우리가 사귀기로 해서 이제 자유롭게 행동하는 건가? 아니면 원래부터 정우 씨는 속으로 이런 사람인 건가? 그런 게 아니라면 어떻게 길 한복판에서 키스하려고 할 수 있지?’비록 나는 강유형처럼 무미
나는 진정우의 붉어진 얼굴과 콧등에 맺힌 땀방울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그는 고개를 돌렸고 나는 더 이상 괜한 장난을 치지 않고 얌전히 차를 몰았다.단단한 물건에 관한 질문 하나 때문에 둘 다 몇 분간 침묵했다.그러다가 나는 문득 아까 그가 말한 둘만의 시간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서 지금 어디 가려고?”“오후에 시간 있어?”“있어!”말이 떨어지자마자 난 자신이 너무 빨리 대답한 걸 깨달았다. 마치 내가 무척 기대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었다.그러자 그의 굳어 있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너랑 가고 싶은 데가 있어.”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내가 내비게이션을 설정할게. 그대로 따라가면 돼.”진정우의 내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외진 교외 지역이었다. 사방이 잡초로 덮인 황량한 땅이었지만 멀리서 맑고 반짝이는 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정우 씨, 여기서 뭐 하려는 거야? 설마 나랑 농사지을 계획은 아니겠지?”나는 장난스럽게 물었고 그는 멀리 강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그럴 생각이야.”나는 웃음을 터트렸다.“정우 씨는 농사보다 전기랑 조명 다루는 데 집중해서 6억 연봉이나 열심히 벌어!”진정우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도 않아 풀숲에서 무언가 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꺅!”나는 비명을 질렀다.진정우는 나와 두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내 비명을 듣자마자 재빨리 뛰어왔다.나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손으로 그의 목을 감고 다리로 그의 허리를 안았다.나는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 높이뛰기 하나 제대로 못 했지만 이번엔 완벽하게 뛰어들었다. 마치 착 달라붙은 흡반처럼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완벽할 정도였다.진정우도 재빨리 나를 단단히 받쳐주며 허리를 감싸안았다.“무슨 일이야?”“뱀이야. 뱀!”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방금 본 게 진짜 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이런 깊은 풀밭에서 뱀이 아니면
나는 내가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웃을 수 있다는 걸 몰랐다.스무 살이 훌쩍 넘어서도 아이처럼 안겨서 빙글빙글 도는 경험이라니.하지만 즐거운 시간이 끝난 후 나는 어지러워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고 결국 그의 품에 얌전히 기대야 했다.그 순간 문득 이 모든 게 그의 계산된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릴 때 너 이렇게 도는 거 좋아했어.”진정우가 내 귀에 낮게 속삭였다. 내가 진정우를 처음 만났을 땐 정말 어렸었다. 너무 어려서 기억조차 희미했다.그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나도 자연스럽게 물었다.“그럼 난 어렸을 때 또 뭐 좋아했어?”“높이 들어 올리는 거 좋아했고 내 어깨에 올라타서 목마 타는 것도 좋아했지.”진정우의 말에 나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난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어쨌든 정우 씨 말이니까 다 믿을 순 없지.”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물놀이도 좋아했어. 물속에서 뛰어놀면서 물을 튀기곤 했지. 온몸이 흠뻑 젖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야.”“또 있어?”나는 그의 이야기가 점점 흥미로워졌다.사람은 참으로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을 도저히 기억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이상한 존재다.그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간일 텐데 만약 그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많은 사람이 어른이 된 후의 불행을 치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또 하나 있다면 넌 동화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어. 근데 내가 이야기를 잘 못 해서 너한테 멍청하다는 소리 들었었지.”그의 말에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동화책만 잔뜩 읽었어. 근데 널 다시 볼 수 없어서 그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가 없었지.”“근데 왜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을까?”나는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여동생이 태어났는데 몸이 안 좋았거든. 그래서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네 댁에 가서 여동생을 돌보며 살았어. 엄마는 일을 하러 나가야 했고.”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아마도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자 그는 마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