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백만 원이 절실했던 한서윤은 세림홀딩스 대표 차도현과 열두 번의 명령을 조건으로 계약한다. 하지만 관계가 계약 밖으로 번지면서, 도현이 오래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고 계약금까지 계산해 접근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신뢰가 무너진 서윤은 기존 계약을 멈추고, 이번에는 자신이 명령권을 가진 새 계약을 제안한다. 돈도 지위도 없이, 다시 자신에게 선택받으라는 조건과 함께.
View More1화. 첫 번째 명령
통장 잔액은 38만 7천 원이었다.
이번 달 월세는 65만 원.
밀린 카드값까지 생각하면, 당장 필요한 돈은 최소 오백만 원이었다.
나는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한숨을 삼켰다.
다시 켜 봐도 숫자가 달라질 리 없었다.
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면접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들어오시죠.]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호텔도, 회사도 아닌 단독주택이 서 있었다.
높은 담장과 검은 대문.
주소가 잘못된 건 아닐까 싶어 공고를 다시 확인했다.
[고액 단기 계약직 구인]
[근무 기간 협의]
[비밀 유지 필수]
[급여 선지급 가능]
업무 내용은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런 공고를 믿고 여기까지 찾아온 나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백만 원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뒤 문이 열렸다.
“한서윤 씨?”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나를 내려다봤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
단정하게 넘긴 검은 머리와 차갑게 가라앉은 눈.
사진도 없었던 채용 공고와 달리, 남자는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네.”
“들어오세요.”
남자는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옆으로 비켜 길을 내주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정리된 거실과 검은색 가구들.
생활감은 거의 없었다.
나는 소파 가장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맞은편에 앉아 얇은 서류철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공고 내용은 확인했습니까?”
“네. 그런데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안 적혀 있던데요.”
“적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내 손끝이 살짝 굳었다.
남자는 내 표정을 확인하듯 잠시 바라봤다.
“불법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 말을 믿으라고요?”
“믿지 않아도 됩니다. 계약서를 읽고 결정하면 되니까.”
그가 서류철을 내 쪽으로 밀었다.
표지에는 단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계약서]
첫 장을 넘기자 가장 먼저 금액이 보였다.
계약금 오백만 원.
남자는 내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정확한 금액을 제시했다.
“제 계좌라도 조사했어요?”
“지원서에 희망 금액을 적었잖습니까.”
그제야 기억났다.
얼마가 필요하냐는 항목에 솔직히 오백만 원이라고 적었다.
나는 다음 조항을 읽었다.
[갑은 을에게 총 열두 번의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을은 모든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거부에 따른 불이익은 없다.]
[세이프워드를 말하는 즉시 모든 행위는 중단된다.]
시선이 멈췄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적힌 그대로입니다.”
“명령이라니요?”
“계약 기간 동안 내가 지시하는 일을 수행하면 됩니다.”
“무슨 지시인데요?”
“그건 미리 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럼 뭐든 시킬 수 있다는 거잖아요.”
“아니요.”
남자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싫으면 거절하면 됩니다.”
“그렇게 쉽게요?”
“거절한 명령은 횟수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나는 다시 계약서를 봤다.
이상했다.
오백만 원이라는 큰돈.
열두 번의 명령.
언제든 거부할 수 있다는 조건.
남자에게 불리한 계약처럼 보였다.
“왜 저예요?”
처음으로 그의 표정이 아주 조금 변했다.
“내가 찾던 조건에 맞았으니까.”
“무슨 조건인데요?”
“빚은 있지만, 아무 일이나 할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은 사람.”
“지금 여기 온 것부터 무모한 것 같은데요.”
“아직 도망가지 않은 걸 보면 그렇기도 하군요.”
비웃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나는 다시 계약서를 넘겼다.
접촉에 관한 조항.
신체적 행위는 사전 동의가 있어야 한다.
동의는 언제든 철회할 수 있다.
모든 기록은 계약 종료와 동시에 폐기한다.
마지막 장에는 빈칸이 있었다.
[세이프워드: ______]
“제가 정하는 거예요?”
“네.”
나는 펜을 들었다.
무슨 단어가 좋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빨간불.”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잠시 머물렀다.
“이유는?”
“멈추라는 뜻이 확실하니까요.”
“좋습니다.”
나는 빈칸에 ‘빨간불’이라고 적었다.
그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서명란이 보였다.
“계약하면 바로 오백만 원을 주는 거예요?”
“서명과 동시에 입금됩니다.”
“제가 첫 번째 명령도 하기 전에 도망가면요?”
“위약금 조항을 읽어보세요.”
역시 그렇게 허술한 계약은 아니었다.
계약금을 받은 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으면 두 배를 배상해야 했다.
나는 한참 동안 펜을 쥐고 있었다.
이 계약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살기에는 이미 돈이 너무 부족했다.
결국 나는 서명했다.
한서윤.
남자는 계약서를 받아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차도현.
그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5,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나는 화면 속 숫자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정말이었다.
숨이 조금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첫 번째 명령은 언제예요?”
차도현은 등받이에 기대어 나를 바라봤다.
차분한 눈이었다.
나를 시험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나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어나세요.”
명령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한 말이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내 앞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는 테이블을 돌아 그의 앞에 섰다.
차도현은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무릎 꿇어요.”
숨이 멎었다.
그의 첫 번째 명령이었다.
거부할 수 있었다.
세이프워드를 말해도 됐다.
그런데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싫습니까?”
“……아니요.”
“그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몸을 붙잡았다.
“무릎 꿇어요, 한서윤 씨.”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차가운 바닥이 피부에 닿았다.
차도현은 손을 뻗지 않았다.
나를 만지지도 않았다.
그저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런데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잘했습니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나는 알았다.
이 계약에서 정말 위험한 건 그의 명령이 아니었다.
그 명령을 따르고 싶어지는 나 자신이었다.
월요일 오전 9시 30분.한서윤은 출근하자마자 개인 휴대전화에 도착한 예약 알림을 확인했다.주말에 처음 게시한 그림 수업의 신청 인원이 4명으로 늘어나 있었다.정원은 6명.아직 개점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예상보다 반응이 빨랐다.서윤은 예약자에게 보낼 안내문을 다시 확인했다.수업 날짜와 시간, 찾아오는 방법, 준비물, 취소 규정까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그때 남기준 과장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한 총괄님, 문화사업 관련해서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서윤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들어오세요.”남기준이 서류를 건넸다.“수선집 사장님께서 전시 문구를 최종 확인하셨습니다. 다만 사진 1장을 교체하고 싶다고 하십니다.”“어떤 사진이죠?”“처음에는 오래된 줄자를 촬영했는데, 이번에는 직접 수선한 옷의 일부를 보여 주고 싶으시답니다.”서윤은 자료를 살폈다.“사진에 손님 이름이나 연락처가 보이지 않도록 확인해 주세요.”“네. 이미 요청드렸습니다.”“좋아요. 그럼 수정본을 받아서 다시 확인하죠.”남기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서윤은 업무 자료를 펼쳤다.개인 서점과 회사의 문화사업은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었지만, 운영과 자료 관리는 철저히 구분하고 있었다.오후 1시 10분.차도현은 윤석재 본부장과 사업 검토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문화사업 시범 전시 예산이 예상보다 높습니다.”도현의 말에 윤석재가 자료를 확인했다.“전시물 제작과 운송 비용이 추가됐습니다.”“비용을 줄일 방법은 검토했습니까?”“일부 전시물을 디지털 자료로 대체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도현은 보고서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전시 효과가 떨어지는 방식으로 무조건 비용부터 줄이지는 마십시오.”“알겠습니다.”“대신 실제로 필요한 항목과 불필요한 항목을 구분하십시오.”윤석재가 고개를 끄덕였다.도현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그리고 참여 상점의 자료 제공 동의가 끝나기 전까지 제작 발주는 보류하십시오.”“네, 의장님.”회의가 끝난 뒤 도현은 잠
목요일 오전 9시 10분.한서윤은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휴대전화 알림을 확인했다.전날 밤 개인 계정에 올린 작은 서점 준비 소식에 댓글이 달려 있었다.‘책도 직접 고르시는 건가요?’‘그림 수업은 초보자도 신청할 수 있나요?’‘혼자 방문해도 괜찮은 공간이면 좋겠어요.’서윤은 댓글을 하나씩 읽으며 미소 지었다.아직 개점 날짜와 정확한 위치도 공개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다만 관심이 실제 방문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서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회사에 있는 동안에는 회사 업무에 집중할 생각이었다.오전 10시 30분.회의실에는 윤석재 본부장과 남기준 과장, 이수현 대리, 정하린 대리가 모여 있었다.서윤은 문화사업 사전 조사 보고서를 화면에 띄웠다.“오늘은 참여 상점별로 확인된 내용과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항을 구분하겠습니다.”남기준이 첫 번째 자료를 설명했다.“현재 6곳에서 참여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중 4곳은 전시 방식까지 협의했고, 나머지 2곳은 공개 범위를 검토 중입니다.”윤석재가 물었다.“참여 의사와 최종 동의를 구분해서 기록했습니까?”“네. 별도로 표시했습니다.”서윤은 다음 화면을 넘겼다.수선집에서 제공한 글과 오래된 줄자 사진이 나타났다.“이 사례는 상호와 위치를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검토 중입니다. 전시 문구는 작성자 확인을 거쳤고, 사진 사용 범위는 최종 동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정하린이 말했다.“전시 구성은 사진과 글을 중심으로 준비했습니다.”윤석재는 화면을 살폈다.“상점 이름을 공개하지 않으면 방문객이 어디인지 궁금해할 수도 있겠군요.”서윤이 대답했다.“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여자의 선택이 우선입니다. 위치를 알려 주는 것이 이번 사업의 목적은 아니니까요.”윤석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방향으로 정리하십시오.”회의는 예정된 시간 안에 끝났다.서윤은 보고서를 최종 검토한 뒤 의장실에 제출했다.오후 1시 20분.차도현은 제
수요일 오전 9시 20분.한서윤은 출근하자마자 개인 휴대전화로 배송 일정을 확인했다.서점에 놓을 책장 2개와 이동식 테이블, 의자가 다음 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창가에 놓을 작은 책상은 별도로 주문해 두었다.그런데 배송 안내문을 읽던 서윤의 손이 멈췄다.‘대형 가구 배송은 건물 앞 하차만 가능하며, 실내 운반 및 조립은 별도입니다.’“아, 이걸 생각 못 했네.”서윤은 곧바로 배송업체에 연락했다.“안녕하세요. 주문한 가구의 실내 운반과 조립을 추가할 수 있을까요?”상담원은 배송 주소와 주문번호를 확인했다.“가능합니다. 다만 추가 비용이 발생합니다.”“견적을 받아볼 수 있을까요?”“네.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통화를 마친 서윤은 운영 예산표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했다.가구를 구입하는 비용과 실제 사용할 수 있도록 설치하는 비용은 달랐다.작은 공간 하나를 꾸미는 데도 생각보다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오전 11시 10분.서윤은 회사 회의실에서 문화사업 사전 조사 결과를 검토하고 있었다.남기준 과장이 참여 상점 명단을 화면에 띄웠다.“현재 6곳에서 참여 의사를 밝혔고, 그중 4곳은 전시 자료 제공 범위까지 협의했습니다.”이수현 대리가 덧붙였다.“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참여 상점 중 2곳이 같은 기간에 내부 공사를 진행한다고 합니다.”서윤은 화면을 살폈다.“전시 때문에 공사를 미루실 필요는 없어요.”“그럼 해당 상점은 제외할까요?”“아니요. 상점 내부를 촬영해야 하는 자료만 일정 조정하고, 기존에 보관 중인 사진이나 기록물로 참여할 수 있는지 여쭤보죠.”남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가능할 것 같습니다.”서윤은 회의 자료를 넘겼다.“그리고 상점마다 사정이 다른데 동일한 참여 방식을 요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정하린 대리가 물었다.“그럼 전시 구성을 상점별로 다르게 할까요?”“네. 어떤 곳은 사진 중심으로, 어떤 곳은 글이나 물건 중심으로요.”서윤은 화면에 적힌 문구를 가리켰다.“대신 전체 전시에서 전달하려
화요일 오전 9시 15분.한서윤은 출근하자마자 대관 공간의 최종 계약서를 확인했다.지난번 요청했던 수정 사항이 모두 반영되어 있었다. 시설 상태 확인 절차와 취소 규정, 보험 관련 책임 범위도 명확하게 정리됐다.서윤은 계약서 마지막 페이지에 서명했다.이제 다음 달부터 1개월 동안 자신만의 작은 서점과 작업실을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계약을 마치자 담당자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공간 이용을 환영합니다.’서윤은 화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그때 정하린 대리가 들어왔다.“총괄님, 좋은 일 있으세요?”“개인적으로 준비하던 공간 계약을 마쳤어요.”“정말요? 축하드려요!”“고마워요.”“어떤 공간인데요?”“주말에만 운영하는 작은 서점 겸 작업실이에요.”정하린의 눈이 커졌다.“총괄님이 직접 운영하시는 거예요?”“네. 일단 1개월만 시험해 보려고요.”“나중에 구경 가도 돼요?”서윤은 웃었다.“물론이죠. 다만 회사 업무와는 별개니까 편하게 오세요.”오전 11시.차도현은 집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윤석재 본부장이 문화사업 사전 조사 보고서를 가져왔다.“의장님, 참여 상점 1차 조사 결과입니다.”도현은 보고서를 펼쳤다.“현재 참여 의사를 밝힌 곳은 몇 군데입니까?”“6곳입니다. 그중 2곳은 익명 참여를 희망하고 있습니다.”“공개 범위는 확인했습니까?”“네. 상호명, 위치, 사진 공개 여부를 각각 선택하도록 했습니다.”도현은 페이지를 넘겼다.“전시 물품의 보관 책임은요?”“원본을 대여하는 경우 별도 인수인계서를 작성하고, 보험 적용 여부도 확인하도록 했습니다.”“좋습니다.”도현은 마지막 페이지를 살폈다.“시범 전시 일정은 아직 확정하지 마십시오.”“네?”“참여자들의 최종 동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윤석재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일정을 맞추기 위해 동의를 서두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오후 12시 30분.서윤은 점심 식사를 마친 뒤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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