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형에게 더는 헛된 기대를 심어주고 싶지 않아 일부러 무심하게 대답했고 더는 논쟁하고 싶지 않아 나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여기까지 와서 싸우자는 거야?”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조용히 말했다.“짐 줘.”나는 별말 없이 짐을 그에게 넘기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우리는 한동안 침묵 속에서 걸었고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태 오빠 상태는 어때? 싸움은 왜 난 거고?”그는 짧게 대답했다.“지금 구금 상태야. 면회는 안 돼.”그의 말에 내 표정이 굳었다.‘그럼 난 뭐 하러 여기까지 온 거지...’나는 신지태가 불안정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온 건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강유형은 내 표정을 살폈는지 바로 덧붙였다.“조율 중이야. 곧 면회 가능할 거야.”나는 살짝 안도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싸움은 왜 난 거야?”그는 침착하게 설명했다.“훈련 중에 생긴 충돌 때문이야. 상대는 티크라는 보조 선수인데 태도가 엉망이었어. 자주 지각하거나 일찍 끝내고 훈련에 집중도 안 했지. 지태가 교체를 요청하자 그가 화를 냈고 말다툼이 심해지다 결국 몸싸움으로 번졌어.”그의 말을 들으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 사람 많이 다쳤어?”강유형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쳤는데 뒤통수를 심하게 다쳤어. 결국...”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사망한 거야?”나는 숨을 들이쉬며 겨우 물었다.그는 고개를 끄덕였다.“아직 사망 원인 조사가 진행 중이야. 만약 지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면 형량이 줄어들 수도 있어.”나는 만약 결과가 반대로 나온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살인은 어디서나 무거운 죄로 취급받는 법인데...’강유형은 차분하게 말했다.“최악의 경우를 피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만나보고 있어.”그는 시계를 확인하며 내게 물었다.“저녁 먹었어? 뭐라도 먹자.”“입맛 없어.”신지태 생각에 배고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강유형은 잠시 나를
강유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정말 날 원망하는구나.”“그렇게까지는 아니야.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사실이야. 내 10년을 너한테 낭비했으니까.”이미 이 화제가 시작된 이상,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그가 잠시 침묵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그럼 내 10년은? 윤지원, 나도 널 사랑했고 진심으로 너에게 최선을 다했어.”나는 잠시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그건 부정하지 않아. 하지만 네가 조나연과 엮인 그 순간, 네가 했던 모든 노력을 스스로 지운 거야.”“죄인도 집행유예나 한 번쯤은 용서받을 기회를 얻잖아. 그런데 왜 나는 그런 기회조차 없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울함이 가득했다.“난 그럴 너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내 단호한 대답과 동시에 음식이 상에 올랐다.강유형은 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지만 내가 먼저 선을 그었다.“이 식사를 계속하고 싶다면 과거 이야기는 하지 마.”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고 결국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는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지만 서로 음식 맛조차 느끼지 못한 채 숟가락만 들었다.식사를 마친 후 그는 나를 호텔로 데려다줬고 내 방은 그의 바로 옆방이었다.방에 들어가기 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태 오빠를 가능한 한 빨리 만나고 싶어.”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아.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이번엔 그의 배려를 받아들여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그가 다시 불렀다.“윤지원, 넌 진정우에 대해 정말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뭐라고?”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대답 대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도대체 무슨 뜻이지? 진정우에 대해 뭘 말하려는 거야?’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진정우에게 영상통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휴대폰을 안 들고 있나, 아니면 바쁜 건가?’나는 호텔 방 사진을 찍어 메시지와 함께 보냈다.[안전하게 도착했어.]하지만 여전히 답
진정우의 영상 통화가 걸려 왔을 때, 나는 호텔 발코니에서 비 내리는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낯선 도시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기운을 준다.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는 그런 감정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며칠 전 영상 통화에서 들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강유형이 왜 진정우에 대해 다 아냐고 물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진정우는 단순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진씨 가문의 사람이었다.나는 그를 평범한 회사원이라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숨겨진 거대 재산을 가진 부잣집 자제였다.그런데 왜 그는 자신을 숨겼을까? 혹시 영화나 소설처럼, 자기기 재산이나 신분 때문에 사랑받고 싶지 않았던 걸까?이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에 나타난 진정우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하고 잘생겼다.“지원아, 내가 설명할게.”그의 말은 단도직입적이었다. 이미 내가 모든 걸 알았다는 걸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뭘 설명하려는 건데?” 나는 다리를 꼼지락거리며 일부러 무심한 척 물었다.“널 일부러 속이거나 숨긴 건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나는 창문에 손가락으로 무심히 선을 그으며 말했다.“뭐, 네가 말하지 않은 것도 네 선택이지.”“지원아...”“진정우, 네가 날 강유형에게 맡긴 건, 그가 진씨 가문과 협력하려면 널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겠지?”“그건...”“하지만 일반적인 남자 친구라면, 전 남자 친구에게 여자 친구를 맡기진 않지 않아?” 나는 낮게 속삭였다.“지원아...”“내가 네게 했던 말 기억나? 나는 거짓말을 제일 싫어한다고 했잖아.”내 마음은 이미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알아. 네가 알게 되면 말하려고 했어. 하지만 적당한 시기를 찾지 못했어.” 그의 목소리는 간절했다.“시기를 찾지 못했다니. 진씨 가문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나서 말하려고 했던 거야? 아니면 오늘 내가 우연히 듣지 않았다면, 영영 말하지 않았겠지?”그는 한동안 침묵하다 답했다.
나는 마음이 조여 오는 듯한 불안감을 느끼며 물었다.“내일 대략 몇 시쯤?”“정확히는 모르겠어. 내일 전화로 알려줄게.”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멈췄다가 물었다.“밥은 먹었어?”“응. 강유형이랑 같이 먹었어.”나는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진정우도 이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을 사람이었다. 게다가 나를 강유형에게 맡긴 것도 그였으니.그는 예상대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신지태에 대해 강유형이 뭐라고 했어?”“그가 면회를 도와줄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어. 다른 말은 없었어.”“강유형은 신지태 팀원들과 친하니까 유용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거야.”그의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았고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우리는 전화 속에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여기 비가 꽤 많이 와.”“들었어.”그제야 나는 화면이 천장을 비추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진정우는 비도, 나도 보지 못한 채 호텔 천장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보여줄게.”나는 휴대폰을 들어 창밖의 비 내리는 풍경을 비췄다.“내가 보고 싶은 건 너야.”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렀다. 잠시 침묵한 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정우야, 넌 날 화나게 했어. 그래서 너에게 벌줄 거야.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날 못 볼 거야.”그는 한참 조용히 있더니 결국 말했다.“알겠어. 네가 말한 벌을 받아들일게.”그게 벌일까? 어쩌면 그럴지도.그는 나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하루라도 못 보면 긴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지는 법이다.진정우는 휴대폰 너머로 나와 함께 낯선 도시의 비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나는 한참 동안 창가에 앉아 있었고 허리가 뻐근해지자 침대로 옮겨 누웠다.휴대폰을 들었을 때, 그는 여전히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왜 아직 안 끊었어?”“끊고 싶지 않아. 네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으니까.”그의 대답은 내 가슴을 울렸지만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럼 내가 끊을게.
[가능한 빨리 연락 주세요.]상대에게서 온 짧은 메시지였다.그래서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알겠습니다.]그런데 답장을 보내고 나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능한 빨리라는 말은 뭔가 다급한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나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혹시 시간이 안 되시거나 여건이 어려우시면 사진으로라도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그 사람은 늘 이렇게 종잡을 수 없었다. 그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내가 그를 찾을 방법은 없었다.부모님의 사고가 다시 떠오르자 나의 마음속 불안함은 한층 더 깊어졌다.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낯선 환경 때문인지 아니면 머릿속에 엉킨 걱정 때문인지 나는 밤새 뒤척였다.다음 날 아침, 강유형은 나를 보자마자 한눈에 상태를 알아챘다.“잠을 잘 자지 못했나 봐.”“괜찮아.”나는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난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아마 헤어진 여자들의 마지막 자존심 같았다.강유형은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표정만으로도 내가 그를 답답하게 만든다는 게 느껴졌다.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오늘 신지태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일단 지태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필요한 것도 물어봐야 해.”그의 말은 전날 진정우가 했던 말과 거의 같았다. 둘 다 신지태의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그가 말을 끝냈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는 내 반응이 이상했는지 다시 물었다.“왜 아무 말이 없어?”“어제 진정우가 똑같이 말했거든.”내 대답에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진정우가 사람을 보내 내가 신지태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대.”나는 솔직히 말했다.그러자 강유형은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턱은 굳게 다물려 있었고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는 여전히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쉽게 화를 냈다.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진정우는 내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드디어 신지태를 만났다. 그는 수감복을 입고 있었고 멋있던 헤어스타일은 온데간데없이 거의 삭발된 상태였다.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그는 처음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신지태는 강유형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실력으로 인정받으며 자리 잡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의 인생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지태 오빠.”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나를 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여긴 어떻게 왔어?”늘 그랬듯이 그는 내 앞에서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마치 그의 세상은 언제나 맑은 햇살로 가득한 듯했다.그런 그의 태도가 오히려 나를 더 침묵하게 했다.“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아니면 너무 못생겨져서 날 못 알아보겠어?”그가 이렇게 밝게 웃는 건 전부 연기였을 것이다. 나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아니야. 오빠는 언제나 멋져.”나는 그의 말을 받아 웃으며 대답했다.그러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날 위로하지 않아도 돼.”“우리는 오빠가 누군가의 계략에 빠졌다는 걸 다 알아. 강유형과 진정우도 오빠를 돕기 위해 애쓰고 있어. 그러니까 오빠는 꼭 침착하게 기다려야 해. 분명 잘 해결될 거야.”나는 그의 마음을 달래며 준비한 질문으로 대화를 유도했고 신지태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아무도 그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으니 우리의 말이 의외였던 것 같았다.“누가 오빠를 찾아왔었는지 자세히 말해줘. 디크랑 왜 다투게 됐는지. 최대한 자세히 말해줘. 혹시 다른 중요한 일도 있었다면 모두 얘기해줘.”내가 간절히 말하자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듯했지만 다시 눈을 뜨며 고개를 저었다.“내 일은 너희가 신경 쓸 필요 없어. 괜히 너희까지 휘말리게 될 수도 있어.”그의 목소리에는 포기와 체념이 묻어
감금실을 나올 때까지도 신지태의 절박한 외침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강유형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신지태의 감정 상태는 순간적으로 격앙되었다가 금세 우울해질 정도로 정말 불안정했다. 특히 그가 마지막에 외쳤던 말이 기억났다.“지원아,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난 결백해. 제발 나 좀 꺼내줘!”그 목소리가 내 가슴을 짓눌렀다.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강유형이 빠르게 다가왔다.그는 내 안색이 나빠진 걸 보자 재빨리 날 부축하며 말했다.“너 괜찮아? 얼굴이 왜 그래? 신지태가 무슨 얘기라도 했어?”신지태가 나한테 부탁한 걸 떠올리자 나는 강유형에게 말했다.“일단 차에 가서 얘기하자.”신지태는 내가 이곳을 빨리 떠나길 바랐다. 아마도 Q 클럽의 감시자들이 근처에 있다는 걸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그는 나마저 위험에 빠질까 봐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차에 오르자마자 강유형이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진정 좀 해.”하지만 나는 물을 받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지태 오빠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고 했어.”나는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지태 오빠 말로는 여긴 아주 위험한 곳이고 우리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대.”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차 앞쪽에서 강렬한 헤드라이트가 번쩍였고 운전기사는 당황하며 욕을 내뱉었다.“젠장!”강유형은 곧바로 내 어깨를 붙잡으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신지태를 만난 지 10분도 안 돼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제 어떡해?”나는 공포가 밀려와 본능적으로 강유형의 팔을 붙잡았고 그는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운전사에게 지시했다.“앞뒤 좌우로 네 대가 따라붙었어. 네가 알아서 어떻게든 따돌려.”운전기사는 침착하게 대답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강 대표님, 뒷좌석 안전벨트 꼭 하세요.”강유형은 재빠르게 내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여주었다.차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내가 휘청거리자 강유형은
차가 크게 충돌하며 뒤집히고 마침내 모든 게 멈췄다. 온 세상이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의 고요함 마치 내 생명이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한참 후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나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보려고 하자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움직이지 마...”주변은 여전히 깜깜했다. 단순히 어두운 것이 아니라 내 얼굴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유형?”“나... 여기 있어.”그의 목소리는 바로 앞에서 들렸지만 무척 힘이 없어 보였다.“좀 비켜봐. 움직일 수가 없어.”나는 그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몸을 빼내려 했다.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자 나는 얼굴을 그의 품에서 겨우 빼낼 수 있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찌그러진 차체와 피를 흘리며 움직이지 않는 운전기사가 보였다.나는 공포에 질려 외쳤다.“강유형! 강유형!”나는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를 돌아보니 얼굴 역시 피투성이였다.‘큰일이야. 둘 다 다쳤어. 어떡하면 좋아.’나는 내가 다쳤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난 여전히 강유형의 아래에 깔려 있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찌그러진 차체에 더 깊이 눌려 있었다.그러나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우리 모두 더 큰 위험에 처할 게 분명했다.“강유형, 숨을 깊게 들이쉬고 몸을 웅크려 봐. 그래야 내가 빠져나올 수 있어.”내 말에 그는 힘겹게 호흡을 조절하며 몸을 웅크렸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마침내 나는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고 고통에 몸을 떨고 있었다.내가 나올 수 있게 하느라 그는 막심한 고통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나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 주려 했지만 그는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먼저... 경찰에 신고해.”“아니... 진정우한테 전화해.”나는 바로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혹시라도 경찰이 Q 클럽과 연루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