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우가 예전에 나한테 말해준 적이 있었다. 진씨 가문으로 돌아가려면 그에 따른 조건이 붙을 거라고 말이다. 그건 바로 다른 집안과 통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런데 아까 진 대표님 말을 들어보면 분명 나를 받아들인 것 같았는데... 앞뒤가 안 맞잖아. 설마 생각이 바뀐 걸까? 만약 다른 조건이 없다면 왜 정우 씨가 아니라 나를 설득하려 하는 걸까?’아무리 생각해 봐도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굳이 들추지 않고 진수로에게 반은 진심으로, 반은 농담조로 말했다.“진짜요? 하지만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정우 씨가 판단해야죠.”진수로는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내 비유에 질려서 그랬던 것 같다.“정우가 진씨 가문이랑 어떤 사이였는지는 알고 있겠지. 정우는 고집이 많이 세서 예전 일들이나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놓치지 않아. 그래서 오히려 지원 씨 말을 제일 잘 듣잖아.”“그래도 전 정우 씨 말을 따라야죠. 정우 씨가 싫다 하면 저도 굳이 나서서 말하지 않을 거예요. 전 정우 씨를 사랑하니까요. 그 사람이 싫어하는 걸 억지로 시키고 싶지 않아요.”나는 내 입장을 확실히 밝혔다. 나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지만 진수로도 딱히 불쾌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정우랑 부부가 맞긴 한가보네요. 둘 다 똑같이 고집이 세니까...”그 말은 맞는 말이다. 부부는 마음이 하나여야 한다.“둘 다 돌아갈 마음이 없다면 나도 더 할 말은 없어. 근데 한 가지만 경고하자면 어르신 쪽에서 아마 화가 좀 많이 나셨을 거야.”진수로는 살짝 협박조로 말했다. 하지만 진정우가 이미 말해줬던 내용이었기에 나는 그저 담담하게 반응했다.“그럼 진 대표님께서 잘 달래드려야죠. 어르신들이 화내시면 몸에 안 좋아요.”내가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진수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말했다.“됐고 난 이만 가볼게.”그는 또다시 집 안을 훑어보더니 말을 덧붙였다.“내가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이 집은 부부가 살기에 별로인 구조야.
“나 진짜 크게 키워서 체인점 만들 거거든? 그냥 놀면서 하는 거 아니야.”안리영에게 내 계획을 막 설명하려던 참에 초인종이 울렸다.나는 안리영과 통화하며 일어나서 문 쪽으로 갔다.밖에 누가 왔는지 먼저 들여다본 나는 순간 멍해졌다.“집에 누가 온 거야? 그럼 끊을게.”안리영도 초인종 소리를 들었는지 이렇게 말했다.“진 대표님이 왔어.”안리영도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정우 씨 찾으러 온 거야?”“정우 씨 집에 없는데...”안리영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그럼 널 찾으러 온 거겠지.”“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이따가 나한테 전화 한 통만 해줘. 안 받으면 그 사람한테 살해당한 걸로 생각하고 신고해주고...”내 말에 안리영은 소리 내어 웃었다.“임신하면 생각이 많아진다더니... 차라리 지금 신고하고 문 열지 마. 그래야 살아남지.”그녀의 말에 나도 미소를 지었다.“신고는 일단 안 하고 정우 씨한테 얘기는 할게.”전화를 끊은 나는 인터폰 너머로 보이는 진수로를 찍어서 진정우에게 보내고서야 문을 열었다.“진 대표님.”“갑작스레 와서 미안해.”진수로는 조금 나온 내 배를 힐끗 쳐다보았다.“정우는? 집에 있어?”“정우 씨가 집에 있었으면 대표님께서 여기까지 오지도 않으셨겠죠.”나는 그의 속셈을 바로 들춰냈다.진수로는 어떤 말을 해도 화내지 않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었다.“정우가 있으면 말하기 불편한 얘기라서 그래. 나도 정우 못 이기거든.”진수로는 겉으로 보면 전혀 부잣집 도련님 같아 보이지 않았다.“들어와서 앉으세요. 물이라도 드릴까요?”나는 예의상 물었다.“그럼 물 한 잔 부탁해요. 차로 주시면 더 좋고요.”진수로는 전혀 사양하지 않고 자기 집처럼 행동했다.내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집안을 둘러보았다.“여기가 지원 씨 집 맞지?”“네.”나는 차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두 손으로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집 구조 괜찮네. 그런데 부부가 같이 살기엔 좀 별로야.”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 질문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다. 맞으면 맞고 아니라고 대답하면 되는 일이었다.하지만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구안석의 체면은 분명 서지 않을 것이다. 아까 그가 안리영을 위해 왔다고 인정했으니 말이다.그렇다고 부정하지 않으면 기자들은 두 사람을 억지로 엮어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연애질이나 한다’는 프레임을 씌울 것이었다.“제가 답변드리겠습니다.”안리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 무거운 화제를 받아들였다.“구 교수님은 제 대학 선배였고 지금은 제 지도 교수이자 선생님입니다. 저희 사이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그녀의 말이 끝나자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더 요란하게 터졌다.옆에 앉아 있던 구안석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결국 안리영은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철저히 부정하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구 교수님, 정말 안리영 선생님 말씀대로입니까? 두 분이 연애한 건 사실 아닌가요?”기자들은 끈질기게 물었다.구안석은 마음이 차갑게 식었지만 지금은 안리영의 말대로 하는 것이 그녀를 곤란하게 하지 않는 최선임을 알았기에 이렇게 대답했다.“저와 안리영 선생님은 사제지간이자 친구입니다. 오늘의 수술도 그녀가 없었더라면 이렇게 성공적로 마칠 수 없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구안석은 아직도 안리영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말을 마친 구안석은 안리영을 바라보았고 마침 안리영도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 속에는 담담함과 따스함이 배어있었다.기자들의 카메라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또다시 셔터를 눌렀다.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조시언 역시 모든 장면을 또렷이 보고 있었다.기자회견은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병원 원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제야 가슴이 좀 놓이는구나. 구 교수님, 안 선생님, 오늘 정말 수고 많았어요. 고마운 마음도 있고 오늘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걸 기념할 겸 저녁에 다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을
안리영의 시선이 조시언에게 머물렀다.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눈빛 속에는 칭찬과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어릴 적부터 시험을 치고 성적이 나올 때마다 안리영이 가장 두려워했던 건 부모님의 반응이 아니라 조시언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그대로였다.그가 기뻐하는 걸 보니 그녀는 더없이 기뻤다.“삼촌, 나 수술 성공했어!”안리영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그 앞에 섰다.조시언은 손을 들어 그녀의 수술 모자를 벗기고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칠칠이가 최고야.”“삼촌, 나 진짜 너무 기뻐.”안리영은 이렇게 말하며 참지 못하고 조시언을 꼭 껴안았다.어젯밤, 그녀가 불안할 때 곁에 있어 준 사람은 조시언이었다. 그는 직접 밀크티를 끓여주며 그녀의 긴장을 풀어줬고 따뜻한 대화로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안리영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삼촌, 이번에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건 절반이 삼촌 덕분이야.”조시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는 망설이던 손으로 조심스레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응, 잘했어. 오늘 밤에 많이 축하해 줄게.”그 순간, 축하 인사를 받고 있던 구안석의 눈빛에는 기쁨보다 묘한 불안함이 맴돌았다. 그의 시선은 서로를 끌어안고 속삭이는 두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안리영이 조시언에게 보이는 감정은 유독 특별해 보여서 그는 불안했다.“리영 씨.”구안석이 그녀를 불렀다.“산모가 곧 병실로 옮겨집니다. 같이 가서 상태 확인해야 해요. 그리고 잠시 후에 기자회견도 있습니다.”그 말을 들은 안리영은 조시언에게서 물러났고, 조시언은 그녀의 눌린 머리카락을 다정히 정리해 주었다.“가봐. 바쁘잖아.”병원 원장을 비롯한 일행도 각자의 일로 분주해졌다.“조 대표님, 저희는 이만 기자회견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아뇨. 저는 이만 가볼게요.”조시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사람들이 떠나고 조시언은 다시 한번 고요해진 수술실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걸음
태아에게 심장 수술을 해주는 건 처음이었기에 병원 전체가 관심을 보였고 지어는 언론 기자들까지 몰려들었다.조시언 역시 그 자리에 빠지지 않았다.안리영은 병원 원장님과 함께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조시언의 지위가 보통이 아님을 실감했다.‘근데 어떻게 한 거지?’그녀는 수술이 끝나면 반드시 집에 가서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안리영은 이미 수술용 격리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고 같은 색깔의 수술 모자, 수술용 마스크까지 착용했다. 그래서인지 유일하게 드러난 눈동자만이 더욱 돋보이고 빛나 보였다.“수술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원장님이 대표로 모두의 마음을 전했다.수술 집도의인 구안석도 안리영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둘은 병원장 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수술대로 향했다.“조 대표님은 모르실 수도 있지만 구안석 교수랑 안리영 선생이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라고 하더라고요. 학교 다닐 땐 서로 좋아했다는 말도 있고요. 이번 프로젝트를 우리 병원에서 진행하자고 한 것도 다 안리영 양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어요.”원장님은 마치 자신이 성사한 일처럼 자랑스럽게 말했다.조시언의 시선은 투명한 유리 벽 너머 수술실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리영과 구안석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원장님의 덕분인 줄 알고 이번 수술 성공하면 원장님을 표창할 생각이었는데 아쉽네요.”조시언의 말에 원장님의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렸다.한편, 수술실 안에 있는 안리영과 구안석은 눈빛 교환을 했다. 그렇게 수술은 드디어 시작됐다.모든 의료진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바깥의 참관실은 숨소리 하나 없이 긴장감이 감돌았다.이 수술이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한 의료적 시도 때문만이 아니었다.수술을 받는 임산부의 외할아버지가 해동 지역의 고위직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매우 조용히 행동해 온 탓에 아무도 몰랐던 사실이었다.조시언이 귀띔해 주지 않았다면 원장님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이번 수술이 성공
조시언은 검은색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금방 샤워를 해서 그런지 머리는 낮처럼 단정하지 않았고 콧대에는 테 없는 안경을 걸치고 있어 고급스럽고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예전부터 조시언이 잘생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왠지 오늘따라 지나치게 잘생겨 보여서 안리영은 순간적으로 그를 소유하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꼈다.그 생각은 순식간에 그녀의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그녀는 얼굴이 붉어져서 급히 눈을 내리깔고 괜히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다.“방에 불이 켜져 있어서 왔는데 왜 아직도 안 자? 시간이 늦었어.”조시언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약간 허스키했는데 아주 매력적이었다.“잠이 안 와서...”안리영은 그렇게 말하며 방에서 나와 소파 쪽으로 걸어갔고 조시언도 그 뒤를 따랐다. 그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안리영이 알아서 털어놓았다.“내일 좀 중요한 수술이 있거든.”조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티 테이블 쪽으로 가서 찻잎을 꺼냈다. 그리고는 찻잔에 담았다.“긴장해서 그래?”“긴장한 건 아닌데... 그래도 걱정돼.”안리영은 소파에 틀고 앉아 귀여운 곰 인형을 품에 안았다. 차가 끓기 시작하자 안리영은 조시언을 바라보며 물었다.“삼촌, 아이들 좋아해?”조시언은 차 끓이는 기계를 작동시키며 말했다.“그렇게 좋아하진 않아. 너무 시끄러워서 말이야.”“뭐가 시끄러워? 말랑말랑하고 얼마나 귀여운데.”지금까지 수많은 아기를 봐온 안리영은 누구보다 아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너도 어릴 땐 시끄러웠어.”조시언의 말에 안리영은 말문이 막혔다.‘삼촌이 아기를 싫어하게 된 것도 나 때문인가?’안리영은 피식 웃었다.“왜? 나 때문에 트라우마라도 생겼어?”“그런 셈이지. 평생 쓸 인내심을 너 하나 달래는 데 다 써버렸거든. 그래서 이젠 싫어.”조시언이 말하는 사이에 차는 이미 끓고 있었고 그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조시언, 왜 맨날 뭐만 하면 다 내 탓인데!”안리영은 대담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조시언은 미소를 지으며 차 끓이는 것에 집중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