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계좌번호를 보여주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1억 2,000만 원을 이체했다.“빚 문서 내놔.”내가 손을 내밀자 그들은 약속대로 빚 문서를 건네며 비웃듯 말했다.“와, 생각보다 돈이 많네.”나는 문서를 확인한 후, 차갑게 경고했다.“난 돈뿐만 아니라 ‘사람’도 있어. 그러니까 앞으로 다시는 소희를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마. 만약 또 한 번 찾아오면 그땐 죽을 줄 알아.”내 단호한 태도에 그들은 더 이상 헛웃음을 짓지 않았다.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지자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지만 가던 길에 한 남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돈 많은 친구가 있는데 대체 왜 사채를 빌린 거야?”“꺼져.”나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이소희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온몸을 떨고 있었다.“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나는 그녀를 조용히 끌어안았고 그제야 그녀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흑... 으아아아아...”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그녀를 꼭 안아주며 그저 울게 놔두었다.이소희가 실컷 울고 난 후, 나는 그녀를 조용히 그녀의 원룸 안으로 데려갔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곰팡이가 핀 벽지, 낡고 좁은 침대, 허름한 책상 위에 놓인 남은 음식들.한때 당당하고 씩씩했던 그녀가 이런 곳에서 이렇게 살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끝이 거칠었고 피부는 갈라져 있었으며 곳곳에는 작은 상처도 남아 있었다.그녀는 돈을 갚기 위해 거친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잘못된 길을 택하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데리고 호텔로 향했다. 그녀에게 샤워를 시키고 새 옷을 입힌 뒤, 함께 침대에 누웠다.그제야 이소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용씨 가문이야.”“뭐?”“그놈들, 다 해동 용씨 가문의 사람들이라고.”순간, 내 머릿속에 용진표의 얼굴이 떠올랐다.그 집안의 돈이
‘내가 골탕을 먹였다고?’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음표를 보냈다.[안석 선배가 왔어!]안리영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나는 곧장 호텔 사건이 떠올라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답장을 보냈다.[내가 만들어 준 둘만의 시간을 잘 즐겨.][즐길 시간이 어딨어, 나 지금 바로 수술 들어가야 해!]‘아, 진짜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하지만 안리영은 일부러 일을 피하는 게 아니었고 정말로 수술이 있었다.사실 다른 의사에게 맡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구안석이 몇 달 동안 연락도 없이 자기 일에만 몰두했는데 이제 와서 그가 돌아왔다고 해서 그녀가 바로 일정을 바꿔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그리고 시간이 흘러 수술이 끝났을 때는 이미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수술을 마친 안리영은 제일 먼저 휴대전화를 확인했지만 메시지 창은 텅 비어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구안석과의 대화방을 열어 보았지만 대화는 그가 한국에 도착했다는 메시지에서 멈춰 있었다.‘몇 시간 동안... 단 한 마디도 없었다고? 설마... 진짜로 화난 거야?’안리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평소처럼 휴게실로 향했다.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휴게실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그 불빛 아래 POLO 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구안석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수술은 잘 끝났어?”안리영은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리며 힘없이 대답했다.“응, 잘 끝났어. 그런데... 여기서 뭐 해?”“너 기다리고 있었어.”그의 짧은 대답에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나도 원래 이따 찾아가려고 했는데...”“정말... 올 생각이 있었어?”그 말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한 압박감을 주었다.안리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치며 애써 피식 웃었다.“나, 먼저 씻고 옷 갈아입을게.”그녀는 얼른 화제를 돌리며 욕실 쪽을 가리켰다. 그런데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구안석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안석은 안리영을 병원에서 데리고 나왔다. 안리영은 그가 호텔로 데려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차에 오르자 구안석이 조용히 물었다.“너희 집으로 가도 돼?”안리영은 잠깐 당황하면서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를 금방 알아챘다.“내 집에 남자가 있는지 확인하러 가자는 거야?”“아니.”‘그럴 리가, 역시 남자의 질투심은...’“나는 그런 남자들과는 달라.”안리영은 할 말을 잃었고 이제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구안석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그녀의 이 작은 집은 부모님 외에는 오직 윤지원만이 와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구안석을 데리고 올라가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간 안리영은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구안석의 목을 팔로 감쌌다. 신발만 벗은 그녀는 순식간에 그보다 훨씬 작아져 발끝을 들여야 했다.“안아 줘.”구안석은 안리영을 번쩍 들어 올렸고 그녀는 구안석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구안석, 먼저 말해두는데 호텔 일은 그냥 연극이었어. 윤지원이 연기를 하려고 꾸민 거야. 나랑 그녀는 남자랑 호텔에서 잔 적 없어. 우리는 같은 방에서 잤고 내 집에는 어떤 남자도 온 적 없어. 믿지 못하겠으면 마음대로 확인해 봐...”“응, 봤어!” 구안석의 눈은 그녀의 머리 위를 넘어 보고 있었다.“봤지? 내 집에는 남자 없어.” 안리영이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럼 저 사람은 누구야?” 구안석의 말에 안리영은 잠깐 멈칫했다. 그녀가 아직 반응하지 못했을 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안리영, 남자를 집에 데려왔어?”그 소리를 듣고 안리영이 고개를 돌리자, 거실 한가운데 서 있는 남자를 보곤 그대로 얼어붙었다.“저 사람 누구야?” 구안석도 그녀에게 물었다. 안리영은 몇 초간 머리가 하얘졌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삼촌, 왜 갑자기 우리 집에 온 거야? 누가 비밀번호를 알려줬어?”믿음직스럽지 못한 안리영의 엄마 외에 그녀의 집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넌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저 사람 누구야
조시언의 시선이 구안석에게로 향했다.“나는 호텔에 머물 거야. 그냥 널 보러 온 거야.”안리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삼촌, 호텔 예약은 했어? 안 했으면 내가...”“필요 없어.”조시언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너희 둘 앉아. 우리 얘기 좀 하자.”그 말투는 확실히 어른스러운 느낌이었지만 사실 그는 안리영보다 한 살 많을 뿐이었다. 구안석도 조시언이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채고 앉자마자 안리영의 손을 잡고 먼저 입을 열었다.“저는 리영이와 진지하게 교제 중입니다. 결혼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리영이가 동의했어요?” 조시언의 질문은 매우 직설적이었다. 구안석은 안리영을 바라보았다.“아직은 아니요.”안리영은 급히 말을 이었다.“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안석 선배를 좋아했어. 선배가 청혼하면 저는 나는 당연히 선배랑 결혼할 거야.”조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얼굴에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지만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리영이 동의만 한다면 저는 최대한 빨리 부모님을 뵙고 인사드릴게요.” 구안석도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안리영은 구안석이 느끼는 압박감을 알아챘다. 오늘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으면 구안석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을 텐데.원래 그녀는 그냥 연애부터 시작하려고 했을 뿐, 결혼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다. 이제 이렇게 되니, 마치 구안석을 몰아붙이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책임감이 강한 구안석은 오늘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이때 안리영도 말을 이었다.“삼촌, 삼촌은 나랑 같은 나이인데 생각이 왜 이렇게 고리타분해? 나는 지금 안석 오빠랑 연애 중이고 지금은 그냥 연애만 하고 싶어. 부모님 뵙고 결혼하는 건 그다음 얘기야.”“그럼 너도 꼭 저 사람과 결혼할 생각은 없다는 거야?” 조시언의 질문은 그녀를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었다.안리영은 남자에게 너무 확실한 약속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조시언이 엄마에게 자신과 구안석의 관계를 말할까 봐 걱정되었다.“응.
구안석은 결국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안리영은 이미 생각해 본 문제였기 때문에 그가 묻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그럼 너는? 왜 안 돌아와?” 구안석은 안리영의 이마에 뽀뽀하며 잠시 망설이더니 금세 대답했다.“지금은 안 돼.”안리영은 그 이유에 대해 더 묻고 싶지 않았다.“나는 외국에 가고 싶지 않아.”두 사람의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구안석은 안리영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느꼈는지, 가볍게 그녀를 끌어안았다.“내년에 신청해서 돌아올 거야.”“응.” 안리영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고 구안석은 잠시 후 일어나서 욕실로 향했다.안리영은 천장을 바라보며 예전에는 장거리 연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제는 정말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하게 되었다.그때, 구안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안리영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욕실을 향해 외쳤다.“구안석, 희연 씨가 전화 왔어.”“받아.” 구안석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고 안리영은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소희연 교수님.”전화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리영 씨, 구 교수님은요?”“지금 샤워 중이에요. 급한 일 있으면 제가 전해줄게요.”안리영은 구안석이 그녀가 이 전화를 받는 걸 알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내일 릴리 교수님이 오시는데 구 교수님이 반드시 참여해야 해서 오늘 밤엔 반드시 돌아와야 합니다.”“알겠습니다. 전해드릴게요. 또 다른 일은 없나요?”안리영은 소희연이 지금 시간이 어떤 때인지, 구안석이 왜 돌아왔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단순히 구안석에게 알리기 위해 전화한 것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리영 씨는 구 교수님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어요?”소희연이 진짜 묻고 싶었던 건 이거였다. 그녀는 역시 속셈이 있는 듯했지만 참 직설적으로 구안석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모르겠어요. 저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어요. 지금 사랑하면 됐죠.”안리영은 일부러 소희연을 자극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진심을 말했다.아무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누구의 비밀?” 나는 무심코 물었다.이소희는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지만 마치 말하고 싶으면서도 뭔가를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그녀의 표정을 보고 나는 그 비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말이 떠오르며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그만 말해, 내가 직접 조사할게.”이소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언니, 이렇게 많은 돈을 빌려줬는데 정말 고맙고 미안해. 하지만 더 이상 내 문제에 신경 쓰지 말아줘.”이소희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그녀가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져만 갔다.“이 돈은 걱정하지 마, 너만 괜찮으면 돼.” 나는 그녀가 부담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소희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그녀는 반드시 이 돈을 갚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누구에게나 자신의 고집과 원칙이 있는 법이니까 나는 더 이상 그녀의 결심을 깨고 싶지 않았다. 비록 이소희는 여전히 여기 있을 생각을 고수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새로이 단독 아파트를 마련해주고 3년 치 집세를 미리 지급했다.그녀에게는 더 이상 그 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소희가 더 이상 그렇게 힘든 일을 하지 않도록, 허진호의 도움을 받아 회사도 알아봐 주었다.그리고 안리영에게 전화를 걸어 구안석과 만나기로 약속했다.“알겠어, 시간과 장소 정해지면 알려줄게.” 안리영의 목소리는 마치 내가 구안석과 만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들렸다.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지만 이미 약속은 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안리영은 오랫동안 답장이 없었다.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그때, 구안석은 갑자기 안리영에게 부모님을 만나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이건 안리영에게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부모님 만나러 가자고? 어제 작은 삼촌 때문에 그런 거야?” 안리영은 구안석이 왜 갑자기 부모님을 만나자고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아니, 사실 내가 돌아온 이유도 바
나는 예전에 강유형과 함께 계약을 논의하러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그때 내 인상 속의 이곳은 꽤 정식적인 곳이었다.하지만 이소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내가 너무 순진했다는 걸 깨달았다.이곳에서 정보를 얻으려면 단순한 손님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나는 전에 술집에서 했던 방식대로 접근하기로 했다.회색 산업에 여성 서비스가 존재한다면 자연히 남성 서비스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전에 술집에서도 남성 직원을 불러봤으니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 보는 게 자연스러웠다.혹여 용씨 가문에서 나를 의심한다 해도 내가 그런 스타일의 손님이라고만 생각할 것이다. 때로는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이 가장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나는 VIP 룸을 하나 빌리고 직원에게 서비스를 요청했지만 직원은 단호했다.“죄송합니다, 고객님. 저희는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술을 따르는 직원은 가능합니다.”이곳이 불법적인 사업을 운영하면서도 완벽하게 감추고 있다는 증거였다.“그럼 술을 따라줄 사람을 불러줘요. 가장 잘생긴 사람으로.”나는 마치 돈 많은 사치스러운 손님처럼 능청스럽게 말했다.잠시 후, 룸에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뜻밖에도 익숙한 얼굴이었다.“준호 씨가 왜 여기 있어요?“나는 용준호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보아하니 이곳의 보안은 예상보다 더 철저했다. 내가 특별한 요청을 하자마자 그들은 바로 용준호에게 보고했다. 아무래도 이런 방식으로 사업을 유지하는 곳이라면 보안이 철저할 수밖에 없다.어쨌든, 이소희가 말한 대로 이곳에서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단골 손님일 가능성이 높았다.용준호는 나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더니 스스로 술을 따라 한 잔 건넸다.“미녀 고객님이 특별한 서비스를 찾고 있다길래 궁금했지. 그런데 네가 있을 줄이야.”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이상해요? 준호 씨, 요즘 인터넷을 안 보나 보네요?“용준호는 내게 술잔을 건네며 웃었다.“정말 알다가도 모를 여
하지만 쫓아가다 말고 멈춰 서면서 갑자기 머릿속에 이소희의 말이 떠올랐다.이소희가 누군가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했는데. 혹시 방금 본 그 사람일까? 만약 그렇다면 용씨 가문의 불법 사업에도 그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일까?생각해 보니 우리 부모님의 죽음도 두 가문이 공모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거세게 몰려왔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서 있다가 뒤늦게 용준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화장실 못 찾았어?”나는 재빨리 태연한 척하며 대답했다.“생리 중이라서요. 생리용품이 필요해요.”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참 묘한 타이밍이네. 내가 사람 시켜서 가져다주라고 할게.”그러고는 정말로 여성 직원에게 시켜 생리대까지 챙겨오게 했다. 나는 연극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화장실에 다녀왔다.방으로 돌아오자 용준호가 불러둔 남자 모델들이 도착해 있었다. 모두 183cm 이상의 키에 체형은 큰 차이가 없었고 넓은 어깨에 잘록한 허리, 긴 다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피부도 깨끗하고 세련된 외모에다, 굉장히 예의 바르기까지 했다.나를 보자마자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이 친구들, 모두 프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야. 원하는 대로 만족할 거야.”용준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괜찮네요. 역시 여기에는 진짜 숨은 고수들이 많은 곳이군요.”내 말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던진 말이었다.용준호는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래서 만족해?”“아주요.”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 사람들, 제가 필요할 때 미리 하루 전에 전화만 하면 준비해 줄 수 있죠?”“당연하지..”그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지만 나는 여전히 아까 봤던 그 그림자가 신경 쓰였다.그래서 이번 기회에 확실히 조사하기로 했다.“준호 씨,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가보세요. 저 혼자 술 좀 더 마시고 싶네요.”그는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