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미야의 시점
가슴.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가슴이 넘쳐나고 있었는데, 정작 여기서 ‘창녀’ 취급을 받는 건 나였다.
에트라나에서 가장 큰 시장 한복판에서 메인라드에게 거절당한 지 2년, 그리고 내가 복수를 계획하기 시작한 지도 2년이 지났다.
매년 첫 번째 달의 세 번째 날이 되면, 모든 여성 워울프들—내가 ‘늑대 여인들’이라 부르길 좋아하는 이들—이 알파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경쟁하는 경연이 시작된다. 이 경연은 참가하는 모든 여성이 자신이 완벽한 루나(Luna)가 될 자격이 있음을 알파 제인 본인에게 증명해야 하는 게임이었지만, 그 남자는 항상 요리조리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곤 했다. 잘해봐야 참가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자리는 그의 첩실 모임 정도였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올해는 내가 에트라나 전체에 알파와 각인하는 법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고, 그 새로운 신분을 이용해 메인라드를 완벽히 짓밟아 버릴 작정이었으니까.
알파의 성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건물 내의 특별한 구역으로 안내받았다. 그곳에는 알파의 선택받은 짝이 되기 위해 경쟁하러 온 다른 여성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다행히도 올해 경연에 참가한 여성의 수는 훨씬 적었지만, 대신 그만큼 지독하게 필사적이기도 했다.
복도에는 대략 7명에서 10명 정도의 여성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이 입은 정장 드레스는 딱히 ‘정장’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내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여성은 가슴이 드레스 밖으로 쏟아져 내릴 듯했고,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다면 어떤 여자는 훤히 비치는 드레스 사이로 노출이 과감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전략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나 역시 이 대륙에서 도덕적으로 가장 결백한 인물은 아니었고, 워울프란 본래 욕망에 충실한 생물이니까.
게다가 내가 입은 옷도 그리 조신한 편은 아니었다. 어머니와 나는 짙은 주황빛 머리를 높고 매끄러운 번 헤어로 올리고, 옆트임이 깊게 파이고 가슴선이 시원하게 파인 몸에 딱 붙는 드레스를 선택했었다. 내 드레스는 남자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히 유혹적이면서도, 오늘 밤 이곳에서 본 그 어떤 옷들보다는 확실히 품위가 있었다.
챙-, 금속이 유리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복도의 잡담을 잠재웠고,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우리 모두의 앞에 서서 유리잔과 금속 포크를 들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메인라드였다. 그의 은발이 섞인 금발을 발견하는 순간 내 손가락에서 핸드백이 슬그머니 떨어질 뻔했으나, 나는 번개처럼 정신을 차려 사고를 막았다. 하지만 가슴속에서 발끝까지 얼어붙는 듯 솟구치는 통증만큼은 미처 막아내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스칼렛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고, 순간 나는 2년 전 그 시장 한복판으로 다시 끌려간 듯한 환각에 휩싸였다.
‘정신 차려! 저놈은 이제 우리 짝이 아니야!’
나는 스칼렛에게 호통을 쳤지만, 녀석은 언제나 세 살배기 강아지처럼 구는 늑대였다.
‘하지만 달의 여신께서...’
‘달의 여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더 나은 짝을 찾아줄 테니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나는 녀석의 말을 싹둑 끊어버렸다. 이 고통을 더 악화시킬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도 들을 여유가 없었다.
스칼렛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고, 나는 녀석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었나 싶어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녀석을 사랑하긴 했지만, 스칼렛에게는 때로 엄한 모습만이 유일한 약이었다.
‘미야, 난 널 믿어. 네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택만 할 거라는 걸 알아.’
마침내 체념이 섞인 한숨과 함께 스칼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나는 아까보다 훨씬 쾌활한 텔레파시로 답했다.
내 시선은 우리 모두의 앞에 거만한 미소를 띤 채 서 있는 그 개자식에게로 돌아갔다. 우리에게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 저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쓰려왔다. 내 안의 깊은 곳에서는 그가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조금이라도 후회나 반성을 하길 바랐지만, 그렇게 금방 일어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거절당한 이후 나는 그의 소식을 계속 추적해 왔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삶은 승승장구 그 자체였다. 최근에는 알파에게서 특별 훈장까지 받았다. 누구라도 그가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법했지만, 그 모든 것은 이제 곧 바뀔 예정이었다.
"늑대 여인 여러분, 좋은 저녁입니다."
그 개자식이 군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단 한 번도 나에게 머물지 않았다. 저놈과 저놈의 늑대는 나를 그렇게 쉽게 잊어버린 걸까? 지난 2년 동안 내가 죽은 듯 조용히 지내며 불쌍한 늙은 감마 따위와 어울려 지냈으니 아무도 나를 쉽게 기억하지 못할 거라던 어머니의 말이 정말 맞았던 걸까? 여기 있는 여성들 중 누구도 나를 ‘에트라나의 창녀’라고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이 관심의 부재가 오히려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알파의 선택받은 짝을 가릴 경연을 시작하게 되어 다들 기대가 크시겠지만, 오늘 밤은 우선 휴식을 취해주시길 바랍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이곳에 모여 첫 번째 경연에 대한 지침을 전달하겠습니다. 저희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여러분이 머물 새 방의 열쇠를 배부해 드릴 겁니다. 편안히 쉬시고, 내일 아침에 다시 뵙겠습니다."
메인라드는 설명을 마친 뒤 단상에서 내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 개자식다운 행보로 그는 몇몇 참가자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위선자 같으니라고!
조신한 처녀만 좋아하고 나 같은 여자 주변에는 서 있는 것조차 견디지 못한다던 놈이, 왜 반누드로 입은 여자들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 거란 말인가?
속에서 불길처럼 솟구치는 분노로 얼굴이 붉어지기 직전, 한 젊은 사내가 다가와 내게 열쇠를 쥐여주었다. 나는 작은 감사 인사를 건넨 뒤 곧바로 돌아섰다. 메인라드를 죽도록 경멸하고 그가 내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싶었지만, 그가 저렇게 행복해하는 꼴을 더 이상 눈에 담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가 나를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더 험악해질 터였다. 아직 그와 직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직은.
내가 배정받은 방은 고향 집에 있던 방과 거의 비슷한 크기였다. 원래는 룸메이트 몇 명과 함께 쓰는 더 큰 방을 예상했었지만, 작은 방 덕분에 혼자 쓸 수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나는 사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나는 방에서 약 두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낸 뒤, 내가 가진 가장 화려한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이 경연에서 정말로 이기고 싶다면 빠르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다. 내일 있을 첫 번째 경연을 그저 운에 맡기는 짓이야말로 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멍청한 짓이 될 터였다.
참가자들의 숙소 구역을 막 벗어났을 무렵, 어디선가 억눌린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무시하고 몇 걸음 더 나아가려 했지만,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소리에 발걸음이 뚝 멈췄다.
"제발, 더 해주세요!"
야릇하게 앙탈 부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좀 참지 못하고.’
나는 스칼렛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며 비웃었다.
‘발정기인가 보지. 미야, 너도 우리에게 그런 시기가 있다는 거 알잖아.’
스칼렛이 받아쳤다.
나는 눈알을 굴렸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그딴 짓을 벌이지는 않아. 정 급하면 내 손을 쓰고 말지. 저 여자는 확실히 딴 놈이랑 뜨겁게 달아오른 거야.’
‘네 말이 맞아. 난 그냥 상황을 좋게 보려고 했던 것뿐이야.’
‘내가 아무리 몸을 파는 여자라지만, 이건 어떻게 포장해도 좋게 봐줄 수가 없네.’
내 임무를 완수하러 가던 길이었지만, 이런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그냥 지나치는 건 내 미덕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상황이 어떻게든 경연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여자의 선명한 신음 소리를 따라가자 소리는 더욱 커졌고, 다행히도 문이 살짝 열려 있는 방 하나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살짝 굽혀 안을 들여다보았다.
순간적인 통쾌함으로 채워졌어야 할 공간은, 곧바로 지독한 혐오와 후회로 가득 찼다.
방 안에서 참가자 중 한 명을 벽에 밀쳐두고 거칠게 욕망을 채우고 있는 사내는 바로 메인라드였다. 알파의 베타, 메인라드 홀. 제 짝은 반드시 처녀여야 한다고 나불대던 그 얼간이는, 정작 자기 자신조차 짝을 위해 정절을 지킬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었다.
스칼렛의 여린 신음 소리가 귓가를 찔렀고, 익숙한 통증이 다시금 가슴을 죄어왔다.
메인라드가 여자의 귓가에 달콤한 속삭임을 짓거리고는 다시 한번 거세게 몸을 들이밀자 통증은 더욱 악화되었다. 배신감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현명하다는 걸 알면서도 발이 땅에 붙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행위가 무르익어가던 중, 메인라드가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과 내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고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쾌락에 젖어 그러는 건지, 나를 본 충격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가 아까는 나를 몰랐을지 몰라도 이제는 내가 참가자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제야 내 뇌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고, 발에 생기가 돌아왔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 문 앞과 복도 전체에서 멀어지도록 달아났다. 얼굴에 남아있는 슬픔의 흔적을 억지로 문질러 닦아내면서.
어떻게든 성의 메인 복도 중 한 곳에 도달한 나는 벽에 몸을 기대고 깊은 숨을 내쉬며, 내가 처음에 왜 방을 나섰는지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어쩌면 운명은 마침내 내 편이 되어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도달한 장소를 둘러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바로 그 순간, 금빛 단추가 달린 검은 튜닉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찬 사내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알파의 호위병 중 한 명이었다.
그 사내 역시 나를 정확히 알아보았는지, 눈을 크게 뜨더니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 역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완전히 잊혀진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며, 나는 가진 모든 매력을 쥐어짜 내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좋은 저녁이에요."
나는 낮고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는 목구멍으로 딱딱한 것이라도 넘어간 사람처럼 침을 꼴깍 삼키며 눈을 뻐끔거렸다.
"좋은... 좋은 저녁입니다, 나리."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훨씬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 바라봐도 돼요. 그저 길 좀 물어보려던 것뿐이니까요."
나는 공중에 손을 내저으며 웃어 보였다. 사내도 나를 따라 웃었지만, 누구라도 억지로 웃는 것임을 알 수 있는 표정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올려 나를 바라보는 그를 향해, 나는 그가 편안함을 느끼길 바라며 미소를 더욱 짙게 띠었다.
그가 침을 삼켰다.
"당신이 ‘에트라나의 창녀’ 맞으시죠? 당신에 대한 좋은 소문은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그 어떤 남자라도 무릎 꿇게 만들 수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직접 보니 왜 다들 그렇게 말하는지 알겠군요. 왜 남자들이 당신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가진 모든 걸 기꺼이 바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그가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던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한번 콧소리로 웃으며 머리칼 몇 가닥을 귀 뒤로 넘겼다. 적어도 그가 들었다는 소문 중에 내 비참했던 거절의 기억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과분한... 아부에 감사드려요. 음, 당신이 들은 소문은 전부 사실이에요. 그리고 오늘 밤 알파께서 절 보길 원하시는데, 제가 그분의 방으로 가는 길을 깜빡 잊어버려서요. 혹시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나는 여전히 완벽한 미소를 유지한 채 물었다.
그의 눈썹이 일그러졌고, 그는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는 그의 말을 완전히 막아섰다. 가운에 손을 얹은 나는 천천히 옷자락을 헤쳤고, 그의 시선이 내 손짓 하나하나를 뚫어지게 쫓는 것을 지켜보았다. 속옷 안쪽, 가슴 바로 위 골 골짜기로 손을 집어넣어 나는 몇 백 달러짜리 지폐 몇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 호위병의 손을 잡아끌어 지폐를 쥐여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요?"
"난 환생해서는 안 되었고, 그 시절에도 헬레네로서 되살아나선 안 되었어요. 이 모든 비극은 나 때문에 시작된 거예요. 내가 죽어 묻혀 있었더라면 이런 미친 짓 따윈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이제 내가 모든 것을 바로잡겠어요." 난 아랫배 위에 손을 얹었다. "부디 내 아이만은 살려줘요. 아직 온전히 자라지도 못한 핏줄이잖아요. 제발 다른 이들은 내버려 둬요. 대신 내 목숨을 기꺼이 바칠 테니까. 애초에 난 살아 숨 쉬도록 허락되어서는 안 될 존재였어요."에스메랄다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것은 나직하고 섬뜩한 울림이었으나 곧이어 온 방을 채우는 광기 어린 폭소로 번져나갔다. "내 어머니들과 자매들이 그따위 수작을 미처 내다보지 못했을 줄 알았더냐? 네 그 멍청한 짝이 널 또다시 이승으로 끌고 올 텐데 말이지. 설령 그자가 그러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번뜩였다. "아이의 순결한 영혼보다 더 강력한 힘을 품은 제물은 세상에 없다. 그러니 당장 대가를 내놓아라!""멈춰요."단 한마디의 외침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방 안의 공기를 갈랐다. 제나가 책을 한층 더 으스러지게 끌어안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는 난생처음 마주하는 거센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대체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선 무슨 생각이 스치고 있는 것일까?"내가 치르겠어요." 그녀가 선언했다.내 고개가 홱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뭐라고? 안 돼!""맞아요." 그녀는 어깨를 곧게 펴고 에스메랄다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내가 제물이 되겠어요. 엄밀히 따지면 내 혈관 속에도 헬레네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난 이미 얼마 전부터 아이를 배고 있었어요. 사미야 언니, 이게 바로 내가 언니에게 청했던 그 부탁이에요. 바로 이거라고요."난 결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생에서 우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 제나. 그딴 건 효력이 없다고—"에스메랄다의 입술이 잔혹한 호선을 그리며 비틀려 올라갔다. "효력이 있다. 영혼의 피는 생애를 거듭해
사미야의 시점메이더란의 변장은 오래 쳐다보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광대라는 단어를 목놓아 외치게 만들 법했으나, 그것은 그자의 사정일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제인이 메이더란의 목에 현상금을 내걸었을 확률은 한없이 높았고, 난 성으로 향하는 길에 그 어떤 샛길로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우리에게 천만다행으로 에스메랄다는 제 뜻대로 쓸 수 있는 온갖 가발과 드레스, 망토들을 넉넉하게 갖추고 있었다. 메이더란이 뒤집어쓰고 이 오두막에 남은 자신의 모든 흔적을 감추기에 안성맞춤이었다.'우리가 저 머저리를 원했었다니.' 메이더란이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스칼렛이 비웃음을 흘렸다.메이더란은 짙은 청록색의 긴 드레스를 걸치고 그 위에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갈색 곱슬머리가 그의 얼굴을 감싸며 그에게 결코 존재하지 않는 여성성을 억지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판을 한층 더 흥미롭게 만들려는 듯 그는 새빨간 립스틱까지 바르고 있었다. 메이더란의 입술은 당분간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험악한 찌푸림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뺨에 거뭇하게 돋아난 수염 자국 또한 몰골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했고, 꽉 끼는 드레스 틈새로 털이 덥수룩한 그의 널찍한 가슴팍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하기 이를 데 없는 꼴이었다!입술 사이로 웃음이 터져 나왔고, 이번에는 스칼렛의 비아냥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메이더란의 그 꼴사나운 차림새 때문이었다."하, 하, 하. 빌어먹을, 당장 출발이나 하지." 메이더란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며 짓씹었으나, 내 웃음을 멈추기엔 턱없이 부족했다.오두막 뒤편에 말 한 마리가 매여 있었던 모양인지, 처음엔 다소 애를 먹었으나 메이더란과 난 잠시 후 간신히 말등에 올라탔다. 마지막으로 오두막을 돌아보자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하는 의문들을 차마 묻지 않을 수 없었다."잠깐만요, 메이와 제나, 제인은 줄곧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을 텐데, 어째서 아무도 날 구하러 오지 않았던 거죠?""왔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은폐
사미야의 시점임신한 노예.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내 처지를 가리키는 정확한 말이었다.지난 나흘 동안 에스메랄다는 내다 팔기 위해 살을 찌우는 새끼 돼지마냥 내게 음식을 먹여댔다. 바닥이 의자이자 침대 노릇을 하던 오두막의 비좁은 구석자리에서 벗어나 이제는 어엿한 침실이 생겼으니, 내 거처 또한 격상된 셈이었다. 제인과 내가 성에서 함께 쓰던 침실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으나, 어쨌든 처우가 나아진 것은 사실이었다.메이더란은 감시자 노릇을 했다.그는 내가 에스메랄다의 뜻대로 모든 것을 따르도록 감시했고, 첫날엔 격렬히 반항해 보았으나 에스메랄다가 내 뺨따귀를 사납게 후려치고는 당장이라도 제물로 삼아버리겠노라 칼을 치켜들며 위협했을 때, 난 그 자리에서 순종하는 법을 터득했다.순종이 언제나 나약함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최근에야 비로소 깨우친 교훈이었다.내가 붙잡힌 이래 매일 밤마다 에스메랄다는 날 찾아와, 오늘날의 에트라나를 일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자신들 마녀들이 대체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는지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물론 내겐 얌전히 귀를 기울이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한탄을 들으면 들을수록 잃어버렸던 기억들이 하나둘 되살아나, 마침내 모든 전말을 똑똑히 기억해 내기에 이르렀다.그리고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마녀들이 손을 내밀었던 것은 아르테미스가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직전이었다. 그럼에도 마녀들은 그에게 희망을 안겨주었고, 아르테미스는 그 대가로 베타 바로 아래의 서열을 내어주어 그들을 온 에트라나에서 세 번째로 막강한 권세를 지닌 존재로 만들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안식처와 보금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물론 내 영혼이 그들의 뜻을 거스른 채 억지로 되살아나기 전까지는, 그리고 아르테미스와 내가 거래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배신하기 전까지는 아르테미스와 마녀들의 관계는 평온했다.애초에 그들은 에트라나의 더 커다란 영토를 직접 다스리길 원했으나, 달의 여신께서 친히 축복을 내리시고 우리에게 하사하신
제인의 시점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쏟아부어 사미야를 찾아 헤맸으나, 그 어떤 흔적도 건져내지 못했다.지독하고 위태로운 나흘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음에도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난 근위병들을 이끌고 그 쓰러져가는 오두막이 마땅히 자리하고 있어야 할 곳으로 말을 달렸으나, 그 자리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광활하게 펼쳐진 텅 빈 공터뿐이었다. 오두막이 분명히 위치해 있었으리라 확신했던 주변 일대를 샅샅이 뒤졌으나 여전히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마치 내가 그 모든 광경을 머릿속으로 지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밤마다 난 에스메랄다가 사미야를 감금해 두었을 법한 은신처들을 그려보는 것으로 지새웠고, 아침은 분노로 가득 차올랐으며, 내 평생 처음으로 랄프가 통제권을 쥐고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을 모조리 찢어발겨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마치 헬레네를 또다시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다만 이번에는 슬피 울며 찾아갈 무덤도, 내 상념들을 적어 내려갈 종이쪽지도 없다는 점만이 달랐다. 난 그저 머릿속으로 수없이 갈라지는 온갖 가정들을 억지로 되감기하며 괴로워해야만 했다.하지만 닷새째 되던 날,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제나와 함께 마차에 오르려던 바로 그 찰나에 전갈이 닿았다. 두 발은 내 평생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나를 실어 날랐고, 요동치는 심장은 발걸음보다 한참 앞서 내달렸다. 성문에 다다를 때까지 난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그곳에 그녀가 서 있었다. 그날 걸치고 나갔던 바로 그 옷차림이었으나, 이제는 갈기갈기 찢겨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눈물이 차올라 시야를 찔렀고, 굳이 감추려 애쓰지 않았다. 내 눈앞에 서 있는 이가 바로 내 짝인데, 대체 어떻게 감출 수 있단 말인가?내 빨간 머리 여인이었다.그녀의 붉은 머리칼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눈 밑엔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얼굴은 극심한 피로로 처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끔찍하게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던 총기가 완전히 꺼
사미야의 시점난 마녀라는 존재들에 늘 묘한 호기심을 품어왔으나,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마주치게 될 마녀가 하필이면 내 짝의 옛 연인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달의 여신께서 날 상대로 잔인한 장난질을 치기로 작정하신 모양이었다.웃기지도 않았다. 손톱만큼도 유쾌하지 않았다."있잖아, 내가 널 이곳으로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 나-난... 그저 널 이 흉측하고 낡은 구덩이에서 죽게 내버려 두려고 데려온 게 아니었어. 내 진짜 뜻은 널 에스메랄다에게 데려가서 그 마녀로 하여금 우리 둘을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려는 거였단 말이다. 그러면 우린 늑대인간이라는 존재에서 비롯되는 그 모든 미친 짓거리들에서 벗어나 평생토록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 미야. 더 이상 신분 따위도 없고, 늘 이것저것을 내놓으라며 우리 머릿속을 쏘아 다니는 그 멍청한 늑대 놈들도 사라지는 거지. 우린 완벽함을 손에 쥘 수 있었단 말이다!"여신께서 내 전 짝과 날 한자리에 나란히 가두어두셨다는 사실을 미처 언급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농담이었다.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난 조금도 우스꽝스럽지 않았다.제 아비가 가로막지만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가 앞뒤 안 가리고 경합에 기어들어가지만 않았더라면 우리가 얼마나 완벽한 한 쌍이 되었을지 줄줄이 늘어놓는 메이더란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제인과 내가 아르테미스와 헬레네의 환생이라는 사실을 그자가 전해 듣는다면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사방으로 헝클어진 백발을 휘날리며 지껄이는 말 한마디마다 두 손을 요란스레 휘젓는 꼴은 이미 미쳐 날뛰는 토끼나 다름없어 보였다.어쩌면 모든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자는 정말로 온전히 돌아버린 미치광이 토끼가 되어버릴지도 몰랐다.내 가설이 맞는지 당장 시험해 보고 싶어 몸이 달아올랐으나, 내 두 손은 이미 손목을 파고들며 가렵게 짓누르는 억센 매듭에 꽁꽁 묶여 있었고, 입에는 보기 좋게 재갈까지 물려 있는 처지였다. 변신을 감행하여 밧줄을 끊어내고 스스로를 해방시킬
제인의 시점무능함.지금 내가 느끼는 심정을 온전히 대변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남은 시간이 없어요." 그 의문의 오두막으로 마차를 타고 내달리는 내내 제나가 남긴 그 한마디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녀들과 위험천만한 거래를 맺었고, 그 대가로 소중한 무언가를 바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은 떠올렸으나, 그토록 중대했던 단 하나의 제물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는 끝내 기억해 내지 못했다. 답을 얻어내려 제나를 몇 번이고 몰아세웠으나, 그녀는 매번 이전보다 훨씬 더 모호하고 알쏭달쏭한 대답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제나는 울화를 치밀게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다.사미야 역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은 상황을 조금도 나아지게 만들지 못했고, 그리하여 난 그저 자리에 편히 기대앉아 눈앞에 닥쳐올 예기치 못한 파도를 맞이하는 수밖에 없었다.참으로 완벽하지 않은가!"제인." 거칠게 소용돌이치던 상념 속에서 사미야의 목소리가 날 건져 올렸다.달팽이처럼 느릿한 속도로 사미야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사미야." 그녀가 내게 건넸던 어조를 그대로 흉내 내며 나지막이 불렀다."메이더란에 대해 진작 털어놓지 않아서 화난 거죠, 안 그래요?" 낮게 깔린 속삭임으로 물어오는 그녀의 시선은 내 얼굴에 온전히 머물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화가 난 것은 사실이었으나, 내 앞에 도사린 미지의 위험에 대한 염려가 훨씬 더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화가 났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털어놓으려 약속했었지만,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잖아요. 그래서 메이더란의 일은 우리 문제들 중 가장 사소한 것으로 느껴졌을 뿐이에요." 그녀가 변명하듯 설명했다.입술을 굳게 다물어 얇은 선을 그렸다.그녀의 심정을 훤히 이해하고 있었고, 특히나 이 소중한 두 번째 기회를 거머쥔 마당에 사미야를 향해 오랫동안 분노를 품고 있을 수 있는 구석 따윈 내 안에 전혀 없었다. 나 역시 메이더란을 얕잡아보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