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도깨비와의 처절한 사투, 그 끝에 남은 것은 하늘로 밀려난 도시 '벽류진'과 검게 타들어 간 지상의 대지뿐이었다. 벽류진의 7명의 무사들에게 그녀, 야츠키는 무엇인가. 세상을 멸할 도깨비의 혈통인가, 아니면 하늘 위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인가. 그녀를 지키기 위해, 혹은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칼을 쥐는 7명의 남자들. "나의 밤을 오직 당신으로만 채우고 싶습니다." 어떤 이는 헌신으로, 어떤 이는 독점욕으로 그녀의 곁을 파고든다. 지상이 다시 생명의 빛을 되찾기까지 500년. 누군가에겐 치명적인 독(毒)이고, 누군가에겐 유일한 희망인 여자. 야츠키는 과연 누구의 곁에서 안식을 찾게 될 것인가. 전장의 흉터를 공유한 그들의 비밀스러운 밤은 오늘도 깊어만 간다.
View More제1화
150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짧지 않았다. 그것은 인류의 기억 속에서 ‘땅’이라는 개념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상을 요괴들에게 내어준 그날 이후, 인류가 기워 붙인 하늘 위 징검다리는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악력으로 짓이겨! 도깨비의 가죽은 바위보다 단단하다!”
전장은 승리를 향한 진군이 아니라, 그저 죽지 않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이었다. 본디 지하의 어둠 속에서 태어나 햇빛조차
보지 못하던 괴물들은, 겁도 없이 지상을 집어삼킬 야욕으로 기어 올라왔다. 놈들은 인간의 살점을 씹어 삼킬수록 뱀처럼
허물을 벗고 더 단단해졌다.
머리를 잘라도 재생했고, 낮이 되어도 죽지 않았다.
무사들은 피로 물든 칼자루를 놓지 못했다. 철퇴가 뼈를 으스러뜨리는 둔탁한 소리, 시퍼런 칼날이 도깨비의 살점을 파고들 때 나는 비릿한 파열음이 전장을 가득 채웠다. 도깨비의 이빨과 손톱이 갑옷을 긁어대며 내는 ‘끼이익-’ 하는 금속음은 무사들의 고막을 찢어 놓았다.
지키다가 손목이 잘려 나가는 것은 차라리 양호했다. 동료의 피와 내장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무사들은 멈출 수 없었다. 물러서는 순간, 우리가 쌓아 올린 징검다리는 무너지고 뒤에 남은 가족들은 놈들의 먹이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땅이 갈라지고 절벽이 무너져 내리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무사와 도깨비는 서로의 목을 조른 채 끝까지 추락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광기에, 도리어 도깨비들이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기이한 풍경조차 연출되었다.
참혹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동료가 죽어 있었고, 매일 저녁에는 새로운 어린 동료가 빈자리를 채우러 칼을 잡았다. 비릿한 피 냄새는 하늘 위 대기 속에서도 가시지 않았다. 앓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막사 안에서도, 누군가는 자신의 잘린 팔을 동여매며 내일의 칼을 갈았다.
끝내 도깨비들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의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지상은 놈들의 발악으로 지각이 뒤틀려 갈라졌고, 그나마 숨 쉴 곳이었던 대지마저 산산이 부서져 사라져 버렸다. 지하를 잃고 지상마저 잃은 소수의 도깨비들의 굴욕은 뼈아팠으나, 인간 또한 갈 곳을 잃은 신세가 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무너져가는 세상 끝에서 협상을 맺고 하늘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를 건설했다. 그것은 피와 눈물로 쌓아 올린 잔인한 등굣길이었다.
“어머니! 어머니!”
등에 짐을 짊어지고 구름 사이로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징검다리를 오르던 평민들이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허공과 무너져 내리는 대지를 본 순간, 공포에 질린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발을 헛디뎠다. 비명은 짧았다. 떨어지는 자를 붙잡을 손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군가는 동료의 시신을 껴안고 오열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잘린 다리를 끌며 신음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칼을 휘둘렀던 무사들도, 정작 살아남은 가족의 죽음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 아비규환의 와중에도 기이한 풍경은 있었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영주들은 생채기 하나 없이, 수십 명의 쿠노이치(여닌자)에게 호위를 받으며 가장 앞서서 징검다리를 건넜다. 그들은 발밑에서 죽어가는 백성들을 외면했다. 오직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희생된 수많은 목숨을 밟고 올라가는 그들의 뒷모습은, 전쟁의 참혹함보다 더 씁쓸한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승자의 대가였다. 우리는 이겼지만 무너졌고 지상을 얻지 못했으며, 그저 하늘 위 작은 섬에 매달려 숨을 헐떡이는 도망자가 되었을 뿐이다.
그 모든 광기와 비극이 멈춘, 구름 너머의 사각지대. 그곳에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정원이 있었다.
전쟁의 포화가 대지를 찢고 있을 무렵, 홀로 하늘로 도망쳐 숨어버린 존재가 있었다. 야츠키. 그녀는 인간을 죽이지도, 놈들의 피와 살을 탐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섭고 두려워서 안개라는 장막 뒤로 제 몸을 숨겼을 뿐이다.
“……또, 바람이 차구나.”
야츠키는 매화나무 아래 앉아 제 손끝에서 피어난 분홍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전쟁의 참혹함을 엿보았던 그녀의 눈동자는 깊고도 슬펐다. 그녀는 외로움과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피워낸 꽃들,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흩뿌리는 안개뿐이었다.
그녀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 영역을 침범하는 것들을 막아내기 위해, 본의 아니게 꽃의 향기를 섞은 요력을 끊임없이 뿜어내야 했다. 그것은 생존의 몸짓이었다.
향기로운 꽃향기가 안개와 섞여 바람을 타고 흘러나갔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이성을 갈아먹는 마약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꽃을 피워낸 그녀 자신은, 아무도 없는 정원에서 홀로 매화 꽃잎을 쥐고 흔들 뿐이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정원. 그녀는 지상의 비명과 하늘 위의 오열도 듣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꽃을 피워내며 스스로를 안개 속에 가두었다.
이곳은 금지구역이었다. 그러나 정찰을 나온 렌은 무의식중에 그 안개 너머로 발을 들였다.
안개 너머로 달콤한 향기가 렌의 코끝을 찔렀다. 그것은 전쟁터의 비릿한 피 냄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향기였다.
붉은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비녀가 꽂혀 있었고, 옅은 손짓으로 가지를 만지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렌과 눈이 마주친 순간,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야츠키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그녀가 당황하며 손을 휘저었다. 가느다란 손끝에서 안개와 섞인 꽃가루가 렌을 향해 흩날렸다.
“……아.”
렌의 입술이 갈라지며 멍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꽃가루가 섞인 안개가 렌의 폐부로 파고들었다. 그것은 독이었다. 하지만 달콤한 독이었다. 렌의 심장이 기이하게 박동했다. 마치 이성이 무너져 내리는 감각.
렌은 돌아가야 했다. 그녀는 분명 도깨비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붉은 기모노 아래 드러난 그녀의 가녀린 목선과, 꽃을 만지는 하얀 손가락을 보며 렌은 자신의 칼자루를 꽉 쥐었다. 손바닥에 칼집이 박혔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도깨비의 함정인가, 렌은 뒤를 돌아 징검다리로 달리기 시작했다. 폐 속 깊숙이 박힌 꽃향기가 마치 낙인처럼 그의 안을 헤집어 놓았다. 이미 그의 몸은 놈들의 방식대로 침식되고 있었다.
무사에게 더 깊은 전쟁의 참혹함보다 더 끔찍한 것은, 어쩌면 저 안개 너머의 고요함일지도 몰랐다.
렌은 다급하게 징검다리를 건너며,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옷자락에 묻은 매화 꽃잎 하나는
끈질기게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운명은 그렇게, 하늘 위에서 비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8명의 무사가 야츠키라는 치명적인 재앙과 마주하게 될 서막이었다.
제 35화 붉은 비녀의 ‘관찰자’ 영주들의 거처는 본래 그들의 명예와 안온함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풍요로운 풀숲과 빽빽한 나무들이 외부의 시선을 완벽히 차단하고, 높고 견고한 돌담이 고풍스러운 기와지붕을 감싸 안은 세상과 단절된 안식처. 그러나 지금 그곳은 기묘한 안개와 퀘퀘한 먹구름 같은 요기가 뒤섞여,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살육의 무대로 변해 있었다.불 꺼진 마루 안은 죽은 듯 고요했다. 그 침묵을 뚫고 가파른 계단을 밟아 올라가면, 가장 높은 곳인 2층 창가에 붉은 꽃 비녀를 꽂은 여인이 서 있었다.참화의 리더, 카가야였다. 그녀는 창밖으로 펼쳐진 아수라장을 차가운 눈빛으로 관찰하고 있었다.“꽤나 오래 버티는군. 저들 사이에 수장이 없는 것 같아. 고작 정찰이 목표였던 건가?”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마치 지루한 연극을 관람하는 평론가처럼 아래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행진을 관망할 뿐이었다.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참혹한 실외 중앙이었다. 가란의 거대한 도끼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쿠로기리는 연기처럼 흩어지며 그를 농락했다. 쿠로기리는 공격을 멈추고 한쪽 처마 끝에 가볍게 착지하며, 마치 춤을 추듯 여유로운 태도로 가란을 내려다보았다.“말로만 듣던 무사의 기개구나. 왜 우리 안의 피만 보면 흥분하는 도깨비들이 너희를 상대로 이토록 고전했는지 이제 알겠어. 꽤나 눈꼴시린 투쟁심이군.”가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끼 자루를 고쳐 쥐었다. 그의 근육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도끼날에 묻은 안개가 뱀처럼 엉겨 붙어 쇠를 갉아먹는 소리가 들렸다. 치이익— 하는 불쾌한 부식음과 함께 도끼날 곳곳이 녹아내리고 있었다.“네놈은 무엇을 위해 영주를 사칭하며 이곳에 터를 잡았나? 왜 이런 참극을 벌이는 거지?”쿠로기리는 섬뜩할 정도로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명예? 그런 건 진작에 죽은 지 오래지. 이곳에 맺힌 원념과 증오가 도깨비들의 그것보다 더 깊고 진하거든. 뭐, 그렇게 만든 건 여기 주인
제 34화 안개 너머의 기만, 무너지는 오감(五感) 영주의 거처를 감싼 안개,그것은 마치 굶주린 짐승의 숨결처럼 무사들의 폐부로 파고들어 예민한 신경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마당 한복판에서 영주의 화려한 예복을 걸친 쿠로기리는 기괴한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그가 서 있는 자리 주위로 안개가 뱀처럼 똬리를 틀며 일렁였다.“어찌하여 그리 경직되어 있습니까? 영주를 뵙고자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렌이 즉각 반응했다. 요기를 정화하는 단검을 고쳐 쥔 그녀의 몸이 바람을 갈랐다. 정면을 파고드는 무사의 일격은 허공을 가르는 찰나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예리했다.렌의 배후에서 솟구쳐 오른 가란이 거대한 도끼를 내리꽂았다. 지면을 박차고 도약한 가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 대지를 뒤흔들 파괴력이었으나 쿠로기리는 연기처럼 흩어지며 자취를 감췄다.가란은 허공을 가른 도끼를 땅에 짓이긴 채, 안개 너머 어딘가에 숨어 있을 쿠로기리를 향해 차갑게 읊조렸다.“영주의 예복을 걸치고 영주를 사칭하는 요물같은 자식이,경비병들은 어디에 있지? 숨어있지 말고 당장 기어 나와라.”안개 속에서 쿠로기리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저는 그저 이곳의 주인이 사라진 자리를 지키는 관리자일 뿐입니다.”가란은 도끼날 끝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도끼가 안개와 맞닿을 때마다 날의 강철이 마치 녹슨 고철처럼 미세하게 부식되고 있었다. 저 녀석은 대상을 갉아먹는 술법을 쓰고 있다. 자신의 전력을 다 보여주었다간 이 도끼가 형체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뇌리를 스쳤다. 가란은 이를 악물었다.이 간보기식 대치는 렌과 시온이 정체를 파악할 시간을 벌어주는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쿠로기리 또한 가란의 힘을 경계하며 안개 속에서 교묘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그때였다. 숲 어딘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울렸다.슈슈슉—!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든 수리검이 렌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렌은 반사적으로 몸을
제 33화 안개 속에 잠긴 고풍스러운 기와집벽류진을 떠나 영주의 영역으로 향하는 길은 지옥도와 다를 바 없었다. 험준한 산세와 날카로운 가시덤불을 뚫고, 세 무사는 마침내 영주 거처의 뒷문 앞에 도달했다. 그곳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성 전체가 흐린 먹구름 같은 안개에 뒤덮여 있었고, 보초를 서야 할 경비원들은 온데간데없었다.무사라면 본능적으로 오감이 예민하고 반사신경이 뛰어나기 마련이나, 이곳은 차원이 달랐다. 만약 시온의 극도로 발달한 청각과 시각 탐지 능력이 없었다면, 렌과 가란은 보이지 않는 함정에 벌써 몇 번이나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시온은 허공을 떠도는 미세한 요기의 파동을 읽어내며 렌과 가란에게 수신호를 보냈다.‘왼쪽이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공기의 흐름이 뒤틀려 있어.’시온의 속삭임에 렌은 요기를 정화하며 은밀하게 움직였고, 가란은 거대 도끼의 묵직한 존재감을 숨기며 그림자 속을 파고들었다. 성은 겉으로 보기엔 흔적 하나 없이 멀쩡했지만, 마치 유령들이 깃든 듯 스산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안개는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무사들의 발밑을 감아쥐고 그들의 기운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끈적한 저항감에 가란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안개… 평범한 게 아닙니다. 기척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있어. 시온, 계속해서 주변 기류를 살펴주시죠.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즉시 알려주세요.”렌이 낮게 읊조리며 정면을 주시했다. 가란은 언제든 도끼를 휘두를 준비를 하며 묵직한 돌파구를 확보했다. 렌은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요기를 정화하며 조심스럽게 마당으로 진입했다. 바로 그때였다.“누구시죠?”낮고 서늘한 음성이 정적을 깨뜨렸다. 마당 한가운데, 영주들이 입는 화려한 예복을 걸친 젊은 남성이 서 있었다. 180센티미터의 큰 키에 등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 육안으로는 20대 초반이라 해도 믿을 만큼 빼어난 용모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뿜어져 나
제 32화 변질된 생명과 어둠의 예고신지로의 연구실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는 등불 아래, 비릿한 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차가운 금속 테이블 위에는 죽은 까마귀 요괴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핀셋을 든 신지로의 손은 분주했고, 야츠키는 그 곁에서 조용히 관찰하며 보조를 맞췄다. 조명은 사체의 기괴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테이블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검은 액체 소리가 정적을 깼다.“이 장기들의 위치를 봐. 분명 까마귀의 생태와는 전혀 달라.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고, 군데군데 부식된 흔적이 있어. 게다가 이 끈적한 약물… 대체 무엇을 섞은 거지?”신지로가 메스를 깊숙이 찔러 넣자,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인간인 그에게는 맡기 힘든 짙은 비린내였다. 분석을 거듭할수록 까마귀의 내부에서 기묘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사체에서 피어오르는 회색 안개는 연구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고, 등불의 빛마저 왜곡시켰다. 그때, 야츠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순식간에 손을 뻗어 신지로의 코와 입을 단단히 막았다.“숨을 쉬지 마세요.”야츠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길을 통해 전달되는 기운은 불쾌할 정도로 오래된, 썩은 늪과도 같은 고대의 요기였다.“이건 보통의 요기가 아니에요. 저보다 훨씬 오래된 기운이죠. 도깨비의 혈통을 타고난 자들이라면 정신력이 흐려지는 정도로 그치겠지만, 일반적인 생물이나 평범한 무기라면 이 까마귀의 장기들처럼 순식간에 썩어 문드러질 거예요. 인간인 당신에겐 더 치명적일 테니 조심하세요.”신지로는 야츠키의 손을 부드럽게 내리며, 굳은 표정으로 사체를 응시했다. 메스를 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의학자로서 이토록 뒤틀린 생명체를 마주하는 것은 일종의 고문과도 같았다. 사체의 단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주받은 기운은 단순한 독이 아니라 생명의 근간을 갉아먹는 침식에 가까웠다.“까마귀가 무언가 잘못 먹은 게 아니야. 누군가의 철저한 계획… 연구와 융합의 산물이지. 그쪽에도 나 같은 의학자가 있는 모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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