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12월 2일 월요일, 서진호텔 로비 주원 씨, 신년 행사 일정』
빠져나가는 차의 뒷등이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나는 차 문 가장자리를 잡았던 손을 내렸다. 이헌이 내 앞을 가리지 않고 옆에 섰다.
“번호 보셨어요?”
“끝자리만요.”
이헌은 계단 쪽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꺼냈다. 나는 기둥 뒤에 붙은 주차 요금 안내판을 봤다. 관리실 번호 아래로 카메라가 향하는 방향이 표시돼 있었다.
“관리실에 물어볼게요.”
“제가 확인할게요. 윤나경 씨는 여기 있어도 되고, 먼저 올라가도 돼요.”
“같이 갈게요.”
이헌이 나를 봤다. 나는 가방끈을 고쳐 쥐었다.
관리실 안에서는 라디오가 나오고 있었다. 관리인은 출구 쪽 화면을 돌려 봤지만, 차가 기둥에 가려 번호가 전부 찍히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탄 차의 기록을 바로 내줄 수도 없었다.
이헌은 연락처를 남겼다. 나는 관리인이 받아 적은 숫자를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집 앞에서 이헌이 걸음을 멈췄다.
“무슨 연락이 오면 혼자 답하지 말아요.”
“실장님한테도 오면 알려 줘요.”
“그럴게요.”
나는 문을 연 뒤에도 잠깐 서 있었다. 이헌은 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주차장 쪽으로 돌아갔다.
◈
목요일에도, 금요일에도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오지 않았다. 토요일에는 다은과 밀린 장부를 맞췄고, 일요일에는 빨래를 널었다. 나흘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월요일 오후, 나는 호텔 로비에서 장갑을 벗었다.
회전문 옆 직원이 다가와 외투를 받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며 가방 안에 장갑만 넣었다. 휴대폰에는 주원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
『트리 앞에서 봐요. 조금 늦어요.』
답장을 보내고 고개를 들었다. 로비 가운데에는 트리가 설치돼 있었다. 가지마다 금색 장식이 달렸고, 바닥에는 아직 뜯지 않은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승강기 문이 열렸다. 나는 내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다가 휴대폰을 뒤집어 쥐었다.
31층으로 올라갈 일은 없었다. 오늘 약속은 여기였다.
“거꾸로 달았잖아. 내려서 봐.”
트리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사다리 위의 직원이 별 장식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작업복 주머니에서 철사가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이쪽이 위인 줄 알았습니다.”
“가운데 구멍 봐. 사진하고 다르잖아.”
아래에 선 직원이 휴대폰 화면을 들어 보였다. 사다리 위의 직원은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손에 든 별이 가지에 걸렸다.
나는 가방을 옆 의자에 놓았다.
“잠깐만요. 제가 아래 잡을게요.”
“손님, 괜찮습니다.”
“별 빼실 동안만요.”
사다리 다리 옆에 포장지가 끼어 있었다. 나는 먼저 포장지를 끌어내고 양쪽 기둥을 잡았다. 위에 있던 직원이 발을 한 칸 내려 디뎠다.
“천천히 하세요. 아래 보고 계세요.”
직원은 별에 걸린 철사를 풀었다. 장식이 떨어져 내리자 내가 한쪽 끝을 받아 들었다. 보기보다 가벼웠다. 뒷면에는 위쪽을 표시한 종이가 반대로 붙어 있었다.
“이 표시 때문에 그러셨나 봐요.”
내가 종이를 가리키자 아래에 있던 직원이 입을 다물었다. 곧 별을 돌려 보고는 위를 향해 말했다.
“내려와. 표시부터 다시 붙이자.”
사다리 위의 직원이 내려왔다. 귀가 빨갰다.
“죄송합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저도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나는 별을 건넸다. 직원은 두 손으로 받아 안고 바닥에 떨어진 철사부터 주웠다.
“자기, 여기서 일해요?”
등 뒤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사다리에서 손을 뗐다. 주원은 내 가방을 들어 주며 트리 꼭대기를 올려다봤다.
“이번에는 제대로 다는 거죠?”
직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주원은 웃다가 사다리 아래를 손으로 가리켰다.
“포장재 먼저 치워 주세요. 손님들 발에 걸리겠어요.”
“네, 바로 치우겠습니다.”
주원은 내게 가방을 건넸다. 손잡이가 손가락에 걸리는 동안 나는 주원의 얼굴을 봤다. 입가에도 눈가에도 평소와 다른 것은 없었다.
“손 차갑네. 오래 기다렸어요?”
“방금 왔어요.”
“커피부터 마실까. 나 오늘 점심도 못 먹었어.”
주원은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검정이었다. 화면을 끄고 재킷 안에 넣는 동작까지 보고서야 나는 트리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행사 일정부터 볼까요.”
“그래요. 일찍 끝내 줄게.”
주원이 먼저 로비 안쪽 탁자로 걸어갔다. 나는 외투 단추를 하나 풀고 맞은편에 앉았다.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주원이 서류를 펼쳤다. 나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
“이건 호텔 행사고, 이건 집안 행사.”
주원이 종이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호텔 신년 행사는 아직 시간이 확정되지 않았다. 본가 인사는 따로였다. 참석자 명단에는 내가 모르는 이름이 많았다.
나는 수첩에 선을 그어 두 일정을 나눠 적었다.
“작업실은 언제부터 다시 열어요?”
“쉬는 날은 아직 안 정했어요. 맡겨 놓은 책이 있어서요.”
“그럼 여기 비워 둘게요. 엄마가 물으면 내가 확인 중이라고 할게.”
주원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빈칸 옆에 표시를 했다. 그 표시가 참석한다는 뜻인지 아닌지 몰라 나는 종이를 당겨 봤다.
“이건 무슨 뜻이에요?”
“미정.”
“그렇게 써 주세요. 나중에 제가 온다고 했다는 말 나오지 않게요.”
주원이 펜을 멈췄다. 나는 수첩을 덮지 않았다.
“알았어요. 미정.”
주원이 글씨를 쓰고 종이를 내 쪽으로 돌렸다.
『윤나경 참석 미정. 본인 확인 후 확정.』
“됐죠?”
“네.”
직원이 음료를 놓고 갔다. 주원 앞에는 커피와 빵이, 내 앞에는 따뜻한 차가 놓였다. 나는 찻잔 손잡이를 잡았다가 내려놓았다.
“드레스는 새로 맞추래요.”
주원이 빵을 나누며 말했다.
“집에 있는 옷 입으면 안 돼요?”
“나한테 물으면 안 되죠. 내가 고르면 또 엄마가 뭐라고 할 텐데.”
주원은 빵 접시를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손을 저었다.
“주원 씨 드세요. 점심 못 드셨다면서요.”
“반만 먹어요. 여기 오는 동안 엄마 전화 받았거든. 자기 얼굴이 너무 말라 보인다고 하시더라.”
“지난번에는 화장을 옅게 했다고 하셨는데요.”
주원이 빵을 든 채 나를 보더니 웃었다.
“그럼 이번에는 진하게 하고 가요. 그다음에는 또 다른 얘기 하실걸.”
나도 찻잔을 들었다. 주원은 냅킨으로 손을 닦고 서류 한쪽을 접었다. 그동안 나는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골랐다가 삼켰다.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지난주에는 바빴어요?”
대신 그렇게 물었다.
“나야 늘 똑같죠. 객실 확인하고, 보고받고. 연말이라 예약 때문에 시끄럽고.”
주원은 트리 쪽을 흘끗 봤다.
“별도 내가 달아야 하나 했네.”
“아까 표시가 잘못 붙어 있었어요.”
“들었어요. 혼낸 사람도 민망하겠던데.”
“다시 붙이면 되는 거니까요.”
주원은 커피를 마셨다. 컵을 내려놓은 뒤에는 내 수첩 위의 펜을 가리켰다.
“그거 아직도 써요?”
“왜요?”
“약혼식 때도 그 펜으로 뭘 적던데. 다른 건 다 새로 샀는데 펜만 낡아서 기억났어요.”
나는 펜 몸통의 벗겨진 자리를 엄지로 가렸다.
“잘 써져요.”
“그럼 됐고.”
주원은 더 묻지 않았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행사 안내문을 한 장씩 넘겼다.
명단 중간에 강이헌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 옆의 참석 여부 칸은 비어 있었다. 나는 다음 줄로 시선을 옮겼다. 종이 모서리를 누른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삼촌은 따로 확인할 거예요.”
주원이 말했다.
“내가 물어봐도 비서한테 확인하라고 할 테니까. 늘 바쁜 사람이라.”
“같은 집안 행사인데도요?”
“집안 행사라 더 바쁠 수도 있죠.”
주원은 가볍게 말하고 다른 종이를 집었다. 나는 명단 위에서 손을 뗐다.
승강기 도착음이 들렸다. 주원은 보지 않았고, 나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건 두 장 받아요.”
주원이 행사 안내문을 내밀었다.
“하나는 아버님 드리고. 장소는 호텔인데 아직 홀은 안 정해졌어요.”
“아버지가 참석하시는지도 제가 여쭤볼게요.”
“응. 무리해서 오실 필요는 없다고 전해요.”
나는 종이를 받았다. 주원은 남은 빵을 먹으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새로 온 연락을 읽는 동안 웃음이 사라졌다가, 화면을 끄자 다시 웃었다.
“미안. 잠깐 올라가 봐야겠어요.”
“일정은 이게 다예요?”
“오늘은요. 바뀌면 연락할게. 내가 확정이라고 보내기 전까지는 정해진 거 아니에요.”
“그 말도 기억해 둘게요.”
“무섭네. 다 적어 놓는 거예요?”
나는 수첩을 가방에 넣었다.
“제가 할 일만요.”
주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외투를 의자 등받이에서 들어 줬다. 나는 받아 입으며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트리 쪽에서는 별을 다시 올리고 있었다. 아까 그 직원이 사다리 위에 있었고, 다른 직원이 아래를 단단히 잡고 섰다.
이번에는 별 끝이 위를 향했다.
“잘 달렸네요.”
내 말에 사다리 아래 직원이 고개를 돌려 인사했다. 위에 있던 직원도 내려와 우리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주원은 직원들의 인사를 받고 승강기 앞으로 갔다. 나는 회전문 쪽에 섰다.
“차 불러 줘요?”
“괜찮아요. 바로 갈게요.”
“도착하면 연락해요, 자기.”
주원은 주변 직원들이 듣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회전문 유리에 주원의 모습이 비쳤다. 승강기 앞에서 다시 휴대폰을 꺼내는 것까지 보였다. 나는 문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
집으로 가는 길에 다은에게 전화가 왔다.
“가계부 할머니가 귤 놓고 가셨어. 네 몫 빼 둘까?”
“응. 내일 먹을게.”
“행사는 잘 끝났어?”
“행사 아니고 일정 잡는 거.”
“그게 더 오래 걸리는 거잖아. 밥은 먹었어?”
“집에 가서 먹으려고.”
다은은 작업실 창문을 닫는 중인지 잠깐 말을 멈췄다. 걸쇠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시집은 덮어 놨어. 네 작업대 손 안 댔고.”
“고마워. 가습기 물은 비워 줘.”
“알았어. 밥 먹고 자.”
통화가 끝난 뒤 나는 이헌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마지막 문자는 전날 저녁에 왔다. 무슨 연락은 없었는지 묻는 말에 나는 없다고 답했다. 그 아래로 새 문자는 없었다.
오늘도 없었다고 썼다가 지웠다.
행사 명단에서 이름을 봤다는 말도 쓰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건널목 신호가 바뀌어 사람들이 먼저 걸어갔다.
집 건물에 들어서니 입구 등이 켜졌다. 현관 안쪽에 우편함이 줄지어 붙어 있었다.
나는 광고지를 꺼내 접었다. 안쪽에 흰 봉투가 남아 있었다. 우편함 폭에 맞춰 세워 넣은 봉투였다.
내 이름도 주소도 없었다.
관리비 안내가 들어 있나 싶어 뒤집어 봤지만 봉한 부분에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우표를 붙였던 자국도 없었다.
나는 계단 쪽을 봤다. 위층에서 문 닫는 소리가 났다. 잠깐 기다렸다가 우편함 문을 닫았다.
봉투는 풀로 붙이지 않았다. 덮개를 안으로 끼워 놓기만 했다. 손가락을 넣자 사진 한 장과 접힌 종이가 함께 나왔다.
사진부터 바로 세웠다.
어두운 차 안이었다. 앞유리 아래로 운전대 일부가 보였고, 그 옆에 앉은 사람의 어깨가 찍혀 있었다. 얼굴은 어느 쪽도 나오지 않았다.
내 가방이 보였다.
무릎에 올려 둔 갈색 가죽 가방이었다. 손잡이 안쪽에 감아 놓은 실도 찍혀 있었다. 나는 가방끈을 잡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사진 속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놓인 손은 유리의 반사 때문에 뚜렷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누구인지 알기 어려울 사진이었다.
나는 사진을 봉투 위에 놓고 함께 온 종이를 펼쳤다. 접힌 자리를 펴는 동안 종이 끝이 손톱에 걸렸다.
휴대폰을 꺼내 이헌의 번호를 찾았다. 통화 버튼에 손가락을 대기 전에, 종이에 찍힌 한 줄을 읽었다.
『12월 말까지 조용히 있어.』
(21화 끝)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접지칼이에요. 아까 보셨던 거요.”나는 상자를 가방에 넣지 않고 뚜껑을 열었다. 경란의 시선이 흰 손잡이에서 받침 아래로 내려갔다.“밑에는?”“닦는 천이 들어 있어요.”천을 꺼내 펼쳤다. 아무 무늬도 없는 천이었다. 경란은 한쪽 끝을 잡았다가 놓았다.“저런 것까지 챙겨 줬네.”나는 천을 접어 받침 아래에 넣었다.“도구에 묻은 풀을 그대로 두면 다음 종이에 옮거든요. 쓰고 나면 닦아 둬야 해요.”“네가 뭘 쓰는지 이헌이가 어떻게 알았을까.”뚜껑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상자 모서리를 맞춰 닫았다.“복원 맡기신 책 때문에 작업실에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 보셨나 봐요.”“의뢰인한테 그런 것도 보여 줘?”“작업하는 걸 궁금해하시면요.”경란은 내 가방 안을 잠깐 보았다. 선물 포장지 옆으로 평소 쓰던 도구집이 나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지퍼를 조금 열었다. 닳은 접지칼 끝이 보였다.“이건 오래 써서 끝이 얇아졌어요. 오늘 받은 건 두꺼운 종이에도 쓸 수 있겠어요.”경란은 도구집을 들여다보다 몸을 바로 세웠다.“그래. 일에 쓰는 거면 잘 써야지.”“네. 잘 쓰겠습니다.”나는 도구집과 상자를 차례로 넣었다. 경란은 내가 가방을 닫는 것까지 보고 돌아섰다.거실 입구에서 주원이 수건을 들고 나왔다. 바닥의 물기를 닦으려 하자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커튼이 다 내려간 뒤에도 나는 2층 창을 올려다봤다. 이헌이 현관문을 연 채 기다렸다. 그날은 안에서 손만 녹이고 바로 나왔다. 경란에게서는 6일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12월 24일 저녁, 나는 같은 현관 앞에 다시 섰다. 2층 창가의 커튼은 걷혀 있었다.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는데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구두 밑창에 붙은 눈이 매트에 떨어졌다.“나경 씨, 손 시려?”주원이 내 뒤에서 문을 닫았다.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괜찮아요.”“장갑 좀 끼고 다녀. 오늘 사진도 찍을 건데 손 빨갛겠다.”주원은 내 가방을 받아 들려다 안에서 종이봉투가 나오자 웃었다.“내 선물?”“회장님 드릴 거예요.”“나는 빈손으로 들어왔는데. 옆에 서 있어야겠다.”거실에서는 접시 놓는 소리가 났다. 경란은 식탁 끝에서 냅킨을 펴고 있었다. 진주 귀걸이 아래로 머리카락 한 올이 붙어 있었다.“늦지는 않았네. 외투 벗고 앉아.”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렸을 때 이헌이 보였다. 식탁 건너 창문 옆이었다. 소매를 두 번 접은 손에 물잔을 들고 있었다.“오셨습니까.”“네, 삼촌.”입안에 남은 호칭을 삼켰다. 이헌은 물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사이에는 의자가 여섯 개 놓여 있었다.주원이 내 옆 의자를 빼 주었다.“자기, 오늘은 일 얘기 금지야. 아버지도 약속하셨고.”석진이 금색 시계를 보고 웃었다.“아직 내가 아무 말도 안 했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본가 장부 수선 마무리』나는 가방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맡기신 건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회장은 책상 위의 장부를 당겼다. 끈이 눌린 자리를 살피던 손이 멈췄다.“그럼 됐네.”더 묻지 않았다. 나는 기록지 한쪽에 수선한 자리를 짚어 드린 뒤 서재를 나왔다. 이헌이 문을 닫았다. 문고리에서 손을 뗄 때까지 나는 복도에 서 있었다.안에서는 서류 넘기는 소리가 났다.“외투 가져올게요.”이헌이 현관으로 갔다. 나는 가방 안쪽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 모서리에 손끝이 닿았다가 빠졌다. 여기서 화면을 켜면 서재 문이 열려도 못 볼 수 있었다.이헌이 코트를 벌려 주려다 내 가방을 봤다.“놓고 입어요. 제가 들고 있을게요.”“바닥에 안 닿게만 해 주세요.”가방을 건네고 팔을 넣었다. 소매 안에서 옷이 말려 올라가 손목을 당겼다. 이헌은 기다렸다가 가방을 돌려줬다. 검은 외투는 아직 팔에 걸쳐 있었다.“회사로 가세요?”“조금 있다가요.”나는 현관 유리 너머를 봤다. 정원 길에는 눈이 치워져 있었다. 담장 아래에만 군데군데 흰 눈이 남았다.“잠깐 걸어도 될까요?”이헌이 외투를 입었다.“정원으로 나가요.”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가방 밑이 젖어 있었다. 서재에서 천을 걷을 때 묻은 건지, 바닥에 남은 눈이 닿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방을 기울여 바닥의 이음매부터 확인했다.“안까지 들어갔어요?”“겉만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