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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s by Jino

이혼 서류는 내가 먼저 냈다

이혼 서류는 내가 먼저 냈다

재벌가 며느리 3년 차, 한서린의 정체는 얼굴 없는 천재 조향사 'N'. 결혼 3주년 밤, 남편의 코트에서 자신의 향을 맡은 그녀는 미련 없이 이혼 서류를 내밀고 떠난다. 뒤늦게 아내의 빈자리를 실감하기 시작한 남편과, 비로소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서린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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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0화. 조건부 청혼
눈은 오후 두 시에 왔다.아침부터 하늘이 낮았다. 서린은 옥탑방 창가에 앉아 오전 내내 하늘을 보았다. 작업실에는 내려가지 않았다. 지현이 문자로 한 줄만 보냈다. 「오늘 휴무예요. 대표 둘이 정했어요.」 하람은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원료장 앞에 우산 두 개를 세워 둔 사진이었다. 무슨 뜻인지는 쓰지 않았다.열두 시가 넘자 공기가 바뀌었다.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골목의 소리가 한 겹 낮아졌다. 인쇄소 기계 소리도, 빵집 문 종소리도 솜에 싸인 것처럼 멀어졌다. 그리고 코 안쪽이 서늘해졌다. 쇠붙이를 혀끝에 댄 것 같은.서린은 창문을 열었다.첫 송이는 창틀에 앉자마자 녹았다. 두 번째도 그랬다. 세 번째부터는 녹지 않았다. 골목 지붕들이 천천히 하얘졌다.그녀는 휴대폰을 들었다. 문자는 쓰지 않았다. 쓸 필요가 없었다. 그 사람도 창밖을 보고 있을 테니까.대신 그녀는 난로에 불을 붙였다. 주전자에 물을 채워 올렸다. 책상 위를 한 번 닦고, 수첩을 가운데 놓았다가 옆으로 비켜 두었다. 비커는 그대로 두었다. 수첩을 다시 펼쳐 다섯 줄을 소리 없이 한 번 읽었다. 입술만 움직였다. 둘째 줄에서 한 번 멈췄다. 연습하는 자신이 우스워서 그녀는 수첩을 덮었다.창밖을 내려다보니 골목 입구에 검은 차가 섰다. 남자 하나가 내렸다. 우산을 받지 않고, 눈 속을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린은 창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숨지도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면 보이는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 *도혁은 골목 입구에서 차를 보냈다.강민재가 운전석에서 돌아보았다.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우산을 내밀었다. 도혁은 받지 않았다."눈 맞고 갈게.""감기 드십니다.""한 번은 괜찮아."그는 골목을 걸어 들어갔다. 빵집 사장이 가게 앞 눈을 쓸다가 그를 보고 빗자루를 멈췄다. 1년 넘게 이 골목 입구에 차를 세우던 남자였다. 사장은 아무 말 없이 턱으로 빨간 벽돌 건물을 가리켰다. 가 보라는 뜻이었다.계단 아래에서 그는 멈췄다. 가을에 그녀의 캐리
Last Updated: 2026-10-15
Chapter: 99화. 첫눈 전날
서린은 새벽 네 시에 비커를 꺼냈다.옥탑방 책상 위에 원료병이 스무 개쯤 늘어서 있었다. 작업실에서 하나씩 들고 올라온 것들이었다. 베르가모트, 삼나무, 향나무, 리넨 계열의 알데하이드, 재스민 앱솔루트 한 방울 분량, 제라늄, 그리고 머스크 두 종류.12월의 첫 주였다.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찬 공기가 들어왔다. 아직 눈 냄새는 아니었다. 눈이 오기 전의 공기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먼지가 가라앉고, 소리가 낮아지고, 쇠붙이 같은 서늘함이 코 안쪽을 건드리는. 오늘 새벽 공기에는 그게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그녀는 수첩을 펼쳤다. 「청혼받는 조건」 다섯 줄 다음 장에 배합이 적혀 있었다. 몇 번을 지우고 다시 쓴 흔적이 있었다.「새 향 — 이름 없음. 둘이 쓰는 것.」처음에는 도혁을 위한 두 번째 향을 만들려고 했다. 첫눈이 곧 떨어질 테니까. 그 병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녀는 알았다. 파리에서, 구청 앞에서, 그의 손목에서 올라오는 향이 날마다 얇아지고 있었다. 머스크만 남고 베르가모트가 먼저 사라지는 건 병 바닥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그런데 첫눈 같은 걸 하나 더 만드는 건 이상했다. 첫눈은 3년 전 그녀가 혼자 기억한 냄새였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그를 위해.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다른 걸 적었다. 그의 냄새와 그녀의 냄새가 한 병 안에서 싸우지 않는 향.첫눈에서 베르가모트와 삼나무를 가져왔다. 옥탑에서 나무 계단과 리넨을 가져왔다. 그리고 1년 동안 두 사람이 같이 맡은 냄새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구청 앞 군고구마. 파리의 크레페 버터. 센강의 물비린내. 그라스의 재스민이 배었다가 그의 첫눈으로 바뀐 손수건.전부 넣을 수는 없었다. 필요 없는 걸 빼고, 마지막에 한 가지만 남기는 게 그녀의 일이었다.비커에 베르가모트를 떨어뜨렸다. 다섯 방울. 삼나무 세 방울. 향나무 두 방울. 그리고 한참 멈춰 있다가, 재스민을 이쑤시개 끝으로 아주 조금. 그라스의 밭이 아니라 손수건에 남아 있던 만큼만.시향
Last Updated: 2026-10-15
Chapter: 98화. 11월
문자는 아침 여덟 시에 왔다.「하루 하나는 내일로 미룰게. 오늘은 부탁 하나.오후 두 시 사십 분, 성동구청 앞에서 기다릴게.안 와도 돼. 그냥 거기 있을게.」서린은 옥탑방 창가에서 그 문자를 읽었다. 달력을 볼 필요는 없었다. 11월 5일. 1년 전 오늘 그녀는 법원에서 나와 구청에 갔다. 번호표 118번. 2분이 걸렸다.두 시 사십 분. 그녀가 이혼 신고서를 낸 시각이었다. 그걸 이 남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서린은 잠깐 생각했다. 그러다 알았다. 그날 오후 세 시 정각에 N의 메일이 태강에 도착했다. 확인서 등본을 받고 나서 구청에 들렀다면, 신고는 그 전이었을 것이다. 1년 동안 그 시간을 거꾸로 세어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숫자였다.답장은 하지 않았다.그녀는 작업실에 내려가 하루를 보냈다. 무화과 여름 2차 물량의 향 농도를 확인했다. 하람이 만든 다음 시제품을 맡았다. 지현과 점심으로 칼국수를 먹었다. 두 시가 되었을 때 서린은 앞치마를 벗었다.지현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오늘 일찍 가요?""잠깐 나갔다 올게요.""네. 천천히 와요."지현은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입꼬리만 조금 올라가 있었다.계단을 내려가는데 하람이 원료장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서린 씨, 립밤 발랐어요? 밖에 바람 차요.""……하람 씨.""네?""아무것도 아니에요."하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서린은 계단을 마저 내려가다가 가방에서 립밤을 꺼내 발랐다. 향을 넣지 않은 립밤이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오늘은 제 냄새가 아니라 거리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구청까지는 걸었다. 성수의 공장 골목을 지나 큰길로 나갔다. 금속을 깎는 기름 냄새, 가죽 공방의 무두질 냄새, 새로 생긴 카페의 원두 볶는 냄새. 1년 전 그날은 택시를 탔다. 법원에서 구청까지, 창밖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오늘은 신호등마다 멈춰 서서 냄새를 하나씩 맡았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기다리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 *구청 앞 계단은 1년 전과 같았
Last Updated: 2026-10-15
Chapter: 97화. 하람의 향
라벨은 하람이 직접 붙였다.작업실 작업대 위에 30밀리리터 병 스무 개가 두 줄로 서 있었다. 투명한 유리 안에 연한 초록빛이 도는 향. 하람은 핀셋으로 라벨을 집어 병 목 아래에 한 장씩 붙였다. 숨을 참고 있었다. 한 장 붙일 때마다 숨을 내쉬었다.「무향 — 무화과 여름」그 아래 작은 글씨로 한 줄.「조향 구하람」서린은 창가에 기대어 그 모습을 보았다. N이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 무향 병에 붙는 건 처음이었다. 라벨티 표상진은 처음에 반대했다. 두 번째 라인을 신인 이름으로 내는 건 모험이라고. 서린은 숫자를 보여 주었다. 파리 전시 기간 동안 무화과 시제품을 맡아 본 사람들의 반응지, 성수 팝업 재방문율, 그리고 하람이 석 달 동안 고친 버전 스물세 개의 기록. 표상진은 한참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숫자가 좋네요, 그럼 된 거죠."손 떨려요."하람이 말했다. 핀셋 끝이 정말로 조금 떨리고 있었다."떨어도 돼요. 삐뚤어지면 다시 붙이면 돼요.""이건 다시 붙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첫 병인데."지현이 커피를 들고 다가와 하람의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았다."하람 씨, 서린 씨 첫 병 라벨 얼마나 삐뚤었는지 알아요? 10년 전에. 제가 봤거든요. 이만큼."지현이 손가락으로 기울기를 그려 보였다. 과장이었다. 서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람이 웃었다. 핀셋 끝의 떨림이 멎었다.마지막 병에 라벨이 붙었다. 하람은 핀셋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붙였어요.""네. 붙였어요."서린은 병 하나를 집어 뚜껑을 열었다. 손목에 한 번 뿌렸다.초록 잎이 먼저 왔다. 한여름 오후,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서 있을 때의 풋내. 이어서 덜 익은 열매를 쪼갰을 때의 하얀 즙 냄새. 그리고 끝에 우유처럼 부드럽게 남는 따뜻함. 파리에서 돌아온 날 옥탑방 책상에서 처음 맡았을 때보다 끝이 길어져 있었다. 서린이 쪽지에 적어 둔 대로."끝을 늘렸네요.""네. 샌달우드 조금이랑, 쌀 증류 원료
Last Updated: 2026-10-15
Chapter: 96화. 윤정숙의 봄
전화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왔다."한서린 씨죠?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옛날에 향기 봉사 오셨을 때 수간호사였던…….""기억해요. 배 선생님."서린은 작업대에서 손을 떼고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스물다섯 살 때, 병동 복도 끝 작은 방에서 환자들에게 냄새를 물어 가며 병을 채우던 때였다. 그때 그녀에게 방을 내준 사람이었다. 올해 초 도혁이 찾아갔을 때, 그녀가 두고 간 샘플 상자를 아직 버리지 못했다고 말한 사람이기도 했다."다름이 아니라요. 요즘 봉사 오시는 분이 한 분 계신데요. 차성준 님 사모님이세요."서린의 손가락이 작업대 모서리를 짚었다."두 달째 매주 오세요. 환자분들 손 닦아 드리고, 말벗 해 드리고. 그런데 그분이 자꾸 비누를 만드세요. 장미 비누요. 환자분들한테 옛날 냄새를 맡게 해 드리고 싶다고. 근데 그게 잘 안 되시나 봐요. 매번 냄새가 이상하다고 속상해하세요.""…….""그분이 서린 씨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해요. 모른 척하고 한 번만 와 주시면 안 될까요."서린은 창밖을 보았다. 10월 끝자락의 햇빛이 인쇄소 지붕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목요일에 갈게요."* * *병동은 스물다섯 살 때와 거의 같은 냄새가 났다.소독약, 삶은 수건, 오래된 리놀륨 바닥. 그 아래에 사람의 냄새가 있었다. 오래 누워 있는 몸의 냄새, 약 냄새, 그리고 누군가 가져온 귤 껍질. 서린은 복도 입구에서 숨을 한 번 고르고 들어갔다.간호사실 앞에서 배 선생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새 머리가 하얗게 센 얼굴이었다. 배 선생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그리고 책상 아래에서 낡은 종이 상자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뚜껑에 서린의 글씨로 「향기 봉사 — 샘플」이라고 적혀 있었다."아직 있어요. 가끔 열어 봐요. 냄새 다 날아갔는데도요."서린은 상자 모서리를 한 번 쓸어 보았다. 스물다섯 살의 글씨가 거기 있었다. 지금보다 동글동글했다.휴게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창가 테이블에 윤정숙이 앉아
Last Updated: 2026-10-15
Chapter: 95화. 조건 목록
서울은 은행잎 냄새로 서린을 맞았다.인천에서 성수까지 오는 택시 안에서 그녀는 창문을 조금 내렸다. 한 달 사이에 가을이 깊어져 있었다. 가로수가 노랗게 물들었고, 길가에 떨어진 열매가 밟혀 쿰쿰한 냄새를 올렸다. 파리에서 한 달 동안 맡지 못한 냄새였다. 좋은 냄새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반가웠다.골목 입구에서 택시를 내리자 빵집 사장이 가게 앞을 쓸다가 빗자루를 멈췄다."어머, 왔네! 파리 갔다며. 빵은 거기가 낫지?""여기가 나아요.""거짓말도 잘해."사장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금빵 두 개를 봉지에 담아 주었다. 돈은 받지 않았다. 봉지에서 버터와 굵은소금 냄새가 올라왔다. 파리의 버터보다 짰다. 서린은 그게 좋았다.캐리어를 끌고 계단 앞에 섰다. 한 달 전 도혁이 캐리어를 내려놓고 바퀴를 돌려놓았던 자리였다. 이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린은 손잡이를 접고 캐리어를 들었다. 가벼웠다. 병 열한 개는 파리에 두고 왔다. 전시가 끝나면 이안이 하나씩 싸서 보내 주기로 했다.올라가는 길에 2층 작업실 문을 잠깐 열어 보았다. 불은 꺼져 있었다. 원료장 유리문 너머로 갈색 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서린은 문틈에서 숨을 들이쉬었다. 알코올, 나무 선반, 누군가 새로 들여놓은 오렌지꽃 원료. 그리고 하람 책상 모니터 옆의 로즈마리 화분.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틀어지지 않은 냄새였다. 그녀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옥탑방 문을 열자 먼지 냄새와 함께 낯선 냄새가 났다. 무화과였다. 누군가 책상 위에 시향지를 한 장 꽂아 두고 갔다. 그 옆에 쪽지.「두 번 고쳤어요. 이제 진짜 무화과예요. — 하람」서린은 시향지를 코에 댔다. 초록 잎, 덜 익은 열매의 풋내, 그리고 끝에 우유 같은 부드러움. 한 달 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그녀는 쪽지 아래에 연필로 한 줄을 적었다.「좋아요. 끝을 조금만 더 길게.」* * *그날 밤 옥탑방은 시끄러웠다.지현이 족발을 사 왔고, 하람이 떡볶이를 사 왔고, 승아가 소주 세 병을 들고 왔다. 파리 얘기를
Last Updated: 2026-10-15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사내 앙숙 차이현과 냅킨에 쓴 가짜 연애 계약서. '스킨십은 손잡기까지', '진짜 사랑에 빠지면 파기'. 하지만 5년 내내 싸워온 그가 왠지 수상하다. 과연 이 계약은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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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0화. 제1조,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Last Updated: 2026-10-15
Chapter: 39화. 추석 연휴 전날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Last Updated: 2026-10-15
Chapter: 38화. 역제안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Last Updated: 2026-10-15
Chapter: 37화. 거사 준비위원회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Last Updated: 2026-10-15
Chapter: 36화. 구겨진 냅킨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Last Updated: 2026-10-15
Chapter: 35화. 친구 얘기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
Last Updated: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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