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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수장고 냉방실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9 18:00:00

『오늘 일정: 12월 3일 화요일, 서진재단 수장고 고서 상태 확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가는 동안 사진을 봉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쪽지는 접지 않고 손에 들고 있었다.

“윤나경 씨.”

이헌의 목소리가 들리자 계단 쪽을 돌아봤다.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봉투가 왔어요. 우편함에요.”

“지금 어디예요?”

“집 입구요. 사진하고 쪽지가 들어 있어요.”

“먼저 안으로 들어가요. 통화는 그대로 두고.”

나는 봉투를 가방에 넣고 계단을 올랐다. 현관문을 잠근 뒤에야 쪽지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종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조금 구겨져 있었다.

“들어왔어요.”

“누가 보냈는지 적혀 있어요?”

“아니요. 얼굴이 안 나온 사진이에요. 제 가방은 알아보겠어요.”

전화 너머에서 의자 미는 소리가 났다.

“제가 갈까요?”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다시 이헌이 집 앞에 오는 것을 누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내일 수장고에서 봐요. 원래 가기로 했으니까.”

“그럼 지금은 사진만 보내 줘요. 봉투도 같이요.”

“답장은 안 했어요. 할 곳도 없고요.”

“잘했어요.”

나는 식탁 위에 봉투와 사진, 쪽지를 나란히 놓았다. 화면에 모두 들어오는지 확인하고 촬영했다.

전송 표시가 사라질 때까지 이헌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

다음 날 수장고 입구에서 방문 기록을 썼다. 화요일 날짜 옆에 이름을 적고 출입증을 받았다.

냉방실 문 앞에는 고서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고 작업용 덧옷을 입었다. 가방 안의 봉투는 아직 꺼내지 않았다.

문이 열리며 이헌이 들어왔다.

“많이 기다렸어요?”

“방금 왔어요.”

이헌은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뒤 내 가방을 봤다.

“가져왔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대에는 책을 올려야 해서 벽 쪽의 빈 탁자를 골랐다. 이헌은 맞은편 의자를 빼다가 멈췄다.

“여기 앉아도 돼요?”

“네.”

나는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다. 사진부터 탁자 위에 놓고 쪽지를 펼쳤다. 이헌은 바로 손대지 않았다.

밤에 휴대폰으로 보냈던 사진이었지만 종이로 보니 차 안의 모습이 더 어두웠다. 나는 가방 손잡이가 찍힌 곳을 가리켰다.

“이 실 때문에 알았어요. 얼굴은 못 알아봐도 제 물건은 알아보겠어요.”

“다른 사람한테 말했어요?”

“아직요. 다은이한테도 안 했어요.”

이헌은 쪽지를 읽었다. 손은 탁자 아래에 둔 채였다.

“부회장님 쪽일까요?”

“형님이 보냈을 가능성은 낮아요.”

“추모공원에서 비서가 휴대폰을 들었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쪽부터 확인하고 있어요.”

이헌은 봉투 안쪽까지 들여다봤다. 나는 접힌 덮개를 벌려 보였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 본 걸 형님에게 보고했을 수는 있어요. 그런데 형님은 이런 쪽지를 안 써요.”

“직접 안 쓰고 시켰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 있죠. 말투만 보고 빼 놓지는 않을 거예요.”

이헌은 쪽지의 마지막 줄을 다시 읽었다.

“형님은 사람을 불러요. 상대가 알아들을 때까지 얼굴을 보고 말하고요.”

나는 어제 로비에서 만난 주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행사 안내문을 펴 놓고 빵을 나누던 손도 생각났다. 그것만으로 아는 게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주원 씨는 평소하고 같았어요.”

이헌의 시선이 내게 왔다.

“그래서 더 묻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제가 먼저 말을 꺼내는 걸 수도 있으니까.”

“안 물은 게 맞아요.”

“그럼 누구를 확인해야 해요?”

이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사진을 돌려 탁자의 긴 변에 맞췄다. 비뚤어진 곳이 없는데도 다시 손을 댔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요. 확인하고 말할게요.”

나는 사진에서 손을 뗐다.

“제 일인데 저만 모르고 기다려야 하는 건 싫어요.”

“알아요.”

“말하기 곤란한 건지, 아직 모르는 건지 구분해서 말해 줘요.”

이헌이 의자를 조금 당겼다. 탁자는 그대로 우리 사이에 있었다.

“아직 몰라요. 제가 떠올린 사람이 보냈다는 근거가 없어요.”

“확인하다가 아니면요?”

“아니었다고도 말할게요.”

나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봉투를 찾은 시각과 통화한 시각을 적어 둔 페이지를 펼쳤다.

“우편함에 넣는 사람을 본 이웃은 없대요. 아침에 관리하시는 분한테도 물었어요. 입구에는 카메라가 없고요.”

이헌이 수첩을 봤다.

“직접 물어봤어요?”

“보낸 사람 찾으려면 언제 들어왔는지부터 알아야 하니까요. 택배 봉투를 기다린다고 했어요.”

나는 봉투 덮개를 펴서 보여 줬다.

“풀도 테이프도 없어요. 우편으로 온 게 아니라 누가 넣고 간 거예요. 겉면에 눌린 글씨도 안 보이고요.”

“원본은 보관해 둬요. 더 접지는 말고.”

“종이 끼워서 둘게요. 사진하고 따로요.”

이헌은 휴대폰을 꺼내 내가 적은 시각을 확인했다. 필요한 것만 받아 적고 화면을 껐다.

“오늘 돌아갈 때도 주변을 봐요.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가까이 가지 말고요.”

“실장님도요.”

“저도 그럴게요.”

나는 봉투를 가방 안의 파일에 넣었다. 손잡이의 실이 지퍼에 끼어 빼내는 동안 이헌은 기다렸다.

◈

고서 상자를 열자 안에 상태표가 놓여 있었다. 나는 마스크를 쓰고 이헌에게도 하나를 건넸다.

“오늘 볼 책이에요?”

“네. 격리해서 말려 둔 거예요. 남은 곰팡이 흔적을 먼저 확인하려고요.”

이헌이 책 위로 손을 뻗다가 멈췄다.

“만져도 돼요?”

“장갑부터요. 그리고 여기서 안 털어요.”

나는 안쪽 작업대로 상자를 옮겼다. 국소 배기 장치를 켜자 낮은 소리가 났다. 덮개 안에 책을 놓고 받침을 끼웠다.

이헌은 소매를 두 번 접었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이 내 손을 따라왔다.

“제가 할 일은요?”

“원래는 상태표만 적어 주시면 돼요.”

“다른 것도 배워도 돼요?”

나는 여분의 붓을 꺼냈다. 털 끝이 벌어지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 이헌에게 손잡이를 내밀었다.

“종이가 들리면 바로 멈춰요. 안 떨어지는 건 억지로 떼지 말고요.”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먼저 바깥쪽 여백에 붓을 댔다. 남은 가루가 흡입구 쪽으로 가도록 짧게 움직였다. 글씨가 있는 곳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렇게요. 손목에 힘 빼고.”

이헌이 빈 받침 위에서 동작을 따라 했다. 붓 끝이 받침에 눌려 옆으로 퍼졌다.

“지금은 세요.”

이헌이 손을 들었다.

“이 정도도 세군요.”

“종이는 받침보다 약하니까요.”

나는 이헌의 붓 아래에 시험용 종이를 놓았다. 붓이 지나갈 때 종이 끝이 들렸다.

“보이죠?”

“네.”

“책에서 그러면 찢어질 수 있어요. 조금 더 눕혀 보세요.”

이번에는 종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헌은 내 쪽을 확인한 뒤에야 다시 붓을 움직였다.

처음 맡긴 곳은 글씨 없는 바깥 여백이었다. 나는 책 안쪽을 받치고 이헌의 손을 봤다.

붓이 두 번 지나갔을 때 손잡이가 덮개에 부딪혔다.

“죄송해요.”

“책에는 안 닿았어요. 괜찮아요.”

이헌이 팔꿈치를 당겼다. 이번에는 너무 가까이 당겨 붓 끝이 종이에 닿지 않았다.

나는 손에 든 받침을 내려놓고 웃음을 참았다.

“왜요?”

“실장님도 처음 하는 건 서툴구나 싶어서요.”

이헌은 붓을 든 채 나를 봤다.

“잘하는 척은 안 했어요.”

“그건 맞아요.”

마스크 안쪽으로 웃음이 났다. 나는 붓이 놓인 방향을 고쳐 주었다. 이헌은 손을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내 손가락이 장갑 끝에 닿기 전에 멈췄다. 손잡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조금만 아래로 잡아요.”

이헌이 손가락을 내렸다.

“여기요?”

“네. 이제 천천히.”

환풍 소리 때문에 작은 대답은 잘 들리지 않았다. 이헌이 고개를 가까이 기울였다. 나는 책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붓이 여백을 지나갔다. 가루가 떨어진 자리에 종이의 얼룩은 남아 있었다.

“이건 안 지워져요?”

“흔적이에요. 지금은 더 안 건드려요.”

이헌은 바로 붓을 뗐다. 나는 상태표에 남은 얼룩과 작업한 곳을 적었다.

“됐다.”

혼잣말을 하자 이헌이 붓을 내려놓았다.

“합격이에요?”

“오늘은 여기까지만요.”

이헌이 장갑 낀 손을 펴 봤다.

“생각보다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네요.”

“안 찢으려고 하면 더 그래요.”

나는 이헌에게 상태표를 넘겼다. 이헌은 작업한 쪽수를 적고 빈칸을 확인했다. 서명이 필요한 곳을 묻기에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

이번에는 펜을 막힘없이 움직였다.

◈

정리를 마치고 마스크를 벗었다. 이헌은 벽 쪽에서 손을 씻고 돌아왔다. 물기가 남은 손끝을 수건으로 한 번 더 눌렀다.

나는 책을 상자에 넣다가 냉방실 바깥에서 발소리를 들었다. 문 앞에서 소리가 멎었다.

손에 들고 있던 상태표를 상자 위에 올렸다.

이헌도 문 쪽을 봤다. 둘 사이에는 빈 작업대가 있었다. 가까이 선 것도 아닌데 나는 덧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다시 뺐다.

문손잡이가 내려갔다.

직원이 문을 조금 열고 고서 상자를 확인했다.

“오늘 반출하실 자료 있으세요?”

“없어요. 이 책은 격리 서가에 그대로 둘 거예요.”

내가 상태표를 들어 보이자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혔다.

나는 상태표를 상자에 넣었다. 종이가 한 번에 들어가지 않아 모서리를 다시 맞췄다.

“여기 오는 것도 기록에 남아요.”

내 말에 이헌이 출입증을 내려다봤다.

“네.”

“복원 일로 오는 건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오늘은 사진을 보여 주려고 왔잖아요.”

“책도 봤어요. 제가 방해를 좀 했지만.”

나는 붓을 넣던 손을 멈췄다. 이헌이 덧붙였다.

“다음에는 다른 곳에서 만나도 돼요. 윤나경 씨가 편한 곳으로.”

“그렇게 하나씩 바꾸면 나중에는 작업하는 곳에서도 피하게 될 것 같아요.”

이헌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나는 붓 보관함을 닫았다.

“오늘은 여기서 보길 잘했어요.”

“왜요?”

“이거 하느라 쪽지를 계속 들여다보지는 않았으니까.”

이헌이 상자 쪽을 봤다.

“다음에는 상태표만 적을게요.”

“아니요. 손에 힘 빼는 것부터 다시 해요.”

이헌이 짧게 웃었다. 나는 빈 상자를 서가 아래에 밀어 넣었다.

덧옷을 벗고 가방을 챙길 때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다은이 보낸 문자였다.

『점심 먹고 와. 네 몫 귤은 냉장고 아래 칸.』

답장을 보내고 나니 이헌이 문 옆에 서 있었다. 먼저 나가지 않고 통로가 비었는지 보고 있었다.

“실장님.”

이헌이 돌아봤다.

“조용히 있으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누굴 만나지 말라는 건지, 뭘 알아보지 말라는 건지 적혀 있지도 않아요.”

나는 가방에서 파일을 다시 꺼냈다. 종이 사이에 끼운 쪽지를 펼쳤다.

『12월 말까지 조용히 있어.』

“제가 뭘 하는지 아는 사람이 보낸 거면, 그걸 적는 게 더 확실하잖아요.”

이헌은 문에서 손을 떼고 돌아왔다.

“그러네요.”

“날짜만 적었어요. 오늘까지도 아니고 결혼할 때까지도 아니고요.”

나는 수첩을 꺼내 빈칸에 날짜를 적었다. 그 아래에는 해윤이라고 썼다. 이헌은 내가 펜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부회장님 말투가 아니라는 것 말고, 짐작하는 이유가 또 있어요?”

“있어요.”

“그건 지금 말할 수 있어요?”

이헌은 쪽지를 내려다봤다. 나는 수첩을 덮지 않았다.

“12월 말이면 해윤 부지 서류가 움직여요. 쪽지 쓴 사람은 그걸 아는 사람이에요.”

(2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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