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투던 광경이 떠올랐는지 평소엔 온화하고 담담해 보이던 서연정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승연이는 우리가 밥 먹을 때부터 정원에서 혼자 놀고 있었는데 아마 애 아빠가 상을 엎는 소리가 하도 커서 놀랐던 것 같아.”서연정은 말하면서 곽승연을 바라보았다.“내가 정신 차리고 승연을 찾으러 갔을 땐 이미 사라진 후였고.”하인들도 곽승연이 어디 갔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탓에 나중에 CCTV 동영상을 돌려보고서야 그녀가 뒷문으로 달려 나간 걸 발견했다고 한다.그리고 하인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 한참 동안 찾아보았지만 곽승연은 보이지 않았고 고은서가 전화했을 땐 마침 신고하려던 참이었다고 설명을 보탰다.그녀는 서연정이 얼마나 다급해하고 절망스러워했는지 상상이 갔다.“저도 오늘 평소보다 집에 늦게 들어오고 또 마침 도우미 아줌마가 휴가를 내는 바람에 집이 비어 있었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승연이를 더 빨리 만나서 어머니한테 연락드릴 수 있었을 텐데.”“아니야,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내가 급한 마음에 승연이 해성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너 아니면 승재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서연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고은서는 피곤해 보이는 서연정을 보며 물었다.“어머니, 곽 회장님과 사이가 그토록 좋지 않은데 왜 이혼하고 승연이를 혼자 데리고 살지 않는 건가요? 아무리 어르신들의 약속을 대신 지켜드리기 위해 이혼하지 않는 거라고 하지만 할머니께선 어머니가 행복하게 사는 게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이혼하신다고 해도 절대 반대하지 않으실 거예요.”자기보다 어른인 데다가 예전엔 시어머니였던 사람을 이혼하라고 달래는 게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서연정이 이미 벼랑 끝에 맞닿은 결혼생활을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서연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지금까지 계속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혼하든 말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나마 이혼하지 않으면 GS그룹
호전된 곽승연이 또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았던 서연정은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알겠어. 울지 마. 그럼 오늘은 돌아가지 말고 언니 집에 있자.”고은서는 곽승연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그녀를 달랬다.“그래그래. 오늘은 언니랑 같이 있자.”곽승연은 그제야 서서히 진정되는 듯했다.“은서야, 그럼 승연이를 부탁할게.”서연정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고은서는 서연정이 상처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도 위안이 될 것 같지 않았다.“괜찮아요, 어머니. 승연이는 제가 잘 돌볼게요.”서연정은 곽승연을 안고 한참 동안 달래면서 그녀가 진심으로 집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뒤돌아 떠났다.서연정이 배웅해 준 후 고은서는 곽승연 곁에 다시 앉았다.그녀는 잠이 깼는지 혼자 소파에 앉아 인형을 안고 멍때리고 있었다.“승연아, 배 안 고파? 언니가 밥해줄까?”“배 안 고파요.”곽승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러나 이내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뭐 먹고 싶어? 만두? 면? 아니면 죽?”“다 돼요.”곽승연은 어색한지 얼굴이 빨개졌다.고은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그럼 언니가 먹을 것 좀 해올게. 언니 집에서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마음껏 돌아봐.”곽승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냉장고에서 여러 가지 채소와 계란을 꺼내 쫄면과 스크램블을 요리할 생각이었다.전에 곽승재의 관심을 얻기 위해 요리를 배우면서 시간 날 때마다 밥상을 푸짐하게 차리고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었다.하지만 곽승재는 무심하게도 거의 집에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가끔 그녀가 해준 밥을 먹으면서 단 한 번도 칭찬이라곤 해주지 않았다.그러나 예전의 고은서는 그가 자신이 해주는 밥을 먹어주기만 해도 흥분해 하며 좋아했다.‘전에는 정말 왜 그랬지? 곽승재가 없으면 못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했는지 몰라. 그런
“오빠요.”곽승연이 답했다.‘아마 어머니한테서 승연이가 내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겠지.’고은서는 더는 상관하지 않았다.“얼른 손 씻고 밥 먹자.”“네.”곽승연은 손 씻으러 가고 고은서는 물을 따르러 갔다. 그러나 바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오빠일 거예요. 방금 언니 집에 있다고 했는데 금방 오겠다고 했어요.”손 씻고 나온 곽승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언니, 나 혹시 뭐 잘못했어요?”곽승연은 두 사람이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고 또 전에 만날 때마다 서로 모순이 생겨 다툰 것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가 자신을 탓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곽승연의 생각을 알아차린 고은서는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아니. 승연이는 아무 잘못이 없어. 오빠도 승연이가 걱정되어서 보러 온 걸 거야. 먼저 먹고 있어. 언니가 문 열게.”“네.”곽승연은 이내 식탁 앞에 앉고 고은서는 문을 열어주러 갔다.아니나 다를까 곽승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금방 출장을 마치고 온 그는 작은 캐리어를 끌고 외투를 팔에 걸치고 있었는데 약간 피곤해 보였다.“승연이 여기 있어?”“응. 들어와.”고은서는 이내 들어오라고 옆으로 비켜주면서 답했다.곽승연은 그를 보자마자 오빠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고은서한테로 돌리면서 기뻐하며 말했다.“언니, 쫄면 너무 맛있어요. 저 이렇게 맛있는 쫄면은 처음이에요.”“언니가 한 게 맛있는 게 아니라 승연이 네가 너무 배고파서 뭐 먹어도 맛있게 느껴지는 거야.”음식 냄새를 맡은 곽승재도 저도 모르게 배가 고파 났다.그러나 식탁 위에 놓인 면을 보면서 차마 자기도 먹고 싶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면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곽승재를 보면서 말했다.“마침 한 그릇 남았는데 배고프면 먹어.”원래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그는 이혼한 이후로 고은서가 해준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다.전미자의 부탁으로 그를 보
면을 먹은 후 곽승연은 방금전보다 상태가 훨씬 나아진 듯했다.고은서는 그녀와 함께 소파에 앉아 아이패드를 보면서 화젯거리를 찾았다.단 한 번도 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던 곽승재는 그릇을 거두더니 자연스레 설거지까지 해놓을 생각이었다.쨍그랑!고은서와 곽승연이 한창 재미나게 패드를 보고 있을 때 부엌에서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곽승연한테 소파에 가만히 있으라고 당부한 뒤 부엌으로 걸어갔다.아니나 다를까, 그릇 조각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데다가 세제 덮개는 열려 있었고 싱크대와 곽승재의 손은 거품투성이였다.“세제를 물로 쓰는 거야?”곽승재는 평소에 당당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던 모습과 달리 약간 주춤하더니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한 번 했다.“처음 해보는 거라서 많이 따랐나 봐.”“더 따르지 그랬어? 그럼 안에 들어가서 수영해도 될 텐데.”“...”곽승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이 작은 구멍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어? 딱 봐도 세제를 짜는 데 쓰이는 거잖아.”고은서는 덮개를 들고 곽승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부엌에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던 곽승재는 생활 지식이 결핍했던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그가 땅에 있는 그릇 조각들을 주우려고 할 때 고은서가 황급히 제지했다.“잠시만! 빗자루로 쓸면 돼. 손으로 줍다가 상할 수도 있으니까. 또 손을 다쳤다고 이런저런 요구를 제기하면 그땐 정말 쫓아낼 거야.”곽승재는 반박하지 않고 빗자루를 들고 평소에 사인만 하던 손으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땅을 쓸기 시작했다.“당신이 청소할 줄 안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그 모습을 본 고은서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은 각양각색의 음식을 다 할 줄 알던데 당신은 왜 이런 거야? 세제도 쓸 줄 모르고 아무리 집안 배경이 좋고 잘생겼다고 한들 이러고 누가 당신한테 시집을 가겠어.”고은서는 투덜거리면서 곽승재 손에 있는 빗자루를 빼앗으려 했다.그러나 곽승재가 그
고은서와 곽승재는 동시에 곽승연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아주 긴장된 상태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방금 부모님의 싸움 현장을 겪은 곽승연은 아직도 긴장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애썼고 그도 눈치 있게 그녀를 놓아주었다.그녀는 곽승연 곁으로 다가가 웃어 보이며 그녀를 위안했다.“승연아, 우린 괜찮아.”“정말이에요?”곽승연이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곽승재는 표정 관리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언니한테 장난 좀 친 것뿐이야.”곽승연은 그제야 시름을 놓고 고은서 따라 부엌을 나왔다.“언니, 아까 오빠랑 뽀뽀 유희를 한 거예요?”곽승연이 갑자기 천진한 목소리로 물음을 제기했다.“...”고은서는 순간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그러니까 아까 곽승재가 나한테 키스하는 모습을 봤단 말이지? 곽승재는 정말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전엔 화내며 가더니만 왜 갑자기 또 나한테 키스하고 난리야.’고은서는 이내 곽승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인했다.“승연이가 잘못 본 거야. 아무 일도 없었어.”곽승연은 더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은서가 부끄러워서 답을 피할 뿐 절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고은서가 곽승연을 욕실로 들여보낸 뒤 곽승재도 부엌에서 나왔다.옷이 덜 마른 탓에 그는 옷소매를 위로 거두면서 굵은 팔뚝을 드러냈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돌아가서 쉬어. 승연이는 내가 돌볼게.”“승연이 잘 부탁해.”곽승재는 머뭇거리다가 한 마디 남기고는 캐리어를 들고 떠났다.고은서는 부엌을 힐끗 들여다보았는데 그릇은 이미 다 씻겨 있었지만 싱크대와 바닥은 물과 거품으로 가득했다.‘아줌마가 보면 곽승재 설거지했다고 감동할지 아니면 이 아수라장이 된 부엌을 보고 환장할지 은근히 기대되네.’...이튿날, 고은서가 눈을 떴을 때 곽승연은 이미 깨어 있었다.어제보다 상태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걸 거부했다.“언니,
송민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민시후 하나로도 충분하거든. 더는 어느 남자 뒤를 쫓아다니고 싶지 않아. 주인혁처럼 인기 있는 사람과 연애하려거든 내가 더 피곤해질걸.”감정이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정말 생각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주인혁한테 말해볼게.”“아니. 필요 없어. 지금 상태가 제일 좋거든. 쓸데없는 감정에 얽히고 싶지 않아.”송민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고은서도 더는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겠다고 말했다.그날 오후.고은서가 처리할 일들을 다 처리하고 곽승연의 요구대로 비둘기한테 먹이 주러 공원으로 향했다.공원은 널찍한 데다가 환경도 깨끗하고 좋았다.광장에 도착한 후 고은서는 비둘기 먹이를 사서 곽승연한테 쥐여주고는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예전부터 비둘기를 좋아했던 곽승연은 인내심 있게 천천히 그들에게 먹이를 뿌려주었다.이곳의 비둘기 또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곽승연의 손에 날아오르기까지 했는데 그녀는 거부하는 대신 환한 미소를 드러냈다.고은서는 이 장면을 촬영해 서연정한테 보내주었다.서연정은 연신 고은서한테 고맙다고 인사했다.두 사람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고은서는 아주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이는 고은서가 여시은을 위해 제작한 우드향 퍼퓸 향이 분명했다.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시은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여시은은 명품 브랜드 원피스를 입고 고양이 가방을 멘 채 쿠아를 안고 있었다.그녀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쿠아가 전보다 훨씬 약해진 데다가 털도 윤기를 잃은 것 같았다. 심지어 눈빛도 전과 달리 흐리멍덩해 보였다.“하인한테 투약 당한 후로부터 기죽어 있는데 제대로 먹지도 않아서 걱정이에요.”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여시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다 여시은이 혼자 꾸민 일이잖아. 그러니까 하인이 쿠아한테 투약한 것도 여시은의 지시를 받은 거겠네.’고은서는 몰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여시은 씨, 쿠아는 여리고 작은 동물일 뿐이
“그만해!”쿠아의 비명과 함께 고은서는 여시은 손에 있는 캣스틱을 빼앗아 땅에 내팽개쳤다.“당신 정말 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이건 명백한 학대라고요.”쿠아의 입가에는 빨간 핏자국이 생겼고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발버둥을 치면서 여시은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그러나 여시은은 쿠아를 꼭 잡고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저는 그냥 간식을 주다가 부주의로 살짝 찍은 것뿐이데요.”고은서는 발버둥 치는 쿠아를 보면서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동물병원 의사가 전에 쿠아의 상태를 검사하면서 학대받은 것 같다고 했었는데 정말 당신이었어.”여시은은 고은서의 화난 모습에 더 환하게 웃어 보이며 쿠아의 털을 쓰다듬었다.“은서 씨, 전에도 말했잖아요. 저를 기분 나쁘게 만든 사람은 꼭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요.”마침 쿠아가 전에 심하게 다쳤던 날에 유일 투자 은행이 개업했다.여시은은 후에 돌아가자마자 쿠아가 심하게 다친 채 땅에 누워 있었다면서 사진까지 보여줬었는데 사진 속의 쿠아는 초점을 잃은 동공에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이발도 다 빠져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고은서는 그 사진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그때 그 사진을 보여준 것도 나 기분 나빠 하라고 보여준 거였어. 그런데 개업식 날에 난 여시은이랑 여재훈을 건드린 적이 없는데. 곽승재랑도 간단히 인사만 나누었을 뿐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데 왜 기분 나쁘다고 뒤돌아 쿠아를 괴롭히는 거지?’“여시은 씨, 저한테 화가 난 거라면 직접 저를 찾아와 말했어야죠. 왜 쿠아한테 화풀이하는 거예요?”고은서는 여시은의 행위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쿠아는 당신 애완묘잖아요. 어떻게 이리 약하고 가여운 생명한테 손을 댈 수가 있어요?”여시은은 무지 기쁘다는 듯 소리 내 웃으면서 답했다.“누가 쿠아 보고 은서 씨를 좋아하래요? 지금 은서 씨의 반응을 보니 저도 틀린 판단을 한 건 아니네요.”“변태!”더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
구경꾼들은 그다지 좋지 않은 시선으로 고은서를 쏘아보기 시작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옆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이쁘게 생겨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다른 사람 고양이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벤치까지 발로 차고 이 정도면 공공시설 훼손 아니야?”“그러니까 말이야. 요즘 여자애들이 너무 오냐오냐하게 자라서 하나둘씩 공주병이라니까.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저러는 거지.”“언니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리고 공주병도 아니에요!”곽승연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언니는 다른 고양이를 뺏는 나쁜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발로 차는 사람도 아니에요!”“뒤로 넘어진 걸 우리가 다 봤는데 뭐가 아니라는 거야.”구경꾼 중의 누군가가 피식 웃으면서 비아냥거렸다.곽승연은 급한 마음에 눈시울이 빨개졌다.“거짓말 아니에요. 언닌 좋은 사람이에요.”고은서는 애써 두려움을 참고 자신을 위해 나서주는 곽승연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여시은 때문에 치밀어 올랐던 화도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듯했다.“승연아, 언니는 괜찮으니까 저 사람들이랑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언니는 처리할 일이 있으니까 기사한테 너를 민아 언니한테 데려다주라고 말해 둘게.”곽승연은 고은서가 조금 전에 신고한 걸 알고 있었다.그리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고은서를 차마 혼자 두고 갈 수 없었기에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언니, 나도 같이 갈래요.”“언니 정말 괜찮아.”고은서는 말하면서 주차장에서 대기 중인 기사에게 연락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가 도착했다.동시에 경찰들도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왔다.곽승연은 용기 내 여시은을 가리키면서 경찰들을 향해 말했다.“경찰 아저씨, 저 여자 나쁜 사람이에요. 우리 언닌 그저 저 여자가 고양이를 학대하는 걸 막으려다가 실수로 밀친 것뿐이에요. 얼른 저 여자를 잡아요.”여시은 순간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