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당한 내가 재벌의 아내가 되었다

배신당한 내가 재벌의 아내가 되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By:  안나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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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오직 남편의 성공만을 위해 자신의 청춘과 젊음, 아름다움을 모두 바친 조강지처. 하지만 돌아온 것은 남편의 철저한 기만과 바람, 그리고 전 재산 탈취를 통한 비참한 이혼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세상의 조롱 속에서 여덟 살 딸을 데리고 낯선 타국 필리핀으로 도망치듯 떠난 여주인공. 지독한 상처 속에서 그녀는 마침내 ‘남을 위한 삶’을 버리고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완벽한 자기 관리로 눈부신 미녀로 거듭난 그녀와, 베일에 싸인 필리핀 거대 자산가와의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그녀를 버린 전남편의 목을 죄어오는 거대한 복수극의 서막! 가장 비참한 바닥에서 가장 화려한 꼭대기로 올라서는 한 여자의 찬란한 인생 2막과 짜릿한 로맨스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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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내 완벽한 10년의 결혼 생활

“사모님, 이번 시즌 한정판으로 들어온 에르메스 버킨백입니다. 회장님께서 미리 결제해 두시며 사모님 결혼 10주년 선물로 꼭 타이밍 맞춰 배송해 달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오렌지빛 박스를 보며 윤혜진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올해로 서른여섯, 남편 강태성과의 결혼 생활은 정확히 10년 차를 맞이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청년 창업가 태성과 결혼해, 그의 사업 뒷바라지만을 위해 청춘을 바쳤다. 남편의 회사가 연 매출 수백억의 중견 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혜진은 철저히 그림자가 되었다. 자신의 커리어도, 젊음도, 심지어 거울 속 자신을 가꾸는 시간마저 아끼며 오직 태성의 내조와 여덟 살 된 딸 민지의 육아에만 전념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혜진을 부러워했다. 고생 끝에 낙이 왔다며, 이제는 자상한 재벌 남편 둔 덕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명품 가방이나 받으며 살지 않느냐고. 혜진 역시 그것이 자신의 헌신에 대한 남편의 변치 않는 사랑의 증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날 저녁, 태성은 중요한 해외 바이어와의 미팅이 있다며 늦을 것이라 문자 한 통을 보내왔다. 혜진은 평소처럼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며 보양식을 준비해 두고, 민지를 먼저 재운 뒤 침실로 향했다. 시계 바늘이 새벽 2시를 가리킬 무렵, 거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혜진은 얇은 가운을 걸치고 서둘러 거실로 나갔다. 남편은 술 냄새를 풍기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당신 왔어요? 많이 피곤하죠. 꿀물이라도 타 올게요.”

“아니, 됐어. 피곤하니까 그냥 자.”

​태성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서늘하고 낯설었다. 혜진의 다정한 손길을 거칠게 쳐내듯 피한 태성은 그대로 안방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혜진은 바닥에 떨어진 태성의 정장 자켓을 주워 올렸다. 그 순간, 코끝을 찌르는 지독하도록 달콤하고 인위적인 향수 냄새가 훅 끼쳐왔다. 자신이 쓰는 은은한 라벤더 향이 아니었다. 젊고 화려한 여자가 쓸 법한, 도발적인 장미 향.

​자켓 깃을 살피던 혜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짙은 파운데이션 자국과 함께, 선명한 붉은색 립스틱 자국이 와이셔츠 깃 깊숙한 곳에 찍혀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바이어 접대를 하다 보면 묻을 수도 있는 거야. 태성 씨가 그럴 리 없어.’

​혜진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온 10년인데. 아무것도 없던 시절, 라면 한 그릇을 나눠 먹으면서도 평생 너만 행복하게 해 주겠다며 눈물짓던 그 강태성이었다. 하지만 심장이 불길하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태성이 욕실에 두고 간 개인 스마트폰이 테이블 위에서 짧은 진동을 울렸다. 평소 남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절대 열어보지 않던 혜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자석에 이끌리듯 손이 움직였다. 화면에 떠오른 발신인은 ‘김 비서’. 시각은 새벽 2시 반이었다.

​메시지의 내용은 혜진의 모든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기에 충분했다.

​[태성 오빠, 집에 잘 들어갔어? 그 고리타분한 아줌마 얼굴 보면서 내 생각하는 거 아니지? 아까 차 안에서 오빠가 해준 말, 잊지 마. 곧 그 여자 정리하고 나한테 온다는 거.]

​혜진의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스마트폰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내리는 것 같았다. 10년 동안 쌓아 올린 그녀의 완벽한 세계가, 아주 작은 액정 화면 속 세 줄짜리 글자 위로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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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완벽한 10년의 결혼 생활
“사모님, 이번 시즌 한정판으로 들어온 에르메스 버킨백입니다. 회장님께서 미리 결제해 두시며 사모님 결혼 10주년 선물로 꼭 타이밍 맞춰 배송해 달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오렌지빛 박스를 보며 윤혜진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올해로 서른여섯, 남편 강태성과의 결혼 생활은 정확히 10년 차를 맞이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청년 창업가 태성과 결혼해, 그의 사업 뒷바라지만을 위해 청춘을 바쳤다. 남편의 회사가 연 매출 수백억의 중견 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혜진은 철저히 그림자가 되었다. 자신의 커리어도, 젊음도, 심지어 거울 속 자신을 가꾸는 시간마저 아끼며 오직 태성의 내조와 여덟 살 된 딸 민지의 육아에만 전념했다.​주변 사람들은 모두 혜진을 부러워했다. 고생 끝에 낙이 왔다며, 이제는 자상한 재벌 남편 둔 덕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명품 가방이나 받으며 살지 않느냐고. 혜진 역시 그것이 자신의 헌신에 대한 남편의 변치 않는 사랑의 증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날 저녁, 태성은 중요한 해외 바이어와의 미팅이 있다며 늦을 것이라 문자 한 통을 보내왔다. 혜진은 평소처럼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며 보양식을 준비해 두고, 민지를 먼저 재운 뒤 침실로 향했다. 시계 바늘이 새벽 2시를 가리킬 무렵, 거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혜진은 얇은 가운을 걸치고 서둘러 거실로 나갔다. 남편은 술 냄새를 풍기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당신 왔어요? 많이 피곤하죠. 꿀물이라도 타 올게요.”“아니, 됐어. 피곤하니까 그냥 자.”​태성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서늘하고 낯설었다. 혜진의 다정한 손길을 거칠게 쳐내듯 피한 태성은 그대로 안방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혜진은 바닥에 떨어진 태성의 정장 자켓을 주워 올렸다. 그 순간, 코끝을 찌르는 지독하도록 달콤하고 인위적인 향수 냄새가 훅 끼쳐왔다. 자신이 쓰는 은은한 라벤더 향이 아니었다. 젊고 화려한 여자가 쓸 법한, 도발적인 장미 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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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아름다운 불청객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혜진은 아침이 오자마자 남편을 붙잡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태성은 아침 일찍 급한 회의가 있다며 혜진의 핼쑥해진 얼굴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서둘러 집을 나섰다. 혜진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민지를 학교에 보냈다. 손이 덜덜 떨려 커피잔조차 제대로 들 수 없었다.​‘김 비서… 새로 들어왔다던 그 20대 비서인가?’​확인이 필요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혜진은 평소 입지 않던, 몇 년 전 유행이 지난 정장을 대충 걸쳐 입고 남편의 회사인 ‘태성 커뮤니케이션’으로 향했다. 대표 이사 사모의 방문에 직원들이 웅성거렸지만, 혜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대표실이 있는 12층에 도착해 문을 열려는 순간, 안에서 들려오는 간드러진 웃음소리에 혜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아하항, 오빠도 참! 회사에서는 대표님이라고 부르라니까요?”“누가 본다고 그래. 세은아, 너 어제 향수 너무 많이 뿌렸더라. 와이셔츠에 묻어서 지우느라 애먹었잖아.”“왜요? 그 아줌마가 눈치라도 챘어요? 눈치 채면 어때, 어차피 곧 헤어질 건데.”​문틈 사이로 보인 광경은 잔인했다. 남편 강태성의 무릎 위에 한참은 젊고 날씬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모델처럼 화려한 이목구비에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 김세은이었다. 태성은 혜진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황홀하고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그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혜진은 이성을 잃고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갔다.​쾅!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태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윤혜진? 네가 왜 여기 있어?”​“강태성… 당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회사에서 이런 짓을 해!”혜진의 목소리가 찢어지듯 갈라졌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하지만 태성은 당황한 기색도 잠시, 이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무릎 위에 앉아 있던 세은을 천천히 내려놓은 태성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차갑게 말했다.“ 세은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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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건 10년 전에 끝났어."
비참하게 회사에서 쫓겨나듯 돌아온 혜진은 며칠 동안 일어 날 수가 없었다. 남편 태성은 아예 집에 들어 오지 않고 있었다. 혜진은 가라 앉는 몸둥아리를 겨우 일으켜 오직 학교에서 돌아오는 딸 민지 앞에서만 겨우 눈물을 참아낼 뿐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남편 강태성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서류 한 장이 들려 있었다.​‘이혼 협의서’​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툭 던지는 태성의 태도는 지극히 비즈니스적이고 냉정했다.“도장 찍어. 서로 피곤하게 진흙탕 싸움 하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자.”​혜진은 헛웃음이 나왔다.“이혼? 당신이 바람을 피워놓고 나한테 이혼을 요구해? 내가 미쳤어? 절대 이혼 안 해. 상간녀 소송 걸고 당신 사회적으로 매장할 거야.”​그러자 태성이 비열하게 웃으며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매장? 해봐, 할 수 있으면. 네가 상간녀 소송을 걸든 말든 내 회사는 타격 없어. 그리고 너, 돈 한 푼 없이 소송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 건데? 변호사 선임할 돈은 있고?”​“무슨 소리야? 우리 재산 반으로 나누면 돼. 이 집도, 당신 회사 지분도 절반은 내 거야!”혜진이 소리쳤다.​태성은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또 다른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것은 회사의 재무 제표와 남편 명의의 자산 현황표였다. 서류를 읽어내려가던 혜진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남편 명의로 된 재산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강남의 이 아파트마저도 이미 몇 달 전, 다른 유령 회사의 담보로 잡혀 대출이 가득 차 있었고, 태성의 개인 예금은 단 한 푼도 없었다. 회사의 지분 또한 교묘하게 해외 페이퍼 컴퍼니와 친인척들의 명의로 분산되어 있었다.​“너 모르게 내가 지난 1년간 재산 다 정리해 뒀어. 법적으로 내 명의로 된 재산은 빚밖에 없다는 뜻이야. 네가 소송을 걸어봤자 배당받을 재산 분할액은 제로(0)야. 오히려 이 집에서 쫓겨나고 빚만 떠안게 될 수도 있어.”​“강태성…! 당신 인간이야?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나를 속여? 내가 민지 엄마야!”혜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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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자존심을 팔다
결국 법정으로 간 이혼 조정은 혜진에게 철저히 불리하게 흘러갔다. 태성이 고용한 대형 로펌의 변호사들은 혜진을 ‘남편의 경제적 능력에 기생하며 가정을 소홀히 한 무능한 주부’로 몰아갔다. 재산은 이미 교묘하게 빼돌려진 상태라, 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남편의 자산이 없었다. 혜진에게 남은 것은 당장 몇 달 뒤 비워줘야 하는 담보 잡힌 아파트와, 고작 몇백만 원의 위자료, 그리고 월 50만 원이라는 터무니없는 양육비가 전부였다.​이혼 절차가 끝난 날, 아파트 단지로 돌아오는 길에 혜진은 친하게 지내던 동네 주부들과 마주쳤다. 평소에는 사모님, 사모님 하며 커피를 사달라고 매달리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어머, 저기 온다. 들었어? 남편 빌딩에서 젊은 비서랑 바람나서 쫓겨나는 거래.”“쯧쯧, 그러니까 평소에 살 좀 빼고 자기 관리 좀 하지. 남편 잘 나간다고 집에서 놀고먹기만 하더니 결국 저 꼴 났네. 애는 불쌍해서 어째?”​그들의 수군거림이 비수처럼 혜진의 귀에 꽂혔다. 버림받은 여자, 무능한 여자, 남편 관리 못 한 여자. 세상은 피해자인 혜진에게 오히려 가해자의 프레임을 씌우고 손가락질했다. 혜진은 도망치듯 민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당장 다음 달부터 살길이 막막했다. 여덟 살 민지를 데리고 월세방이라도 구하려면 당장 목돈이 필요했다. 혜진은 침실 장롱 깊숙한 곳을 열었다. 결혼할 때 시어머니가 생색내며 준 보석들과, 남편이 간간이 미안할 때마다 사다 준 명품 가방들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에 받은 결혼 10주년 한정판 버킨백도 그대로 있었다.​‘이것들이라도 팔아야 해. 민지를 길바닥에 나앉게 할 수는 없어.’​혜진은 명품 가방과 패물들을 커다란 가방에 가득 담아 압구정의 명품 매입 매장으로 향했다. 화려한 매장 조명 아래, 혜진이 내놓은 물건들을 감정사가 차가운 눈으로 살펴보았다.​“사모님, 이 버킨백은 상태는 좋은데… 최근에 가품(짝퉁)이 너무 정교하게 풀려서 영수증이나 보증서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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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도행 티켓, 목적지는 필리핀
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버림받은 여자’라는 낙인과 주변인들의 지독한 관심이 혜진을 괴롭혔다. 친정 부모님마저도 “네가 얼마나 남편을 들볶았으면 남자가 밖으로 도냐”며 오히려 혜진을 탓했다. 전남편 태성은 이혼 서류에 도장이 마르기도 전에 김세은과 화려한 재혼식을 올린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SNS에는 두 사람이 고급 리조트에서 찍은 행복한 사진들이 넘쳐났다.​더 이상 이곳에 숨 쉴 공간은 없었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던 혜진은 새근새근 자고 있는 딸 민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엄마의 눈치를 보느라 밝던 아이가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있었다.​‘여기 있으면 나도, 민지도 피말라 죽을 거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자.’​혜진은 손에 쥔 마지막 돈을 정리했다. 그리고 우연히 인터넷 유학 커뮤니티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물가가 저렴하고, 영어 교육이 가능하며, 한국 사람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곳. 필리핀이었다. 혜진은 망설임 없이 마닐라행 편도 항공권 두 장을 예매했다.​떠나기 전날 밤, 혜진은 거울 앞에 섰다. 스트레스로 거칠어진 피부, 눈가에 가득한 기미, 그리고 눈물로 부어오른 눈. 10년 동안 남을 위해서만 살다가 정작 자신은 잃어버린 한 여자가 서 있었다.​“강태성, 김세은. 당신들이 날 버린 걸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혜진은 거울을 보며 독하게 중얼거렸다. 슬픔은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지독한 생존 본능으로 바뀌었다.​다음 날 아침, 혜진은 캐리어 두 개에 민지와 자신의 최소한의 짐만 싣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서울의 빌딩 숲을 바라보며 혜진은 마음속으로 완전히 과거의 자신을 지워버렸다.​비행기가 이륙하고 몇 시간 뒤, 마닐라 공항의 게이트가 열렸다. 훅 끼쳐오는 후텁지근한 열기와 이국적인 풍경, 그리고 낯선 언어들. 여덟 살 민지는 무서운 듯 혜진의 손을 꼭 쥐었다.​“엄마, 여기 이제 우리 집이야?”혜진은 민지를 품에 꼭 안아주며 단호하게 말했다.“응, 민지야. 여기서 엄마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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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거리에서 길을 잃다
마닐라 공항의 무더운 공기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혜진은 한 손에는 대형 캐리어를, 다른 한 손으로는 민지의 작은 손을 꼭 쥔 채 공항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한국에서 인터넷을 뒤져 급하게 구해둔 마닐라 외곽의 단기 임대 아파트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야 했다. 주변을 가득 채운 호객꾼들이 낯선 언어로 소리를 지르며 혜진을 에워쌌다.​“택시? 마담, 택시 필요해요?”시끄러운 소음과 사방에서 쏘아져 오는 시선에 민지가 무서운 듯 혜진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뒤로 숨었다. 혜진은 애써 대담한 척 가방을 꽉 움켜쥐며 한 호객꾼의 안내에 따라 낡은 승용차에 올라탔다. 목적지가 적힌 종이를 보여주자 운전기사는 알겠다는 듯 씨익 웃으며 가속페달을 밟았다.​하지만 차가 도심을 벗어나 어둡고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서기 시작할 때쯤, 혜진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인터넷에서 보았던 안전한 주거 단지가 아니었다. 낡은 슬럼가와 깨진 가로등, 그리고 알 수 없는 낙서가 가득한 거리가 이어졌다.​“기사님, 여기 제 목적지 맞아요? 길이 이상한 것 같은데요.”혜진의 다급한 영어 질문에 기사는 백미러로 혜진을 힐끔 보더니 냉랭하게 대꾸했다.“트래픽 때문이야. 지름길로 가는 거니까 가만히 있어.”​그리고 잠시 후, 차는 으슥한 공터 앞에 완전히 멈춰 섰다. 기사는 차문을 잠그더니 혜진을 돌아보며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했다. 한국 돈으로 치면 고작 몇만 원의 거리였지만, 그가 요구한 것은 혜진이 가진 페소화의 상당 부분이었다. 미터기는 켜져 있지도 않았다.​“사기 치지 마세요! 당장 문 열어요! 경찰 부를 거예요!”혜진이 소리치며 차 손잡이를 흔들었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민지는 결국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기사는 덩치 큰 몸으로 위협하듯 운전석에서 일어나 혜진의 가방을 강제로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돈 내놔, 마담! 안 그러면 여기서 못 내려!”남편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겨우 명품 가방 몇 개를 팔아 마련한, 자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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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순간, 손을 내민 의문의 남자
운전석 창문을 부술 듯이 내려치며 서 있는 사람은 검은색 셔츠를 입은 동양인 남자였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 그리고 한눈에 봐도 좌중을 압도하는 서늘한 아우라를 풍기는 남자였다.​그의 등장에 당황한 택시 기사가 창문을 살짝 내리며 현지어로 따지려 들었지만, 남자는 가차 없이 차문 틈새로 손을 집어넣어 내부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그리고는 기사의 덜미를 잡고 차 밖으로 거칠게 끌어내렸다.​“악! 쾅!”순식간에 공터 바닥으로 처박힌 기사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핏기가 싹 가신 표정으로 변했다. 남자가 현지어로 몇 마디 낮게 읊조리자, 방금 전까지 혜진을 위협하던 악랄한 기사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빌기 시작했다. 마치 절대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 앞에 선 무력한 인간의 모습이었다.​남자는 한심하다는 듯 기사를 발로 차 버렸고, 기사는 차를 버려둔 채 허겁지겁 도망쳐 버렸다.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온 공터. 혜진은 여전히 떨리는 몸으로 민지를 안은 채 차 뒷좌석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남자가 천천히 뒷좌석 문을 열고 허리를 숙여 안을 들여다보았다. 짙은 눈썹 아래로 빛나는 날카롭고 깊은 눈동자가 혜진의 엉망이 된 몰골을 가만히 응시했다.​“괜찮습니까?”낮고 굵직한 한국어였다. 타국 땅에서 들은 모국의 언어에 혜진은 긴장이 풀리며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하지만 이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가방을 더 세게 가슴에 묻었다. 사기꾼 남편 덕분에 세상의 그 어떤 호의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누구… 신데 절 도와주시는 거죠?”혜진의 경계 섞인 질문에 남자는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살짝 움직여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밤바다처럼 차가웠다.​“그저 길을 지나던 행인입니다. 이 밤중에 아이를 데리고 이런 우범지역에 올 만한 배짱 좋은 한국 여자가 보이길래 신경이 쓰여서 말이죠.”남자는 차 안에서 떨고 있는 민지를 부드러운 눈길로 한 번 바라본 뒤, 혜진의 캐리어를 차 트렁크에서 꺼내 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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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에 비친 초라한 나
의문의 남자가 태워다 준 덕분에 혜진과 민지는 무사히 예약해 둔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는 치안이 좋은 편에 속하는 한인 타운 인근의 작은 콘도미니엄이었지만, 한국에서 살던 대형 아파트에 비하면 턱없이 좁고 허름했다. 남자는 혜진의 짐을 로비에 내려다 주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혜진을 뒤로한 채 미련 없이 차를 돌려 떠나버렸다.​방으로 들어와 민지를 씻기고 간신히 침대에 눕혔다. 낯선 환경 탓에 긴장했던 아이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조용해진 방 안, 혜진은 욕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불을 켜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까 택시 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느라 찢어진 정장 상의,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긁힌 뺨 위에 맺힌 핏자국. 하지만 그보다 더 혜진을 비참하게 만든 것은 그동안 남편 사업 뒷바라지와 육아라는 핑계로 철저히 방치해 온 자기 자신의 ‘몸’이었다.​스트레스로 인해 부어오른 살집,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아 푸석푸석하고 기미가 가득한 피부, 목 늘어난 티셔츠 위로 겹쳐진 뱃살.전남편 강태성이 이혼 서류를 던지며 했던 잔인한 폭언들이 환청처럼 귀를 때렸다.​‘살은 뒤동뒤동 쪄가지고 아줌마 냄새 풀풀 풍기는 여자… 너 지금 네 꼴이 어떤지 알아?’그리고 남편의 무릎 위에 앉아 자신을 벌레 보듯 비웃던 김세은의 젊고 탄력 있는 몸매가 떠올랐다.​“내가… 왜 이렇게 됐지?”혜진은 거울을 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남편을 위해 아침마다 보양식을 차리고, 남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정작 자신은 몇 년 전 옷을 입으면서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이 비참한 도망자 신세였다. 남을 위해 살았던 10년의 끝은 철저한 자기상실이었다.​혜진은 세면대에 찬물을 가득 받아 얼굴을 파묻었다. 차가운 물이 피부에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물을 닦아낸 혜진의 눈빛이 무섭게 돌변했다.​“강태성, 김세은. 너희들이 원한 게 이거지? 내가 낯선 땅에서 무능하고 초라한 아줌마로 평생 비참하게 썩어가는 거.”혜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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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무너진 멘탈을 붙잡는 이유
​허름한 셋방의 에어컨은 밤새도록 기괴한 기계음을 내며 덜덜거렸고, 창문 틈새로는 매연 섞인 마닐라의 밤공기가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혜진은 단 한 숨도 자지 못한 채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했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것은 얼룩진 시멘트 벽지와 삐걱거리는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는 자신과 딸 민지의 모습이었다.​현실은 냉혹했다. 낯선 타국 땅, 통장에는 한국에서 명품을 급하게 처분해 쥔 고작 수천만 원 남짓의 정착 자금이 전부였고, 아는 사람이라곤 첫날밤 기적처럼 나타나 자신을 구해준 정체 모를 남자 에이든뿐이었다.​‘내가 정말 잘한 선택일까?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이라도 해야 했던 건 아닐까?’​순간적으로 지독한 나약함이 혜진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왔다. 전남편 강태성이 파놓은 교묘한 법적 함정에 빠져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보다, 대한민국 전체가 자신을 ‘능력 없어 버림받은 아줌마’로 몰아가며 손가락질할 때보다, 지금 이 순간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방 한구석에 고립되었다는 공포가 그녀의 멘탈을 사정없이 흔들어놓았다. 거대하고 단단해 보였던 혜진의 정신력이 모래성처럼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숨이 가빠왔다. 공황 발작과도 같은 지독한 무력감이 그녀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그때, 침대 머리맡에서 작은 뒤척임이 들렸다.​“음…… 엄마…….”잠결에 엄마를 찾는 민지의 목소리였다. 민지는 작은 손을 더듬거리며 혜진의 옷자락을 꼭 쥐고는, 이내 안심했다는 듯 혜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이의 이마에 맺힌 송골송골한 땀방울과 여전히 유치원 가방을 맬 때처럼 작고 부드러운 체온이 혜진의 가슴에 닿았다.​그 순간, 사정없이 흔들리던 혜진의 눈동자가 초점을 찾았다. 뇌리를 강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단 하나의 자각이 있었다.​‘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내 딸 민지는 어떻게 되지?’​그것이었다. 지독한 고독과 절망 속에서도 혜진이 무너진 멘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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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타국에서 맞이한 지독한 향수병
​인간의 정신력은 밤낮으로 채찍질한다고 해서 마냥 버텨주는 기계가 아니었다. 민지를 보며 독하게 정신을 붙잡았다고 생각했지만, 필리핀 생활이 삼 주째 접어들 무렵 혜진에게 소리 없이 찾아온 것은 지독한 ‘향수병’이었다.​낯선 정착 과정은 매 순간이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행정 처리는 매번 서툴렀고, 현지인들의 빠른 발음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마트에 가도 익숙한 한국 식재료 대신 정체 모를 현지 소스와 열대 과일 향이 가득했다. 물조차 마음대로 마시지 못해 늘 생수를 사다 날라야 하는 사소한 불편함들이 모여 혜진의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그날 저녁은 유독 스콜이 길게 이어졌다. 콘도 창문을 거칠게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혜진은 민지에게 줄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현지 야채와 고기를 볶아 상을 차렸지만, 민지는 한두 숟가락 깨작거리더니 이내 숟가락을 놓았다.​“엄마, 나 한국에서 먹던 할머니 김치찌개 먹고 싶어. 학교 친구들도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나 그냥 한국 집으로 돌아가면 안 돼?”​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던 여덟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가 혜진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민지를 달래서 겨우 재우고 난 뒤, 혜진은 식탁에 홀로 앉아 민지가 남긴 음식을 바라보았다.​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덥고 습한 마닐라의 공기 속에서, 혜진은 익숙했던 한국의 모든 것이 미치도록 그리워졌다. 매일 가던 동네 마트, 편하게 대화하던 한국어, 추운 겨울날의 서늘하고 맑은 공기, 심지어 자신을 비난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마저도 이 지독한 낯섦에 비하면 차라리 익숙해서 안전한 것처럼 느껴졌다.​내가 왜 이 멀리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어야 할까. 익숙하고 편안했던 나의 고향, 나의 나라. 그곳에서 밀려나 타국에서 미아처럼 떠돌고 있다는 정체성 상실감이 그녀를 덮쳤다. 향수병은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었다. 과거의 안락함으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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