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고은서는 백유미가 그동안 자신을 상대로 저질렀던 만행들이 모두 누군가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백유미가 고은서는 이미 누군가의 표적이 됐다고 그토록 확신에 차서 말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백유미는 겉으로는 내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지만 사실 또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어. 너와 너희 가문을 상대하라고 말이야.”곽승재가 말을 덧붙였다.고은서는 계속해서 곽승재에게 물었다.“이 모든 것도 다 백유미가 너한테 알려준 거야? 그래서 내가 진짜 위험해질까 봐 사람을 보내서 날 지켜보게 한 거고?”“말하자면 그렇지.”곽승재의 수심으로 가득 찬 눈동자에는 죄책감마저 엿보였다.“원래는 내가 먼저 그 사람을 찾아내서 네가 더는 위험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철저하게 숨은 탓에 현재로서는 그 사람에 대한 유리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아.”고은서는 언제 이 모든 것들을 알게 되었냐고 곽승재에게 물었다.곽승재는 백유미가 L국에서 납치를 계획할 때부터 백유미의 뒤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고 말했다.이후에 백유미는 C선생이라는 사람이 계속 자신에게 모든 것을 지시해왔다고 순순히 인정했다.C선생이라는 말에 고은서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고은서는 한참을 생각해낸 끝에 그때 백유미가 원지훈 무리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을 때 백유미에게 전화가 온 사람이 C선생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고은서는 그때 전화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C선생이라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도 했다.하지만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설마 그때 전화가 온 것도 백유미한테 일의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나 물어보려고 그런 건가? 근데 백유미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서 백유미를 버리려고 한 거고?”고은서는 이 일을 곽승재에게 말해주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C선생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곽
“은서야, 왜 그래? 어디 문제라도 있어?”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리고 사색에 잠긴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는 자신이 전에 받았던 전화에 관해 얘기했다.그러자 곽승재도 따라 눈살을 찌푸렸다.“내 추측이 맞았어. 아마 백유미가 일을 망친 데다가 혹시나 무언갈 폭로하기라도 할까 봐 희생양으로 삼고 모든 죄명을 덮어씌운 걸 거야.”녹음된 증거도 있고 해서 고은서는 이미 그 일에 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다.그런데 백유미 배후에 있는 사람이 제보자일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 했다.“백유미는 배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에 관해 아무 말도 없었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는 눈살을 또다시 찌푸렸다.“백유미도 배후가 대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 전에 암암리에 조사해 보았다고는 했는데 딱히 쓸만한 걸 찾아내지는 못했대. 그런데 의심되는 상대가 한 명 있다고 했어.”“누구?”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익숙한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송민준.”고은서는 약간 의외이긴 했지만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앞섰다.백유미가 송민준을 의심했었다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된 건 송민준 자체가 원래부터 꽤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송민준은 왜 백유미 더러 고씨 가문을 해치라고 한 거지?’“송민준을 의심하는 이유는?”곽승재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당시 고은서가 사고로 유산하게 된 일을 꺼냈다.송민아의 도우미가 백유미 어머니랑 아는 사이인 건 맞았다. 심지어 진숙희가 먼저 그녀 어머니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면서 연락한 것이었다.진숙희 신분을 알게 된 백유미 또한 그 절호의 기회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또 마침 고은서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진숙희에게 그 아이가 민시후의 아이라면서 어떻게 해서든 그 소식을 송민아한테 전하라고 시켰던 것이다.송민아가 고은서를 찾아가 아이를 없애라고 했던 것도 다 백유미가 계획한 것이었다.“진숙희가 은혜를 갚기 위해 백유미를 도운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그런데 백유미 또한 사람을 그렇게 쉽게
“그런데 아무런 의심스러운 곳도 찾지 못했다는 건 송민준이 C선생이 아니란 뜻이잖아.”곽승재는 고은서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자세히 분석하기 시작했다.“딱 두 가지 가능성이야. 하나는 송민준이 확실히 무고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우리한테 꼬투리 하나 잡히지 않을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라는 것.”고은서는 송민준이 무고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치밀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그런데 송민준은 왜 나랑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려 하는 거지? 애초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과 집안이잖아.’“백유미는 그 뺑소니 범인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대?”곽승재 또한 전에 백유미한테 물어봤었는데 고은서와 고준석이 해찬시에 갔을 때 두 사람을 처리할 만한 절호의 기회라고만 소식을 전했을 뿐 모든 건 C선생 혼자 계획한 일이라고 답했다고 말했다.그 말인즉슨 백유미는 두 사람이 사고가 날 거라는 걸 알고만 있었을 뿐 자세한 계획에 관해서는 모르고 있었단 뜻이다.‘곽승재가 두 범인 사진을 보여줬을 때 아무런 당황한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던 게 다 이유가 있었네. 난 그저 곽승재가 백유미의 편을 들어주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고은서는 문뜩 무언가가 떠올랐다.‘전생에 백유미가 만났던 절도 방화범도 그 두 남자였는데 그러니까 전생의 배후도 C선생이었던 거야. 할아버지가 다친 것도 우리 집이 망한 것도, 또 내가 정신병원에서 겪은 모든 일이 다 그 C선생이 꾸민 짓인 거야.’고은서는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곽승재는 몸을 떨고 있는 고은서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은서야, 괜찮아? 병원 갈까?”고은서는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한기에 휩싸인 듯 마치 당장이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벼랑 끝으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고은서는 이번 생에 곽승재와 이혼만 하고 백유미를 망가뜨리기만 하면 나머지 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현실은 매우 잔인했다.백유미는 그
고은서가 이런 상태로 곽승재와 대화하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아무런 공격성도 느껴지지 않았고 일부러 냉담한 척하지도 않았으며 더는 정신을 곤두세우고 그를 경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곽승재는 약간 씁쓸하긴 했지만 전에 비해 두 사람의 사이가 호전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고은서는 그의 품에서 나오면서 말했다.“알겠어. 그럼 C선생을 찾아내고 나랑 고씨 가문이 더는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어. 당연히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런 부탁을 하는 건 무례겠지.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당신을 사랑하는 것 빼곤 다 해줄 수 있으니까.”그녀의 혼자 힘으론 도무지 C선생을 상대할 수가 없었으므로 유력한 조력자가 필요했다.송민준은 처음부터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주인혁은 연예인으로서 자칫하면 앞날을 망칠 수 있었고 유성준은 MQ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찬 상태였다.지금으로써는 곽승재가 조력자로서 제일 알맞는 인물이었다.게다가 곽승재가 요즘 들어 계속 몰래 그녀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미리 정보를 공유하고 이른 시일 내로 손을 잡는 게 모두에게 이득이었다.“당신이 모자란 게 별로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그런데 필요하다면 최선을 다해볼게.”고은서가 설명을 보태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약간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은서야, 자꾸 날 이기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난 단 한 번도 너한테서 뭘 바란 적이 없어. 일부러 네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돕는 것도 아니야.”고은서는 자기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히 도움을 받는 입장이면서도 불구하고 거만한 태도를 선보이는 게 확실히 마땅치 않았다.그녀는 이내 그에게 사과했다.“그럼 우린 이젠 한배를 탄 거네. 백유미한테서 더 들은 거 없어? 백승엽 일에 관해서는 어떤 태도였어?”고은서는 이어 백유미에 관한 얘기를 이어갔다.곽승재는 백유미가 백승엽의 일에 관해 많은 의심을 품고 있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줬다.백승엽이 백
“그때 그 목소리 엄청 익숙했는데 혹시 백유미 목소리였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도 이내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육현석이 종래로 중요한 일로 연락이 온 적이 없었던데다가 당시 마침 백유미를 심문하고 있었던지라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고 박지연의 전화는 행여나 고은서한테 문제라도 생겼을까 봐 잊지 않고 받은 것이었다.이 가능성을 고려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곽승재한테 직접 들으니 마음이 자꾸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곽승재는 과거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전에는 고은서를 자신을 성가시게 만드는 존재라고만 여기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는 그녀를 관심해 주고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다.“고마워.”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감사 인사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가까운 사이라면 굳이 고맙다고 인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곽승재는 고은서가 자신을 피하지 않고 도움을 받으려 하면서 그와 함께 C선생에 관해 의논한다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라고 생각했다.반면 고은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백유미한테 약을 먹인 사람에 관해서 계속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나랑 고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가는 혐의 대상이 한 명이 있긴 해.”“여시은을 말하는 거야?”곽승재가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그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에 대해 약간 놀라긴 했지만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겉으로 보기에는 순진해 보이지만 속이 아주 깊은 사람이야.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나한테 접근한 거고.”“전에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면서 나더러 여시은과 정략결혼까지 하라고 했잖아.”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전에는 당신 아버지 때문에 그런 거야.”곽승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은서와 쟁론하고 싶지 않았다.“아버지는 정략결혼을 통해 우리 회사를 더 강하게 만들 생각으로 그런 거야. 그런데 난 단 한 번
의아해하는 고은서와 달리 곽승재는 아주 덤덤해 보였다.“지금 중요한 건 배후에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과 네 안전을 보장하는 거잖아. GS그룹에서 나왔다고 해서 나한테 해가 될 일은 없어. 그전보다 한가한 시간도 더 많아지고 해서 차라리 더 좋아.”고은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전에 그녀한테 곽승재가 GS그룹에 있은 지도 꽤 오래되고 또 그를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있는 데 왜 이리 쉽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게 다 그의 계획의 일부분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곽승재와 아무런 다툼도 없는 잔잔한 대화를 이토록 오래 이어간 게 얼마 만이지?’전에는 남은 생에 더는 곽승재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과 고씨 가문이 전생의 비극적인 결말을 또다시 맞이하는 걸 막기 위해 모든 원한을 내려놓고 그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곽승재 또한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고은서와 재결합하고 싶은 건 맞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두 사람은 해결 대책에 관해 간단히 토론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체력이 고갈되었다.배가 아픈 데다가 낮에 회의하고 병 보이러 가고 또 정신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두통까지 생겼다.그녀가 피곤해한다는 걸 발견한 곽승재는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데려다줄게. 먼저 돌아가서 쉬어. 나머지는 나중에 만나서 다시 얘기해.”고은서는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곽승재는 차창을 내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경호원을 향해 와서 운전하라고 손짓했다.도중에 곽승재가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려고 했으나 그녀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날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줬으면 좋겠어. 나를 여성 파트너로만 생각해 줘. 선 넘는 일은 삼가해주고.”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거절을 마다하지 않고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기
이미숙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더 긴장해 했다.“은서 씨, 더는 이렇게 무리하게 일하면 안 돼요. 건강도 챙겨야죠. 그러다 몸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고은서에게 있어서 이미숙은 거의 가족과 다름없었다.그녀의 관심에 고은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후로 고은서는 이틀 동안 이미숙의 요구대로 집에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화장실을 가고 밥 먹는 것 외에는 거의 침대에서 내려올 일이 없었다.사실 이미숙은 밥까지 침대로 가져다줄 생각이었는데 고은서가 거절하는 바람에 그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재택근무라도 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곧 폐인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아줌마, 저 진짜 괜찮아요. 그냥 조금 불편한 것 빼곤 아무렇지 않아요. 게다가 이틀 동안 누워 있어서 이젠 다 나았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얼른 볼일 보러 가세요. 그리고 저녁엔 지연이랑 밥약이 있어서 제 저녁은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고은서가 이미숙을 달랬다.정식으로 병원에서 나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던지라 박지연은 이틀 동안 계속 병원 업무에 시달려 있었다.따라서 고은서 또한 그녀에게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할 기회가 없었다.오늘 마침 두 사람 다 시간이 있어서 같이 밖에서 밥을 먹으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고 미리 약속을 잡아두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끝없는 당부를 들으면서 준비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의사가 음식을 가려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유기농 식재료를 사용하는 홍콩식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웨이터는 고은서를 이 층으로 안내했다.마침 다른 웨이터가 옆 룸에 음식을 올리고 있었는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힐끔 안을 들여보았다.그런데 룸 안에서 익숙한 사람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온승준의 현 와이프 유혜린이었다.남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간단히 위로 묶어 올린 유혜린은 성숙미가 넘쳐흘렀다.유혜린 옆에는 사십 대 좌우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꽤 괜찮게 생긴 듯했다.남
여자의 비명소리에 이어 욕설을 퍼붓는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고은서와 박지연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마주 보았다.“구경하러 가고 싶은데.”고은서가 흥미진진해 하며 답했다.“나도.”두 사람은 이내 일어서서 문 쪽으로 다가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이미 구경꾼들이 적지 않게 몰려들어 있었는데 복도가 북적북적했다.유혜린의 룸에서는 욕설을 주고받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내부 광경이 잘 보이지 않았던 터라 고은서와 박지연은 더 좋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두 사람은 구경꾼들 사이에 서서 몰래 룸 안을 들여다보았다.조수연은 룸 안에 서서 유혜린을 손가락질하면서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험한 욕을 퍼붓고 있었다.유혜린은 뺨을 맞았는지 손으로 얼굴 한쪽을 가린 채 남자 앞에 서 있었다.“유혜린, 의사라는 사람이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해도 되는 거야? 임신했으면 집에 가만히 있을 것이지 감히 나와서 몰래 바람을 피워?”조수연이 호통쳤다.“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친구랑 밥 한 끼 먹었을 뿐인데 바람이라뇨?”유혜린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친구는 무슨. 개 같은 자식들이 내가 모를 줄 알아? 이미 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바람을 피웠잖아.”조수연이 화내며 소리쳤다.“아까 들어왔을 때 저 남자가 다정하게 네 어깨에 손까지 올려놓고 있었는데 내가 찾아왔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여기서 더 한 짓이라도... 아악!”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얼굴이 일그러진 유혜린이 다가와 그녀의 뺨을 내리친 것이다.그녀는 가녀린 몸과 다르게 힘은 무척 셌다.조수연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뒷걸음을 쳤다.도중에 상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땅에 넘어졌을 것이다.한 번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던 조수연은 한참 동안 멍해져 있다가 이내 미친 듯이 달려가 유혜린의 머리채를 잡았다.“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시어머니한테 손을 대? 오늘 내 손에 한 번 죽어 봐!”조수연은 소리를 지르면서 유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