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민시후를 향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이제 만족해?”“뭐, 괜찮네.”민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여기 일 다 끝났으면 나랑 어디 좀 가지.”“어디?”“나가서 얘기해.”민시후는 겉옷을 정리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도 도아름과 작별인사를 하고는 민시후를 따라 나갔다.아까 민시후가 내뱉은 전형적인 자본가다운 말에 기분이 나빴던 고은서도 일부러 도도한 척 말했다.“말도 안 해주고 도대체 어딜 가겠다는 거야? 나 너랑 사적으로 뭐 할 생각 없으니까 일 아니면 갈 거야.”“누군 너랑 사적으로 엮이고 싶은 줄 알아?”민시후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은서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고는 말을 이었다.“새 프로젝트 알아봤는데 같이 가서 봐달라고 부른 거야.”아직 고은서가 ZY 그룹에 취직하기 전인데 벌써부터 부려먹으려고 하는 민시후에 고은서는 악덕 사장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너 지금 속으로 내 욕했지?”“계약하자고 나 꼬실 때는 이런 표정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눈썹을 치켜세우며 묻는 민시후에 고은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프로젝트 알아보는 것도 내 성과로 쳐주는 거야?”“고은서, GS그룹 대표 사모씩이나 돼서 그런 것부터 따져야겠어?”비아냥대는 민시후에 고은서도 같은 조롱조로 대꾸했다.“차 한번 만졌다고 2만 억이나 배상하라던 너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그 말에 민시후는 화도 내지 않고 고은서의 가장 아픈 부분을 쿡쿡 찔러대기 시작했다.“곽승재가 널 버린 건 다 그 입 때문일 거야. 말은 가려서 해야지.”고은서 역시 화를 내지 않고 받아쳤다.“네 말대로면 네 약혼자가 너한테 질척거리는 건 네 입이 좋아서야?”“...”약혼자 얘기를 꺼내자 바로 표정이 어두워진 민시후가 차 키를 고은서에게 던져주며 말했다.“운전 네가 해.”조금 있다 회식 자리가 있는지 저를 기사로 쓰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고은서는 파트너이자 미래의 대표님인 민시후의 말에 따라주기로 했다.운전을 시작하고 민시후에게 목적지를 물으니 사람
고은서의 말에 굳은 표정으로 있던 민시후가 웃음을 터뜨리자 여자는 화가 난 듯 고은서를 향해 따지기 시작했다.“운전이나 하는 주제에 왜 자꾸 나대!”“아, 너 지금 네 반반한 얼굴 믿고 민시후 씨랑 어떻게 해보려는 거지, 꿈은 야무지네.”고은서는 어이없다는 듯 뒤에 앉은 민시후를 보며 말했다.“넌 왜 이런 바보 같은 것들이 자꾸 꼬이는 거야?”“너!”화가 난 여자가 고은서를 향해 화를 내려 하자 민시후가 귀찮다는 듯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창문 올리고 그냥 가.”그 말에 따라 창문을 올리고 액셀을 밟는 고은서 탓에 넘어질 뻔했던 여자는 얼른 멀어져가는 차에 대고 소리쳤다.“민시후 도련님, 차 배상도 못 했는데 연락처라도...”아직도 포기를 못 하고 쫓아오는 여자를 보던 고은서가 말했다.“민시후 씨 좋아하는 사람 많네.”그 말에 민시후는 고은서를 한번 쓱 보더니 나지막이 물었다.“너도 내 차 친 적 있지 않나? 그럼 너도 나 좋아하는 거야?”“... 그건 진짜 실수야.”고은서는 이제야 민시후의 운전기사가 왜 그렇게 능숙하게 사진을 찍고 교통사고를 처리했는지 알 것 같았다.이런 식으로 민시후의 연락처를 알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한둘이 아니어서 본의 아니게 능숙해진 것 같았다.“그러니까 이렇게 튀는 차 말고 평범한 차를 타고 다녀. 계속 이런 식이면 차 수리비도 만만치 않게 나오겠네.”“내가 왜 다른 사람 때문에 여유로운 생활을 포기해야 하지?”코웃음을 친 민시후는 비서에게 연락해 영상자료를 얻어서 교통사고 건을 처리하라고 일러주었다.그냥 재수 없게 생각하고 넘기려나 보다 했는데 민시후는 그냥 시간 낭비가 싫은 것뿐이었다. 그러니 뒤처리는 다 아랫사람 몫이지.하지만 민시후의 생각에는 고은서도 동의하는 바였다.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의 행복이라는 것, 예전의 고은서는 그 도리를 몰라서 그렇게 비굴하게 살았던 것 같다.그렇게 삼십 분을 넘게 달려 고은서는 민시후가 말한 식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호텔처럼 크고 웅장하
“어딜 가?”민시후는 고개를 들고 강압적으로 말했다.“네가 그렇게 쉽게 잊는 일이면 중요한 일이 아니란 거야. 앉아서 주문해.”그 말에 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아 직원이 건네준 얇은 메뉴판을 받아들었다.“나 잠깐 화장실 갔다 올게.”고은서는 자리를 비우는 민시후를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위주로 주문을 마쳤다.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밥이 제일 중요하니까 고은서는 다른 건 밥을 먹고 난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고은서가 주문을 마치자 마침 민시후도 자리로 돌아왔다.민시후는 메뉴판을 들어 음식을 몇 개 고르더니 고은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주방 가서 천자 1번 방 메뉴 이걸로 바꿔 달라고 해.”메뉴판을 건네받은 고은서가 고른 것들을 보니 전부 다 초록색 야채들이었다.오이 볶음, 오이무침, 오이소박이, 오이 껍질, 오이 겨자, 오이 달걀 볶음, 그리고 과일까지 모두 오이로 통일인 메뉴는 한눈에 봐도 사람 하나 놀리려는 것 같아 보였다.이 메뉴들을 보고도 눈치 못 채는 바보는 없을 것 같아 고은서가 민시후를 향해 물었다.“도대체 뭐 하려고 이러는 거야? 그냥 알려주면 안 돼?”“뭘 그렇게 놀래, 메뉴 몇 개 바꾸는 게 어때서, 그냥 반응 보고 인성이나 테스트해보려고 그러는 거니까 그만 말하고 빨리 가.”“안가.”고은서는 민시후의 요구를 단번에 거절하며 말했다.“아무 이유도 없이 왜 다른 사람들의 메뉴를 바꿔, 주방에서도 내 말대로 안 해줄 거야.”그에 민시후는 고은서를 쳐다보며 말했다.“이 정도 일도 못 하면서 나보고 어떻게 네 능력을 믿으라는 거야. 넌 그냥 갖다 주기만 하면 돼. 주방에서는 시키는 대로 할 거야.”“걱정하지 마, 넌 아직 ZY 그룹 사람도 아니니 화를 내도 나한테 내지 너한테 아무 영향 없을 거야.”민시후가 달래듯 말하자 고은서가 바로 되물었다.“그럼 왜 직접 안 가고 날 시키는데?”“내가 너 데려왔는데, 쓸모는 있어야지.”“내가 다 덮어쓰라고?”“잘 아네, 빨리 가.”민시후 말대로
이어서 직원 두 명이 음식들을 내왔는데 그게 식을까 봐 걱정한 건지 음식마다 뚜껑을 씌워 내왔다.주민기는 직원들이 음식들을 올리는 걸 보며 허 교수라는 사람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허 교수님과 비서분들도 다 배고프시죠, 얼른 드세요. 집밥 반찬 위주로 고른 거라 조금 초라해 보일 수도 있는데 그래도 잘 봐주세요.”“음식들 다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말을 마친 직원들이 뚜껑을 하나둘 열어주니 눈앞에는 오이가 한 상 가득 펼쳐졌다.갑자기 벌어진 오이 파티에 허 교수와 두 비서는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왜 갑자기 메뉴가 바뀐 건지 알 수 없었던 주민기 역시 어안이 벙벙해서 굳어있었다.그러다 제 보스의 따가운 눈초리에 주민기는 다급히 직원을 잡고 물었다.“이게 뭡니까? 이건 저희가 주문한 게 아닌데요.”그냥 주는 대로 서빙했을 뿐이라는 직원에 그들은 매니저를 찾아 물었다.그리고 홀에 앉은 사모님이라는 분이 주방에 와서 메뉴를 바꿨다는 말을 듣자 곽승재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사모님이 보스에게 무슨 화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쪽에서 일부러 벌인 일이라고 밝혀지자 잠시나마 제가 미쳐서 주문을 막한 건지를 의심하던 주민기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서둘러 허 교수 일행에게 사과하고 매니저에게는 새로운 메뉴를 내와달라고 부탁했다.허 교수 일행도 놀라긴 했지만 그 이유를 알았기에 더는 말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하지만 곽승재는 그럴 수 없었는지 “실례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홀로 향했다.그리고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홀의 구석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을 때 곽승재의 미간은 어느 때보다도 구겨졌다.뒤로 머리를 질끈 묶은 고은서는 지금 갈비를 쥐어 잡고 뜯어대고 있었다.그리고 그 옆에 앉은 남자는 민시후였는데 민시후는 고은서처럼 식욕이 강하지 않은지 핸드폰을 슬쩍슬쩍 보며 이따금 고은서를 더럽다는 듯 보고 있었다.곽승재는 표정을 굳히고 바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둘이 왜 같이 있어?”한창 맛있는 식사를 하던 고은서가
고은서는 곽승재와 싸우면서 이런 저급한 방법을 택한 민시후에게 어이가 없었다.이런 악취미와 유치한 작전에 함께했다고 인정하기도 뭐해 고은서는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그런데 곽승재가 민시후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바로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넌 나랑 같이 천자 1번 방에 가자.”“내가 왜?”정말 저한테 책임을 물으려는 듯 보이는 곽승재에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때 민시후가 나서더니 도와주는 건지 부추기는 건지도 모를 말을 해댔다.“쟤 오늘은 내 기사로 온 거야, 쟤한테 따지는 건 괜찮은 데 데려가는 건 안 돼.”그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고 민시후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네 형이 곧 진급한다지, 이때 네가 사고를 치면 널 가만둘까?”“네가 그런 것까지 상관해?”가소롭다는 듯 웃는 민시후에 곽승재가 담담히 말했다.“네 형이 운성에 있긴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번 상업자본행사에 우리 GS그룹도 초대됐더라고.”“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진급 못 하면 가서 민씨 집안 사업하면 되지.”“네 형 일은 상관없을 수 있지, 근데 네 아버지도 상관없어?”그 말에 민시후는 자연스레 입을 다물었다.민시후가 형의 일을 망쳤다는 걸 아버지가 알게 되면 해성에 숨는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그래, 이런 게 네가 잘하는 일이지. 이번 한 번은 내가 넘어갈게. 부부끼리 잘 해결하고, 난 이만 가볼게.”민시후가 어찌나 빨리 일어났는지 고은서가 계산하라는 말도 못 했는데 밖으로 쌩 나가버렸다.“오빠도 이제 가.”자신에게도 가라고 하는 고은서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고은서, 너희들이 매니저와 연락해서 우리 방 음식 다 바꿔놓는 바람에 내가 허 교수님 볼 면목이 없잖아. 이 일은 그냥 이렇게 넘어가겠다고?”매니저 말로는 사모님이 지시한 거라는데 고은서의 반응을 보니 저절로 신분을 밝히진 않은 것 같았기에 그렇다면 민시후가 매니저를 매수한 게 분명했다.하지만 곽승재가 화난 건 그런 게 아니라 고은서가 민시후가 좋은 사람이
고개를 돌려 보니 곽승재의 손등이 붉게 데어있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그에 깜짝 놀란 직원은 연신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제가 아까 잘 피하지 못해서...”“괜찮아요, 주방 가서 수프 다시 만들어달라고 하세요. 돈은 제방에서 같이 낼게요.”그 말에 감격한 직원이 떠나고 고은서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올뻔한 관심의 말을 참아내고는 담담히 말했다.“찬물로 좀 씻어.”말투는 담담했지만 눈에 가득한 걱정을 보아낸 곽승재가 검은 눈동자로 고은서를 응시하며 말했다.“네가 도와줘.”고은서는 거절하지 않고 복도 제일 끝에 있는 세면대로 가 물을 틀었다.혹시나 물의 세기가 셀까 싶어 손으로 물을 받아 곽승재의 손등에 뿌려주는 고은서의 얼굴에 복도의 따뜻한 조명이 비치니 평소와 달리 더 아름다워 보였다.“넌 뭐 좋아해?”곽승재의 질문에 고개를 드는 고은서의 물기 어린 눈도 조명에 비쳐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그에 곽승재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선물 주기 전에 네가 뭘 좋아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며.”곽승재의 말을 듣자 어젯밤의 실랑이가 떠올랐던 고은서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예전 같았으면 곽승재의 이런 질문에 아주 기뻐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걸 다 알려주고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건 오빠라는 말까지 덧붙였을 테지만 지금의 고은서는 이런 질문이 웃기기만 했다.“필요 없어. 오빠도 좋은 마음에서 한 일이겠지만 난 이제 오빠가 주는 선물은 필요 없어.”고은서 얼굴에 훤히 드러난 조소와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에 곽승재는 화가 잔잔히 올라왔지만 그럼에도 애써 참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삼촌이랑 숙모님이 계속 FY 그룹 대표랑 밥 한번 먹어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며칠 뒤에 나 마침 시간 있으니까 삼촌한테 GS로 오셔서 같이 가자고 전해 드려.”고은서는 눈을 내리깔고 물을 손등 위로 뿌려주며 말했다.“내가 전에 말했지, 우리 집안일에 관여하지 말아 달라고. 그거 그냥 홧김에 한 말 아니야.”“우리 삼촌이랑 외숙모가 아직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곽 대표님, 아내분이 이렇게 사랑스러우신데 왜 화나게 해요,나중에 가서 제대로 사과하셔야겠어요.”곽승재는 정말 아내를 화나게 한 남편마냥 자연스럽게 대답했다.“그래야죠.”그때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더니 아까 국물을 쏟은 직원이 화상연고를 들고 들어와 곽승재에게 사과를 했다.다들 그제서야 빨갛게 데인 곽승재의 손등을 보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곽 대표님 손등이 많이 대이신 것 같아요.”“아까 아내가 물로 씻어 줬어요, 괜찮아요 지금은.”주민기는 아내라는 호칭이 날이 갈수록 입에 붙는 제 상사를 보며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저번에 해선 호텔에서의 미팅도 주민기 혼자 가서 간단히 얼굴만 비치고 오기로 얘기가 다 돼 있었는데 주민기가 거의 도착할 때쯤 곽승재에게서 같이 가겠다는 연락이 왔었다.그리 중요한 자리도 아닌데 같이 가겠다고 생각을 바꾼 곽승재가 주민기도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호텔에서 고은서를 봤을 때 주민기는 그제야 곽승재의 진짜 의도를 알아차렸다.그래서 이번에도 제 상사의 사랑을 돕기 위해 주민기는 곽승재 손에 들린 연고를 보며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사모님, 대표님 손에 연고 좀 발라주세요. 왼손으로 하면 불편하시잖아요.”“그래요, 약은 바로 발라야죠, 안 그럼 흉 져요.”허 교수까지 거들자 고은서는 금실 좋은 부부 사이를 연기해야 한다는 걸 인지하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곽승재 손에서 연고를 건네받아 손가락에 조금씩 짜서 손등에 펴 발라 주었다.연고의 효과인지 아니면 고은서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풍기는 향기 때문인지 곽승재의 통증은 말끔히 사라졌다.“됐어요.”고은서가 약을 다 바르고 손을 떼자 곽승재는 그게 못내 아쉬웠다.“화장실 갔다 올게요.”그렇게 화장실 앞에 선 고은서는 아까 저를 품에 넣던 곽승재의 긴박함과 사람들한테 저를 아내라고 소개하던 그 자연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곽승재의 관심을 그렇게 원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저의 신분을 인정해주길 바랄 때는 그런 맘을 모른 척하
“곽승재의 말에 고은서는 백미러로 그를 보며 물었다.“내가 민시후랑 밥을 먹으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잖아.”곽승재는 아까보다 조금 냉랭해진 얼굴을 하고 대꾸했다.“내가 민시후랑 사이가 안 좋은 걸 알고 일부러 날 자극하려고 붙어 다니는 거야?”고은서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그럼 자극은 받았다는 거네?”“꿈 깨. 네가 어떻게 난리를 치든 그건 네 맘인데 그러다 네가 민시후한테 당한다 해도 나는 너 동정 안 해.”“내 일에 신경 끄고 시간 남으면 네 오랜 친구나 신경 써.”조소를 흘리며 말을 마친 고은서는 곽승재를 더는 보고 싶지도 않다는 듯 그쪽으로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그에 곽승재도 더는 말 하지 않고 둘은 정적 속에서 예원 별장까지 도착했다.먼저 별장으로 들어간 고은서는 옷장에서 이불부터 찾아냈다.앞으로 한 열흘 남짓 남았으니 괜히 이사한다고 움직이는 것도 귀찮았다. 그래서 곽승재가 여기서 자든 말든 신경 끄고 고은서는 게스트룸에 들어가서 자기로 했다.그런데 방문 앞까지 가니 곽승재의 큰 몸이 고은서를 막아 나섰다.“어디 가?”“게스트룸.”“이번에는 또 뭐 때문에 이러는 건데.”고은서는 곽승재를 한번 보고는 말했다.“너랑 정상적인 부부인 척 연기할 생각 없으니까 비켜.”“연기는 안 해도 되는데.”곽승재는 할머니의 번호를 누르며 말했다.“할머니한테 말은 해야지, 내가 널 게스트룸으로 쫓아낸 게 아니라고.”“...”삼촌과 외숙모가 다녀간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고은서는 이 일로 또 할머니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만 참기로 했다.열 며칠 정도는 금방이니까.“이불은 나눠 덮어.”씻고 나온 고은서는 제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웠음에도 이렇게 멀쩡한 상태에서 곽승재와 한 침대에 누워야 한다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그나마 다행인 건 곽승재가 서재에서 업무를 보느라 바로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렇게 경계만 하다가 고은서가 잠에 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었다.
“집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 이만 가볼 테니까 오빠도 조심히 들어가.”말을 마친 고은서가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송민준이 입을 열었다.“은서야, 잠시만 기다려 봐.”고은서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말을 이었다.“부모님이 민아를 보러 곧 해성에 올 것 같아. 민아가 부모님께 네가 평소에 많이 도와준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 같이 식사하고 싶다고 하셨어. 혹시 그때 시간이 되면 오지 않을래?”고은서는 송민아의 부모님과 같이 식사하는 자리라는 말에 바로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북성에서 지냈었고 송민아의 아버지와 아는 사이일 수도 있었다.고은서는 어머니와 송민아의 아버지가 아는 사이인지 궁금해서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작은 정보라도 얻을 기회였기에 놓칠 수 없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민아를 도와준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친구끼리 서로 도와주면서 사는 거지.”송민준은 부모님이 고은서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서 시간이 되면 꼭 와달라고 부탁했다.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일 민아랑 얘기해 보고 결정할게.”송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씻고 잠에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가 전화를 걸어왔다. 휴대폰 벨 소리에 잠이 깬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로 연락했어?”“은서야, 설마 자고 있었던 거야? 안 자는 줄 알고 전화했어.”곽승재는 고은서가 이 시간에 자고 있을 줄 몰랐다. 평소에 그녀는 자주 밤을 새웠기 때문이었다.고은서는 눈을 감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피곤해서 일찍 누웠어.”그녀의 목소리가 곽승재의 귀를 간지럽혔다. 고은서가 무방비한 상태에서 전화를 받아서 그런지 목소리가 유난히 달콤하게 들렸다.곽승재는 지난번에 호텔에서 고은서와 같이 중독된 날을 떠올렸다. 두 번 정도 하고 나니 고은서는 기진맥진해서 침대에 쓰러졌다.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날도 고은서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곽승재를
송민준은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감정은 원래 저도 모르게 생겨나는 거야. 나도 언제부터 너한테 호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네가 나랑 만난 적이 없다고 해서 술집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한 거지. 정확히 그날부터 좋아했다는 건 아니야.”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오빠는 나한테 있어서 그저 친구의 오빠일 뿐이야. 미안하지만 오빠를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오빠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랄게.”송민준이 씁쓸하게 웃었다.“은서야, 나한테 너무 차갑게 구는 거 아니야? 혹시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어?”고은서의 말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꽂혔다. 그러나 송민준이 갑자기 호감을 느낀다고 말했을 때부터 고은서는 선을 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녀가 정색하면서 입을 열었다.“민준 오빠, 해성과 북성에서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하지만 나는 오빠가 남자로 보이지 않더라.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송민준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혹시 곽 대표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니면 민시후 때문인가?”고은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다른 사람과 상관없는 일이야. 오로지 내 생각이니까 이해해 줘.”송민준이 차분하게 말했다.“은서야, 내가 갑자기 호감 있다고 해서 많이 놀랐지? 네가 나를 그저 민아의 오빠로만 보니까 답답해서 그랬던 거야. 나는 아무 감정도 없는 기계가 아니라 사랑을 꿈꾸는 남자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지금 말해봤자 의미 없긴 하지만 그래도 너한테 얘기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어.”그가 말을 이었다.“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라도 너랑 친하게 지내다 보면 호감을 느끼게 될 거야. 만약 내가 부담스럽게 굴었다면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자. 예전처럼 계속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고은서는 송민준을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송민준은 너무 완벽한 사람이었고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그녀가 단호하게 거절해도 화내거나 욕하지 않고 이 상황
곽승재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송 대표님은 온화하지만 늘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둔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봐요? 고은서한테 특별히 신경 쓰는 것 같아서요.”그가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냈지만 송민준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아름다운 여자를 마다할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곽 대표님 말대로 은서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그의 말에 곽승재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고은서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송민준을 쳐다보았다.송민준이 이런 상황에서 그녀한테 호감이 있다고 솔직하게 말할 줄 몰랐던 것이다.예전에 송민아와 박지연이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지만 송민준이 명확하게 말한 적이 없어서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서 고은서는 송민준이 평소에 잘해줄 때마다 동생의 친구여서 챙겨주는 줄 알았다.오늘 송민준이 갑자기 그녀한테 호감이 있다고 말하니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민준 오빠, 그런 장난은 재미없어요. 나처럼 한번 갔다 온 여자가 어떻게 송씨 가문의 며느리를 꿈꾸겠어요?”고은서가 자신을 비꼬자 송민준이 다정하게 말했다.“은서야, 너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곽 대표님과 민시후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내가 낄 자리가 없어.”“낄 자리가 없으면 마음을 접어야죠.”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그리고 고은서는 송 대표님 같은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송민준이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곽 대표님,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곽 대표님이라고 해서 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는 것도 아니고요.”송민준이 말을 이었다.“은서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제가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아서 그래요. 저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아직 모르는 거잖아요.”곽승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고은서는 두 사람이 유치하게 말싸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곽승재를 향해 말했다.“바쁘니까 먼저 가 봐.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곽승재는 떠나기 싫었지만 이곳에 남아있어도 할 수
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들어보니 확실히 여시은답지 않은 것 같아. 여재훈이 강박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건 아닐까?”여재훈은 여시은의 뒷배가 되어주었기에 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만 할 것이다. 곽승재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런 가능성도 있는 것 같아. 오늘 마재경을 너무 쉽게 설득해서 그런지 찝찝한 기분이 들어.”그의 말에 고은서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그러면 여시은이 지시한 게 아니라 마재경이 우리를 속이려고 그랬다는 거야? 마재경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해.”고은서가 불안해하자 곽승재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추측일 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경찰 측에서 조사하고 있지만 나도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생각이야. 해외 아이디를 추적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시간이 늦었으니 집까지 데려다줄게.”곽승재와 고은서가 같이 걷고 있을 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고은서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힐끔 쳐다보았다. 발신자는 곽승재의 아버지 곽현수였다.곽현수는 Y 국에 가서 업무를 처리하느라 여씨 가문의 개업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마 귀국했거나 최근에 일어난 일을 듣게 되어서 곽승재의 책임을 물으려고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고은서가 차분하게 말했다.“나는 괜찮으니까 전화 받아.”곽승재는 굳은 표정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 한 편에서 곽현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나는 기사님한테 연락하면 되니까 먼저 가 봐.”곽승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나를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아버지한테 가보는 게 어때? 괜히 나 때문에 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고 할까 봐 그래.”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고은서를 혼자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