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고은서는 밀가루 반죽을 냉장고에 넣어 발효시켜 다음 날 아침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직접 개량한 저당 팥앙금을 만들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샤워하고 피부 관리를 마친 후 침대에 눕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중, 서재에서 바쁘게 일하던 곽승재가 갑자기 들어왔다.고은서는 그와 대화하기 싫어서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는 물기와 샴푸 향기를 남기며 침대에 누웠다. 고은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존재감을 줄이려 애썼다.그러나 다음 순간, 고은서의 이불이 당겨졌다. 그리고 놀랄 틈도 없이 곽승재는 그녀의 몸 위에 바로 덮쳐들었다.“너 뭐 하는 짓이야!”고은서가 눈을 뜨고 화를 내며 물었다.곽승재는 팔을 그녀의 몸 양옆에 지탱하며 깊은 눈으로 말했다.“고은서, 내가 너의 남편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불만이었지? 지금 그 역할을 해줄게.”“야, 너 제정신이야?”고은서는 그를 밀어봤지만 그의 큰 몸집은 산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곽승재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강제로 밀어붙이려는 모습에 고은서는 주인혁이 가르쳐준 호신술을 떠올렸다. 그녀는 다리를 높이 들어 그의 허벅지 안쪽을 향해 강하게 찔렀다.“으악!”곽승재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서 통증을 호소하며 몸을 움츠렸다.고은서는 그 기회를 이용해 곽승재를 다시 한번 밀었고 이번에는 쉽게 그를 밀어낼 수 있었다.곽승재의 잔뜩 찡그린 이마와 창백한 얼굴, 그리고 손으로 가리는 부분을 보며 자신의 행동에 매우 뿌듯했던 고은서는 조금 난처했다.그녀는 뭔가 안 될 곳을 차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양심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급한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다리를 들어 올린 것뿐인데 이렇게 될 줄은...“괜찮아?”고은서가 진심으로 물었다.곽승재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너 이러고도 정말 여자 맞아? 좀 살살하지 그래?”‘진짜로 할 생각도 아니었고 고은서가 좀 낮추는 태도만 보이면
이 익숙한 호칭과 등록되지 않은 번호를 보고 고은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도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은서야, 나 지금 TIME에 있어. 네가 좋아하는 칵테일을 마시니까 우리 함께 술 마시던 시절이 정말 그립더라.”역시나 성아연이었다. 지난 술자리 이후로 고은서는 성아연이 다시는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다시 스스로 연락을 해왔다.만약 성아연이 이 우정을 잃기 싫어서 연락한 거라면 고은서는 절대 믿을 수 없었다.TIME은 이 도시에서 가장 호화로운 바 중 하나로, 성아연은 자주 그곳에서 친구들을 불러내어 부잣집 딸처럼 대접을 아끼지 않았지만 사실 그 돈을 지불하는 사람은 고은서였다.혹시 술을 많이 마신 탓에 호구였던 자신을 떠올렸던 걸까?“넌 나한테 절대 화내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설령 절교하더라도 나에게 한 번 기회를 주겠다고 했잖아.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성아연이 계속해서 문자를 보내왔다.이 말들은 고은서가 실제로 한 말이었다.그때는 성아연을 진심으로 친구로 생각했고 그녀와의 우정이 변질되지 않을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다.그런데 그녀가 백유미와 결탁한 줄은 상상도 못 했다.사실 성아연의 말은 그리 설복력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은서 스스로 곽승재의 사랑을 너무 간절히 원했고 또 성아연과의 우정을 너무 믿었기에 매번 그녀의 조언을 따라 백유미와 맞섰다.“은서야, 전에 있었던 일은 모두 내 잘못이었어. 너에게 사죄하기 위해 아빠에게 부탁해서 향료 대리점을 하는 친구를 소개받았어. 그 친구가 MQ에서 대량의 향료를 주문할 수 있대.”고은서는 번호를 차단하고 자려고 했지만 성아연이 다시 문자를 보내자 그녀의 차단하려던 손이 잠시 멈췄다.지난 생에서도 성씨 일가는 고씨 가문에 사업을 소개해 주었고 납기 시점에 문제 발생으로 상대방이 수취를 거부했다. 그 후 MQ는 벌금까지 지불하고 그 물건은 다른 사람에게 팔지도 못하고 창고에 쌓여 있었다. 이로 인해 MQ의
고은서는 냉정하게 말했다.“아저씨께 불필요한 수고를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 줘. MQ는 현재 주문이 꽤 많아. 승재 씨도 최근에 우리 삼촌을 도와 빅딜을 성사했어.”말을 들은 성아연은 난감해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고 이 일을 계속해서 고집하려는 것도 아니었다.그녀는 오히려 고은서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구하며 앞으로는 모든 발언과 행동에서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했다.고은서는 그녀와 더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대충 몇 가지 핑계를 대어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외할아버지에게 문자를 남겨 당분간 삼촌에게 더 신경 써 달라고 부탁했다.이 일들을 마친 후 고은서는 피곤해져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새로 교체한 침대 시트에서 나는 은은한 향을 맡으며 고은서는 금방 잠이 들었다.비몽사몽인 상태에서 고은서는 허리 위에 어떤 것이 눌린 것을 느꼈고, 몇 번 몸을 움직여 봤지만 그 무게를 떨칠 수 없어 결국 눈을 떴다.그러자 고은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방으로 들어와 팔을 자신의 허리 위에 올려놓고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녀는 온몸을 그를 향해 자고 있었고 머리는 그의 어깨 옆에 기대어 있었으며, 눈을 뜨자마자 곽승재의 날렵한 턱선을 볼 수 있었다.비록 혼자서 이불을 덮고 있었지만 이렇게 친밀한 자세로 누워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져 고은서는 급히 곽승재의 팔을 밀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곽승재는 잠결에 그녀를 흘끗 보았으나 대수롭지 않게 눈을 감고 다시 자려고 했다. 고은서는 자신의 잠꼬대가 이렇게 심한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분명히 잠들기 전에는 침대 가장자리에 있었는데 자고 나니 이미 곽승재의 곁에 찰싹 붙어 있었다.지금은 아직 이른 시간이었고 평소 자율적으로 일찍 일어나는 곽승재도 일어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고은서는 이미 잠을 다 깬 상태였기 때문에 차라리 외투를 걸치고 주방으로 가서 할머니에게 드릴 단팥빵을 만들기로 했다.냉장고의 반죽은 이미 발효가 완료되었다. 고은서는 그 반죽을 꺼내 길게 밀어서 납작한 형태
겉보기에는 매우 간단해 보이는 일인데 그가 너무 센 힘으로 반죽을 눌렀더니 반죽 모양이 한 번에 망가져 버렸다.“이러다가 도마까지 부서지겠네.”고은서가 불평하며 말했다.“그만하고, 내가 평평하게 만든 반죽에 속을 넣어서 모양을 잡아줘.”곽승재는 고은서를 한 번 쳐다본 후 말없이 지시대로 속을 쌌다.하지만 동작은 여전히 서툴렀고 앙금 속이 전혀 균일하지 않았다. 반죽 모양을 잡을 때는 더구나 엉망이었고 하마터면 앙금 속이 터져 나올 뻔했다.“어휴, 그만해!”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무 한심해서 못 봐주겠다. 너 그냥 나가 있어. 오히려 방해야. 할머니께서 점심 때까지 기다리셔도 못 드실까 봐 걱정이야.”“고은서, 방금 내가 한심하다고 했어?”곽승재는 그녀의 불평에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그러자 고은서가 말했다.“이렇게 쉬운 일도 못 하잖아. 너도 자신이 한심하지 않아?”예전에 곽승재를 너무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만약 그가 이렇게 서투르다는 걸 일찍 알았다면 아마 그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곽승재는 고은서가 머리를 저으며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고 홧김에 밀대를 빼앗아 그녀에게 명령하듯이 말했다.“너는 그냥 옆에 있어. 내가 할게!”‘그 한마디에 멘탈 나갔나 보네.’“좋아! 기대할게.”고은서는 여유롭게 말하며 동시에 앞치마를 벗고 그에게 물 었다.“매 줄까?”곽승재는 냉담한 시선으로 거부의 의사를 표했다.고은서도 그를 강요하지 않았고 아줌마가 집에 없으니 옷이 더러워지면 스스로 세탁하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옆에서 곽승재의 솜씨를 감상하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되도록 고은서에게 깔보이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실제로 해보니 훨씬 더 어려웠다. 겨우 반죽을 밀어 평평하게 만들었지만 두께가 불균일하고 어떤 곳은 아예 구멍이 나버렸다.고은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반죽을 들어 자기 얼굴 앞에 가리면서 그 구멍을 통해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한번 비교해 봐. 내 눈과 이 구
“읍!”곽승재의 점점 더 선을 넘는 행동을 느끼며 고은서는 화가 나고 초조해져 몸을 비틀며 피하려고 했다.하지만 곽승재의 힘이 상상 이상으로 강해 지금 이 자세로 그녀는 어떤 방어 기술도 쓸 수 없었다.이 상태에서 더 저항하는 건 불가능하니 고은서는 결국 불편함을 참으며 곽승재의 가슴에 몸을 기대었다. 이렇게 하면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지긴 하지만 적어도 그의 음란한 손길을 피할 수 있었다.그녀의 순응을 느낀 곽승재는 격렬했던 키스를 조금 늦추었고 고은서는 그 기회를 이용해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쓰읍...”곽승재는 아픔에 낮은 신음을 내었다.그가 화를 내며 그녀를 밀어낼 줄 알았지만 곽승재는 오히려 더 자극을 받은 듯하였고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녀 혀를 빨기 시작했다.‘미친 XX...’고은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의 혀끝을 물어버렸다.그러자 곽승재는 드디어 좀 아팠는지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 너 자꾸 이럴래?”고은서는 산소 부족으로 신선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헐떡이며 말했다.“이 나쁜 XX...”‘아무렇지 않게 반죽 만들다가 왜 갑자기 욕구불만인 거야?’고은서의 붉어진 얼굴과 키스 때문에 촉촉해진 입술을 보며 곽승재 마음속의 이상한 욕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하지만 고은서의 눈빛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조금만 더 건드리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맞장 뜰 기세로 서 있었다.곽승재는 참느라 상당히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여성을 강박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성인이 된 이후로 그에게 관심 갖고 다가오려는 여성은 많았지만 그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예전의 고은서가 매일 그에게 달라붙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감정적인 충동도 느끼지 못했다.그는 항상 자제력이 강했다.‘하지만 왜 요즘 고은서와 함께 있으면서 그녀의 향기를 맡으면 그녀를 괴롭히고 싶고, 울리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드는 걸까? 혹시 그녀가 사용하는 향수가 욕망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는 걸까?’
‘절대 다음은 없어. 다시는 곽승재랑 함께 주방에 있지 않을 거야.’“허허, 괜찮아, 그냥 어제 갑자기 먹고 싶었던 거야. 의사 선생님이 간식을 적게 먹으라던 걸 깜빡했어. 따로 다시 만들 필요는 없어.”할머니가 웃으면서 위로해 주었다.고은서는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기분이 더 좋아지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전화를 끊고 지저분한 주방을 보며 고은서는 바로 가사도우미를 불렀다.가사도우미가 일을 시작하는 동안 고은서는 그 남자의 냄새가 묻은 몸을 깨끗이 씻어 내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여자는 스스로 모든 집안일을 떠안고 있으면 끝이 없을 만큼 일이 쌓이기만 하지. 난 그딴 착한 아내의 명성을 원하지 않아. 그러고 있을 시간에 차라리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게 훨씬 나아.’서재에서, 곽승재는 할머니의 영상 통화를 받았다. “승재야, 입술에 피가 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할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곽승재는 피를 닦으며 대충 대답했다.“괜찮아요, 실수로 부딪힌 것뿐이에요.”할머니는 상황을 이해한 듯 웃으시며 말했다.“너 또 은서를 괴롭혔지? 걔한테 물린 거지?”방금 일어난 일을 떠올리며 곽승재는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고은서는 그의 입술뿐만 아니라 혀도 물어버렸다. 방금 확인해 보았는데 혀에서는 피까지 나고 있었다.그런 상황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걸 보니 고은서는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왜 말이 없어? 함부로 행동한 걸 후회하고 있니? 여자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대로 해줘야 행복해하는 거야.”할머니는 꾸짖으며 말했다.“항상 은서에게 잘 대해주라고 했는데 넌 들은 척만 했지? 그러니까 이제 이혼 얘기까지 나오게 된 거 아냐. 그런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은서를 화나게 할 셈이니?”곽승재의 기분은 여전히 복잡했다.“걔가 정말로 헤어지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단지 저에 대한 공략 전술을 바꿔서 더 교묘해진 것뿐이에요.”“아이고, 이 답답아! 너를 어쩌면 좋니!”할머니는 실망한 목소리로
고은서는 놀라며 물었다.“벌써 자료를 다 보셨어요?”“굳이 볼 필요도 없죠.” 민시후는 다소 비꼬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역시 곽 씨 사모님, 참 대단하시네요.”고은서는 어리둥절해서 대답했다.“그냥 대충 쓴 자료인데 그렇게 완벽하나요?”“아직도 모르는 척하네요?”민시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제가 볼 때 승재 씨는 당신에게 꽤 잘해주는 것 같아요. 전혀 버리려는 듯한 태도가 아니던데요.”“민 도련님, 좀 더 명확히 말해 주실래요?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요.”민시후는 다리를 꼬고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방금 들은 소식인데, 허 교수 쪽에서 당신이 그들의 약품 홍보를 담당하게 됐다고 결정했어요.”고은서는 충격을 받았다.“뭐라고요? 잘못된 소식 아닐까요?”그녀는 어제 허 교수와 만났고 그의 마음이 GS그룹에 있다는 걸 분명히 확인했다. 또 백유미와 연락까지 했는데 어떻게 하루 만에 자신에게 맡기기로 결정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민시후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내 소식은 절대 틀리지 않아요. 그래서 승재 씨가 그쪽에게 꽤 신경 쓰는 것 같다고 추측한 거죠. 아니면 뭐, 이별 전 마지막 선물인가요?”고은서는 민시후의 개인적인 추측을 무시하고 물었다.“제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나요?”만약 방금 그 소식이 사실이라면 그 일도 빨리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민시후는 흥미로운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걱정 마요. 상대방이 스스로 함정에 뛰어들게 확실히 처리해 줄게요.”“... 고마워요. 일단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고은서는 전화를 끊고 다시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참이 지났고 곽승재가 이번에도 받지 않으려나 하는 순간, 그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야?”그쪽은 매우 조용했고 그의 말투는 간결하고 짧았다. 마치 처리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어서 고은서는 조용히 물었다.“지금 회의 중이야? 나중에 전화할까?”“할 말 해.”“알겠어.”고은서는 바로 물었다.“허 교수님 쪽의 대리권을 나한테 맡
곽승재는 백유미의 말을 듣더니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평소에는 항상 온화하고 침착하던 백유미가 오늘따라 감정적으로 격해진 모습을 보이니 그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내가 알아야 해?”곽승재가 되물었다.그의 무심한 표정과 입술의 상처를 보며 백유미의 마음속에는 질투심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겉으로는 속상한 척 눈물을 흘렸다.“승재야, 예전에 우리 엄마가 심하게 아프셨을 때 난 정말 괴로웠어. 약이 하루빨리 연구되기를 간절히 바랐고 그런 날 위로해 준 사람이 너야, 기억 안 나? 그때 넌 그런 약이 생기면 꼭 사주겠다고 했었잖아.”백유미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허 교수님이 개발한 이 약은 엄마의 병을 치료하는 약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직접 시장에 내보내고 싶어. 내 마음속의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채우고 싶었어.”그는 백유미의 집착이 어머니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어릴 적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백유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가 엄청 힘들어했다는 것은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승재야, 은서 씨도 이 프로젝트가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 다른 수익성 있는 프로젝트를 찾아서 은서 씨에게 맡겨도 되잖아. 부탁이야, 이 약품 대리는 나에게 계속 맡길 수 없겠어?”백유미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 부탁했다.이것은 백유미가 처음으로 그에게 부탁하는 것이었기에 곽승재는 잠시 망설였다.고은서 쪽은 이미 소식이 전해진 상태였고, 프로젝트가 백유미에게 넘어갔다고 알게 되면 분명 화를 낼 것이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반응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최근 고은서는 드디어 좀 조용해졌고 백유미와 다툼이 없었던 만큼, 곽승재는 그녀가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유미야, 약품이 국민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누가 책임을 지든 중요하지 않아.”곽승재가 말했다.“여전히 힘들다면 최근에 너의 팀원들과 약품 관련 프로젝트를 더 많이 가져보는 것도 좋아.”백유미는 드디어 마음을 접었다. 그는 정말로 이 프로젝트를 자신에게 맡길 생각이 없는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
고은서는 얼굴과 몸이 온통 와인으로 범벅이 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와인은 그녀의 얼굴 결을 따라 드레스 위로 떨어졌고 머리카락에도 많이 튀었다. 그리고 젖은 앞머리 몇 가닥이 이마에 붙어 고은서를 더욱 가여워 보이게 했다.고은서는 놀란 듯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괜찮아요?”그 순간 곽승재와 송민준이 동시에 고은서를 향해 급히 다가왔다.곽승재가 송민준보다 한발 앞서 도착해 고은서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물었다.고은서는 몸을 살짝 떨면서 두려움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네, 괜찮아요.”누군가 물티슈를 건네자 곽승재는 서둘러 고은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여시은은 텅 빈 와인 잔을 들고 테라스에서 고은서와 멀지 않은 곳에 떡하니 서 있었다.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평소 감정을 잘 숨기던 여시은도 고은서의 이런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사이 로비의 음악은 멈췄고 상황을 보려는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은서야, 괜찮아? 어떻게 넘어진 거야?”여시은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고은서의 앞에 다가가며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하지만 고은서는 여시은을 보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몸까지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곽승재는 고은서를 안정시키듯 감싸며 여시은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여시은 씨, 대체 무슨 일이죠?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송민준이 곽승재보다 먼저 여시은에게 질문하고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고은서에게 걸쳐주려 했다.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곽승재가 재킷을 받아 고은서에게 걸쳐주었다.“시은아!”소식을 접한 여재훈이 급히 달려왔다.“아빠!”여재훈을 본 여시은은 든든한 빽이라도 생긴 듯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으윽...”여재훈이 여시은을 달래기도 전에 고은서가 타이밍 좋게 아픔을 참는 소리를 냈다.“왜요? 아파요?”고은서에게 재킷을 걸쳐주던 곽승재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다른 한 손으로 팔꿈치를 문지르는 동작을 했다.곽승재가 고은서의 팔을 살펴
이런 수법은 백유미도 쓴 적이 있었다.안타깝게도 여시은은 백유미처럼 곽승재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작은 곽승재에게 통하지 않았다.아마 고은서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탓인지 여시은의 시선이 마침 고은서에게로 향했다.고은서는 입가의 비웃음을 다 감추지도 못한 채 여시은과 눈을 마주쳤다.여시은의 눈빛이 차가워졌지만 고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에 들고 있던 주스를 한 모금 마시더니 여시은에게 잔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기분 좋게 앞쪽 테라스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이런 식으로 도발을 당한 적이 없었기에 참지 못하고 따라올 것으로 생각했다.역시나 고은서가 테라스에 도착지 얼마 되지 않아 뒤에서 여시은의 목소리를 들려왔다.“은서야, 왜 혼자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어? 송 대표님은?”여시은은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있었고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다.고은서는 잔을 내려놓으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여시은 씨, 매일 이렇게 연기하느라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니면 제가 여시은 씨처럼 건망증이 심한 줄 아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이런 태도를 보일 줄 몰랐는지 환했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은서야, 지난번에 아버지께서 우리 둘 사람을 불러 화해시켜줬잖아. 왜 아직도 화를 내고 있어?”여시은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슬픈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은서야, 너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쿠아가 사고를 당해서 이미 하늘나라로 갔어.”고은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쿠아가 죽었다고?’여시은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쿠아가 연못에 빠져 사고를 당했어. 연못에 금붕어들이 많이 있었는데 쿠아가가 놀면서 잡으려다가 빠진 모양이야. 내가 발견했을 때는 쿠아가 이미 물 위에 떠 있는 상태였어. 내가 직접 건져 올렸지만 쿠아의 몸이 이미 굳어버린 거 있지. 눈도 뜨인 채로 털은 전부 젖어서 몸에 붙어 있었어. 정말 안됐지...”고은서는 알고 있었다. 여시은이 일부러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을.그리고 쿠아가 물고기를 잡다가
곽승재는 현재 판주 투자은행에 있지만 감히 그를 얕보는 사람은 없었다.그는 곽씨 가문의 장손이자 곽씨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판주 투자은행에 간 것도 일종의 시련으로 여겨질 뿐이다.앞으로의 곽씨 그룹은 여전히 곽승재가 이어받게 된다는 것도 모두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인 곽승재는 평소처럼 검은색의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키가 크고 훤칠한 체구에 빼어난 외모는 마치 이곳이 그의 무대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여시은과 여재훈 역시 그에게 다가가 친근하고 허물없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주변에서는 곧장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곽씨 가문과 여씨 가문이 혹시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 거 아니에요? 저렇게 친밀하게 대화하는 걸 보면 마치 한 가족 같잖아요.”“아직도 모르셨어요? 여씨 가문이 이번 투자은행의 개업을 순조롭게 하게 된 것도 곽 대표님이 뛰어다니며 큰 도움을 줬다잖아요!”“얼마 전까지 곽 대표님이 연예인과 스캔들 난 거 아니었어? 요즘은 소식이 뚝 끊겼던데... 아마도 정략결혼 얘기가 오가면서 그런 여자들은 정리한 모양이네.”“솔직히 곽 대표님과 여시은 씨는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죠. 진짜 결혼하면 주가가 어디까지 치솟을지 가늠이 안 가네요!”“그러게 말이야. 얼른 주식 좀 사둬야겠다...”주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은서는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여시은이 곽승재와 결혼할 마음이 굉장히 확고한 모양이었다. 곽승재에게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여론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고은서는 그런 것에 한 치도 관심이 없었다.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KK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한 고은서는 홀로 로비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찾아온 몇몇 동업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곽승재 역시 고은서를 발견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두 사람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만 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여시은이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살짝 어두운 그림자가
여시은은 몇몇 귀부인들에게 고은서를 소개했다.고은서도 예의 바르게 그녀들에게 인사를 나눴다.“시은아, 이분이 바로 네가 말했던 요즘 사업을 크게 성공시키고 관청에서 상까지 받은 그 친구야?”화려한 옷을 입은 한 귀부인이 물었다.“네, 언니. 은서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라 제가 본받을 만한 점이 많아요. 우리 회사도 은서 회사처럼 잘 운영될 수만 있다면 너무 만족할 것 같아요!”여시은은 과장된 어조로 대답했다.“고은서 씨가 뛰어난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굴은 참 예쁘네.”이혜화로 불리는 사람이 이렇게 평가했다.“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니까. 자기 장점을 잘 파악하고 이용하다니! 우리 세대는 따라갈 수 없는 것 같아.”다른 한 귀부인이 감탄했다.고은서는 눈앞의 여자들의 말하고 있는 의도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성과가 얼굴 덕분이라는 얘기였다.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언니들이 이루신 지위와 성과에 비하면 제가 이 얼굴로 얻은 작은 성과는 비교도 안 되죠. 앞으로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언니들에게 많이 배워야겠어요.”고은서의 자기 비하와 아첨이 섞인 말을 들은 이혜화 일행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이때 여시은이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언니들, 은서가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말재주도 좋고! 제가 이렇게 훌륭한 분을 언니들에게 소개해 드리길 잘했죠?”고은서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제 생각에 더 대단한 분은 시은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하지만 시은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성공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예를 들어 제가 투자은행에서 오래 일하면서 크고 작은 만찬회도 많이 참석했지만 언니분들과 같은 귀한 분들을 만날 기회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시은의 개업식에서 이렇게 많은 언니를 한자리에 모이게 하다니 시은의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는걸요.”고은서는 살짝 한숨을 쉬며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서 시은이가 저를 부러워한다는
고은서도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큰일은 아니고. 만약 리셉션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오빠가 내 편을 들어줄 수 있을까 해서. 나 혼자 싸우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까 봐 좀 두렵거든.”송민준은 다시 한번 고은서를 안심시켰다.“은서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렇게 큰 심리적인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고. 그냥 평범한 연회처럼 생각하면 돼.”“알았어.”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오늘은 결코 평범한 파티가 아닐 것으로 추측했다.얼마 후, 차가 여씨 가문에서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다.이곳은 해성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친 5성급 호텔로 환경과 서비스 모두 매우 훌륭했다. 평소에도 연예인과 부자들이 기자회견이나 연회를 열 때 가장 선호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운전기사가 차를 현관문 앞에 멈추자 곧바로 웨이터가 와서 문을 열어주었다.운전기사에게 주차를 부탁한 송민준은 고은서에게 신사답게 팔을 내밀었다.고은서가 송민준을 바라보자 그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치 예의를 갖추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은서는 송민준과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가볍게 그의 팔에 손을 얹고 함께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현장에는 축하 화분들이 가득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그중에는 유일 투자은행의 화분도 있었는데 이는 고은서가 특별히 보내도록 지시한 것이었다.고은서는 여시은에게서 한 수 배웠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에게 불만이 있으면 있을수록 예의를 더 잘 지켜야 하며 상대방에게 어떤 흠도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나중에 관계가 틀어져도 사람들이 그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두 사람은 출석 체크를 마친 후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입구 근처에서 여재훈과 여시은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여재훈은 멋진 양복을 입었는데 전체적으로 성숙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여시은은 옅은 푸른 색의 맞춤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세련된 스타일은 그녀를 마치 상류층 귀부인처럼 우아해 보이게 했다.여시은은 고은서와 송민준을
어깨를 움츠린 송민아의 모습은 불쌍하고 유약해 보였다.“오빠가 너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둘이 진전이 없더라도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할 수는 있잖아?”고은서는 송민아를 노려보았다.“안 돼. 듣기 불편해.”“알았어. 앞으로는 두 사람을 연관 짓지 않을게. 이거 좀 놓을래? 무서워.”“...”고은서는 그제야 송민아를 놓아주었다.송민아는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독단적 행동에 적응하지 못한 듯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대표님, 다음부터는 말로 해주세요. 갑자기 이러니까 적응이 안 돼요.”고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네가 자꾸 나와 민준 씨를 엮으니까 그렇지. 민준 씨가 어떤 성격인지 몰라?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할 리 없잖아.”송민아는 고은서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송민준은 감정이 없는 기계가 아니라 정상적인 남자야. 이렇게 예쁘고 능력 있는 너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잖아?”“그리고 내가 오빠를 잘 아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다른 여자에게는 이런 인내심을 보인 적이 없거든.”송민아는 고은서의 옆에 바짝 다가앉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싫다면 더 이상 억지로 연결하지 않을게. 오빠가 정말 너를 좋아해도 중간에서 도와주지 않을 거야. 능력이 있으면 스스로 네 마음을 얻을 수 있겠지.”고은서가 진심으로 화낸 것은 아니었다. 여동생으로서 오빠의 연애를 응원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다만 송민준이 적인지 친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녀 감정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만약 송민준이 C선생이라면 그녀는 너무 구역질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어느새 여시은의 예흥 투자은행 개업식 날이 됐다.현장에서 간소하게 개업식을 치렀던 고은서와 달리 여시은은 5성급 호텔의 컨벤션홀을 빌려 리셉션 형식으로 개업식을 치른다고 한다. 리셉션은 오후에 시작돼 만찬회까지 이어진다.고은서는 만찬회 예절에 맞춰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블랙 정장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소재와 핏 모두 흠잡을 데 없이 고급스러웠다.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올리고 분위기에
그날 저녁, 라이트문 아파트에 돌아온 고은서는 주차장에서 곽승재와 마주쳤다.두 사람은 묵묵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엘리베이터를 탈 때, 고은서는 곽승재의 코트에서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여시은을 위해 직접 조합한 향이었다.이는 곽승재가 오후에 여시은과 함께 있었다는 증거였다.“오후에 여시은 씨 회사에서 미팅이 있었어. 퇴근할 때까지 줄곧 바빠서 전화를 못 했어. 그래서 끝나는 대로 라이트문 아파트로 온 거야.”곽승재는 지나가는 말처럼 설명했고, 고은서는 그냥 웃었다.여시은은 곽승재가 자리를 비웠을 때 일부러 코트에 향수를 뿌린 게 분명했다.‘이따위 유치한 장난질로 도발하는 건가?’...며칠 후, 고은서는 여시은이 보낸 개업 리셉션 초대장을 받았다.초대장은 송민아가 직접 사무실로 가져왔다.“여시은이 이번에 유명 기업인과 업계 엘리트를 대거 초대하고 언론사도 여러 군데 초청했나 봐. 우리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 때보다 훨씬 화려하고 이목이 쏠릴 것 같아.”고은서는 그저 웃었다.‘나한테 본때를 보여주려면 규모에서 압도해야 했겠지.’“은서야, 그날 나랑 같이 가자.”여시은이 고은서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그녀는 여시은을 유난히 경계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정형외과 프로젝트가 마무리 단계이니 너는 거기에 집중해. 그냥 리셉션 참석하는 거니까 별일 없을 거야.”하지만 송민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여시은이 너를 물에 빠뜨리기까지 했었잖아.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초대했을까? 분명 꿍꿍이가 있을 거야.”고은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심리학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고도 모르겠어? 여시은이 리셉션 주최자잖아. 문제가 생기면 체면을 구기는 건 그 여자야. 그렇게 멍청하게 자기 무대를 망칠 리가 없잖아?”“여시은이 나를 초대한 건 아버지 앞에서 겉으로는 친구인 척하며 친분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동시에, 내가 자기랑은 급이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겠지.”도리는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