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곽승재가 지난번에 한 말이 떠올랐다.서인수가 사람을 파견하여 그녀를 협박한 일은 우선 아무런 증거가 없고, 설사 그와 관련된 것이 밝혀지더라도 그가 스스로 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이 일로 경찰에게 체포된 거라면 기록 몇 장과 몇 마디 경고로 끝날 가능성이 컸다.그래서 주민기는 서인수의 배경을 조사하여 그가 비정상적인 수단을 사용한 이유로 개업 당일에 조사를 받도록 했다.‘몇 년 동안 감옥에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나오다니...’“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약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나오고 강한 사람에게는 겁을 내는 타입이에요. 이번에 대표님이 은서 씨를 위해 그를 처리한 걸 알았으니 다시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걸요.” 도아름은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그가 나올 때 내가 직접 가서 경고할 거예요. 다시 은서 씨를 괴롭히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요.” 고은서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알겠어요. 요즘은 그래도 법이 최고니까 그가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겠죠.” 이 일에 대해 조금 더 얘기를 나눈 후 도아름이 말했다.“지연 씨도 해외에서 돌아온 지 며칠 됐죠? 우리끼리 점심시간에 함께 식사하러 가지 않을래요?” “좋아요. 지금 지연 씨에게 연락해 볼게요.” 고은서가 핸드폰을 꺼내려던 찰나, 마침 박지연의 번호가 화면에 떴다. “어머, 통했네? 방금 너에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고은서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잠깐만, 나 먼저 얘기할래!”박지연이 말했다.“우리 팀원들이 단체워크숍을 가기로 했는데 가족도 함께 갈 수 있대. 온 닥터는 시간이 안 되어서 네가 나랑 함께 가줘!” 고은서가 물었다.“어제는 왜 얘기 안 했어? 이렇게 갑자기?” “어제는 너를 데려갈 계획이 없었어. 오늘 온 닥터가 마침 시간이 안 되니까 네가 대신 가달라고 부탁하는 거야.”박지연이 대답했다.“우리 정말 오랜만에 함께 놀러 가는 거잖아. 지금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아참, 네가 전화한 이유는 뭐야?”박지
곽승재가 그녀에게 회사 사람들이 토요일에 운호 산장에서 단체워크숍을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우연히 맞아떨어질 수는 없잖아. 박지연도 이곳을 선택했다고?’고은서는 박지연을 옆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곽승재와 짜고 온 거야?”박지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뭘 짜?”“모르는 척하지 마.”고은서는 박지연을 노려보며 말했다.“너 언제 곽승재에게 매수된 거야?”며칠 전 병원에서 만났을 때 박지연은 워크숍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오늘 갑자기 결정하고 이곳에 왔다. 게다가 고은서에게 구체적인 장소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의심을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고은서를 더 이상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보자 박지연은 그냥 헤헤 웃었다.“매수라고 하긴 그렇고, 우리 부서 몇 명끼리 정말로 놀러 오려고 했어. 마침 승재 씨가 이곳에 온다고 했거든. 또 워크숍 하는 김에 함께 하자고 초대해서 그냥 거절하지 않은 것뿐이야.”고은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박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원래 이런 작은 이득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어?”“작은 이득이 아니지, 운호 산장은 소비가 엄청나. 게다가 최상급의 천연 온천이라 미네랄 성분이 풍부해서 피부 요양과 회복에도 좋대. 너에게 딱 맞잖아! 내 전 재산을 걸고 말할게. 진심으로 너를 생각해서 그런 거야.”박지연이 대답했다.“전 재산까지 건다고? 전 재산 안 아까워?”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뭐가 아까워.”박지연은 고은서를 안으로 밀며 말했다.“승재 씨도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네가 예전에 가장 사랑했던 남편이잖아!”고은서는 한 대 치고 싶은 생각을 겨우겨우 참았다.“박지연, 네가 말한 대로 그건 예전의 일이고, 지금 나는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 네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뭐야?”“이혼하더라도 완전히 연락 끊고 지낼 필요는 없잖아?”박지연은 그녀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게다가 너희는 아직 부부잖아. 어차피 여기서 그를 안 만나도 집에 가서 만날
이곳 객실의 인테이러는 한옥의 독특한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전통과 현대적인 요소를 혼합한 한옥 스타일로, 가구와 소품들이 현대적임에도 원목으로 나름의 톤을 맞추어 잘 어울렸다.고은서의 방은 박지연과 같은 층이 아니었다.그녀가 방문을 열어보니 넓고 큰 침대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정갈하고 흰 이불 위에 붉은 장미꽃이 놓여 있었고, 꽃잎도 많이 뿌려져 있어 분위기를 한 층 더 살려 주었다. 또 여러 가지 쌍으로 된 장식품들이 분위기를 은근히 애매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작은 여행 가방이 옷장 옆에 놓여 있었고 고은서는 가방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그녀의 수영복, 잠옷, 기타 갈아입을 옷들 등이 있었고, 스킨케어 제품과 화장품도 있었다. 확실히 이미숙의 손길이 느껴졌다. ‘다들 내 일정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모르는 건가?’고은서는 수영복을 꺼내 입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약간 어색하게 느꼈다. 가슴 부분이 너무 많이 드러나지 않나 싶어서였다. 이 수영복은 원래 곽승재와 함께 온천에 가려고 사왔던 것이다. 곽승재가 냉정하게 거절한 뒤 그녀는 수영복을 넣어두었고 단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보기엔 꽤 평범한 스타일이었지만 막상 입어보니 너무 섹시한 핏이었다. 그때 외부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고은서는 박지연이라고 생각되어 문을 열며 물었다.“지연아, 이 수영복 좀 너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은서는 멈췄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박지연이 아니라 훤칠하고 잘생긴 곽승재였다. 그는 오늘 캐주얼하게 흰색 폴로 셔츠와 검은색 슬랙스 바지를 입고 있어서 평소의 딱딱함은 사라지고 한결 느긋하고 편해진 느낌이었다. ‘이 시간에 GS그룹 직원들과 온천에 가거나 차를 마시고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고은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몸에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수영복 디자인이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감싸고 있었다. 검은 천 아래 그녀의 가는
전처럼 다시 차가워진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렸다.“이곳 웨이터분더러 다른 수영복을 가져오라고 했어. 지금 문 열고 가져갈래? 아니면 그냥 문 옆에 놔줘?” “그냥 문 옆에 두고 넌 나가!”고은서가 대답했다.곽승재가 떠나려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복도에서 기다릴게.”그는 이렇게 말한 후 수영복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고은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새 수영복을 꺼내 갈아입었다. 이번 수영복은 비교적 보수적인 디자인이었고, 어깨가 별로 드러나지 않은 상의에 하의는 반 길이 스커트였다. 입어보니 훨씬 자연스럽고 편했다. 그녀는 가운을 걸치고 휴대폰을 들고 방을 나섰다. 곽승재는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몸에 잠깐 머물렀다. 가운 밑으로 드러난 길고 흰 다리를 보며 그는 입술을 살짝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자, 박지연 씨도 지금 온천 구역에 있어.”고은서는 여전히 말 못 할 어색함을 느끼며 대답했다.“내가 혼자 내려갈 테니 데려다 줄 필요는 없어.”“오늘 여기는 우리들만 이용할 수 있게 예약된 곳이야. 대부분이 GS그룹 회사 사람들인데 넌 내 아내로서 내가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지.”곽승재가 말했다.‘나에게 언제 신경 써준 적이 있다고 그래?’고은서는 속으로 불평했다.곽승재는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듯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예전엔 내가 소홀했어. 그때 못 해준 것들 지금 보충해 줄께.”“...”그의 상냥한 말투와 태도는 마치 어제 저택에서 싸웠던 일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고은서는 더 신경 쓰지 않았고, 어차피 이 며칠만 참으면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대로 이 산장에는 GS그룹 사람들로 가득했다. 온천 구역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이미 여러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그녀와 곽승재를 보며 그들은 매우 예의 바르게 불렀다.“대표님, 사모님.”또 많은 여성
그의 몸이 반응을 일으킨 것 같았다.두 사람은 아직도 안고 있었고 아래의 온천탕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휴대폰을 꺼내 몰래 찍고 있었다. 아주 그냥 개망신 현장이었다.곽승재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워서 고은서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 있지?’고은서는 곽승재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화난 표정을 보면서 곽승재는 팔에 살짝 더 힘주어 그녀를 높이 안아 올렸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감싸며 가장 가까운 온천탕으로 걸어갔다. 걸으면서 두 사람의 몸은 매우 밀착되어 있었다. ‘오늘 이곳에 오지 말아야 했어. 왔어도 바로 가야 했어...’ 곽승재를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냥 즐기라고 했던 박지연의 말을 들은 자신의 실수였다. 그건 다 헛소리였다. 곽승재는 절대 없을 수 없었고 그녀는 단 한 순간도 마음 놓고 즐길 수 없었다. 지금 그녀가 가장 원하는 건 쥐구멍에 숨는 것이었다. 고은서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향기가 코에 스며들며 곽승재는 자신이 곧 못 참을 것 같다고 느꼈다. “너 또...”품에 있던 고은서는 그곳의 변화를 느끼고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잔뜩 붉어진 얼굴과 분노가 들끓는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부끄러움과 화가 뒤섞여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곽승재는 온몸이 근질근질 해났고 그는 가까스로 참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조금만 참아, 온천탕까지 몇 걸음 안 남았어.” 이 말이 지금 이 상황에서 너무 어색하게 들려왔다. “이 나쁜 XX...”고은서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았고 당장이라도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너 자꾸 이런 표정을 지으면, 우리 다시 방으로 돌아갈까?”곽승재의 낮은 목소리에는 위협뿐만 아니라 욕망으로 가득했다. 고은서는 지금 더 이상 그를 자극하면 그때는 말로만 위협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실행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부끄럽고 화가 나면서
고은서의 분노와 발버둥을 느낀 곽승재는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수건이 곳곳에 걸려 있었고 고은서는 화가 난 것도 잊고 수건 하나를 던져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수건을 둘러매고는 수영장 주변의 작은 길을 따라 박지연을 찾으러 도망치듯 떠났다.곽승재는 물에 흠뻑 젖은 고은서를 지켜보았다. 보수적인 수영복은 여전히 그녀의 가는 다리와 곡선미를 가릴 수 없었고 그는 그녀를 놓아준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형, 듣고 있어?”육현석이 또 한 번 부르며 말했다.곽승재는 그제야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고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무슨 일이야?”“왜 이렇게 화가 났어? 욕구불만이야?”육현석이 장난치며 말했다.육현석은 자신이 무심코 한 농담이 마침 곽승재의 신경을 건드렸다는 것을 몰랐다.“앞으로는 일이 있으면 주민기에게 직접 전화해.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 상황 파악이 안 된 육현석을 혼자 남겨둔 채 곽승재는 버럭 화를 내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육현석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고 왜 갑자기 연락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찾아왔다.박지연은 그녀가 올 거라고 미리 알고 있었는지 동료들더러 다 나가보라고 했다. 그리고 손에 휴대폰을 들고 로즈꽃 온천에 앉아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웃어? 지금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할 뻔했다고!”고은서는 온천에 들어가며 화를 냈다.“내가 뭘 했는데? 그냥 너를 온천에 데려온 것뿐이야. 난 너와 승재 씨가 달콤하게 안고 있으라고 시키진 않았어.” 박지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냥 딱 한 번 가볍게 안을 줄 알았는데 떨어지기 아쉬웠나 봐? 네 주변 사람들은 곧 이혼할 거라는 걸 알고 있겠지만, 모르는 사람은 아직 신혼부부인 줄 알겠네.”방금 일어난 일을 생각하며 고은서의 얼굴이 다시 뜨거워 났다.사실은 박지연이 생각하는 로맨틱한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곽승재의 몸이 반응을 일으켜 그에게 맞춰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건 GS 그룹의 내부 직원 단톡방 아니야? 네가 왜 거기 있어?”고은서가 박지연을 바라보며 물었다.박지연은 떳떳하게 휴대폰을 돌려받고 댓글을 계속 읽으며 말했다.“이건 업무 단톡방이 아니고 그들이 따로 만든 뒷담화용 단톡방이야. 현석 씨가 나를 초대했어.”고은서는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너 인맥 꽤 넓어졌다? 현석 씨와 친해진 것도 모자라 이렇게 빨리 GS 그룹 내부에까지 들어갔어?”박지연이 말했다.“그냥 그들의 뒷담화가 궁금해서 들어간 거야. 걱정하지 마, 우리 둘 사이는 아무도 몰라.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다 진심으로 얘기하는 거야.”고은서는 말이 없었다.산장의 객실에서, 백유미는 문서들을 검토하고 있었고 단톡방의 메시지 소음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물을 다칠 수 없었다. 습식 사우나도 당연히 금지되어 있어 그녀는 놀이에 참여하지 않고 원지훈에게 줄 프로젝트를 연구하고 있었다.단톡방에서 이렇게 시끄럽길래 백유미는 휴대폰을 들고 무슨 재밌는 가십거리가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사진을 보자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사진은 여러 장이었고 모든 사진 속 곽승재와 고은서는 친밀하게 안고 있었으며, 곽승재의 눈빛에는 고은서를 향한 무의식적인 부드러움이 묻어 있었다.백유미는 휴대폰을 꽉 쥐며 부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오기 전에 그녀는 분명히 비서에게 확인했었고 곽승재가 혼자라고 했다. 그런데 왜 고은서가 이곳에 나타나 곽승재와 공개적으로 애정 표현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백유미는 자신을 진정시키며 성아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아연 씨, 고은서랑 관계를 어떻게 좀 해보라고 했잖아요, 왜 아직도 소식이 없죠?”아무도 그녀에게 소식을 전해주지 않아 그녀는 항상 일을 수동적으로 해야 했다.성아연은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백유미씨, 고은서는 저를 매우 경계하고 있어서 제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아요. 그래서 서두를 수 없어요.”“그럼 계속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을 건가요?”
“할 말 다 했어? 그럼 가도 돼.”곽승재가 사람을 쫓아내며 말했다.그러자 육현석은 당당하게 대답했다.“형, 아직 시간도 남았고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이 최상급 천연 온천에 안 들어가면 좀 아깝잖아, 그치?”곽승재는 그의 말을 예상했지만 전혀 신경 쓸 에너지가 없어서 그냥 명령했다.“나에게서 떨어져 있어.”그가 너무 눈에 띄어서 창피했다.“형, 형수님은 어디에 있어?”육현석은 곽승재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고 장난스럽게 물었다.“방금 형과 형수님이 공개적으로 애정 표현을 했다는 소문이 진짜야?”“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형, 어떻게 사람 마음이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어? 형수님이 있으면 나는 버리는 거야?”육현석은 서운하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먼저 박지연 씨를 설득해 형수님을 데려오게 했는데 형은 벌써 은혜를 잊었어? 이렇게 기쁜 일도 나와 공유하지 않으려 하면 어떡해!”“좀 조용히 해.”곽승재는 육현석이 시끄럽다고 느끼며 앞을 바라보았다.고은서와 박지연은 온천에서 나와 식사 구역으로 가고 있었다. 곽승재의 시선은 고은서의 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약간 젖어 있었고 매끈한 몸매에 우유처럼 흰 피부는 햇볕에 더욱 투명하게 빛났다.마치 물에서 막 나온 인어처럼 보였다.이전에 곽승재는 고은서가 이렇게 놀라운 미모인 줄 몰랐는데 왜 지금은 훨씬 더 예뻐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다른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 때도 곽승재는 매우 불쾌했다.육현석도 곽승재의 시선을 따라 고은서와 박지연을 보았다.두 사람은 가운을 두르고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밝게 웃고 있었다.“형, 아직도 앉아서 뭐 해? 배 안 고파? 뭐라도 먹고 싶은 거 없어?”육현석이 일부러 묻자 곽승재는 검은 눈을 들며 되물었다.“너 배고프냐?”육현석은 형이 자존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고개를 끄덕였다.“배고파, 형. 나 아직 형이 아끼는 동생 맞지? 같이 식사 좀 해줘.”곽승재는 마지못해 일어났다.“가자.”“...”육현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
고은서는 얼굴과 몸이 온통 와인으로 범벅이 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와인은 그녀의 얼굴 결을 따라 드레스 위로 떨어졌고 머리카락에도 많이 튀었다. 그리고 젖은 앞머리 몇 가닥이 이마에 붙어 고은서를 더욱 가여워 보이게 했다.고은서는 놀란 듯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괜찮아요?”그 순간 곽승재와 송민준이 동시에 고은서를 향해 급히 다가왔다.곽승재가 송민준보다 한발 앞서 도착해 고은서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물었다.고은서는 몸을 살짝 떨면서 두려움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네, 괜찮아요.”누군가 물티슈를 건네자 곽승재는 서둘러 고은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여시은은 텅 빈 와인 잔을 들고 테라스에서 고은서와 멀지 않은 곳에 떡하니 서 있었다.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평소 감정을 잘 숨기던 여시은도 고은서의 이런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사이 로비의 음악은 멈췄고 상황을 보려는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은서야, 괜찮아? 어떻게 넘어진 거야?”여시은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고은서의 앞에 다가가며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하지만 고은서는 여시은을 보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몸까지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곽승재는 고은서를 안정시키듯 감싸며 여시은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여시은 씨, 대체 무슨 일이죠?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송민준이 곽승재보다 먼저 여시은에게 질문하고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고은서에게 걸쳐주려 했다.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곽승재가 재킷을 받아 고은서에게 걸쳐주었다.“시은아!”소식을 접한 여재훈이 급히 달려왔다.“아빠!”여재훈을 본 여시은은 든든한 빽이라도 생긴 듯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으윽...”여재훈이 여시은을 달래기도 전에 고은서가 타이밍 좋게 아픔을 참는 소리를 냈다.“왜요? 아파요?”고은서에게 재킷을 걸쳐주던 곽승재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다른 한 손으로 팔꿈치를 문지르는 동작을 했다.곽승재가 고은서의 팔을 살펴
이런 수법은 백유미도 쓴 적이 있었다.안타깝게도 여시은은 백유미처럼 곽승재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작은 곽승재에게 통하지 않았다.아마 고은서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탓인지 여시은의 시선이 마침 고은서에게로 향했다.고은서는 입가의 비웃음을 다 감추지도 못한 채 여시은과 눈을 마주쳤다.여시은의 눈빛이 차가워졌지만 고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에 들고 있던 주스를 한 모금 마시더니 여시은에게 잔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기분 좋게 앞쪽 테라스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이런 식으로 도발을 당한 적이 없었기에 참지 못하고 따라올 것으로 생각했다.역시나 고은서가 테라스에 도착지 얼마 되지 않아 뒤에서 여시은의 목소리를 들려왔다.“은서야, 왜 혼자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어? 송 대표님은?”여시은은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있었고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다.고은서는 잔을 내려놓으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여시은 씨, 매일 이렇게 연기하느라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니면 제가 여시은 씨처럼 건망증이 심한 줄 아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이런 태도를 보일 줄 몰랐는지 환했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은서야, 지난번에 아버지께서 우리 둘 사람을 불러 화해시켜줬잖아. 왜 아직도 화를 내고 있어?”여시은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슬픈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은서야, 너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쿠아가 사고를 당해서 이미 하늘나라로 갔어.”고은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쿠아가 죽었다고?’여시은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쿠아가 연못에 빠져 사고를 당했어. 연못에 금붕어들이 많이 있었는데 쿠아가가 놀면서 잡으려다가 빠진 모양이야. 내가 발견했을 때는 쿠아가 이미 물 위에 떠 있는 상태였어. 내가 직접 건져 올렸지만 쿠아의 몸이 이미 굳어버린 거 있지. 눈도 뜨인 채로 털은 전부 젖어서 몸에 붙어 있었어. 정말 안됐지...”고은서는 알고 있었다. 여시은이 일부러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을.그리고 쿠아가 물고기를 잡다가
곽승재는 현재 판주 투자은행에 있지만 감히 그를 얕보는 사람은 없었다.그는 곽씨 가문의 장손이자 곽씨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판주 투자은행에 간 것도 일종의 시련으로 여겨질 뿐이다.앞으로의 곽씨 그룹은 여전히 곽승재가 이어받게 된다는 것도 모두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인 곽승재는 평소처럼 검은색의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키가 크고 훤칠한 체구에 빼어난 외모는 마치 이곳이 그의 무대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여시은과 여재훈 역시 그에게 다가가 친근하고 허물없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주변에서는 곧장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곽씨 가문과 여씨 가문이 혹시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 거 아니에요? 저렇게 친밀하게 대화하는 걸 보면 마치 한 가족 같잖아요.”“아직도 모르셨어요? 여씨 가문이 이번 투자은행의 개업을 순조롭게 하게 된 것도 곽 대표님이 뛰어다니며 큰 도움을 줬다잖아요!”“얼마 전까지 곽 대표님이 연예인과 스캔들 난 거 아니었어? 요즘은 소식이 뚝 끊겼던데... 아마도 정략결혼 얘기가 오가면서 그런 여자들은 정리한 모양이네.”“솔직히 곽 대표님과 여시은 씨는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죠. 진짜 결혼하면 주가가 어디까지 치솟을지 가늠이 안 가네요!”“그러게 말이야. 얼른 주식 좀 사둬야겠다...”주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은서는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여시은이 곽승재와 결혼할 마음이 굉장히 확고한 모양이었다. 곽승재에게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여론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고은서는 그런 것에 한 치도 관심이 없었다.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KK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한 고은서는 홀로 로비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찾아온 몇몇 동업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곽승재 역시 고은서를 발견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두 사람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만 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여시은이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살짝 어두운 그림자가
여시은은 몇몇 귀부인들에게 고은서를 소개했다.고은서도 예의 바르게 그녀들에게 인사를 나눴다.“시은아, 이분이 바로 네가 말했던 요즘 사업을 크게 성공시키고 관청에서 상까지 받은 그 친구야?”화려한 옷을 입은 한 귀부인이 물었다.“네, 언니. 은서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라 제가 본받을 만한 점이 많아요. 우리 회사도 은서 회사처럼 잘 운영될 수만 있다면 너무 만족할 것 같아요!”여시은은 과장된 어조로 대답했다.“고은서 씨가 뛰어난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굴은 참 예쁘네.”이혜화로 불리는 사람이 이렇게 평가했다.“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니까. 자기 장점을 잘 파악하고 이용하다니! 우리 세대는 따라갈 수 없는 것 같아.”다른 한 귀부인이 감탄했다.고은서는 눈앞의 여자들의 말하고 있는 의도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성과가 얼굴 덕분이라는 얘기였다.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언니들이 이루신 지위와 성과에 비하면 제가 이 얼굴로 얻은 작은 성과는 비교도 안 되죠. 앞으로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언니들에게 많이 배워야겠어요.”고은서의 자기 비하와 아첨이 섞인 말을 들은 이혜화 일행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이때 여시은이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언니들, 은서가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말재주도 좋고! 제가 이렇게 훌륭한 분을 언니들에게 소개해 드리길 잘했죠?”고은서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제 생각에 더 대단한 분은 시은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하지만 시은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성공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예를 들어 제가 투자은행에서 오래 일하면서 크고 작은 만찬회도 많이 참석했지만 언니분들과 같은 귀한 분들을 만날 기회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시은의 개업식에서 이렇게 많은 언니를 한자리에 모이게 하다니 시은의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는걸요.”고은서는 살짝 한숨을 쉬며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서 시은이가 저를 부러워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