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운세를 확인했던 걸 하며 후회하는 육현석이었다.특별히 주문 제작한 핸드폰은 곽승재로 인해 폐기되는 결말을 맞이했다.유심 카드를 꺼낸 육현석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형, 아무리 화가 나도 형수님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진짜인 줄 오해한단 말이야.”곽승재는 정말 폭발 직전에 놓여 있었다.“내가 한 말 모두 진심이야!”“그래, 그래. 진심이야.”육현석은 더 이상 곽승재에게 따지지 않고 그의 말에 맞장구치며 웨이터에게 지혈제와 반창고를 가져오게 했다.다양한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술집답게 기본적인 약물은 모두 갖춰져 있었다.곽승재의 비협조 속에서 육현석은 그의 손바닥에 지혈제를 발라주고 반창고 몇 개를 겨우 붙여 지혈할 수 있었다.한바탕 고군분투 끝에 곽승재는 드디어 조용해졌다. 그는 피곤한 듯 의자에 기대어 있었는데 검은 눈동자는 심연처럼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고 손에는 여전히 술잔을 든채 기울이고 있었다.“형, 확실히 조사한 거 맞아? 형수님이 임신한 아이 정말 형 아이는 아니야?”육현석이 말을 이었다.“형수님이 그렇게 방탕한 사람은 아니잖아.”곽승재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본인이 인정했어.”육현석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형수님이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까?”“내가 직접 민시후가 자신의 아이이니 고은서한테 결혼하자고 하는 말을 들었어!”여기까지 말을 마친 곽승재는 화가 치밀어 올라 고은서를 죽여버리고 싶었다.‘내가 민시후와 사이좋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그 새끼랑 어울리면서 아이까지 만들다니!’“사람 시켜서 민시후 다리 분질러버려.”곽승재의 눈에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남은 생은 휠체어를 타게 만들어야 누굴 건드렸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앞으로 다른 사람도 건드리지 못하겠지.”육현석은 곽승재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지금 평소와는 달리 엄격하고 이성적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육현석은 어쩔 수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설득했다.“형, 민시후 다
민시후가 싸늘히 웃으며 답했다.“다른 이유가 있겠어? 송민아를 위해 나서서 나한테 경고하는 거 아니야?”송민준도 웃었다.“너희들을 소란스럽게 만들어서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어? 민아는 그냥 너랑 결혼하고 싶은 거야. 그러면 우리 가족들도 그걸 고려하지 않을까?”민시후는 송민준의 말에 넋이 나갔다.송민준이 송민아의 결혼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나서서 소란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송민준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송민준은 감추는 게 많았고 평소 일 처리 방식도 독특했다.그는 아무 이유 없이 클럽에 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공교롭게 고은서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송민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임철원이 그렇게 빨리 사람을 데리고 복수하고 도망친 건 누가 뒤에서 도와준 거지?’“넌 내가 갑자기 찾아온 게 의아하지 않은 가 보네? 어젯밤 일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고.”민시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송민준은 평소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답했다.“나도 관련 게시물을 봤거든. 네가 보면 오해할 것 같았어. 어제 클럽에 간 건 단순히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야.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 먼저 갔는데 나도 더 이상 거기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지. 시후야, 오히려 내가 묻고 싶어.”송민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민시후는 긴장을 풀고 다른 의자에 다리를 걸치며 답했다.“물을 필요 없어. 고은서가 임신한 건 사실이야.”송민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네 애야?”“그럼?”“민아 쪽은 어떻게 할 예정이야?”“어차피 혼사는 너희들이 멋대로 결정한 거니 나랑은 상관없어. 나는 단 한 번도 민아랑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시후 오빠!”송민준이 뭐라 하기도 전에 화가 난 송민아가 찻집 병풍 뒤에서 뛰쳐나왔다.“고은서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그 여자 때문에 나랑 파혼하겠다는 거예요?”갑자기 나타난 송민아였음에도 민시후는 그저 놀란 표정을 지었을 뿐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되
민시후는 지긋지긋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민아가 스스로 혼나기를 자초한다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야.”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찻집 문으로 향하며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렸다.“시후야, 고은서 씨의 아이가 너랑 관련이 있든 없든 무리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아저씨 쪽에서는 나만큼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거야.”“지금 협박하는 거야?”민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송민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답했다.“그저 충고야.”말을 마친 송민준이 긴 다리로 자리를 떴다.민시후는 멀어지는 송민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늦은 밤 간병인을 돌려보낸 고은서는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병실은 아무리 좋아도 병실이었다.지워지지 않는 소독약 냄새는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고은서는 핸드폰을 꺼내 주의를 분산시키려고 했다.동영상을 보고 있을 때 고은서는 주인혁이 참가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편집한 영상에는 인기 많은 멤버가 몇 명 있었는데 주인혁도 그중에 포함되었다.주인혁은 제작인이 일률로 나눠준 훈련복을 입고 있었는데도 남들보다 훨씬 더 밝고 멋져 보였다.노래할 때 주인혁의 우월한 비주얼과 독특한 무대 매너는 더 눈에 띄었다.댓글에서도 주인혁의 정보를 묻는 사람이 많았고 또한 순정 만화 주인공과 같은 동시에 묘한 야성미가 느껴져 설렌다는 댓글들도 보였다.그러한 댓글에 고은서는 진심으로 주인혁을 위해 기뻐했다. 마치 친동생이 철들고 출세해서 느끼는 자부심과 우월감도 느꼈다.요즘 주인혁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아마 훈련으로 바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30위 안에 든 사람들을 위해 주최 측에서 축하 파티를 한다더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고은서는 굳이 주인혁에게 메시지를 보내 방해하지 않고 앱에 들어가 그가 출연한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다.전생에도 핫했던 오디션 프로그램답게 화질과 편집은 확실히 좋았고 참여자들도 저마다의 특색이 있었다.연속 두 편
오후에 화가 나서 떠나고 저녁에 했던 통화에서도 매서웠던 곽승재의 기세에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지금 와서 따지려는 건 아니겠지?’고은서 혼자서는 곽승재를 이길 수 없었다.졸음에서 거의 깨어난 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벨을 눌러 간호사를 불러 곽승재를 쫓아내려고 했다.하지만 손을 다 뻗기도 전에 곽승재가 정확히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취한 것 같은데 왜 동작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거야?’“뭐 하려고?”곽승재가 싸늘히 웃으며 물었다.술에 취했는지 그의 말은 평소보다 느렸고 눈빛은 평소보다 더 제멋대로였고 평소보다 더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고은서는 모르는 척 합리적인 핑계를 댔다.“목말라서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하려고.”곽승재가 긴 팔을 뻗어 침대맡에 놓여있던 컵을 그녀에게 내밀었다.“마셔.”곽승재에게 강하게 잡힌 고은서는 힘껏 발버둥 치지 못하고 나지막이 말했다.“이건 식었잖아. 따듯한 걸 마시고 싶어.”그 말을 들은 곽승재의 입가에 불현듯 요염한 미소가 번졌다.곽승재는 컵에 든 물을 마시고 고은서의 얼굴을 감싸 쥔 채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싫어!”곽승재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고은서는 얼른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성깔이 올라온 곽승재는 입을 가린 고은서의 손을 잡더니 기어코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목 안 말라!”그의 입이 닿은 순간 고은서는 급하게 외치며 고개를 돌렸다.곽승재의 입술은 그녀의 귓불에 닿았고 차갑고 물기 있는 입술이 귓가에 떨어지자 고은서는 전율을 참을 수 없었다.곽승재는 무언가 재밌는 일이라도 발견한 듯 차가운 입술로 그녀의 귓바퀴, 목, 쇄골을 훑으며 고은서를 자극했다. 그녀는 당황하면서 끊임없이 몸부림을 쳤다.“곽승재! 꺼져! 나쁜 놈!”수치심을 느낀 고은서가 분노에 차 외쳤다.그녀의 불편함을 느꼈는지 곽승재는 정말 움직임을 멈췄다.하지만 고은서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뜨거운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그는 그녀의 두 손을 침대 위로 누르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고 고은서는 아파서 오열했다.그에 반해 곽승재는 평소보다 더 흥분하여 그녀의 긴 목덜미를 미친 듯이 유린했다.귓가에서 들려오는 곽승재의 숨결은 거칠고도 뜨거워 고은서는 자기가 호랑이 굴에 떨어진 약한 먹잇감처럼 느껴졌다. 굶주린 맹수에게 한입에 핥이고 삼켜질 것만 같았다.이때의 곽승재는 평소의 냉철함은 완전히 사라지고 입술과 손은 뜨거웠고 몸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고은서는 더 깊게 잠든 야성을 불러올까 두려워 감히 몸부림칠 생각도 하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었다.이내 곽승재는 키스에 만족하지 않고 손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약간 거친 손가락이 여린 피부를 스치자 고은서는 온 몸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간지럽고 저릿했다. 곽승재는 두 팔로 그녀를 꼭 껴안았는데 마치 그녀를 품속에 가두고 싶은 듯한 모양새였다.단단히 붙들린 고은서의 체온도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하면 통제 불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아직 몸이 허약한 그녀는 이런 자극을 견딜 수 없었다.강한 태도로 곽승재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고은서는 태도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짜내며 자신을 불쌍하게 보이려 애썼다. 고은서는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승재 씨, 아파. 놔줘.”안쓰러운 그녀의 어조 때문인지 곽승재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눈꼬리가 붉어지고 눈빛이 뜨거워진 곽승재에게는 여전히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는데 그걸 본 고은서도 너무 뜨거워 뜨끔해졌다.“오빠....”고은서는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어 말했다.“나 놔주면 안 돼?”곽승재의 눈빛이 반짝이며 더없이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라고 부른 거야?”그의 손바닥이 더 이상 아래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고은서가 가볍게 대꾸했다.“승재 오빠...”이 호칭을 들은 곽승재는 두 손으로 그녀를 더 꽉 껴안으며 기쁘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은서야, 나 좋아하잖아. 그런데 왜 허락하지
고은서는 곽승재의 광기와 집념을 엿보고는 소리쳤다.“지금 나를 만진다면 정말 평생 미워하고 원망할 거야!”“미워할 거면 그렇게 해. 어차피 나랑 평생 살 생각 없잖아.”곽승재는 차가운 눈초리로 벨트를 내던지고 서슴없이 다가왔다.갑작스럽고 낯선 통증에 고은서는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곽승재의 팔뚝을 물었다. 마치 살점을 뜯어낼 것처럼 말이다.곽승재는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강하게 움켜쥐어 고은서가 어쩔 수 없이 입을 풀게 했다.“곽승재,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너랑 같이 죽을 거야.”고은서가 눈물을 머금은 채 원망과 결심이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자식 아이를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야?”차갑게 말한 곽승재의 얼굴은 더욱 싸늘해졌고 그는 고은서의 두 다리를 더 꽉 조였다.병실 안은 순식간에 곽승재의 거친 숨결과 고은서의 오열로 가득 찼고 몇 마디의 질책도 뒤섞였다.얼마나 지났을까, 곽승재의 눈동자는 더욱 붉게 변했고 그는 몸을 숙여 고은서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고은서, 아이는 지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야.”말할 힘까지 다 빠져버린 고은서는 눈물도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었다....고은서는 갈증이 나서 잠에서 깼다.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물을 마시려고 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움직이지 마.”박지연의 소리에 겨우 눈을 뜬 고은서는 비로소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박지연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는데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로 보건대 이미 대낮이었다.어젯밤 곽승재에게 들들 볶여 숨이 막혔던 고은서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곽승재가 언제 갔는지 그녀는 몰랐고 박지연이 온 사실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물 마시려고? 따라줄게.”박지연은 그녀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고 그녀를 일으켜줬다.갈증이 났던 고은서는 물 한 잔을 다 마셔버렸다.“더 마실래?”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늘 당직 아니잖아. 어쩐 일이야?”“곽승재가 불러서 왔어.
고은서는 더욱 이를 갈며 말했다.“정말 나한테 무슨 짓을 했다면 강간죄로 신고했을 거야! 근데 너는 우리가 안 했다는 걸 어떻게 알아?”고은서가 의문스럽게 물었다.박지연이 답했다.“곽승재가 혹시라도 내가 상황을 모르고 전신 검진을 받게 할까 봐 숨기지 못하더라고.”‘그랬구나.’지금 고은서의 모습은 검진을 받기 적합하지 않았다.“곽승재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널 신경 쓴다고 하기에는 한밤중에 와서 네가 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괴롭히고... 그렇다고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약 발라주고 날 불러서 너랑 같이 있어 달라고 하고...”박지연이 계속 투덜댔다.어젯밤 미친 듯이 행동한 곽승재를 떠올린 고은서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그는 통제 불능인 짐승처럼 그녀를 산 채로 잡아먹고 싶어 하는 듯했다.특히 그녀의 목을 문 순간, 고은서는 정말 물려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곽승재가 받은 충격이 가볍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은서야, 곽승재한테 무슨 일 있어?”박지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아침에 봤을 때 뭔가 알 수 없는 갈등을 품고 있는 것 같았어. 뭐가 고민일까? 네가 깨어날 때까지 직접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냥 가더라고. 남의 아이를 임신했는데도 이혼하고 싶지 않은 건가?”어젯밤 곽승재가 그녀의 귓가에 했던 말이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아이는 지워. 다시 시작하자.”곽승재의 성격상 이혼하지 않는 건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서인데 다시 시작하자는 제안을 해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아침에 서둘러 자리를 뜬 건 어쩌면 그런 말을 후회해서 그럴지도 몰랐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소송으로 갈 거야.”고은서는 민시후에게 변호사를 찾아달라고 한 부탁은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은서야, 곽승재가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소송으로도 이기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본 거야?”박지연이 물었다.이 말은 민시후도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었다.“내가 왜 민시후한테 도움을 청한 것 같아?”고은서는 더
고은서와 박지연은 백유미가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옷을 걷어 올린 뒤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아니요. 안 돼요.”고은서의 답을 들은 백유미는 화내지 않고 간병인에게 병실로 넣어달라고 하고는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사모님, 요 며칠 동안 허리가 너무 아파서 일어나지 못해 제때 보러 오지 못했습니다. 별일 없으시죠?”박지연은 참지 못하고 눈을 흘기며 말했다.“얼굴도 두껍네요. 은서가 환영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유미 씨, 사모님을 구하려다가 다쳤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백유미 옆에 있던 간병인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감사해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못되게 구는 거예요?”갑작스러운 간병인의 참견에 어색해진 백유미는 부드럽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아주머니, 먼저 나가주세요. 사모님이랑 말씀 좀 나누게요.”“은서는 당신이랑 할 말 없어요. 그대로 나가세요!”박지연은 성모처럼 구는 백유미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정말 온 세상에 혼자만 좋은 사람인 것처럼 굴죠! 다 속셈을 품고 있다는 거 알아요!”박지연의 말을 듣고 백유미의 표정은 더 어색하게 굳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지연 씨랑 사모님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그대로 해명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어제 대표님이 주 비서님한테 아침을 보낸 건 그냥 겸사겸사 한 일이에요. 특별한 뜻은 없어요.”백유미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이 화나서 또 무슨 충동적인 행동을 할까 봐 이틀 동안 제 병실에도 오지 않으셨어요. 저랑 대표님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더 이상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백유미 씨 뜻은 곽승재가 당신을 보러 갔다는 사실을 은서가 알면 죽기 살기로 난동을 부린다는 말인가요?”박지연이 참지 못하고 백유미의 말을 가로챘다.“그래서 곽승재는 그 이유때문에 당신한테 몰래 관심을 줄 수밖에 없었고?”백유미는 동요 없이 답했다.“그 뜻이 아니에요. 저는 단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