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전에 민시후랑 밥 먹을 때마다 곽승재가 각종 이유로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 했던 게 떠올랐다.그녀 또한 이번에도 똑같은 수법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도 별로 민시후랑 함께 판다 기지에 가고 싶지 않았는지라 그를 설득해 보내려고 했다.“형이야? 그래도 한 번 돌아가 보는 게 어때? 시찰은 며칠 미루면 되잖아.”고은서가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상대방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방금 전보다 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민시후, 날이 갈수록 더 버릇없게 구는 거 아니야? 지금 그 여자 때문에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데도 돌아오지 않겠다는 거야?”“내가 버릇없이 군 게 한두 날이야? 차라리 내가 철들길 원하는 게 더 어리석은 거지.”민시후는 호통치고는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은서가 그를 계속 설득하려고 할 때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린 민시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고은서, 너 지금 날 보내고 곽승재랑 단둘이 데이트하려고 하는 거지? 그딴 생각은 지금이라도 접는 거 좋을 거야.” “날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갑자기 질투하는 것처럼 왜 이래? 사람 오해하게 만들지 마. 그리고 난 너희 집안 사람들에게 찍혀서 내 평범한 일상을 망치면서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기 싫어.”고은서의 솔직함에 민시후는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지금 나랑 선을 긋는다고 해도 이미 늦었어. 네가 내 아이를 가졌다는 기사를 막긴했으나 이미 다 알고 있거든.”‘다 알고 있다고? 그러면 안 되는데. 송민아가 민시후한테 약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먼저 말을 꺼내거든 민씨 집안 사람들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지금이라도 모든 사실을 토로하면 믿어줄까?”고은서의 물음에 민시후는 단호하게 답했다.“소용없을걸.”“...”“고은서, 지금 다들 내가 너 없으면 못 산다고 믿고 있어. 어때? 만족해?”민시후가 물었다.‘뭘 만족한다는 거야? 난 그저 그때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말해봤을 뿐인데 일을 이렇게 만든 진짜 범인은 너잖아.’고
고은서가 방 하나를 더 요구할 때 프론트 데스크 직원이 갑자기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죄송합니다, 손님. 오늘 방이 다 만원이어서 드릴 수 있는 빈방이 없네요.”고은서는 시간을 확인하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저녁 시간도 아닌데 빈방이 없다고요?”직원은 이 호텔이 판다 기지 부근 호텔이어서 거의 매일 만원이라고 전했다.고은서는 민시후에게 신분증을 돌려주면서 말했다.“다른 호텔로 가.”민시후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답했다.“힘들어 못 가겠어. 그냥 네 방에서 하룻밤 보낼게.”“아니. 넌 안 힘들어. 그리고 이런 무리한 요구는 절대 들어주지 않을 거야.”고은서는 그에게 신분증을 던져주면서 말했다.민시후는 고은서에게 다른 호텔에 방을 잡아주면 가겠다고 약속했다.그러나 그녀가 주변 호텔에 다 연락해 물어보았지만 최근 아기 판다를 만질 수 있는 새로운 활동이 생기면서 판다 기지를 찾는 사람도 같이 늘어 다 빈방이 없다고 했다.“민 대표님, 설마 이곳으로 오기 전에 비서한테 미리 방 잡아두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일부러 이러는 거죠?”고은서의 물음에 민시후는 껄렁대며 답했다.“이런 작은 일까지 내가 직접 신경 써야 해? 아니면 지금이라도 네가 직접 물어보든가.”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내가 왜 물어봐? 비서가 잘못을 저지른 게 네 책임이지 내 책임이야? 길바닥에서 자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그러나 민시후는 화를 내기는커녕 웃으면서 말했다.“너무 야박한 거 아니야? 그럼 난 어쩔 수 없이 네 호텔 방 앞에서 이불 깔고 자야겠네. 누가 물어보면 여자친구한테 쫓겨났다고 하지 뭐.”“제 방을 저분한테 주세요.”고은서가 화를 내려고 할 때 차가운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그는 깨끗한 옷차림에 작은 캐리어 하나를 끌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같은 비행기랑 같은 목적지, 심지어 호텔까지 같은 호텔이라고?’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의 스케줄을 알고 일부러 따라온 것이라고 확신했다.그러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덤덤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뻔했다.여자는 괜찮다는 듯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여시은이라고 합니다. 몇 년 전에 Y 국 연회에서 뵌 적이 있는데 당시 저희 아버지랑 얘기 나누고 있을 때 제가 실수로 곽 대표님과 부딪히면서 곽 대표님 몸에 술을 쏟은 적이 있어요.”곽승재는 한참 고민 끝에 끝내 기억해냈다.“여 대표님 딸 맞나요?”“네. 그래도 저희 아버지가 은근히 이름 있나 봐요. 그래도 기억해줘서 고마워요.”여시은이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곽 대표님, 혹시 방이 모자라나요? 제가 마침 방 두 개를 예약했는데 하나 드릴게요.”여시은의 애교 섞인 목소리는 다른 사람과 달리 반감이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도 귀엽게 생기고 몸도 작고 가녀려서 저도 모르게 보호해주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방 두 개를 예약한 원인이 따로 있을 텐데 저희가 민폐 끼치는 거 아닌가요?”고은서가 물음에 여시은은 웃으면서 답했다.“괜찮아요. 쿠아 데리고 왔는데 혹시라도 저랑 같은 공간에 있는 걸 불편해하면 다른 방에 혼자 있게 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제 생각과 달리 적응능력이 엄청 강해서 별문제 없이 저랑 잘 지내고 있어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자신의 크로스백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뽀송뽀송한 고양이 한 마리가 머리를 쏙 내밀었다.고은서의 얼굴에는 이내 화색이 돌았다.“전에 구한 그 고양이인가요? 너무 귀여워요.”“맞아요. 발을 다치는 바람에 병원에 가서 처치했거든요. 그래서 걷기 시작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요.”여시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고양이는 사람을 무서워하긴 했으나 고은서의 손길은 피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은 목소리로 야옹거리며 애교까지 부렸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고양이의 머리를 몇 번 더 어루만졌다.쿠아를 좋아하는 고은서를 보며 여시은은 그녀에게 제안했다.“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밥이라도 먹지 않을래요?”마침 민시후랑 곽승재를 혼자 마주하기 싫었던 고
고은서는 아예 두 사람의 대화를 무시하고 여시은에게 물었다.“우리 다른 테이블로 갈까요?”그러나 여시은은 재밌다는 듯 사양했다.“괜찮아요. 떠들썩하고 재밌고 좋은데요.”‘완전 팝콘각으로 생각하면서 흥미진진해 하는 거 같은데.’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분위기가 어색하긴 했지만 주문은 예상 밖으로 순리롭게 진행되었다. 여시은이 매운 음식을 별로 먹지 못했기에 안 매운 음식도 함께 주문했다.음식들이 하나둘씩 오르기 시작했고 네 사람은 함께 저녁 식사를 즐기기 시작했다.얼마 후 여시은은 배부르다고 젓가락을 내려놓고 옆에서 끊임없이 야옹거리는 쿠아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이내 세 사람만 남게 되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앉은 고은서는 무언의 압력을 느꼈다.곽승재는 매운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지만 어떤 음식이 맛있고 어떻게 먹으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걸 꿰뚫고 있었다.그는 별로 먹지도 않고 계속 고은서를 위해 음식을 짚어주었다.심지어 고은서에게 티슈를 건네주거나 물을 건네주는 등 다정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곽 대표, 서비스가 끝내주는데? 차라리 웨이터로 재취업하는 건 어때? 연말 랭킹 1위쯤은 식은 죽 먹기일 것 같은데.”민시후가 옆에서 비아냥거렸다.곽승재는 그를 힐끗 쏘아보고는 계속 고은서를 위해 음식을 짚어주었다.바로 이때, 민시후의 핸드폰이 울렸다. 곽승재를 도발하던 그는 행동을 멈추고 옆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나 배불러.”다른 한 편 고은서는 곽승재의 행동을 제지했다.“매운 음식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얼마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배불러?”곽승재가 물었다.“입맛이 별로 없어서. 의사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시간 낭비는 그만하고 내일 의사 만나고 곧바로 해성으로 돌아가.”고은서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전에 나한테는 시간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이유가 민시후랑 여행하기 위해서였어? 민시후가 너 때문에 다친 내 상처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야?”곽승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내
고은서는 또 한 번 곽승재의 변화를 느꼈다.공항에서도 비행기에서도 그리고 호텔 로비에서도 민시후와 함께 있는 그녀를 전처럼 강제로 끌고 가지 않았다.방금전에 다시 시작하자고 일련의 약속을 한 것도 너무 뜻밖이었다.과거의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이런 약속을 한 적이 없었다.그의 눈빛을 보아서는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아마 전생의 그녀였다면 혹은 금방 환생한 그녀였다면 이런 말을 듣고 한참 고민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의 고은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안 돼.”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곽승재는 순간 눈에 띄게 실망해 했다.“은서야,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거절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 당신이 내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뭘 안다고 그래?”고은서가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곽승재는 순간 자괴감 때문에 고개를 푹 숙였다.“알고 있어. 내가 다 보상해줄게.”‘아니,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또다시 거절했다.“필요 없으니까 내 가까이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은서야...”“뭐야? 고백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민시후가 걸어오면서 비아냥거렸다.“민시후!”종일 참고 있던 곽승재의 분노가 끝내는 폭발했다.“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회사를 똑같은 위기에 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그러나 민시후는 무서워하기는커녕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ZY 그룹뿐만 아니라 차라리 북제에 있는 민씨 가문 전체를 망가뜨리지 그래? 더 재밌을 것 같은데.”“내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해?”곽승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겠지. 사업계의 유일무이한 존재인 GS그룹의 곽 대표에겐 아주 쉬운 일이겠지.”민시후가 비꼬는 듯한 말투로 그를 약 올렸다.“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날 북제로 돌려보내려고 한 것 같던데. 형한테서 전화가 오지 않나, 나중엔 아버지한테서 직접 전화가 오고 말이야. 왜? 고은서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겁나?”
그녀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당연히 곽승재가 한 짓이겠지. 집으로 가지 않으면 아마 끊임없이 연락 올 거야.”아버지의 연락을 받은 그는 부득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택시 불러줄 테니까 너 혼자 가. 굳이 내가 같이 가줄 필요 없잖아.”“두 시간이란 시간을 나한테 투자하면 이틀 동안 심지어 더 많은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될 텐데 설마 내가 계속 네 곁에 붙어있길 바라는 거야?”민시후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이건 그냥 답정너잖아.’고은서는 당연하게도 두 시간으로 더 많은 자유 시간을 얻는 걸 선택할 것이다.‘민시후가 가면 곽승재도 더는 내 곁에 있을 이유가 없겠지. 그렇게 되면 나도 진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거야.’민시후가 비서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끊어달라고 부탁할 때 고은서는 먼저 중식집 밖으로 나갔다.여시은은 중식집 앞에 있는 잔디밭에서 만년필 하나를 들고 고양이와 놀아주고 있었다.고양이가 이리저리 뛰면서 그녀의 손을 물려고 할 때마다 그녀는 온화한 목소리로 만년필을 물라고 고양이를 달랬다.여시은은 잔디밭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는데 검은 긴 생머리가 어깨 위에 자연스레 풀어 헤쳐져 있었다. 나긋한 목소리로 고양이를 달래는 그녀의 모습이 유독 마음에 와닿았다.그러다 갑자기 고양이가 그녀가 쥐고 있던 만년필을 땅에 떨어뜨렸다.그러나 그 만년필을 피뜩 들여다본 고은서는 아주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름 아닌 곽승재가 갖고 있던 만년필이었다.전에 곽승재의 물건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두고 소중히 여기던 고은서는 그 만년필이 곽승재가 평소에 쓰던 만년필이란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은서 씨.”그녀의 시선을 감지한 여시은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고은서도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호텔로 갈 거예요? 아니면 여기서 쿠아랑 더 놀아주고 갈 거예요?”“당연히 호텔로 가죠. 마침 쿠아도 배고파하는데 잘됐네요.”여시은이 고양이를 안고 고은서를 향해
쓸데없는 물음이었다. 그녀가 그 이유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전에 몇 번이고 물어봐도 날 놀리면서 안 알려주더니 이번엔 진짜 알려주려는 건가?’“이유가 뭔데?”고은서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알고 싶으면 같이 뒷좌석에 앉아줘. 그래야 말하기 편하잖아.”민시후가 껄렁거리며 말했다.망설임도 잠시, 고은서는 이내 뒷좌석에 올라탔다.그녀는 민시후와 곽승재 사이의 모순에 관해 너무 알고 싶었다.게다가 차에 기사도 있었고 민시후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물론 기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알고 있는 민시후는 사람을 함부로 대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민시후도 그녀를 따라 뒷좌석에 앉았다.문을 닫은 후 민시후는 폰을 꺼내 그녀와 함께 셀카 한 장을 찍고 누군가에게 전송했다. 그리고 어딘가로 음성메시지를 보내며 깐족댔다.“곽 대표, 봤지? 고은서가 날 공항까지 데려다주면서 심지어 나랑 같이 앉기 위해 뒷좌석에 탔다니까. 당신은 날 못 이겨.”‘왜 갑자기 진지하게 슬픈 감정에 젖어있는 것처럼 곽승재 얘기를 먼저 꺼내냐 했더니 곽승재랑 내기 한 거였어?’“그만 쳐다봐. 나도 곽승재한테 당하고만 있을 수 없잖아. 받은 만큼 돌려줘야지.”“아까 둘이 만나서 내기하자고 했어?”고은서가 눈이 휘둥그레서 물었다.방금 전, 민시후가 짐을 가지고 내려가려고 할 때 차마 이렇게 쉽게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일부러 곽승재를 찾아가 그녀가 그를 공항까지 데려다줄 거라 하면서 도발했던 것이다.“고은서 이젠 당신 차에 앉으려고도 안 하지? 그런데 어쩌나, 내 차에는 엄청 잘 앉는데. 내가 직접 운전할 때면 내 옆 조수석에 앉아주고 내가 뒷좌석에 앉을 때면 또 나랑 같이 뒷좌석에 앉아주고 하는데.”그는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는 곽승재를 보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을 보탰다.“왜? 못 믿겠어? 그럼 기다려. 내가 증명해 보일 테니까.”지금 이 시각, 민시후는 고은서를 보면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내
민시후는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내 착각인가? 왜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지? 아니야. 쓸쓸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하루종일 이리저리 날뛰면서 다른 사람을 놀리지 못해 안달이나 하는 사람을 내가 왜 걱정하는 거야.’그녀는 호텔로 돌아가자마자 프론트 데스크 직원에게 그녀의 방에 누구도 함부로 들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곽승재가 전보다 많이 변하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고은서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갔다.그날 저녁, 고은서는 꿀잠을 잤다.이튿날,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준비하고 조식 먹으러 내려갔다.때마침 여시은도 조식 먹으러 내려왔다. 그녀는 귀여운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올리 묶은 채 어제와 같이 고양이 이동장을 메고 있었는데 청순하고 귀여운 느낌을 주었다.여시은은 고은서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은서 씨, 좋은 아침이에요!”“시은 씨, 쿠아도 좋은 아침이에요.”고은서가 쿠아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인사했다.아침 식사 후, 고은서는 아기 판다를 볼 생각에 들떠있었다.“시은 씨도 같이 가지 않을래요?”여시은은 고은서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저야 좋죠. 마침 저도 아기 판다 보러 가려고 했어요.”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며 호텔 문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고은서는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는 오늘 정장 대신 세련된 일상복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남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훤칠한 몸매와 뛰어난 얼굴을 가진 그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관광버스 앞에 서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의사 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지?’“은서야.”곽승재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해 걸어왔는데 그의 손에는 판다 키링이 쥐어져 있었다.“호텔에서 판매하길래 네 가방에 달면 좋을 것 같아서 하나 샀어.”곽승재가 말하면서 그녀의 가방에 달아주려고 했다.“괜찮아. 나 스스로 하나 사면 돼.”고은서가 그의 손을 피하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