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재야, 한 가지만 믿어줘. 난 은서 씨를 해치려 한 적이 없어. 오해를 만들었다고 해도 손해를 보는 건 나뿐이야.”백유미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무력한 목소리로 말했다.“너에게 남다른 감정이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을게. 하지만 너에게 있어 나도 조금이나마 독특한 존재인 줄 알고 있었어. 남녀 사이에 사랑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 인품만은 의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그런데 네가 성아연 일에 관해 나한테 직접 물어보지 않고 아예 날 냉대하고 또 은서 씨가 우리 집 회사를 망가뜨리는 걸 보고만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백유미가 적반하장으로 곽승재를 탓하기 시작했다.“어릴 적에 내가 폐렴으로 고열에 시달리면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을 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백유미는 곽승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혼자 답했다.“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된다고 그 누구도 날 괴롭히지 못하게 지켜줄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날 원수처럼 대하는 건데?”백유미는 더는 참지 못하고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내가 그렇게 못났어? 난 그저 부득이하게 너에게 몇 가지 속인 일이 있을 뿐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널 해칠 생각은 없었다고. 이후에도 절대 널 해치지 않을 거야.”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그 고충이 뭔데?”백유미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날 강요하지 말아줘. 진짜 알려줄 수 없으니까. 그런데 제발 날 믿어줘. 나도 이렇게까지 하기 싫었어. 나도 우리 둘 사이가 이 지경에 이르는 걸 원치 않았다고.”곽승재의 얼굴빛이 방금전보다 더 어두워졌다.“전에 고은서와 고씨 가문 회사에 손을 댔으니 고은서가 너희 집 회사를 망가뜨리려거든 네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야. 나도 널 돕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리고 성아연을 이용하고 또 고씨 가문 회사에까지 손댈 능력이 있으면 이번 일도 충분히 무난히 넘길 능력이 되는 거 아니야?”곽승재의 덤덤한 눈빛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백유미도 그가 어디까
이미숙은 지금까지도 고은서가 곽승재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두 사람이 이혼한 지 꽤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은서가 화난 김에 고집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고은서는 이젠 설명하는 것조차 지겨웠다.“아줌마, 얼른 해장국 끓이러 가세요. 저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요.”고은서는 폰을 놓자마자 생각에 잠겼다.‘아마 백승엽 일 때문에 이 시간에 곽승재를 찾아간 거겠지.’현재 백승엽은 아직도 수감소에 갇혀 있었다.이번 일이 너무 큰일은 아니었지만 또 그저 눈 감고 넘어갈 만한 작은 일도 아니었다. 법적 징벌보다는 사람들의 도덕적 비난을 더 많이 받게 될 것이다.‘백유미의 수단으로 곧 풀려나게 되겠지.’그러나 원지훈은 전에 백승엽을 단단히 혼쭐 내주겠다면서 그를 제대로 된 불구로 만들겠다고 고은서와 약속했었다.원지훈은 백씨 가문을 무너뜨리는데 진심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백유미와 백승엽을 아웃시키고 백씨 가문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싶어 했다.그러나 의외인 것은 곽승재가 여느 때와 달리 백유미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는 것이다.전에는 백씨 가문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면서 백승엽을 친아버지처럼 공손하게 대하던 곽승재가 갑자기 백씨 가문 전체를 냉대한다는 게 약간 믿기지 않았다.‘백유미의 진면목을 알고 단단히 실망한 모양이네.’바로 이때, 주인혁한테서 영상통화가 왔다.“누나, 저 성공했어요!”전화 너머로 주인혁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주인혁은 생방송을 할 때 입고 있던 옷 그대로였고 심지어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맑은 눈동자는 희열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은서는 그에게 축하 인사를 하면서 오래전부터 그가 성공할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고 했다.주인혁은 바쁜 와중에 그녀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몰래 폰을 들고 그녀에게 일등으로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스태프가 뒤에서 그를 재촉하자 그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이내 고은서에게 말했다.“며칠 후에 브랜드 쪽에서 자선
이튿날.고은서는 오전에 ZY 그룹 계약 체결에 관한 일을 처리하고 오후에는 유성준의 전화를 받고 마침 해성으로 온 커스텀 향수를 부탁한 분을 만나러 갔다.오후 두 시, MQ에 도착한 고은서는 직접 그녀를 마중하러 나온 유성준을 발견했다.“은서야, 왔어? 손님은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셔. 전에 우리랑 연락했던 분은 손님 비서래. 그런데 오늘은 직접 오셨어.”“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접대실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시은 씨?”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여시은도 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은서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아는 사이에요?”옆에 있던 유성준도 따라 놀랐다.“전에 그 향수를 만든 사람이 은서예요. 그리고 여시은 씨께서 찾고 계신 퍼퓨머도 은서예요.”“은서 씨 퍼퓨머에요? 전에는 금융에 관한 일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여시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은서에게 물었다.“그저 취미일 뿐이에요. 전문 퍼퓨머까지는 아니에요. 만약 제 실력이 의심된다면 제가 전문 퍼퓨머를 소개해 드릴게요.”고은서가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럴 리가요. 저도 소문 듣고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그 향수를 제작한 퍼퓨머가 은서 씨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네요. 그 향수를 엄청 마음에 들어 했거든요.”여시은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그러니 이번엔 저한테 안성맞춤인 유일무이한 향수를 부탁할게요.”그러나 고은서도 커스텀 향수 제작을 맡는 건 처음인지라 확답을 주지 않았다.“최선을 다해볼게요.”고은서는 이내 여시은의 취향과 수요에 관해 물으면서 그녀를 데리고 여러 가지 향을 맡아보며 그녀가 좋아하는 향을 자세히 기록했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시은 씨, 배고프지 않아요? 우리 같이 저녁 먹을래요?”고은서가 여시은을 보며 말했다.“저도 마침 배고팠는데 좋아요.”여시은이 꼬르륵 소리 나는 배를 만지면서 답했다.두 사람은 유성준까지 불러 함께 MQ 근처에 있는 해산물 맛집에
고은서와 여시은은 서로 좋아하는 사람에 관해 얘기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그래서 고은서 그저 웃으면서 대화를 아주 공식적으로 이어갔다.“시은 씨처럼 좋은 조건을 갖춘 상대가 얼마나 된다고요. 누굴 좋아하든 다 그 사람 복이죠.”“글쎄요. 그런데 아직 제가 좋아한다는 걸 모르고 있을 거예요.”여시은이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약간 의외였다.“왜 고백하지 않는 거죠?”‘여시은의 외모와 가정 배경이라면 아마 거절할 남자가 없을 텐데.’“아직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서요.”여시은은 말하면서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은서 씨는요? 은서 씨를 좋아하는 사람이 엄청 많잖아요. 만약 은서 씨 보고 선택하라면 옛사랑을 선택할 거예요, 아니면 새로운 사랑을 선택할 거예요?”여시은이 눈을 깜빡이면서 천진난만한 물음을 제기했다.고은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옛사랑은 이미 지나간 과거인데 절대 선택할 리가 없죠. 저는...”그러나 그녀가 말을 이어가려고 할 때 뒤에서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고개를 홱 돌려보니 다름 아닌 곽승재가 문 쪽에 서서 그녀가 한 말을 듣고 있었다.그는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서는 아주 캐쥬얼한 옷차림의 육현석도 있었다.“형... 은서 씨.”육현석이 조심스레 그녀에게 인사했다.“곽 대표님, 여기서 또 만나게 되네요. 밥 먹으러 오신 건가요? 저희 금방 주문 마쳤는데 같이 드실래요?”여시은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합석 요청을 보냈다.곽승재는 여시은의 말을 무시한 채 고은서만 빤히 바라보았다.‘보긴 뭘 봐?’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 대화를 몰래 엿듣는 습관은 언제 고칠 거야?”‘들을 거면 가만히 듣고만 있든가, 기분 나쁜 티는 왜 내고 다니는 거야. 내 기분도 따라 상하게.’“결혼 선물도 미리 줬으면서 이런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그녀의 말을 들은 육현석은 놀라 하며 뒤로 한발 물러섰다.‘내가 뭘 들은 거야? 결혼 선물? 형 미친 거 아
유성준이 그녀를 설득하려고 할 때 갑자기 뒤에서 육현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형수님! 헤헤, 죄송해요. 또 잘못 불렀네요.”육현석은 웃으면서 휘청이는 곽승재를 부축하며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은서 씨, 저희도 오늘 술 마셨는데 차 안 가져와서 혹시 은서 씨 차에 같이 가면 안 될까요?”“그냥 차 부르세요.”고은서가 단칼에 거절했다.“형이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요.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어깨가 아프고 위도 아프다고 하는데 기사가 오려면 한참 기다려야 되잖아요. 그런데 기사가 이미 떠났다고 하니까 중도에 만나게 되는 즉시 내릴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육현석이 설명하면서 어떻게서든 그녀의 차에 타려고 했다.고은서도 더 이상 거절하기 난감해졌다. 그래서 그녀는 유성준을 먼저 보내려고 했다.“오빠, 일찍 들어가서 쉬세요.”유성준은 육현석이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고은서를 더는 난감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지라 비아냥거리려던 말을 꾹 참고 애써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 집 들어가게 되면 문자해.”고은서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육현석은 곽승재를 뒷좌석에 앉히고 자신은 재빨리 조수석으로 달려가 앉았다.“형이 술만 마시면 저한테 짜증 내고 그러는데 혹시라도 저를 때릴까 봐 무서워서 조수석에 앉은 거예요. 그런데 여자한테는 손대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특히 은서 씨한테는 절대 그럴 리가 없으니까 맘 편히 먹고 얼른 앉아요.”“...”횡설수설하는 육현석을 보며 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뒷좌석에 앉았다.차가 출발한 후 육현석은 자신의 기사한테 연락해 합류할 장소를 정했다.곽승재는 조용하게 창가에 머리를 대고 손으로 이마를 받친 채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그를 비추었는데 왠지 모르게 고독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평소에는 주량이 좋은 사람인데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은지 엄청 급하게 마시더라고요. 그래서 더 빨리 취한 것 같아요.”고은서는 자연스레 시선을 다
“이거 놔!”고은서는 팔꿈치로 곽승재의 가슴팍을 찌르면서 소리쳤다.“스읍.”곽승재는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서운에 있을 때 곽승재가 그녀를 지키기 위해 또 한 번 상처를 입은 걸 떠올린 고은서는 순간 흠칫했다.곽승재는 이 틈을 타 그녀를 더 세게 껴안으면서 말했다.“은서야, 날 밀어내지 말아줘. 나에게 한 번만 기회를 더 줘...”술기운이 느껴지는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얼굴 가까이 와닿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죽이고 있었다.‘설마 방금전에 내가 레스토랑에서 한 말 때문에 자극이라도 받은 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야?’그녀의 주변은 온통 곽승재 몸에서 나는 설송향으로 물들었다.불편함을 느낀 고은서가 그를 밀어내면서 말했다.“이거 좀 놔.”“싫어. 놓으면 또 날 버리고 갈 거잖아. 그러면 더는 널 볼 수 없게 되잖아.”곽승재는 얼굴을 그녀의 품에 기댄 채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앙탈을 부렸다.“은서야, 보고 싶었어.”그는 고은서 없이 보내는 일분일초가 너무 괴롭게 느껴졌다.비록 며칠 동안 함께 서운에서 지내고 또 몇 시간 전에 금방 만나고 지금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곽승재는 그녀의 이름을 계속 부르면서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술을 마신 원인 때문인지 고은서는 온몸이 뜨거워 나는 것 같았다.“곽승재, 술 마셨다고 함부로 행동하지마. 안 취한 거 다 알고 있으니까.”고은서가 발버둥 치면서 곽승재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는 고집을 부리면서 아예 그녀를 들어 올리면서 자신의 다리에 앉혔다.덕분에 두 사람은 부득이하게 마주 보게 되었고 또 곽승재가 고은서를 손으로 잡고 있는 바람에 두 사람은 거의 맞붙어 앉아 있게 되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체온이 점점 높아지면서 그의 말 못 할 부위가 이상해지는 걸 느꼈다.‘이러다가 진짜 큰일 나겠어.’고은서는 곽승재의 상처를 관심할
“저리 비켜...”고은서는 온몸에서 전율이 느껴지는 듯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허세를 부리는 아기 고양이처럼 느껴졌다.욕망을 애써 억누르고 있던 곽승재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아래로 잡아당기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은서야, 너무 보고 싶었어. 진짜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었어...”단단한 무언가에 손이 닿은 고은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곽승재의 손을 뿌리치면서 화를 냈다.“변태 새끼!”“은서야, 너도 하고 싶잖아. 참지 말고 날 한 번 믿어봐.”곽승재의 뜨거운 숨결이 고은서의 목에 와닿았다.그의 말이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그녀는 술을 마신 자신이 너무 미웠다.‘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어. 그럼 곽승재의 유혹에 이렇게 쉽게 넘어갈 리도 없었을 텐데.’자신의 몸을 더듬는 곽승재의 손길에 고은서는 더는 참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의 저항은 이젠 무용지물이 되었고 심지어 곽승재에겐 크나큰 유혹으로 느껴졌다.곽승재가 그녀를 깨물 때 고은서는 수치스러움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곽승재, 그만해...”그녀의 울먹이는 소리에 고개를 든 곽승재와 눈이 마주친 고은서는 순간 흠칫했다. 그의 눈빛은 온통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더 매혹적이게 느껴졌다.“은서야, 아파? 내가 더 부드럽게 해줄게.”고은서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싫어.”곽승재는 단번에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그녀는 몸에 힘이 풀리면서 거의 그의 품에 기대어 있었는데 두 볼은 빨간 홍조를 띠고 있었고 그를 바라보는 울망울망한 두 눈엔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마치 자신을 가지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거절하고 있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진심으로 거절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취하지 않은 자신이 너무 미웠다.사실 계속 이어간다고 해도 고은서는 그를 밀어내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그렇게 되면 고은서를
고은서는 곽승재의 장난스러운 말투와 눈빛으로부터 자신의 현재 모습이 얼마나 낭패한 지를 예상할 수 있었다.그녀는 오늘 셔츠와 정장 치마를 입었는데 곽승재 때문에 단추가 풀리면서 속옷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가슴 쪽에 아주 선명한 이빨 자국까지 생겼다.고은서는 자신의 이런 모습이 너무도 창피했다.그녀는 생각을 포기하고 얼굴을 곽승재 가슴팍에 묻은 채 그의 외투를 잡아당기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고 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그는 그녀를 안은 채 엘리베이터 올라 아주 자연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반응하고 조심스레 고은서에게 물었다.“몇 층이야?”고은서의 대답을 들은 곽승재는 버튼을 누르는 시늉만 하고 또다시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올렸다.곽승재의 욕망은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고 심지어 다시 들끓어 오를 기세를 보였다. 이를 가까이 감지한 고은서는 그를 쏘아보며 화냈다.“이상한 생각 그만 좀 해!”그러나 곽승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내가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사람이 지금 내 품에 안겨 있는데 나도 어쩔 수 없어.”코끝은 온통 곽승재의 특유한 설송향으로 가득했고 귓가에는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얼굴이 또다시 화끈 달아올랐다.‘곧 집이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돼.’두 사람은 고은서 집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친밀한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지문을 누르고 집 문을 열리자마자 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그러나 곽승재가 핑계를 둘러대면서 그녀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나 목말라.”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곽승재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집에 들어선 고은서는 황급히 곽승재를 밀어내고 자신의 가슴 부위를 손으로 막았다.“물 저기 있... 우웁!”곽승재는 고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장롱 쪽으로 밀어붙이며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방금전의 키스와 달리 그의 다급함과 미련이 깊이 느껴지는 키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