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의 차갑고 결연한 표정을 본 백유미는 순간 불안해졌다.‘어느 부분에서 문제라도 생긴 건가? 고은서는 원지훈이 직접 T국으로 데려온 거고 프로젝트도 확실히 존재하는 거여서 내가 T국에 온 것도 아주 마땅한 일일 텐데. 심지어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뿐만 아니라 원지훈도 이미 죽었는데 곽승재는 왜 자꾸 이 모든 게 다 내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면 고은서의 말이라면 이젠 굳게 믿는다는 건가?’백유미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있을 때 곽승재는 폰을 꺼내 녹음 파일 하나를 재생했다.“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 T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절대 고은서한테 들켜서는 안 돼. 이번 일까지 망치면 너랑 네 엄마 진짜 감방으로 보내버릴 테니까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다름 아닌 그녀와 원지훈의 대화 내용이었다.백유미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등골이 오싹해 나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이건 어디서 난 거야... 누군가 날 모함하려고 하는 거야! 이거 합성한 거야. 승재야, 다시 한번 조사해봐. 난 억울하다고!”백유미가 소리쳤다.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다른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그녀가 T국에 있는 사람과 협상한 내용부터 그녀가 짠 상세한 계획까지 다 녹음되어 있었다.그녀의 섬뜩한 목소리가 병실에서 유난히 잘 들렸다.“똑똑히 들었어? 다신 한 번 더 재생해줄까?”곽승재가 물었다.얼굴이 삽시에 창백해진 그녀는 더는 새로운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승재야, 난... 난 그저 은서 씨를 간단하게 겁만 주려고 했어. 진짜 해칠 생각은 없었어.”“온갖 방법으로 은서를 속이면서 T국으로 데려간 것도 모자라 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찾아놓고서 그저 겁만 주려고 했다고?”곽승재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졌다.“승재야,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줘.”백유미는 상처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병상에서 일어나 곽승재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내가 거짓말을 했어. 난 지금도 널 사랑하고 있어. 네가 고은서랑 이혼하면 나
박지연과 육현석이 나간 후 고은서는 민시후가 계속 마음에 걸려 그의 병실로 갔다.하지만 병실 앞에 도착한 그녀는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박지연의 말대로 목숨 바쳐 자신을 구한 민시후의 마음이 가식일 리가 없었다.그러나 고은서에게 있어 이건 하나의 부담과도 같았다.그녀는 민시후가 단지 자신을 놀리게 재밌어서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집착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곽승재를 엿먹이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단 한 번도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고은서?”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 민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지금 문밖에 있지?”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내가 밖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의사와 간호사들은 문을 지키는 습관이 없거든.”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그런데 안 들어오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민시후가 무언갈 눈치챈 듯 물었다.고은서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병상 옆으로 다가가 되물었다.“분명히 심하게 다쳤으면서 왜 거짓말한 거야?”‘아니지. 그저 스치면서 상한 거라는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심하게 다치지 않았으면 병상에 누워서 꼼짝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민시후의 성격으로 내 병실로 찾아오지 않을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데.’“너무 심하게 다치지 않았어. 적어도 곽승재보다는 심하지 않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젠 이런 것까지 비기는 거야?’민시후는 한참 동안 말이 없는 고은서를 보면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 내가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걱정하고 있는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 그리 쉽게 죽을 인간이 아니야. 너한테 오랫동안 붙어 다닐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헛소리 좀 그만 쳐!”고은서가 화를 내며 말했다.“알았어. 안 말하면 될 거 아니야.”민시후가 먼저 꼬리를 내렸다.“먹을 거 가져왔다며. 뭘 가져왔는데?”“이거.”고은서가 손에 있는 사과를 들어 보
민시후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뭐가?”고은서는 고개를 들고 의문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우리 서로 알고 지낸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잖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매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날 좋아하게 된 거야?”“왜 갑자기 널 좋아하게 됐다니?”민시후는 거동만 불편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이라도 일어나 그녀의 이마를 한 대 콩하고 치고 싶었다.“그러니까 지금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야? 지금까지 내가 널 좋아한다는 말을 거짓말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고은서는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종일 껄렁대고 다니는데 뭐가 진심이고 뭐가 거짓말인지 어떻게 구분해.”“고은서, 너 진짜 한 대 맞을래?”민시후가 화를 내면서 얼굴을 홱 돌렸다.고은서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알고 있었다.민시후가 그녀를 도와 백유미한테 함정을 파줄 뿐만 아니라 집까지 사주고 또 서운도 함께 가주고 심지어 동물원까지 선물하는 걸 봐서는 그는 처음부터 진심이었다.그저 그녀가 계속 의심하면서 그의 진심을 의심했을 뿐.고은서는 씩씩거리고 있는 민시후를 보면서 조심스레 사과 한 조각을 그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맛 좀 보지 않을래?”“싫어.”민시후가 그녀를 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고은서, 넌 확실히 너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매력적이기는커녕 보는 사람 화날 정도로 멍청해. 내가 순간 눈이 멀고 머리에 문제가 생겨서 널 좋아하게 되었나 봐. 됐지?”“...”고은서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넌 왜 자꾸 너 자신을 비하하는 거야? 대체 곽승재한테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으면 자신을 그 정도로 내리까냐고.”민시후가 씩씩거리며 물었다.“어느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다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최선을 다해 그 여자를 지키려 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그런데 왜 너는 자꾸 그걸 부담으로 생각하는 건데?”민시후는 자책하는 고은서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화가
목소리가 별로 크진 않았지만 민시후는 아주 똑똑히 들었다.그는 육현석을 힐끗 째려보고는 고은서를 향해 아양을 떨며 말했다.“은서야, 방금 깎아준 사과 엄청 달고 맛있는데 한 조각만 더 먹여주면 안 될까?”나머지 세 사람은 충격적인 그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육현석은 진저리를 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민 대표님, 은서랑 얘기 더 나누세요. 저는 먼저 밥 먹으러 가볼게요.”박지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하고는 쌩하고 달아났다.병실 안에는 고은서와 민시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러는데 다음에는 연기하기 전에 나한테 미리 따로 신호 보내주면 안 될까?”고은서는 아직도 방금전의 놀라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곽승재 껌딱지 새끼를 가만두면 안 되지.”민시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한 시간 후, 육현석은 곽승재가 있는 병실로 찾아갔다.“형, 민시후 그 새끼 진짜 사람 약 올리는 데는 짝이 없어. 형수님 옆에 꼭 붙어있으면서 심지어 사과까지 먹여달라고 한다니까.”방금전 민시후의 모습을 떠올린 육현석은 씩씩거리며 말했다.“형수님을 바라보는 눈길은 또 어찌나 오글거리던지. 형수님을 완전히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있다니까. 환자만 아니었으면 정말 달려가서 한 대 치는 건데.”그는 말하면 말할수록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그 많은 여자 중에서 왜 하필 형수님을 좋아한다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니까.”그러다 육현석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형, 내 말 듣고 있어? 형은 화 안 나?”곽승재는 방금전부터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육현석의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형,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하필 그 위급한 상황에 백유미를 구하려고 한 거야?”육현석은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답답해 났다.“그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하면서 힘겹게 형수님을 찾았으면 당시 상황이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형수님 곁
곽승재는 육현석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아직도 아침의 그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고은서는 정신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뼈밖에 안 보일 정도로 살이 빠져있었고 얼굴도 전과 다르게 핼쑥해져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그가 알고 있는 그녀의 똘망똘망한 눈빛과 다르게 꿈속의 그녀는 절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냉소를 흘리면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고은서는 이미 피바다 속에 쓰러져있었다.그 순간 그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형, 왜 그래...”육현석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지. 형 지금 눈시울이 빨개진 거야?’오랫동안 곽승재와 지내오면서 그의 이런 모습은 육현석도 처음이었다.마치 하나뿐인 동반자를 잃은 늑대처럼 처절하고 비참하면서도 후회막심해 보였다.“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육현석이 위안했다.곽승재는 또다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목이 쉰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어제 백유미가 칼을 들고 자살하려고 할 때 유난히 당황스러웠어. 마치 백유미를 막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아침에 이 꿈을 꾸고 난 후로 그 이유를 알겠더라. 고은서도 똑같은 일을 겪었는데 그땐 내가 미처 구하지 못했다는 걸.”“그러니까 지금 전생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거지? 방금전에 말한 일도 전생에 발생한 일이고.”육현석이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아주 황당한 생각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꿈에서 봤던 일들이 진짜 현실에서 발생한 것처럼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육현석은 곽승재의 이런 모습이 약간 적응되지 않았다.항상 강인한 모습만 보이며 할 줄 모르는 게 거의 없었던 곽승재가 갑자기 전생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이토록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형, 그저 꿈일 뿐이야. 너무 자책하지마.”육현석이 애써 그를 위안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는 차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형,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돼? 요즘 스트레스 너무 받아서 그저 악몽 꾼 걸 거야.”비록 고은서의 변화와 곽승재의 말들을 잘 되새겨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육현석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형수님처럼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자살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자신의 주장도 과감하게 제기할 줄 알고 또 하고 싶은 일도 한다면 하는 사람인 데다가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왜 자살을 한다는 거야?”그러나 곽승재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은 듯했다.‘육현석의 말대로 고은서는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살한다는 건 얼마나 큰 절망을 느껴서였을까?’“형, 방금전에 백유미 찾아가지 않았어? 어떻게 됐어?”육현석이 일부러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손에 있는 증거를 경찰 측에 넘기면 되잖아. 왜 굳이 직접 찾아간 거야?”곽승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증거가 나타난 타이밍이 너무 수상해.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자꾸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뭐? 누군데?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건데?”육현석은 놀라움을 참지 못했다.“그저 내 직감일뿐이야. 자세한 건 더 조사해봐야 해.”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이튿날, 고은서는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약 효과가 아직도 남아있는 탓인지 머리가 계속 띄엄띄엄 어지러워 났다.“고은서!”그녀가 누워서 좀 더 쉬려고 할 때 박지연이 흥분해 하며 병실로 달려 들어왔다.“빅뉴스야!”반면 고은서는 약간 풀이 죽어 있었다.“뭔데?”“백유미가 다른 사람한테 맞아서 지금 중환자실에 들어갔대.”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누가 때린 건데?”“누가 때렸는지 한 번 맞춰봐.”박지연이 웃으면서 일부러 뜸을 들였다.고은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T국에 있는 백유미랑
박지연은 또 다른 한 가지 소식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이 원지훈 유품을 확인할 때 그의 폰에서 백유미가 성폭행당하는 동영상을 발견했다고 한다.아마 원지훈이 자신의 앞날을 위해 그 동영상으로 백유미를 협박하려고 했던 모양이다.동영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다.백유미한테는 기필코 아주 큰 타격이 될 것이다.범가온은 동영상을 확인한 후 아들의 죄를 덮어주기는커녕 사람을 찾아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했다고 한다.그 동영상은 업데이트되자마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었고 여론이 점점 커져갔다.“조회수가 어마어마하대. 특히 외국 사이트는 심사가 별로 엄하지 않아서 벌써 T국 여러 사이트 실검에 올랐어. 비록 국내에서는 동영상 풀버전을 볼 수는 없지만 전파 속도가 하도 빨라서 이미 본 사람들이 꽤 많을 거야. 백유미 이번엔 진짜 끝장이야.”그러나 고은서는 마음이 별로 놓이지 않았다.백유미에겐 곽현수라는 조력자가 있었고 그가 직접 나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 누구도 보장하지 못한다.아니나 다를까, 오후쯤이 되어서 고은서는 휠체어에 앉은 백승엽과 곽현수가 T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비록 이미 GS그룹 경영권을 곽승재에게 물려주고 회사 일에서 손을 뗐다고 하지만 T국 상류계층 사람들마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명성은 여전했다.그 사람들과 곽현수의 참견으로 T국 경찰 측에서는 얼마 되지 않아 원지훈을 죽인 백유미의 행위가 정당방위라는 조사결과를 공포했다.왜냐하면 원지훈이 찍은 동영상에서 백유미를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함께 녹음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경찰 측에서는 원지훈이 앙심을 품고 백유미를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칼을 들고 정당방위 하는 그녀에게 목이 찔려 죽었다고 판단했다.고은서 납치 사건에 관해서는 녹음 파일과 증인이 다 있었기에 백유미는 거의 유죄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그러나 백승엽이 이름 있는 정신병원 진단서를 내밀며 백유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박지연은 종래로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깊은 사고를 거친 후에야 결정을 내리는 타입이었다.그뿐만 아니라 고은서와 마찬가지로 결정한 일이라면 꼭 해야 하는 성격이었다.고은서는 아무리 설득해도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부했다.“적당히 해. 화내면서 눈물 흘리며 찾아오기 없기야.”박지연은 고은서의 농담을 뒤로 한 채 마치 곽승재를 후회하게 만들 히든카드라도 손에 쥐고 있는 듯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고은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아침에 어머니한테 불리워 해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나마 나랑 함께 지연이를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 됐어. 당하고 나면 알아서 정신 차리겠지 뭐.’...박지연은 이내 곽승재가 있는 병실에 도착했다.어깨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탓인지 그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해 보였다. 그녀가 병실로 들어갈 때 그는 병상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옆에는 비서 주민기가 서 있었다.주민기는 그녀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줬다.곽승재는 그녀가 찾아올 거라는 걸 먼저 예상이라도 한 건지 아주 덤덤한 표정을 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박지연 씨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죠?”박지연은 냉소를 흘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곽 대표님, 백유미가 은서한테 얼마 악독한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고작 정신병원 진단서 하나 때문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건가요?”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은서한테 백유미를 대가 치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면서요. 이게 곽 대표님이 말한 그 대가인가요?”박지연이 계속 캐물었다.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해성으로 돌아간 후 정신병원으로 보낼 거예요.”“거참. 고작 정신병원 하나로 끝내겠단 말씀이세요?”박지연이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백유미가 아무런 병이 없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지금 그저 핑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