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부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일반인은 못사는 핸드백인데. VIP만 살 수 있는 건데!”높은 목소리에 원지훈도 이쪽을 쳐다보았다.“돈 많으니까 사는 거죠!”조은혜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재벌가에 시집간 것도 모자라 결혼할 때 할아버지가 혼수로 200억 원이나 줬는데.”고은서는 돈 많은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이때 웨이터 한 명이 들어오자 곽승재가 준 블랙카드를 꺼냈다.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웨이터한테 블랙카드를 꺼냈다.“이 카드로 계산해 주세요. 오늘은 제가 사는 거거든요.”원지훈이 다가와서 말렸다.“안 돼요. 오늘은 제가 사기로 했잖아요.”“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은혜 언니인데 너희들 돈을 쓸 순 없잖아.”고은서는 마치 장난감을 사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블랙카드를 꺼냈다.원지훈은 계속 말리면 눈치 없는 것 같아 자연스럽게 동작을 멈췄다.“고마워요.”고은서는 계산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미안, 급한 일이 있는 걸 깜빡했네. 즐겁게들 놀아.”조은혜는 그녀가 꼴보기 싫어 굳이 말리지도 않았다.고은서가 밖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원지훈이 쫓아 나왔다.“누나, 혹시 연락처 좀 추가해도 될까요?”고은서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원지훈을 쳐다보았다.이에 원지훈이 바쁘게 설명했다.“다른 뜻은 없어요. 은혜 씨 언니면 은혜 씨에 대해 잘 알 것 같아서요. 은혜 씨랑 빨리 친해지고 싶은데...”고은서가 태연하게 물었다.“은혜가 마음에 들어?”원지훈이 사실대로 인정했다.“네. 은혜 씨랑 서로 안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많이 좋아해요. 한번 노력해 보려고요.”고은서가 고개를 쳐들면서 말했다.“우리 집안은 아무나 들이지 않아. 우리 외삼촌한테 자식은 은혜 하나뿐이야. 딸을 엄청 아끼시는 분이라 아무한테나 못 줘.”“알아요. 근데 그래도 조건이 괜찮다고 생각해서 은혜 씨를 쫓아다니는 거예요. 저희 아빠가 고향에서 커다란 농산품 회사를 운영하고 계시거든요. 조건이
고은서는 핸드폰을 거두었다.아까 자랑하는 척 블랙카드를 꺼낸 이유는 바로 원지훈에게 경제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탐욕스러운 그는 절대 고은서와 친해질 기회를 놓치지 않을 사람이었다.그러면 조은혜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그리고 원지훈은 딱 봐도 백유미 라인인데 나중에 유용하게 쓰일지도 몰랐다....고은서는 쇼핑몰에서 최신상 드레스, 액세서리와 금을 샀다.예전에는 금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금의 가치를 알아버렸다.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보기도 좋고 가치도 있고. 돈이 필요할 때는 팔 수도 있고.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이 없었다.쇼핑이 끝나고, 곽승재한테서 연락이 왔다.고은서는 발신인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전화를 별로 받지도 않던 사람이 주동적으로 전화를 하다니!“무슨 일인데? 설마 금 몇 덩어리를 샀다고 나를 탓할 건 아니지? 아침에 분명 마음대로 쇼핑하라고 했잖아.”사레 걸린 곽승재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외할아버지께서 벼루 좋아하시잖아. 하나 좋은 거 얻어놨거든. 내가 지금 바빠서 그러는데 네가 할아버지께 갖다드려.”곽승재가 외할아버지의 취향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았다.“알았어.”고은서가 흔쾌히 대답했다.“지금 쇼핑몰에 있는 거야?”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곽승재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응. 인제 가려고.”곽승재가 또 물었다.“무슨 물건을 샀는데?”“옷이랑 액세서리랑 금이랑.”“저번에도 이런 가게에 들렀어?”“아니. 저번에는 지연이가 온 의사 선생님께 옷을 선물하고 싶대서 남성 옷 전문점을 들렀지...”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은서는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왜 묻는데? 사고 싶은 거 있어?”곽승재의 말투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알아서 사. 난 회의가 있어서.”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어차피 옷을 사줘도 입지 않는데 돈 낭비할 바에 사지 않는 것이 나아.’고은서는 쇼핑한 물건들을 들고 GS 그룹으로 향했다.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직원들이 반갑게 인사했다.고은서는 갑자기
‘왜 바쁜 줄 알았더니, 이러고 있느라고 바쁜 거였네. 업무가 바쁜 와중에도 일을 찾아서 하다니.’“은서 씨.”백유미가 먼저 고은서를 발견하고 인사했다.그러고는 눈치껏 곽승재에게 이렇게 말했다.“승재야, 다른 일 없으면 먼저 판주 투자은행으로 가볼게.”“응.”백유미가 떠나고, 곽승재는 고은서의 텅 빈 두 손을 쳐다보았다. 마치 왜 자기 물건은 사지 않았냐고 물어보는 듯했다.고은서는 모른 척하면서 물었다.“벼루는?”전화할 때는 괜찮더니 갑자기 말투가 바뀐 고은서의 모습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방금 떠난 백유미가 생각나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유미는 내일 파티 관련해서 보고하러 온 것뿐이야...”“나랑 상관없는 일이야.”고은서가 곽승재의 말을 끊었다.“줄 거면 빨리 줘. 나도 바쁘니까.”침묵을 지키던 곽승재가 서랍에서 벼루가 담긴 선물 박스를 꺼냈다.“회의 취소하고 같이 외할아버지한테 다녀올까?”“안 그래도 돼.”고은서는 벼루를 받아쥐고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떠났다.‘이 이혼, 하고야 말겠어! 내가 왜 대충 살아야 하는데? 오빠 말고 다른 남자를 찾지 못할 정도로 내가 별로인 것도 아니고.’육현석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고은서를 마주치고 인사를 할까 말까 하고 고민하고 있다가, 고은서가 차가운 얼굴로 옆을 쓱 지나가는 바람에 머쓱해서 코를 만졌다.‘왜 갑자기 안하무인이 된 거지?’육현석은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곽승재의 표정도 안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형, 은서 씨가 또 화를 돋우고 갔어?”곽승재가 짜증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은서 씨? 네가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야? 버릇도 없이.”육현석은 할 말을 잃었다.‘계속 이렇게 불러도 뭐라고 하지 않더니.’하지만 연애 경험이 많은 윤현석은 단번에 무슨 일인지 파악했다.‘은서 씨가 좋아져서 이런 호칭까지도 신경 쓰이는 거지.’그래서 눈치껏 호칭을 이렇게 정리했다.“형, 아까 형수님이랑 마주쳤는데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 둘이 싸웠어?”
‘늦었으면 늦었지. 내가 왜 화를 풀어줘야 하는데?’곽승재는 육현석의 충고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계획서는 완성했어? 지금 회의실에 가서 브리핑할 수 있을 정도야?”“...”갑작스러운 화제전환에 육현석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형, 좀 봐주면 안 돼?”곽승재의 태도는 단호하기만 했다.“안 돼.”윤현석이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형, 형수님한테서 받은 화를 나한테 풀면 안 되지!”곽승재가 째려보면서 말했다.“쓸데없는 소리할 거면 꺼져.”육현석은 바로 입을 닫았다....고은서는 외할아버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곽승재가 준비한 벼루를 선물했다.외할아버지는 선물을 보자마자 미소가 활짝 폈다.“승재 안목이 괜찮네. 이런 고급 벼루는 보기 힘들어. 내가 얼마나 갖고 싶었는데! 은서야, 너도 한번 볼래?”“아니요.”고은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할아버지한테 선물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가지러 가지도 않았다.“할아버지, 저 작업실에 가서 향초를 좀 만들게요.”저번에 할머니한테 염주 팔찌만 선물해서 다른 선물도 드리고 싶었다.곽승재가 외할아버지한테 벼루를 선물하고 싶다고 할 때부터 할머니한테 잠이 잘 오는 향초를 만들어 드리기로 했다.고은서는 늘 집에서 향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고준석은 습관 된 지 오래였다.그는 벼루를 감상하면서 말했다.“그래, 가봐.”마당 제일 끝에 있는 작업실은 공간이 넓고 조용했다. 이곳은 엄마가 살아생전 가장 즐겨 찾던 곳이었다.고은서는 어릴 때부터 향에 민감한 엄마를 닮아 향초 제작을 배우곤 했다.전문적인 퍼퓨머가 되려면 엄격한 향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엄마는 고은서가 고생할까 봐 그저 취미 삼아 만들어 보라고 했다.외할아버지 빼고는 누구도 그녀의 제대로 된 실력을 몰랐다.향초를 만들다 보니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그냥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다.어떤 향은 오랫동안 정제해야 할 정도로 과정이 번거로웠다.“매일 청소해서 방이 깨끗해. 그냥 쓰면 돼. 온 오후 힘들었는데 얼른 밥이나 먹어.”고은
“아, 맞다. 할아버지, 은혜가 외국에 가고 싶어 하던데. 외삼촌한테 유학 보내자고 말해보는 거 어때요?”고은서는 오전에 조은혜를 만났던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지금 성적이 안 좋은데. 환경을 바꾸면 성적이 좋아질지 어떻게 알아요?”조은혜가 외국에 나가면 원지훈이 더는 따라다니지 않을 것이고, 이러면 전생의 비극을 방지할 수도 있었다.고준석이 말했다.“외숙모가 예전에 하나뿐인 딸을 외국에 보내기 싫다고 말한 적 있어. 지금 이미 은혜한테 짝을 찾아주는 것 같던데?”조은혜를 끔찍이 생각하는 단은숙은 절대 고준석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산책을 마치고, 고은서는 고준석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고 그가 잠에 들어서야 다시 작업실로 향했다.그러고 또 몇 시간 뒤, 고은서는 할머니의 취향에 맞춰 베티베르, 베르가모트 등 방향유로 수면에 좋은 향초를 완성했다.저번에 주민기 엄마한테 선물한 향초가 효과 있다고 해서 또 만든 것이다.고은서는 피곤했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고은서는 기지를 쭉 폈다.‘역시 어릴때부터 사용한 침대가 제일 편하네.’고은서는 이혼하고 집에서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차려주는 밥만 먹고, 고준석과 함께하는 시간을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고은서는 세수를 마치고 머리가 부스스한 상태로 1층으로 내려갔다.이때 마당에서 고준석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아침부터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 거지?’밖으로 나가자, 고준석이 곽승재와 주민기에게 태극권을 가르쳐주고 있었다.“잘 봐. 이렇게 하는 거야.”정장 차림의 곽승재와 주민기가 진지한 표정으로 서툴게 태극권을 연습하는 모습은 웃기기만 했다.“풉!”고은서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았다.곽승재는 멈칫하더니 그녀를 째려보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주민기가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사모님.”“민기 씨, 제가 향초 좀 만들었는데 이따 가져다드릴게요.”“감사합니다. 사모님.”“은서야, 일어났어? 승재도 온 지
고은서는 곽승재의 눈빛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물론 질문도 이상하다고 느껴져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내가 왜 화났다고 생각해?”“그럼 왜 집에 안 들어왔는데?”‘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서로 죽고 못사는 부부처럼 말하네. 자기가 결혼생활 1년동안 집에 자주 돌아오지 않았던 것은 생각하지 않고.’고은서는 의미 없는 말을 하기 싫어 그를 째려보고는 식탁 앞에 가서 앉았다.고은서가 컵에 우유를 따라 먹으려고 하자 곽승재가 말했다.“나도 줘.”“손 뒀다 뭐 하는데?”곽승재는 이를 꽉 깨물고 말았다.“예전에는 맨날 우유며 빵이며 선물하더니, 그때는 착한 척했던 거야?”‘염치도 없이 예전 일을 꺼내?’고은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왜, 난 맨날 오빠만 따라다녀야 해? 이제는 지쳤어.”살기가 가득한 말에 곽승재는 움찔하고 말았다.“고은서, 아침부터 왜 화를 내고 그래!”“오빠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화도 안 날 것 같은데?”“...”곽승재는 화를 참아보기로 했다.“집에 안 들어오는 건 그렇다 치고, 왜 문자는 답장하지 않는 건데?”고은서는 핸드폰을 확인할 시간조차 없었다.“문자는 왜 보냈는데?”곽승재가 애써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어제는 유미 아버님 생신이었어. 그래서 유미한테 영양제를 사서 보내드렸을 뿐이야.”고은서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백씨 가문을 좋아하고 있네. 백유미 생일을 함께 보내더니, 아버님 생신에도 선물을 드려?’“나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데? 나랑 상관없는 일이잖아.”“신경 쓰이지 않았으면 태도가 바뀔 일도 없었겠지.”곽승재가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고은서, 내가 저번에도 말했잖아. 불만이 있으면 말하라고. 이런 의미 없는 짓이나 하지 말고.”“그래도 저녁에 다른 여자 집에서 샤워하는 오빠보다는 낫잖아!”고은서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두 번째 언급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내가 언제 남의 집에서 샤워했다고 그래?”‘아직도 인정 안 하네!’고은서는 핸드폰에 저장
곽승재는 화장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은 후 마침 전화가 와서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아무렇지 않게 소파 위에 올려놓은 셔츠가 백유미한테 찍힐 줄 몰랐고, 더욱이 이 사진이 고은서의 손에 들어갈 줄도 몰랐다.곽승재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이 사진, 유미가 보내줬어?”고은서가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누가 보내줬든 이 셔츠 오빠 거 맞냐고.”곽승재는 대답 대신 고은서의 앞에서 바로 백유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백유미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물었다.“승재야,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곽승재는 백유미에게 사진을 보내주면서 물었다.“설명해 봐. 이 사진, 어떻게 된 건지.”백유미는 물론 고은서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줄 몰랐다.전화기 너머의 백유미는 사진을 보고 멈칫하더니 그제야 그날 일을 떠올렸다.“이거 내가 SNS에 올렸다가 삭제한 사진이잖아. 요리 솜씨 자랑한다고 맨날 음식사진을 올리고 있잖아. 사진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지웠었어. 승재야, 이 사진을 왜 저장한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왜 내 셔츠까지 함께 찍은 건데?”“그래?”백유미는 그제야 자세히 확인했다.“정말이네. 승재야, 혹시 은서 씨가 오해한 거야?”곽승재가 직접적으로 말했다.“내가 너의 집에서 샤워하고 잔줄 알잖아.”백유미는 곽승재 옆에 있는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은서 씨,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오해에요.”백유미는 그날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은서 씨, 그래도 믿지 못하겠으면 CCTV 영상을 보여드릴게요.”곽승재가 고개를 돌린 틈을 타 고은서는 백유미의 비웃음 가득한 눈빛을 읽고 말았다.고은서는 피식 웃더니 곽승재의 넥타이를 잡아끌어 입술에 키스했다.향긋함과 부드러운 촉감에 곽승재는 멈칫하고 말았다.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그 역시 고개 숙여 키스를 마저 했다.핸드폰이 걸리적거렸는지 곽승재는 테이블 위에 뿌리치고 고은서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계속해서 키스했다.하지만 허리를 꽉 끌어안는 순간 고
...고은서는 고준석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갔다.차에서 물건을 내리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불청객인 성아연을 발견했다.그녀는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차를 마시면서 패션잡지를 보고 있었다.“사모님, 성아연 씨께서 사모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이미숙이 말했다.“고은서, 왔어? 오래 기다렸어.”성아연이 잡지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고은서는 이미숙더러 일 보러 가라면서 성아연에게 물었다.“왜 왔어?”불친절한 말투에 성아연은 불쾌하기만 했다.“고은서, 아직도 화나 있는 거야? 내가 유미 씨한테 인생 교육한 거 누구 때문인데.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에 지금 무슨 말투야? 너도 GS 그룹 파티에 참석한다며? 나랑 같이 파티룩도 고르고 메이크업 숍도 같이 가. 파티 현장에 같이 가면 되겠네.”“내가 왜 너랑 이런 걸 같이 해야 하는데?”고은서가 물건을 소파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다시는 나 찾지 않기로 한 거 아니야? 그럼 이만 배웅하러 나가지 않을게.”성아연은 화를 내려다 고은서가 산 드레스를 보고 감탄했다.“와, 최신상이잖아. 내가 얼마 전부터 갖고 싶었는데. 고은서, 나 이거 선물해 주라. 고르러 가기도 싫어.”성아연이 꺼내 입어보려고 하자 고은서가 확 낚아채면서 냉랭하게 말했다.“갖고 싶으면 가서 사든가. 이거 내 거야. 내가 왜 선물해야 하는데?”성아연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고은서, 왜 이렇게 치사해졌어? 예전에는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옷이면 다 선물해줬잖아!”우정을 끔찍이 생각했던 고은서는 성아연이 마음에 든다면 아깝더라도 전부 다 선물해 줬다.하지만 지금은 이 드레스를 성아연에게 선물해 줄 바에 걸레로 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염치가 없긴.”고은서가 물건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하자 성아연이 말렸다.“고은서, 정말 나랑 절교하고 싶어? 잘 생각해 봐. 사람들이 너랑 놀아주지 않을 때 누가 너랑 놀아줬는지. 승재 씨를 따라다닐 때 누가 옆에서 아이디어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