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씨 노부인은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냈다.노파는 지팡이를 짚고 우뚝 서서 광기 어린 눈으로 연무장 중앙에 서 있는 북진연을 노려보았다.범청봉 일당은 살인벌의 소리를 들은 직후에 연무장에서 철수했다.북진연의 검에 부상을 입은 월공은 중상을 입은 범현창을 끌고 연무장을 나갔다.연무장 중앙에는 북진연과 흑기군, 그리고 그를 도와주고자 달려온 온사만 남게 되었다.노부인은 싸늘한 목소리로 협박했다.“이곳에서 죽기 싫으면 당장 항복하고 내게 용서를 구하거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그 나이 들어서 악귀가 되었구나.”북진연은 냉소를 지으며 욕설을 내뱉었다.살면서 그를 협박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곧 관짝에 들어갈 노인네 따위에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었다.노부인의 표정이 음침하게 굳더니 온사를 향해 피식 비웃음을 터뜨렸다.“섭정왕, 너 자신은 그렇다 쳐도 네 옆에 있는 성녀를 위해 다시 고민해 보는 게 좋을 텐데?”“오늘 너희들은 살아서 이곳 범가성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섭정왕이야 워낙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연모하는 이마저 이곳에서 죽게 만들 생각이냐?”연모하는 이라는 말에 온사는 순간 당황했다.‘설마 나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그녀는 조용히 북진연을 바라보았다.그녀의 시선을 느낀 북진연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침착하게 말했다.“너희 따위가 우릴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아?”“성녀는 섭정왕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람인가 보군.”노부인은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노파는 고개를 돌려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듣기로 성녀가 진국공 가문에서 쫓겨난 이유가 섭정왕과 밀정이 들켜서라던데, 사내를 위해 존귀한 신분까지 버렸는데 그 사내는 너를 지켜주지도 못하게 생겼으니. 저런 무책임한 사내를 차라리 버리는 게 낫지 않겠어?”온사는 기가 차서 헛웃음만 나왔다.“범 노부인, 대체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듣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으나 그거로 우릴 협박하려는
분노한 범씨 노부인이 소리쳤다.“섭정왕 전하! 아이가 이미 패배를 인정했는데 이러시면 안 됩니다!”“누가 그랬지? 난 들은 적 없는데?”북진연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졌다는 말을 내뱉은 적이 없지 않느냐?”“말했는데 전하께서 말을 못하게 막았지 않습니까!”범청봉의 고함에 북진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난 이자의 입을 틀어막은 적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지? 네가 이 아이를 설득해 보려무나. 빨리 말하라고 말이지.”노부인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지만 지금은 북진연과 입씨름을 할 때가 아니었다. “현창아, 어서!”“현창아, 어서 졌다고 말해!”“형님!”범현창도 당장 말하고 싶지만 극심한 고통에 말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멀쩡한 다리를 차가운 검날이 겨누고 있었다.그는 만약 이때 입을 연다면 그의 입을 틀어막고자 북진연의 검이 순식간에 자신의 남은 한쪽 다리마저 잘라버릴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그러나 말을 안 해도 이대로 가다가는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그의 어깨와 잘린 허벅지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범현창은 그제야 북진연이 피를 좀 봐야겠다는 말이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어떡하지? 대체 어떡해야 살 수 있지?’그리고 이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노부인이 소리쳤다.“월공, 시작하거라!”명령이 떨어진 순간, 중년 사내가 발을 구르더니 연무장에 뛰어들어 북진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그러나 북진연이 더 빨랐다.“죽으려고 작정했구나!”북진연은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낸 후, 잠시 안도하던 범현창을 찔렀다.“제가 졌… 악!”범현창의 처참한 비명이 다시 울려퍼졌다.그것은 두 다리를 모두 잃은 사내의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북진연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놈의 사타구니에 검을 휘둘렀다.“이 망할 자식이!”“다 같이 덤벼!”일족의 사람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범청봉을 필두로 장내의 일족들이 우르르 검을 들고 북진연을 향해 달려들었다.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가만히 있는 온사를 향
시작하자마자 범현창이 중상을 입고 쓰러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분명 둘이 동시에 공격을 시전했는데 북진연의 속도가 압도적으로 빨랐다.눈 깜짝할 사이에 일족의 자랑이던 범현창이 초라한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졌다.북진연의 검은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섭정왕, 그만하세요!”노부인이 다급한 비명을 지르자, 북진연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뭐가 그렇게 급해? 목숨을 취하지는 않겠다고 했으니 죽이진 않을 것이다.”어차피 항복을 외치지 않는 한, 그는 마음대로 상대를 괴롭힐 수 있었다.북진연의 속내를 읽은 노부인은 다급히 범현창에게 소리쳤다.“현창아, 어서 항복해!”패배를 인정하면 한쪽 손을 잃을지라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더 처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그러나 북진연은 상대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넌 참 간도 큰 녀석이야. 내 앞에서 건방을 떨고 날 도발한 자는 네가 처음이었으니. 지난번에 날 도발한 자의 말로가 어땠는지 알려줄까?”북진연은 천천히 범현창의 어깨에 박힌 검을 뽑았다.순식간에 범현창은 극심한 고통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바닥을 뒹굴며 생각했다.‘할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지? 패배를 인정하라고?’그러나 이대로 패배를 인정한다면 앞으로 일족 앞에서 체면이 엉망이 될 것이다. 그는 일족의 적장손이고 앞으로 가주가 될 사람이었다.패배를 인정하더라도 적어도 북진연에게도 상처를 내고 인정해야 했다.‘그래, 그거야!’범현창은 이를 악물고 기어일어나 자신의 앞에 선 북진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죽어!’쾅!그러나 검이 북진연에게 닿기도 전에 그는 북진연의 발길에 차여 허공으로 떠올랐다. 범현창은 끈 떨어진 연처럼 허공을 날아 지면으로 추락하더니 울컥하고 피를 토했다.피에는 살점인지 뭔지 모를 덩어리도 섞여 있었다.그 광경을 목격한 범씨 노부인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발길 한번에 범현창의 오장육부가 손상된 것이다.‘왜지? 왜 나보다 빠르고 힘도 나보다 센 거지?’범현창은
곱상한 외모의 중년 사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노부인에게 공손히 청했다.“노부인, 소인이 공자를 대신해 출전하겠습니다.”“안 됩니다.”“안 돼!”뜻밖에 범현창과 노부인 모두 그의 출전을 반대했다.노부인이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범현창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아저씨, 이 일의 발단은 저이니 손목 하나 잘려도 상관없습니다. 아저씨께서 저를 대신하여 나서실 필요는 없어요.”말을 마친 그는 곧장 앞으로 나섰다.“섭정왕 전하, 어떤 식으로 겨루실 겁니까?”북진연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규칙은 간단해. 결투에서 진 쪽이 손목을 자르는 거지.”그는 곧이어 한마디 덧붙였다.“내가 어린애를 괴롭힌다고 얘기할 것 같으니 한쪽 손만 사용해서 너와 결투하도록 하겠다.”그 말을 들은 범현창의 두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일전에 북진연의 실력을 잘 몰라서 그를 도발한 거였지만 그가 검을 던져 사촌동생의 머리를 박살낸 이후로 그는 자신이 북진연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적어도 힘으로는 상대를 이길 수 없었다.그러나 북진연이 만약 한손만 이용해서 싸운다면 결과는 장담할 수 없었다.그런 생각을 하니 범현창의 얼굴에 다시 자신감이 돌아왔다.“섭정왕께서 제게 양보까지 해주시는데 제가 어찌 마다하겠습니까?”“좋아. 이따가 너무 빨리 항복하진 말라고.”북진연은 한껏 그를 비웃어준 뒤, 온사에게 말했다.“돌아가서 쉬고 있어. 곧 끝날 테니.”“예, 조심하십시오, 전하.”비록 북진연이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걱정되어 한 말이었다.북진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걱정 말고 자리로 가. 위에 내가 직접 우린 차도 있으니 그걸 마시고. 이따가 끝나면 내가 새로 우려주지.”“예, 전하.”그렇게 온사는 자리로 돌아갔다.아니나다를까, 탁자 위에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다.한 모금 맛본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이 차는… 여기 차가 아닌 것 같은데?”뒤에 있던 흑기군이 작게 말했다.“성녀 전하,
온사의 도발에 완전히 넘어간 범현창은 화살을 꽉 쥐고 치욕에 몸을 떨었다.이대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현창아!”범청봉이 호통치며 다시 그를 불렀다.“네 할머니의 지시를 잊지 말거라!”그는 범현창에게 뭐가 중요한지 일깨워주고자 했지만 범현창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삼촌,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온사를 노려보며 말했다.“서로에게 화살을 겨눈다는 의미지요? 저야 두려울 것 없지만 성녀께서 정말 그리하실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예리한 화살은 자칫하면 피를 볼 수도 있답니다.”온사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쓸데없는 말이 많구나. 말을 끌고 오게 하거라.”범현창의 눈가에 진한 살기가 스쳤다.‘주제도 모르는 년.’“좋습니다! 여봐라!”“당장 멈춰!”범현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파의 목소리가 입구에서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언제 온 건지, 범씨 노부인이 중년 사내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연무장 중앙으로 온 노부인은 다짜고짜 손을 들어 범현창의 따귀를 때렸다.짝 하는 소리와 함께 범현창의 고개가 돌아갔다.“무례한 녀석, 감히 성녀 전하께 그런 불경한 말을 하다니. 당장 안 꺼져?”온사는 말없이 구경만 하고 있었다.범현창은 노부인 앞에서까지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그는 잔뜩 음침한 눈길로 온사를 쏘아보고는 뒤돌아섰다.“잠깐.”이때, 조용히 관전하고 있던 북진연이 갑자기 그를 불러세웠다.곧이어 그는 친히 우린 찻잔을 온사의 자리에 놓은 후, 성큼성큼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갔다.온사의 옆으로 온 그는 범씨 노부인과 범현창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게 도전장을 내민 것도 모자라 성녀까지 도발한 자이다. 이토록 예의를 모르는 놈을 따귀 한대로 끝낼 수는 없지 않느냐?”“섭정왕 전하, 아이가 철이 없어서 저지른 일이니 제가 손자를 대신해 두분께 사죄를….”“그거로는 부족하지.”북진연은 노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갑게 말을 잘랐다.“그럼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졌어….”“현창 형님이 지다니.”“이럴 수가, 분명 저 성녀는….”그들은 성녀가 나약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감히 입밖으로 낼 수 없었다.그들이 무적의 사격술이라고 생각했던 범현창이 온사에게 졌기 때문이었다.게다가 범현창이 먼저 도발했으니 범청봉마저 어색함을 금할 수 없었다.그들은 성녀를 너무 얕잡아보았던 것이다.상대는 그저 얼굴로만 성녀가 된 줄 알았는데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을 줄이야.“성녀 전하께서 이토록 사격에 능할 줄은 정말 몰랐군요.”범청봉이 어색함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아직 때가 되지 않았고 그들은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화살을 쏘느라 피곤하시죠? 어서 앉아서 좀 쉬시죠.”온사는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후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그런데 이때!“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그녀의 등 뒤에서 범현창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사는 고개를 돌리고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뭘 인정할 수 없다는 거지?”범현창은 이를 갈며 말했다.“대결 다시 합시다. 서서 쏘는 게 아니라 말을 타고 쏘는 겁니다!”그는 어릴 때부터 뭔가를 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북진연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건데 일개 여인에게 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온사가 일반 여인이 아닌 성녀라고 하더라도 그는 이 굴욕감을 참을 수 없었다.그는 어떻게든 체면을 되찾아야 했다.온사는 피식 웃더니 그에게 되물었다.“말을 타고 화살을 쏘는 내기를 하자고? 확실해?”북진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온사의 기마술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 같이 여정을 떠나면서 그녀는 줄곧 말을 타고 그들과 동행하며 뒤처진 적이 없었다.그렇다는 건 기마술 실력이 나쁘지 않다는 얘기였다.그러니 말 위에서 화살을 쏘는 법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북진연은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오늘 밤 온사의 또다른 면을 또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확실합니다. 자신 없으신가요?”범충은 잃어버린 체면을 되찾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