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차도혁은 아무렇지 않았다.
회의는 아홉 시에 시작해 열한 시에 끝났다. 점심은 거래처와 먹었고 오후에는 계열사 보고를 두 건 받았다. 저녁에는 세아의 귀국 환영 모임에 잠깐 얼굴을 비쳤다.
청담동 갤러리를 통째로 빌린 자리였다. 세아의 음대 동기들과 공연 기획사 사람들, 몇몇 재벌가 2세들이 샴페인 잔을 들고 서 있었다. 세아는 무대 대신 사람들 사이를 돌며 웃었다. 도혁이 들어서자 그녀가 가장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오빠, 왔네! 안 올 줄 알았는데."
"잠깐 들렀어."
"잠깐이라도 고마워. 어제 공항에서도 고마웠고."
세아가 그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공항에서 찍힌 사진과 같은 자세였다. 누군가 휴대폰을 드는 게 보였다. 도혁은 팔을 빼지 않았다. 빼야 할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다.
"근데 사모님은? 같이 오시지."
세아가 물었다. 옆에 있던 기획사 대표도 거들었다.
"그러게요, 전무님. 사모님 얼굴 한 번 뵙고 싶었는데. 결혼식 때도 멀리서만 봤거든요."
"바빠서요."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3년 동안 그가 아내 대신 가장 많이 한 대답이었다.
세아가 작게 웃었다. 무언가 알겠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다른 손님에게 불려 가며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다행이다. 사실 나, 그분 얼굴 보면 좀 미안할 것 같았거든."
무엇이 미안하다는 건지 도혁은 묻지 않았다. 샴페인을 반 잔쯤 마시고 그는 먼저 자리를 떴다. 갤러리 문을 나서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말하는 게 들렸다. 역시 둘이 다시 만나는 거 아니야? 사모님은 원래 빚 때문에 들어온 사람이라며.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것은 밤 열한 시였다. 불 꺼진 거실. 그는 불을 켜지 않고 서재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아침에 본 그대로 이혼 합의서와 반지와 작은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서류를 서랍에 넣었다. 반지도 넣었다. 병은 넣지 않았다. 이유는 스스로도 몰랐다.
둘째 날, 도혁은 조금 불편했다.
아침에 드레스룸 문을 열었는데 셔츠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흰 셔츠가 서른 장쯤 되는 건 알았다. 그런데 그 서른 장이 어느 칸에 걸려 있는지는 몰랐다. 세 번째 칸을 열었더니 넥타이였고, 다섯 번째 칸을 열었더니 겨울 코트였다.
결국 그는 가사도우미를 불렀다. 일주일에 세 번 오는 오십 대 여자였다.
"셔츠."
"네? 아, 셔츠요. 여기 있습니다, 전무님."
도우미가 드레스룸 안쪽 벽을 밀자 문이 하나 더 열렸다. 그 안에 셔츠가 색깔별, 두께별로 걸려 있었다. 요일마다 입을 것이 따로 표시된 작은 태그까지 달려 있었다.
"이건 누가 정리한 거지."
"사모님이 직접 하셨지요."
"당신이 하는 거 아니었어?"
도우미가 난처하게 웃었다.
"저는 청소만 합니다, 전무님. 전무님 옷이랑 드시는 거, 약 챙기시는 건 전부 사모님이 하셨어요. 처음에 제가 하겠다고 했더니 사모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이건 제 일이라고."
"다림질도요?"
"네. 전무님 셔츠는 세탁소에 안 맡기셨어요. 약품 냄새가 남는다고요. 새벽에 일어나서 직접 다리셨어요. 저는 그 시간에 오지도 않으니까, 사모님이 언제 주무셨는지도 몰라요."
도혁은 셔츠를 한 장 꺼냈다. 목 안쪽에서 아주 옅은 향이 났다. 섬유유연제가 아니었다. 무슨 향인지 이름을 댈 수는 없었지만 3년 동안 매일 맡아 온 냄새였다. 너무 익숙해서 한 번도 냄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냄새.
그는 셔츠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었다. 햇볕에 마른 면 같은 냄새였다. 아침마다 현관에서 넥타이 매듭을 고쳐 주던 손에서도 이 냄새가 났던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 손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래. 나가 봐."
셋째 날, 도혁은 두통으로 깼다.
새벽 다섯 시였다. 관자놀이가 쪼개질 것 같았다. 그는 욕실 수납장을 열었다. 약이 없었다. 부엌 서랍을 열었다. 없었다. 거실 협탁, 서재 책상, 현관 신발장까지 다 뒤졌다. 없었다.
그는 부엌 한가운데 서서 휴대폰을 들었다. 통화 기록을 열어 「한서린」을 찾았다. 한참 내려가야 했다. 그녀가 걸어 온 기록만 있었고, 그가 건 기록은 없었다. 걸려 온 것도 받지 않은 쪽이 대부분이었다. 마지막 기록은 사흘 전 저녁 일곱 시 반이었다. 3주년 저녁. 부재중.
통화 버튼 위에서 엄지가 멈췄다.
두통약 어디 있냐고 물으려고? 사흘 만에?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대신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냈다. 냉장고 문 안쪽 칸에 투명한 약통이 하나 붙어 있었다. 뚜껑에 네임펜으로 작게 쓰여 있었다.
「두통 — 공복에 드시지 말 것」
그 아래에 한 줄 더.
「식빵은 냉동실 둘째 칸」
도혁은 오래 그 글씨를 보았다. 둥글고 작은 글씨였다. 아내의 글씨를 그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냉동실 둘째 칸을 열었다. 식빵이 한 장씩 종이 포일에 싸여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한 장을 꺼내 토스터에 넣었다. 잠시 뒤 빵 굽는 냄새가 부엌에 퍼졌다.
3년 동안 아침마다 이 냄새가 났다. 그는 그게 저절로 나는 냄새인 줄 알았다.
* * *
그날 오후 태강그룹 본사 꼭대기 층에서 호출이 왔다.
회장실은 늘 향나무 냄새가 났다. 여든둘의 차명헌 회장은 30년째 같은 책상에서 일했다. 도혁이 들어서자 회장은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앉아라."
도혁은 앉았다. 회장은 한참 서류를 넘기다가 돋보기를 벗었다.
"서린이 나갔다며."
"……누가 그러던가요."
"누가 그러긴. 네 얼굴에 쓰여 있다. 셔츠 단추가 하나씩 밀렸어."
도혁은 반사적으로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단추가 하나씩 어긋나 있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단추를 다시 채웠다. 회장이 코웃음을 쳤다.
"3년 동안 네 셔츠 단추가 밀린 걸 나는 한 번도 못 봤다. 넥타이가 비뚤어진 것도. 그게 누구 손이었는지 이제 좀 알겠냐."
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 달 전에 그 아이가 여길 왔다."
"들었습니다."
"들었다고? 누구한테?"
"……본인한테요. 나가기 전날."
"그래. 그 아이가 저기 앉았다. 네가 지금 앉은 그 자리에."
회장이 턱으로 도혁의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그 아이가 울 줄 알았다. 빌 줄 알았지. 시어미가 모질게 군다, 남편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소리 할 줄 알았어. 3년이면 그럴 만도 하니까."
"……."
"그런데 무릎도 안 꿇더라. 서류 봉투를 하나 내밀었어. 이혼 합의서 사본하고, 3년 동안 이 집에서 받은 것들 목록. 예물, 카드, 차. 전부 두고 나가겠다고 적혀 있더구나. 그러고는 한마디 하더라."
회장이 잠시 말을 멈췄다. 창밖으로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회장님, 저는 이 집에 빚을 갚으러 왔는데, 3년 동안 갚을 기회를 한 번도 못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가 보겠습니다."
도혁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
빚을 갚으러 왔다. 그 말을 그는 아내의 입으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3년 동안 그 말은 그가 속으로만 하던 말이었다. 돈 때문에 들어온 여자. 그런데 그 여자가 제 입으로 그 말을 꺼내 놓고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회장실의 향나무 냄새가 갑자기 짙게 느껴졌다. 도혁은 넥타이 없는 목을 한 번 만졌다.
"그래서 허락하셨습니까."
"허락?"
회장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늙은 사람의 마른 웃음이었다.
"그 아이가 내 허락을 구하러 온 줄 아냐. 통보하러 온 거다. 예의 바르게. 한 달을 주더구나."
"한 달이요?"
"너한테 한 달 준 거다, 이놈아. 한 달 동안 네가 한 번이라도 눈치챘으면 그 서류, 서랍에서 안 나왔을 거다."
도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 달. 그 한 달 동안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해외 출장이 두 번이었다. 집에서 저녁을 먹은 날은 없었다. 그리고 사흘 전, 공항.
그 한 달 동안 아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본 적이 없으니까. 아마 매일 아침 넥타이를 고쳐 주었을 것이다. 약통에 글씨를 써 붙이고, 셔츠를 요일별로 걸었을 것이다. 나갈 날을 정해 둔 채로.
"할아버지."
"왜."
"그 사람은 어차피 돌아옵니다."
회장이 도혁을 보았다. 오래, 말없이.
"왜 그렇게 생각하지."
"갈 데가 없으니까요. 친정은 빚더미고, 직업도 없고, 가져간 건 옷 가방 두 개뿐입니다. 한 달이면 돌아옵니다. 길어 봐야 두 달이고요."
회장은 대답하지 않고 돋보기를 다시 썼다. 서류로 눈을 내리며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나가 봐라."
도혁은 일어났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등 뒤에서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혁아."
"네."
"너는 3년을 같이 살고도 그 아이가 누군지 모르는구나."
도혁이 돌아보았다. 회장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
"끝내 모르겠구나."
* * *
그날 밤 도혁은 서재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강민재의 보고가 메일로 와 있었다. 「사모님 소재 — 확인 중. 사모님 명의 카드 사용 내역 없음. 휴대폰은 켜져 있으나 위치 조회는 법적으로 어렵습니다.」
카드 사용 내역 없음.
그는 그 줄을 다시 읽었다. 사흘 동안 한 번도 카드를 쓰지 않았다. 그럼 뭘 먹고, 어디서 자고 있다는 건가.
책상 위 작은 유리병이 스탠드 불빛에 반짝였다. 은색 리본은 풀린 채였다.
그는 병을 집어 뚜껑을 열었다. 뿌리지 않았다. 병 입구에 코만 가까이 댔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올라왔다.
왜 이 향을 맡으면 현관이 떠오르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3년 전 그 겨울 현관에서 자기가 무엇을 보았는지, 그때 자기 얼굴이 어땠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 향을 만든 사람만 기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