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의 새벽은 기름 냄새로 시작했다.
골목 초입의 오래된 인쇄소에서 잉크와 기계유 냄새가 흘러나왔고, 그 옆 빵집 환풍구에서는 버터가 녹는 냄새가 났다. 서린은 캐리어 두 개를 끌고 그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바퀴가 보도블록 틈에 걸릴 때마다 덜컥 소리가 났다.
3년 만에 걷는 길이었다.
빨간 벽돌 건물 2층, 간판도 없는 철문 옆에 손바닥만 한 황동 명패가 붙어 있었다.
「무향(無香)」
향을 만드는 곳의 이름이 '향이 없음'이라는 게 우습다고, 처음 이 이름을 지었을 때 실장은 한참 웃었다. 서린은 그때 이렇게 대답했었다. 모든 향은 아무 냄새도 없는 데서 시작한다고.
철문을 열자 불이 이미 켜져 있었다.
"서린 씨!"
작업대 뒤에서 문지현이 튀어나왔다. 마흔다섯, 짧은 커트 머리에 돋보기안경을 이마에 올린 여자였다. 서린이 스무 살 때 조향 학원에서 처음 만난 선생이었고, 지금은 N의 유일한 손발이었다.
"잠은 잤어요?"
"실장님이야말로요. 세 시간 전에 전화 드렸는데."
"그 전화 받고 잠이 와요? 누가 7번을 훔쳤다는데."
지현은 서린의 손에서 캐리어를 빼앗듯 받아 들다가 멈칫했다. 캐리어 두 개. 그리고 서린의 맨 손가락.
"……반지는요?"
"두고 왔어요."
"그럼 진짜로—"
"네. 진짜로요."
지현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서린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그 손이 조금 떨렸다는 걸 서린은 모른 척했다.
* * *
금고는 작업실 안쪽, 원료장 뒤에 숨어 있었다.
어른 허리 높이의 회색 철제 금고. 비밀번호는 여덟 자리였고, 그 번호를 아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서린과 지현.
서린이 번호를 눌렀다. 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에는 가죽 표지의 노트 열두 권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N이 10년 동안 만든 모든 향의 배합이었다. 파리의 회사들이 수십억을 부르며 찾아 헤매는 것이 전부 이 좁은 철 상자 안에 있었다.
서린은 일곱 번째 노트를 꺼냈다.
표지를 넘기고, 종이를 한 장씩 넘겼다. 손가락 끝으로 모서리를 쓸어 보고, 제본 실이 끊긴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마지막 장까지 넘긴 뒤 노트를 코에 가까이 댔다.
종이 냄새. 오래된 잉크. 그리고 자기 손 냄새.
"……노트는 멀쩡해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어젯밤 그 향이 확실히 7번이었어요?"
"확실해요."
서린은 금고 맨 아래 칸을 열었다. 거기에는 작은 유리병들이 스펀지 틀에 꽂혀 있었다. 노트마다 한두 병씩, 배합을 확정하기 전에 만든 시제품이었다.
7번 자리는 두 칸이었다.
그중 한 칸이 비어 있었다.
지현이 숨을 들이켰다.
"5밀리 한 병……. 이게 언제부터 없었지? 나 지난달에 재고 볼 때 분명히—"
"실장님, 지난달에 7번 칸까지 보셨어요?"
지현의 입이 닫혔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1번부터 6번만 봤어요. 7번은 서린 씨가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직 이름도 없는 거라고."
맞는 말이었다. 7번은 서린이 3년 전, 결혼하기 직전에 만들기 시작한 향이었다. 흰 목련과 비에 젖은 돌. 그리고 무화과 잎. 결혼식 날 아침 창밖에서 나던 냄새를 붙잡아 두려고 만든 향이었는데,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이 향을 완성할 이유가 결혼 생활 안에서 한 번도 생기지 않았으니까.
"금고 기록 볼 수 있죠?"
"네, 잠깐만요."
금고는 디지털식이었다. 지현이 옆면의 작은 화면을 눌러 개폐 기록을 불러냈다. 날짜와 시각이 줄지어 떴다. 대부분은 지현이 낮에 원료 노트를 확인하느라 연 기록이었다.
서린의 눈이 한 줄에서 멈췄다.
「7월 19일 02:03 — 열림」
「7월 19일 02:11 — 닫힘」
8분.
"7월 19일."
서린이 날짜를 소리 내어 읽었다. 지현이 휴대폰 달력을 뒤졌다.
"토요일이에요. 새벽 두 시면 나는 집에서 자고 있었을 거고……. 서린 씨는요?"
"시댁에 있었어요."
그날은 시할머니의 기일이었다. 서린은 새벽 네 시까지 본가 부엌에서 전을 부쳤다. 기름 냄새가 머리카락에 배어 사흘 동안 빠지지 않았던 걸 기억했다. 시어머니는 그날도 전 모양이 고르지 않다며 두 번이나 다시 부치게 했다.
"그럼 누가……."
"번호를 아는 사람이 연 거예요. 부순 흔적이 없으니까."
"나 아니에요!"
지현이 거의 소리를 질렀다. 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알아요. 실장님이었으면 7번 말고 1번을 가져가셨겠죠. 그게 제일 비싸니까."
"……이 와중에 농담이 나와요?"
"농담 아니에요."
서린은 금고 문을 닫았다. 삑, 소리가 났다.
"CCTV 볼게요."
* * *
같은 시각, 청담동의 펜트하우스.
차도혁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커피도, 토스트도, 그가 3년 동안 한 번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은 반숙 계란도.
그는 넥타이를 매다 말고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 비서."
"네, 전무님."
"아침 여덟 시 회의, 아홉 시로 미뤄."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아무 일도 없어."
도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그 강 위로 아침 해가 낮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 어디 있는지 알아봐. 조용히."
"누구를……."
"내 아내."
수화기 너머가 한 박자 조용해졌다. 강민재는 5년째 도혁의 비서였지만, 도혁이 '내 아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걸 들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찾아서—"
"아니."
도혁이 말을 끊었다.
"찾기만 해. 데려오지는 말고."
"……네?"
"내버려 둬. 어차피 사흘이면 돌아와."
전화를 끊고 그는 넥타이를 마저 맸다. 거울 속의 매듭이 비뚤었다. 다시 풀고 다시 맸다. 또 비뚤었다. 3년 동안 그는 넥타이를 직접 맨 적이 없다는 걸, 그 순간까지 알지 못했다.
매일 아침 이 시간이면 현관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가 구두를 신는 동안 조용히 다가와 매듭을 한 번 고쳐 주고, 한 발 물러났다. 말은 없었다. 그도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해가 뜨면 한강이 반짝이는 것처럼.
도혁은 넥타이를 풀어 소파에 던졌다. 노타이로 가면 그만이었다.
현관에서 구두를 신다가 그는 신발장 위를 보았다. 늘 거기 놓여 있던 작은 도자기 접시가 비어 있었다. 차 열쇠와 사원증, 명함 지갑이 매일 아침 그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는 걸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열쇠는 어디 있지.
그는 서재로 가서 어젯밤 벗어 둔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열쇠가 나왔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는데 코트 깃에서 향이 훅 올라왔다. 흰 목련. 비에 젖은 돌. 어젯밤 세아를 호텔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차 안에 가득하던 향이었다.
좋은 향이라고 생각했었다. 세아가 빈에서 산 거라며 손목을 내밀었을 때.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목이 막혔다. 어젯밤 이 코트를 받으려다 멈춰 서 있던 아내의 손끝이 떠올랐다. 그 손이 왜 멈췄는지 그는 묻지 않았다.
도혁은 코트를 옷걸이에 도로 걸었다. 그리고 다른 코트를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 * *
작업실 CCTV는 건물 관리인이 달아 준 구형이었다. 녹화 파일은 날짜별로 한 달 치씩 외장 하드에 쌓였다. 지현이 7월 폴더를 열었다.
7월 19일.
영상을 틀었다. 새벽 1시 50분, 텅 빈 작업실. 1시 55분, 여전히 텅 빈 작업실. 2시 정각까지 화면 구석의 시계만 흘러갔다.
그리고 화면이 튀었다.
시계가 2시 00분에서 갑자기 2시 15분으로 넘어갔다.
지현이 영상을 멈추고 되감았다. 다시 틀었다. 2시 00분. 그리고 2시 15분. 그 사이의 15분이 통째로 없었다.
"……이게 뭐야."
지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 속 텅 빈 작업실을 오래 바라보았다. 2시 15분의 작업실은 2시 00분의 작업실과 똑같았다. 의자 하나, 컵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금고를 8분 동안 열었다 닫았다. 그리고 그 앞뒤로 딱 15분만 지웠다.
실수가 아니었다.
"실장님."
"네."
"이 하드, 우리 말고 누가 만질 수 있어요?"
지현이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작업실 한쪽 구석의 작은 책상을 돌아보았다.
조수 구하람의 자리였다.
책상 위에는 하람이 늘 쓰는 머그컵이 엎어져 있었다. 컵 옆에 코튼볼 한 봉지. 그리고 시향지 몇 장.
서린은 그 책상으로 걸어가 시향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코에 대지 않았다. 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흰 목련. 비에 젖은 돌. 그리고 끝에 남는, 아주 희미한 무화과 잎.
"하람이……? 설마. 걔 여기 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금고 번호도 모르고—"
"모르면 알아낼 수도 있죠. 실장님 번호 누를 때 옆에 서 있던 적 없어요?"
지현의 얼굴이 하얘졌다.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지금 전화해서 불러요. 아니, 경찰부터—"
"아니요."
서린은 시향지를 비닐 봉투에 넣어 입구를 접었다. 목소리는 조용했다. 어젯밤 남편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던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하람 씨 오늘 몇 시 출근이에요?"
"……열 시요."
"그럼 평소처럼 대해 주세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린 씨!"
"시향지 한 장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요. 하람 씨가 '서린 씨 노트 구경하다 호기심에 한 번 섞어 봤어요' 하면 끝이에요. 병이 누구 손에 들어갔는지, 그걸 누가 몸에 뿌리고 공항에 나타났는지는 여전히 모르고요."
지현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서린의 말이 맞았다. 늘 그랬듯이.
"그럼 어떻게 해요."
서린은 금고 쪽을 돌아보았다. 회색 철 상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
"도둑은 한 번 연 문을 또 열어요."
그녀는 봉투를 서랍 깊숙이 넣고 잠갔다. 작업실 창밖에서 빵집 환풍구의 버터 냄새가 다시 흘러들었다. 아침 아홉 시 반이었다.
한서린이 남편 없이 맞은 첫 번째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