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은 질문한 하성이 아닌 하연을 바라봤다.“하연아, 방금 정태훈한테서 연락받았는데...”태훈의 이름을 들은 순간 하연은 대충 무슨 일을 말할지 짐작했다.“패션쇼 현장에서 벌어졌던 그 일 때문이에요?”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옷 망가뜨린 범인 잡았대. 패션쇼에 가위를 소지해 들어왔다는 것도 인정하고, 몯델의 신발에 칼날 숨긴 것도 인정했다.”들으면 들을수록 하연은 화가 치밀었다.“그리고요?”“찾아봤더니 그 사람 고아였어. 가족도 친척도 없는 사람이 뜬금없이 계좌로 몇천만 원이 입금돼서 조사했는데 아무 단서도 못 찾았어. 그리고 입 꾹 다물고 있어. 그저 본인 잘못 인정만 하고 누가 지시했는지는 말하지 않아.”“...”여기까지 들은 하연은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그러니까 다른 단서는 없다는 거네요?”“응. 상대방은 분명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를 공격하고 있어. 막기 어려워. 잘 생각해 봐, 너 평소에 누구 심기 건드린 적 있어?”하연은 어깨를 으쓱했다.“그건 저야 모르죠. 그런데 저를 싫어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에요.”그 말에 하민의 낯빛은 더 어두워졌다.“설마 한서준 그놈 때문에 너한테 이러는 건 아니겠지?”민혜경만 봐도 아주 좋은 선례다.“혹시 민씨 가문 짓은 아닐까?”하연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민씨 가문은 이미 몰락했어요. 그렇게 큰돈을 선뜻 내놓으면서 그런 지시를 내렸을 리 없어요.”하연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지만 하민은 그것 외에 다른 경우는 떠오르지 않았다.“큰오빠, 그 사람이 인정했다면 우리 집안 규칙대로 처리하는 건 어때요?”하민은 하연의 뜻을 단번에 이해했다.“우리 최씨 집안 사람을 건드리면 당연히 그 대가를 치러야지. 이 일은 오빠한테 맡겨.”그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하민이 오히려 걱정되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하연아, B시는 너무 위험해. 네가 혼자 그곳에 가 있으면 우리 모두 마음 놓지 못해. 차라리 DS 그룹은 포기하고 여기 F국에 있는 본사로 돌아오는 건 어때?”“
하연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하민은 하연이 F국을 떠나는 걸 끝내 동의했다.B시로 돌아온 하연은 곧바로 안형준을 만나러 길을 떠났다.그 시각, 안형준은 민성시립 대학교 교수 사무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이번 하연이 패션쇼에서 선보인 복장을 평가하고 있었다.“안 교수님, 이번 패션쇼가 성공리에 막을 내린 건 모두 메인 의상 덕분이었어요.”안형준의 제자인 주형민이 먼저 의견을 내비치자 안형준도 그 말에 동의했다.“맞아. 이번 디자인 무척 훌륭해. 벌써 해외 패션쇼의 초대도 받았어.”“정말이에요? 그러면 우리 이번 기회에 해외에서 패션쇼 열 수 있겠네요?”그 말에 다른 제자도 흥분한 듯 눈을 반짝였다.“당연하지.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해?”“국제 패션쇼에서 예전에는 우리 작품 꺼리더니. 심지어 우리는 세계 무대에 설 만한 복장을 디자인하지 못한다고 무시도 했었잖아. 그런데 이런 걸 보면 우리 실력을 제대로 증명했나 봐.”“어떡해, 너무 흥분돼.”“...”흥분한 듯 말을 보태는 학생들 속, 유일하게 한 사람만 기쁨이 아닌 비아냥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디자인도 평범하고, 포인트도 없구먼. 다들 어쩜 보는 안목이 이렇게 없어?”그 말 한마디에 기쁨으로 가득 찼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서창섭, 너 그게 무슨 뜻이야? 너도 우리나라 디자인 무시하는 거야?”서창섭이라 불린 사람은 귀찮은 듯 대답했다.“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지연 선배는 어떻게 이겼나 몰라. 교수님, 대체 무슨 생각이예요? 어떻게 이런 사람을 메인 디자이너로 선발하셨어요?”지연의 이름이 언급되자 안형준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다른 학생들도 지연의 이름에 하나둘씩 입을 다물었다.“서창섭, 자고로 말은 적게 하랬어. 말할 줄 모르면 조용히 닥치고 있는 게 어때?”“네가 지연 선배 짝사랑하는 건 알겠는데, 이번 일은 엄연히 따지면 지연 선배 잘못이야.”“잘못한 건 인정해야지. 편 들어주면 어떡해?”다른 학생들의 말에 창섭의 낯빛은 순간 어두워졌다.“너희가 뭘 알
“서창섭! 너 그게 무슨 말이야. 하연 선배는 본인 실력으로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따냈거든. 패션쇼도 성공적으로 끝나고, 사회적으로 평가도 얼마나 좋은데, 이거로 하연 선배 실력은 증명된 거 아닌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동기의 충고에도 창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하하, 고작 이게 뭐라고. 이 정도는 누구나 다 해! 최하연이여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서창섭, 그만해!”참다 못한 형민이 결국 나섰지만 창섭의 태도는 여전히 똑같았다.“최하연, 정말 이번 패션쇼에 본인 신분과 배경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하연은 그 말에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그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창섭을 확인했다. 분명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기에 하연은 상대의 이런 적대적인 태도가 더 이해되지 않았다.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이번 메인 디자이너 선발은 공평하게 진행되었어요. 창섭 씨가 말한 더러운 수단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창섭은 큰 소리로 웃었다.“그 말을 누가 믿지? 너희는 믿어?”그때, 형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서창섭, 메인 디자이너는 공정한 경쟁으로 선정한 거야. 심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의견을 하연 선배를 선택했고. 그러니까 소란 그만 피워!”그 말에 창섭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형민을 바라봤다.그리고 그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 모든 건 그가 지연한테서 들은 것과 완전히 달랐으니까.“서창섭,”그때 안형준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무슨 연유로 이러는지 몰라도 하나만은 명확히 알려주지. 하연 양의 디자인은 모든 사람이 확인하고 충분히 고민한 끝에 선정된 거다. 오늘 너희가 모두 여기 모였으니 내가 솔직히 말하마.”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학생들은 모두 안형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안형준은 제자들의 시선 속에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양, 내가 패션쇼 전에 대충 얘기한 적은 있어도 제대로 설명은 안 했었죠?
“스승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싱긋 미소 지으며 내뱉은 하연의 대답에 모두가 함께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차 한잔을 하연에게 건넸다.하연은 차를 받아 들고 안형준의 앞에 다가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스승님, 절 받으세요.”안형준은 하연이 건넨 차를 받아 들더니 미리 봉투에 넣어 두었던 용돈을 하연에게 건넸다.“그만 일어나거라.”“감사합니다.”입문 의식이 끝나자 안형준은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심지어 당장이라도 자기 제자를 데리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나 하더니 끝내 업계에서 친한 친구들한테 문자로 이 일을 자랑했다.마치 세상에 모두 알리기라도 하듯이....민성 시립대학교에서 나오자마자 하연은 저에게로 걸어오는 웬 훤칠한 남자를 발견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운석이 먼저 하연을 알아보고 성큼성큼 걸어왔다.“여신님! 귀국했네요?”피곤함에 찌든 운석의 모습에 하연은 놀라운 듯 물었다.“운석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운석은 대답 대신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본인이 할 말을 내뱉었다.“화재 사고를 당했다던데,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괜찮아요?”“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하연의 대답에 운석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그동안 운석은 사업 때문에 D시에 있느라 B시의 소식을 여쭈어볼 새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연락했을 때, 하연이 화재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때문에 일을 마치자마자 바로 돌아왔고, 지금 하연이 무사한 걸 확인하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린 거예요?”그때, 하연이 멀지 않은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캐리어를 가리키며 물었다.운석은 부정하지 않고 서류를 꺼내더니 칭찬을 기대하는 어린이처럼 하연에게 그 서류를 모두 건네며 말했다.“자, 봐봐요. 제가 그동안 이룬 실적이에요.”“이렇게나 많이요?”하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류 뭉치를 확인하더니 속으로 운석의 능력에 탄복했다.그러자 운석은 득의양양
“뭐? 남자 두 명이 여자 한 명을 놓고 싸우기는! 최 사장님과 제일 친한 사람 부 대표님이거든. 설마 잊었어? 최 사장님 현재 애인은 부 대표님이라던데.”“대박. 막장이 따로 없네!”“...”직원들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소파에 앉아 있던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발자국도 안 되는 위치에 서 있던 구동후가 막아 나섰다.“대표님, 저 사람들 함부로 지껄이는 거나 신경 쓰지 마세요.”서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눈 밑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로부터 얼마 뒤, 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서서 엘리베이터를 올랐다.“하연 씨, D시에 아직 발전 공간이 엄청 많더라고요. 그래서 나 앞으로 3년 동안 중점적으로 D시 쪽에 집중할 예정이에요”“괜찮은 생각이네요. D시 시장을 열 수만 있다면 이익이 엄청날 거예요.”“이 일은 나한테 맡겨요.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오일은 우리가 앞으로 밀고 나갈 발전 방향이에요...”운석과 하연은 대화를 하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최 사장님, 이제야 오셨네요?”익숙한 목소리에 운석은 하려던 말을 이내 멈췄고, 하연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곧이어 상대 쪽으로 걸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호 이사님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최 사장이 죽다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돼서 상태도 살필 겸 왔죠. 몸은 괜찮아요?”‘웃겨 정말, 고양이가 쥐 생각하네.’하연은 겉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걱정과 관심 고맙습니다. 저는 무사합니다.”호현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선배의 자태를 나타냈다.“괜찮다니 다행이군. 이번 최 사장님이 맡은 패션쇼가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회사 실적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던데, 축하해요. 물론 제1분기 실적이 나온 걸 보니 최 사장님이 약속한 30퍼센트에는 한참 못 미치던데, 힘내요.”하연은 눈을 들어 조금도 밀리지 않는 눈빛을 보냈다.“이제 고작 제1분
이곳에서 서준을 만난 것에 현욱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한 대표님, 무슨 바람이 불어 DS 그룹에 다 오셨습니까?”“왜요? DS 그룹이 저를 환영하지 않나 봅니다?”서준의 말에 현욱은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한 대표님도 참, 무슨 그런 말씀을. 그저 최 사장님이 지금 한 대표님 만나는 게 불편한 듯하여 이리 말씀드린 겁니다.”그 말은 아주 의미심장했다.평소 능구렁이처럼 행동하는 호현욱이 이 순간 서준의 마음을 읽어내는 건 일도 아니다.이에 서준은 시선을 돌려 함께 서 있는 하연과 운석을 보더니 스스럼없이 쏘아붙였다.“불편한지 아닌지는 호 이사님이 결정할 일 아니지 않나요?”그 말에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린 현욱은 이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한 대표님 말씀이 맞네요.”하지만 서준은 더 이상 현욱을 보는 체도 하지 않더니 곧장 하연 쪽으로 걸어갔다.서준을 발견한 순간 하연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무시했다.“최하연...”심지어 서준이 저를 부르는데도 여전히 못 들은 척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때, 옆에 있던 동후가 어색한 듯 코를 쓱 만지더니 곧장 자리를 피했다.“한 대표님,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하지만 동후를 떠나보낸 서준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석훈이 그를 불러 세웠다.한때는 그래도 친구였던 지라 두 사람은 비슷한 분위기를 뿜어냈다.강한 기운이 서로 충돌하는가 싶더니 운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서준,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왜? 지금 날 막는 거야?”운석은 곁눈질하더니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말했다.“하연 씨 너 만나고 싶지 않아 하니까 이만 돌아가.”그 말에 서준은 눈빛이 일순 어두워졌다. 타고난 오만함에 서준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쳐들며 되물었다.“네가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못 막아도 막을 거야. 오늘 너 여기 못 들어가.”두 사람은 서로 대치하며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하, 나운석. 너와 내가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네.”서준의 말에는 자조적인 의미가
그 사고로 하연이 다쳤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심지어 F국까지 쫓아갔었다.하지만 최씨 가문에서 하연을 너무 꼭꼭 숨긴 탓에 그곳에 있는 열흘 동안 하연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그리하여 귀국한 뒤, 서준은 DS 그룹 로비에서 줄곧 하연을 기다렸다.그때, 하연이 자기의 모든 감정을 숨긴 채 가볍게 말했다.“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건가? 미안하지만 난 그딴 관심 필요 없어.”“그래도 괜찮은 거 이렇게 확인해서 다행이야.”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서준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임성재와 합작하고 있는 나노기술 로봇 프로젝트가 현재 과열 단계야. 다음 달이면 신제품 런칭쇼가 있어. 이건 우리가 합작하는 첫 번째 프로젝트니까 시간 나면 같이 보러 가자.”서준이 사업 얘기를 꺼내자 하연은 거절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건 하연의 프로젝트이기도 했으니까.“그래, 시간 내서 갈게.”방금 전 하연과 현욱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 서준은 대충 하연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대충 짐작했다.때문이 곧바로 화제를 그쪽으로 전환했다.“우리 HT 그룹에서 요즘 새로운 프로젝트 몇 개 준비하고 있으니 관심 있다면 협력할래?”하연은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그 대답에 서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숨기며 눈을 내리깔았다.“그렇게 나랑 엮이기 싫어?”“왜 이래? 공과 사는 칼 같이 구분하던 사람이?”“아니면 나랑 협력할 용기도 없나?”“...”서준의 도발에 하연은 화를 내기는커녕 조금도 도용하지 않은 태도로 차분하게 말했다.“한 대표님 자신감은 역시 변함이 없네. 하지만 DS 그룹은 이미 FL그룹과 협력하기로 했어. 그러니 HT 그룹과는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너무나도 선명한 거절 의사에 서준은 코웃음을 쳤다.“FL그룹 이제 막 설립된 회사 아닌가? 아직 제대로 자리도 못 잡았는데 벌써 달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서준의 말속에는 경멸이 가득했다.“정말 예나 지금이나 남을 존중할 줄 모르네.”그 말에 서준의 표
그 말은 하연을 단번에 정신 차리게 했다.“네?”하연과 서준 사이의 묘한 기류를 느낀 운석은 서운한 듯 입을 열었다.“만약 다시 그 자식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하연 씨 선택 존중해 줄게요.”잔뜩 풀이 죽어 중얼거리는 운석을 보자 하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왜요? 그렇게 자신 없어요?”“경쟁 상대가 서준 그 자식이면 져도 쪽팔릴 건 없어요. 그런데 생각 잘해요, 두 사람 사이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존재한다는 거. 같이 있으려면 그 문제부터 해결해요.”하연은 다급히 운석의 말을 잘랐다.“누가 한서준이랑 다시 시작한다 그래요?”그 말에 운석은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씨가 그 자식이랑...”하연은 고개를 저었다.“적어도 아직은 다시 시작할 생각은 없어요.”“그렇다면 저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뜻이겠죠?”하연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잔뜩 흥분한 듯한 운석과 눈을 마주했다.그러면서 오늘 이 기회에 확실히 말해야겠다는 결심을 내렸다.“운석 씨, 정말 제가 운석 씨의 남은 평생을 맡길만한 상대가 확실해요?”“100퍼센트 확실해요.”운석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저 하연 씨를 원해요. 예전에는 눈이 삐어 한번 놓쳤지만, 저와 약혼한 상대가 하연 씨인 줄 알았다면 절대 거절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하연은 눈을 내리깔았다.솔직히 운석이 저에 대한 마음은 그저 일시적인 것일 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단호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에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철저히 단념시킬 수밖에 없었다.“운석 씨, DS 그룹에서 나가요. 운석 씨처럼 능력 있는 사람은 더 큰 무대에 있어야 해요. NW그룹으로 돌아가도 여기보다는 나을 거예요.”“지금 저 내쫓는 거예요?운석은 뭔가 알아차린 듯 되물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운석 씨가 여기 있는 거 너무 아까워서요.”“저는 상관없어요. 하연 씨 곁에만 남이 있을 수 있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