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HD그룹은 분주한 분위기였다. HD그룹 대표인 송기정은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고, 정태산을 접대한 후, 하연에게 남겨진 30분의 면담 시간은 결국 20분으로 줄어들었다.하연은 송기정의 사무실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그녀는 DS그룹과 HD그룹이 협력할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자료를 충분히 준비해 왔다.송기정은 두 손을 책상 위에 얹고 하연의 프레젠테이션을 다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최 사장님의 아이디어와 실행력은 시대를 앞서가고 있습니다. 다만, 시장이 이를 수용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희도 내부 고위층 회의를 거친 후에야 명확한 답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 진부한 답변은 하연이 예상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크게 실망하지 않았고, 송기정과 악수하며 말했다.“송 대표님, 만나 뵐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송기정은 급히 해야 할 일이 있는 듯 보였고, 비서에게 하연을 배웅하도록 지시했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정태훈은 하연을 위로했다.“최 사장님, 이번 일은 이미 완벽하게 마치셨습니다.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벌써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번에 하연의 준비는 철저했지만,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의 실망은 남아 있었다.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키가 크고 세련된 한 여자가 우아하게 걸어 나왔다. 그녀는 목에 스카프를 둘러 매우 젊어 보였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세월의 흔적이 엿보였다. 그런데도 철저한 관리 덕분에 마흔쯤으로 보였으며, 뒤에는 몇 명의 부하들이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HD그룹에서 대기하던 직원들은 그 여자를 보자마자 달려가며 말했다.“저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하연은 잠시 그 여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주변의 HD그룹 직원들이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저 여자분이 바로 혜성그룹에서 온 고위층인가? 생각보다 젊네. 상상과는 달라.”“혜성그룹 본사는 B시에 없잖아. 일부러 온 거라니,
“최 사장님은 아직 어려서 아마 이런 소리가 귀에 잘 안 들어올 수도 있어요. 우리 집에는 양딸이 한 명 있는데, 어릴 때부터 선생님을 모셔서 가야금 병창을 배웠거든요. 지금은 입만 열면 몇 소절을 척척 부르니 참 귀여워요.” 주경미는 흐뭇하게 자랑하며 말했지만, 그 안에는 약간의 우월감이 담겨 있었다.하연은 중요한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양딸이요?”“내 복이 약해서 아들 하나뿐이잖아요. 양딸로 삼은 아이는 원래 우리 남편 비서의 딸이었는데, 그 비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서 우리가 불쌍하게 여겨 키우게 됐어요.”하연은 남의 사생활을 캐물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두 분께서 잘 가르치셨으니, 따님도 분명 훌륭하게 자라셨겠네요.”“우리 딸은 올해 막 대학을 졸업했어요. 아직 일을 시키고 싶진 않아요. 앞으로 몇 년 동안 세상 경험을 쌓게 하고 나서, 좋은 사람을 골라서 평탄한 인생을 살게 할 생각이에요.” 주경미는 더욱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차 한 모금을 마셨다. “무대에 서는 것도 좋지만, 뒤에 든든한 배경이 있는 것도 큰 장점이죠. 그렇지 않나요? 최 사장님?”하연은 즉시 이 말을 알아들었다. 이것은 은근한 압박이었다.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모님께서 잘 기르신 따님에게는 큰 장점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하연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주경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하연은 조용히 난간 앞에 서서 건너편 무대에서 국악 공연을 하고 있는 창자를 바라보았다. 창자는 화려하게 화장하고 소리를 높여 전통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서는 나름의 멋이 느껴졌다. 지금 무대에서 울려 퍼지는 창자의 목소리와 그가 부르고 있는 전통 노래의 가사는 묘하게도 하연이 처한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저 여성분, 정말 묘하네요. 겸손하지도, 교만하지도 않은 그 태도.나는 빙 둘러 물어보리라,그 마음속 깊은 속내를.”...주경미는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지난번에 내가 창
“나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원래는 B시의 일을 마치면 바로 떠나야 했지만, 시간을 일부러 남긴 이유는... 너희도 알 거다.”상혁은 깊은 눈빛으로 말끝을 맺었다.“한 검사장님께서 저와 대립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한 검사장님께 절대복종하며, 수도로 무사히 돌아가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한창명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저는 떳떳하니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상혁은 고개를 살짝 들며 미소를 띠었다.“됐어, 됐어.” 정태산은 두 사람의 기 싸움에 머리가 아픈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에 우리 마누라가 창명이 너랑 최 사장님을 엮었던 거, 취소야. 우리 마누라가 단단히 잘못 생각했더군.” “취소요?” 한창명은 찻잔을 들고 찻물을 살짝 불어가며 말했다. “최 사장님은 제게 그런 말을 한 적 없는데요.” 그 시각 하연은 주경미에게 답하고 있었다.“사모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와 한 검사장님은 인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상혁은 눈길을 한 번 보내며 말했다.“한 검사장님은 남녀 관계에 아주 서툰 편이신가 보네요. 여자가 직접 말해줘야 알 정도로요?”한창명은 차분하게 대답했다.“우리 두 사람의 일에 부 대표님께서 끼어들 자격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무대에서는 여전히 국악 공연이 이어지고 있었고, 상혁은 무심한 듯 앞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연아!”병풍 너머였지만, 소리는 명확하게 들렸다. 하연은 순간 멈칫했고, 주경미도 깜짝 놀랐다. 상혁이 이렇게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하연을 부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주경미는 하연에게 가서 함께 가자는 신호를 보내며 앞서 걸었다. “상혁이었네. 창명이도 여기 있고, 참 오랜만이야.”“사모님.”한창명은 일어나서 주경미에게 인사했다.상혁은 그런 인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연아, 한 검사장님이 네 마음을 모르고 있으니, 오늘 한번 확실하게 얘기해줘. 두 사람 사이의 일은 끝났다고.”‘연아’라는 호칭은 분
“그 여자가 규칙과 예법을 견딜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하네요.”겉으로는 조용했지만, 주경미의 말투는 날카로웠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식당 직원들은 불안에 떨며 혹시나 일이 더 커질까 걱정하고 있었다.정태산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이런 곳에서는 체면 좀 챙겨. 그런 건 집에 가서 얘기하자고!”주경미는 오랜 세월 정태산의 부인이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명예가 함께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다시는 그 여자와 만나지 마세요.”상혁은 손에 들고 있던 옥을 돌리던 동작을 멈추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사모님.”주경미는 상혁의 갑작스러운 말투 변화에 깜짝 놀랐다.이와 동시에 그의 눈빛도 한층 깊어져 있었다.“우리 어머니는 억지로 누군가를 붙잡고 매달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모님처럼 수십 년간의 안정된 결혼 생활을 유지하셨겠죠. 그건 누구보다 사모님이 잘 아실 텐데요.” 상혁의 눈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주경미는 그의 눈빛을 피하며 시선을 돌렸다. 비록 두 집안의 길은 다르지만, 주경미도 부상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B시의 큰 변화를 이끌어 낸 새로운 인물이었고, 그만큼 위험한 인물이었다.주경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알지, 방금 한 말은 실수였어. 너희 어머니를 진심으로 비난한 건 아니야.”그러고는 상혁에게 말을 덧붙였다.“다음에 어머니를 만나면, 내가 사과드린다고 전해줘. 나중에 꼭 어머니께 식사 대접도 하겠다고 해.”그러면서 주경미는 차갑게 식은 냉채를 상혁 앞에 내밀며 말했다.“상혁아, 좀 진정해.”상혁은 그 음식을 건드리지 않았다.“이쯤에서 그만하게.” 정태산은 노여움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애들 앞에서 이게 뭐야? 내 체면은 어디에다 두라고.”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구슬을 내려놓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우린 아랫사람일 뿐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싸울 거야!” 정태산이 좌석을 세게 두드리며 소리쳤지만,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방 비서, 네가 말해 봐.”둘은 오랜 시간 함께 일했기 때문에, 방 비서가 아직 다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정태산은 알고 있었다.“지난번에 조사해 보라고 하셨던 건데, 제가 추적 끝에 감시 영상을 찾았습니다. 조진숙 씨에게 연락한 사람은 낯선 남자였습니다.”방 비서는 서류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정태산에게 건넸다.정태산은 서류를 넘겨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야. 나와는 어떤 인연도 없었는데... 어찌 나와 진숙이를 알고 있는 걸까?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 이 사람, 대체 정체가 뭘까?’“손이현?”“저도 시 경찰서에 문의해 봤지만, 아무도 이 사람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주경미가 다가와 사진을 살피며 화를 억누렀다.“혹시 당신의 예전 학생인 거 아니에요?”정태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직감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고, 바로 그 서류를 한창명에게 건넸다.“손이현은 B시 사람이야, 네가 나 대신 이 사람을 좀 더 신경 써줘.”한창명은 사진을 훑어보고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서류를 받아 들고는 수락했다.큰 인물들이 떠나자, 수연정은 그제야 긴장을 늦출 수 있었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하연은 난간 앞에 앉아 있었다. 국악 공연이 끝나고, 하연은 원하는 전통 무용을 직접 요청했다. 무대는 화려한 색으로 꾸며져 다시 활기가 넘쳤다.상혁은 전화를 끝내고 돌아와, 무대에 몰두하고 있는 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긴 머리는 클립으로 묶여 있었는데, 이곳에 오기 전에 협상을 끝내고 온 것 같았다.상혁은 하연의 뒤로 다가가며 말했다.“재밌어?”하연은 깜짝 놀랐고, 상혁이 말하는 것이 그녀가 손으로 가지고 놀고 있던 구슬임을 알아챘다.“이거 얼마예요?”“값나가는 물건은 아니야. 마음에 들어?”“촉감이 좋네요.”“갖고 싶으면 줄게.” 상혁은 별로 대수롭지
하연은 말하면서도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데, 화가 나면서도 실망스러운 듯했다.상혁은 그런 하연을 보며 미소를 지었고,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괜찮아, HD그룹과 안 맞아도 다른 기술 회사들이 있잖아. B시에서 안 되면 타지역에서도 할 수 있어. 네가 꼭 하고 싶다면 방법은 많을 거야.”지금으로서는 이런 말이 최선의 위로였다.상혁이 문 쪽을 향해 갑자기 말했다.“사람을 데려와.”얼마 지나지 않아, 보디가드들이 한 남자를 끌고 들어왔다. 그 남자는 바로 하연 앞까지 끌려와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최... 최 사장님!” 남자는 절을 하며 땅에 엎드려 울부짖었다.하연이 일어나 보니, 그 남자는 바로 얼마 전 병원에서 나온 이현오였다. 그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상태가 매우 초라해 보였다.“네가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하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날엔 제가 정말 정신이 나갔습니다. 최 사장님에게 그런 생각을 품고 협박하다니,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와서 엎드려 사죄드리며, 최 사장님의 용서를 구할 뿐입니다. 제발 저를 한 번만 봐주십시오.”이현오는 고개를 들고 애원하더니 다시 땅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그의 몸은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상혁은 그 상황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여전히 무대 쪽을 바라보며, 다리 위로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하연은 이현오 같은 사람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고통을 겪지 않으면, 절대로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법이었다.“오늘 이렇게 나한테 와서 무릎 꿇고 사죄하는 이유가 맞았기 때문이야? 아니면 단지 얻어맞고 일자리를 잃어서 그런 거야?”하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이현오를 바라보며 물었다.이현오는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말했다.“최 사장님, 저는 정말로 제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 잘못된 길을 갔습니다. 다시는! 절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겁니다!”사실 이현오가 이 지경에
“물론 HD그룹이 최선의 선택이겠지만, 다른 기업들도 그에 못지않아. 예를 들어 BN그룹이랄까? 이미 연락하고 있어.”하연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여은도 몇 마디 인사를 더 나누고 대화를 마쳤다. 하지만, 전화를 끊기 직전에 물었다.[지금 어디 가는 중이야?]“말도 마. 한씨 가문을 왕씨 가문에게 넘긴 후, 2주가 지나서야 나한테 연락이 왔어. 지금 그쪽에 자료를 넘기러 가는 길이야.” 하연은 속으로 왕씨 가문이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너에게 하마평을 준 거네. 왕씨 가문은 엉망진창인 한씨 가문을 넘겨받고 싶지 않은 게 분명해. 네가 괜히 나서서 문제를 자초한 것 같아.]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씨 가문을 제외하고는 이 상황을 처리할 더 나은 방법이 없었다.하연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바로 예전의 한씨 가문 고택이었다. 한동안 고택이 관리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다. 하연이 고택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에 값비싼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꽤 화려한 차였다.고택 내부로 들어서니, 거의 모든 가구와 물건들이 치워져 있었다. 인기척도 없었다.“최하연 씨, 오셨군요.”계단 모퉁이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연이 고개를 들어 보니, 우아한 자태의 여성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화장하지 않았지만, 눈가의 주름과 피로한 기색이 어렴풋이 보였다.하연은 그녀를 어디선가 봤다고 느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며칠 전 HD그룹에서 봤던 그 여자였다.‘혜성그룹의 그 고위직 임원!’ 하연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 여자가 바로 지금 내 눈앞의 이 여자라니!’“드디어 만났네요. 저는 왕아영이에요. 왕씨 가문은 최하연 씨가 보낸 것을 다 받았고, 나를 이 일의 책임자로 임명했죠.” 왕아영은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그럼 왕명주 사모님은 왕아영 씨의...”“언니죠. 저보다 다섯 살 많아요.”왕아영의 얼굴에는 철저한 자기관리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녀의 생활이
하연은 왕아영의 말에 충격을 받은 채 잠시 말을 잃었다. 그 틈을 타 왕아영은 하연을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모르셨나 보네요? 친구라고 하셔서 당연히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하연은 손에 든 가방을 꼭 쥐며 불길한 예감이 느꼈고, 조심스럽게 물었다.“한명준 씨, 지금 어디에 있나요?”왕아영은 하연을 살펴보더니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우리가 어디서 본 적 있던가요... 아, 기억났어요. 며칠 전에 HD그룹 본사에서 봤죠. 그때 최하연 씨도 거기 있었잖아요.”하연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대답했다.“저는 DS그룹의 사장으로, 최근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맡고 있습니다. 혜성그룹과는 경쟁 관계였죠. 한씨 가문 문제와 상관없이, 왕아영 씨도 저를 알았을 거라고 생각해요.”하연은 왕아영이 일부러 자신을 무시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도.왕아영은 입꼬리를 비틀며 고개를 돌렸고, 정면으로 답하지 않았다.“최 사장님, 아무래도 착각하신 것 같네요. 이제 DS그룹과 혜성그룹은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HD그룹은 이미 두 회사의 협력 결정을 공개했거든요. DS그룹은... 이미 탈락했습니다.”왕아영의 도발적인 말에 하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렇게 말씀하시기엔 아직 이른 것 같네요. HD그룹이 업계의 선두 주자일 수는 있지만, 그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후발주자들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요.”하연의 말을 들은 왕아영은 조용히 탁자 위에 자료를 내려놓았고, 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최 사장님이 말하는 ‘선두’라는 개념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사실, 내가 B시에 온 이유는 최 사장님이 엉망진창인 한씨 가문을 우리 왕씨 가문에 떠넘겼기 때문이죠. 그게 아니었다면, 난 절대 여기 오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 왕씨 가문은 대대로 학문을 중시하는 집안이에요. 우리 언니 일로 명성이 실추되지만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밖으로 나올 일도 없었을 거예요. 결혼은 아직 못했지만, 다행히 업
송혜선은 조봉규를 거칠게 밀쳐냈다. 조봉규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거칠게 쓰러졌다. “안 돼... 혜선아...” 쿵!무거운 소리와 함께 조봉규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채, 천천히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결국 그는 의식을 잃었다. 송혜선은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조봉규의 얼굴을 스쳤다. 잠시 머뭇거리던 손끝은 이내 떼어졌다. ‘이젠, 끝이야.’ 송혜선은 망설임 하나 없이 돌아서며, 서늘한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상혁은 대부분의 일정을 취소하고 하연의 곁에 머물렀다. 둘만의 달콤한 시간은 보는 이들까지 부러움에 빠지게 했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에 양가 부모님들은 대만족이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양가 어른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자연스레 상혁과 하연의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 “약혼은 했지만, 전통대로라면 결혼식도 치러야지.” 최동신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진숙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은 이미 조진숙에게 친딸과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인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을 대충 넘길 순 없었다. “걱정 마세요. 결혼식 준비는 제가 맡아서 잘 준비할게요. 두 아이는 그날 예쁘게 하고 참석만 하면 됩니다.” “하하, 고맙소, 고맙소.” 최동신은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요즘 들어 최동신의 건강도 한층 좋아진 데다가 경사까지 겹치니 덩달아 기운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이들만 행복하면, 우리야 바랄 게 없지.” 옆에 있던 최하민이 자연스럽게 거들었다. “결혼식은 서둘러야겠지만, 아직 혼인신고를 안 했으니 그게 먼저 아닐까요?” 조진숙은 그제야 무릎을 탁 치며 소리쳤다. “맞다, 그걸 깜빡했네.” 그녀는 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혼인신고는 아이들 의견을 먼저 들어봐야지. 중요한 일이니까.” 하연과 상혁은 나란히 계단을 내려오다, 자연스럽게 들려온 혼인신고 이야기. 둘 다 순간 멈칫했다. 본능처럼 서로를 바라봤다. ‘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