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현 씨가 누구든, 최하연 씨에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역시 한창명이었다. 그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이었고, 눈빛엔 호기심과 경계가 동시에 섞여 있었다.하연은 손에 쥔 젓가락을 힘주어 움켜쥐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들고 솔직하게 말했다.“네, 정말 중요해요.”한창명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가끔은 모르는 게 더 나을 때도 있죠.”하지만 하연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저는 모르는 채로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한 검사장님, 만약 우리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함께 해보는 게 어떨까요? 이 베일을 벗겨낼 수 있을지...”하연은 그의 인맥이 필요했고, 그가 자신보다 훨씬 더 쉽게 많은 것들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고 손을 내민 것이었다.하연이 떠난 후, 한창명은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 속 인물을 잠시 응시하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했다.“도대체 누구길래 이렇게까지...”근처에서 누군가 그의 행동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도대체 누구길래 한 검사장님이 이렇게 선을 넘는 행동을 하시지?”“며칠 전 한 검사장님이 학군 구역 정책을 갑자기 수정했다고 하던데, 그것도 혹시 저 여자 때문인가?”“예쁘긴 정말 예쁘네. 만약에 정말 한 검사장님의 여자 친구라면, 많은 남자가 속으로 질투할 거야.”...하연은 DS그룹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정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최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DL그룹 이사회에서 부상혁을 탄핵하려고 공동 서명한 사건이 터졌다. 이유는 상혁의 개인 계좌에서 해외 금융기관, 즉 고리대금업체와의 거래가 포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금액은 무려 1000억에 달했다. 사건이 터지자 금융계는 크게 동요했다.상혁은 4조라는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며 여러 사업에 투자해 왔다. 하지만 고리대금업체와의 유착이 밝혀지자 사람들의 불안은 커져만 갔다. 곧이어 경제 전문 기자가 심층 기사
신에너지 사업이 이제 막 시작된 터라 하연은 B시를 떠날 수 없었다. 일은 산더미처럼 쌓였고, 겨우 네다섯 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을 쪼개어 하연은 나운석을 만나러 갔다.“그 1000억이라는 자금은 개인 계좌에서 나온 거예요. 자금 출처는 금천파이낸스인데, 국제적으로 유명한 고리대금업체예요. 그 자금을 처리하는 사람은 유승환이라고 해요.”늦은 밤, 운석은 하연과 마주 앉아 한 자료를 내밀었다. 하연은 자료를 보지 않았다.“그 돈을 어디에 쓰려고 했던 거죠?”“부 대표님의 개인 자금 흐름이지, 빌린 돈은 아니에요. 부 대표님도 단순히 금천파이낸스의 도움을 받아 그 돈을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전환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를 두고 누군가가 문제를 만든 거예요.”1000억은 한 번에 이동시키기에 큰 금액이었다. 그래서 금천파이낸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렇게 급하게 자금을 이동시킨 이유가 뭘까요? 그 돈을 어디에 쓰려고 했던 걸까요?”FL그룹과 관련된 것이라면 공적인 자금을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려고 했다는 건데, 그럼 1000억이라는 거액을 대체 어디에 쓴 걸까?운석도 며칠 동안 이 사건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만 알아낼 수 있었다. “더 구체적인 건, 이 사람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그는 유승환의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승환은 다루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리대금업체를 이렇게 크게 운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업계에서는 그를 ‘맹수’라 부를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었다.“알겠어요.”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 했다. 그때 운석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며칠 후에 한씨 가문 사건 재판이 열릴 것인데, 출석할 생각이 있어요?”그는 한서준과 오랜 시간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친구를 향한 연민이 느껴졌다.“요즘 너무 바빠서요. 나중에 생각해 볼게요.”하연은 잠시 멈췄다가 빠르게 그의 사무실
순간 하연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상혁이 그 1000억의 용도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상혁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하연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그 사람이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어요. 2,000억은 저도 충분히 낼 수 있었다고요.”유승환은 그날 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정말 최 사장님이 개인 명의의 계좌를 사용할 수 있었을까요?” “그럼 왜 가명을 썼어요?”“부 대표님은 막 금융위원회 간담회를 끝낸 상태였고, 수많은 눈이 부 대표님을 지켜보고 있었잖아요. 부 대표님도 자신의 감정을 앞세울 수 없었던 거죠.”공적인 자리에서는 상혁이 이렇게 할 수 없었지만, 개인적인 일이라면 그도 자신의 감정을 앞세울 수 있는 일이었다.하지만 상혁의 국내 계좌에는 천억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연을 돕기 위해 해외 자금을 긴급히 국내로 옮겨야 했고, 이를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 금천파이낸스를 통한 것이었다.하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래, 이게 바로 부상혁의 방식이었지... 항상 행동이 말을 앞섰고, 말은 하지 않았어.’하연이 말없이 있자, 유승환은 미소를 지으며 아침 식사를 건넸다.“좀 드시겠어요?”하연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제가 아까 말한 거, 그대로 할 거예요. 감사팀이 오후에 도착할 테니, 꼭 협조해 주세요.”유승환의 미소가 사라졌다.하연은 곧 금천파이낸스의 모든 계좌를 철저히 조사했고, 그 결과 금천파이낸스는 대대적인 정비와 함께 국제 IPO를 준비하게 되었다.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금천파이낸스는 무슨 고리대금업체가 아니고, 그저 현대 사회의 인터넷 금융일 뿐이었다.상혁이 빌린 게 아니라, 금융사를 조사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오해가 풀렸다.유승환은 마지막까지 저항했다.“우리 금천파이낸스 같은 작은 회사가 어떻게 상장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감사까지 받겠어요...”하연은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정상적인 사업을 하세요. 그래야 유 사장님의 형제들이 안정된 삶을 살 수
“보아하니 이장님도 꽤 신중하신 것 같네요.” 하연은 책 몇 권을 들고 말하며, 책 속 필체를 훑어보았다. “손 선생님의 글씨체가 예전과 조금 다른 것 같아요.” 하연은 책 속에서 보이는 글씨가 과거에 우연히 보았던 이현의 필체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 이현의 필체는 날카로움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부드럽고 힘이 없는 글씨였다. “그 녀석 말이야...” 왕대천은 순간 놀랐지만, 금세 냉정함을 찾으며 말했다. “아마 일을 시작한 이후로 글씨 쓰는 걸 게을리했을 거야. 요즘은 제대로 쓰지 않아서 그래.” 하연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장님,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손 선생님은 학교 다닐 때 여자애들이 많이 따라다녔나요?” 왕대천은 웃으며 말했다. “그야 많았지. 심지어 집까지 찾아온 아이들도 있었는데, 이현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어. 연애는 한 번도 안 했지.” “이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몰래 연애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 없어.” 왕대천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 녀석은 내가 키우다시피 했으니까 하나하나 다 알지. 착실하고 성실한 아이야. 학교 다닐 때 내가 연애는 못 하게 막았거든.” 왕대천은 말한 후에 뭔가 잘못된 걸 깨달은 듯 급히 덧붙였다. “하연아, 설마 너희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니? 이현이가 돌아오면 내가 잘 말해볼 테니, 너무 화내지 마라.” 왕대천은 하연을 정말로 자신의 미래 며느리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하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나서던 찰나, 마침 왕대천 부인과 마주쳤다. 왕대천 부인의 얼굴은 어딘가 어두워 보였고, 하연은 잠시 멈춰 섬으로써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하연은 무슨 일이 있는지 바로 눈치챘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왕대천 부인은 무의식적으로 품 안에 있는 보따리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아니야, 하연이가 왔구나.” ...하연이 차를 몰고 마을을 떠날 때, 현장을 조사하러 오는 HD그룹의
차량이 멀어지자, 하연은 무릎 위에 놓인 책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최 사장님, 집으로 돌아갈까요, 아니면 DS그룹으로 갈까요?” “공항으로 가주세요.” 운전기사가 의아한 듯 백미러를 보았지만, 하연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F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 주씨 가문은 F국에서 악명 높은 까다로운 집안으로 유명했다. 주원빈은 상공업으로 가문을 일으켰고, 수많은 술자리에서 성공의 발판을 마련해 오늘날의 이 위치까지 올라왔다. 지금, 주원빈은 그 술자리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주씨 가문과 사업을 논하고 싶다? 좋다, 먼저 술부터 마셔라!... 한편, 부상혁은 이틀째 주씨 가문의 본가에서 머물고 있었다. 하연이 금천파이낸스의 명예를 회복시켜 상혁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지만, 힘센 사업가들 사이의 협상과 입장 표명은 여전히 그의 몫이었다.지금 상혁은 미친 듯이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마치 술에 살고 술에 죽겠다는 결심이라도 한 듯, 누구의 술잔이든 마다하지 않고 과감하게 취해갔다.심지어 주슬기도 상혁의 이상함을 눈치챘다. 소란스러운 술자리였지만, 그녀는 상혁의 곁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걱정 있어요?”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고, 목덜미가 붉게 달아오른 채로, 핏줄이 드러난 손으로 잔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많이 마셨지만 정신은 여전히 맑았다. “우리 아버지는 당신을 곤란하게 하지 않았어요. 오늘 여기에 있는 명문가 가족분들도 당신을 곤란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의 능력은 모두 인정하고 있으니까, 무너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요.” 슬기는 상혁이 여전히 1000억에 관한 일을 마음에 두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상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슬기는 약간 당황한 듯 상혁의 옆에 있던 외투를 집어 들었다. “비서는 어디에 있어요? 왜 안 보이죠? 제가 부축할게요...” 슬기의 손이 상혁의 몸에 닿는 순간, 갑
“그럼 제가 마실게요.” 하민이 응답하지 않자, 상혁은 바로 술잔을 들어 올려 단숨에 들이켰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좋은 술이군요.” 하민은 술자리 문화를 추구하지 않았고, 그가 굳이 술을 마셔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이런 자리에서 타협할 생각은 더더욱 없어서 직설적으로 말했다. “네가 스스로를 망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우리 하연이를 슬프게 한다면, 나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이 자리에 남을지, 나랑 갈지 빨리 선택해.” 하연의 이름이 언급되자, 멈칫하던 상혁이 더욱 빠르게 술을 따랐다.“슬프게 한다고요? 하연이가 정말 아직도 저 때문에 슬퍼할까요...” 주변 사람들은 그제야 하민이 이곳에 온 이유가 최하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원빈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다.“최 대표님, 최씨 가문은 우리 집안을 대체 뭐로 보는 겁니까? 우리를 최씨 가문의 놀이 도구로 생각하는 겁니까? 우리 슬기도 명문가에서 제대로 교육받으며 바르게 자란 딸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행동은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주슬기가 부상혁을 오래도록 좋아해 왔다는 사실은 F국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우리 동생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오늘 저도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하민이 직접 나선 것은 오로지 하연의 요청 때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 말이었다. 실은 이것 자체가 상혁에게는 일종의 타협이자 약간의 양보였다. 그러나 상혁의 귀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연이 다른 사람을 통해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상혁은 또 술 한 잔을 들이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형님, 먼저 돌아가세요. DL그룹과 ZT그룹 간의 일은 제가 여기 남아서 처리해야 하니까요.”그의 말은 단호했지만, 주씨 가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남겨둔 것이었다. 하민의 얼굴은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 주원빈이 다시 한번 술잔을 들며 권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하민이 갑작스럽게 테이블을 세
“만약 과거를 내려놓았다면, 나를 ‘형님’이 아닌‘하민’이라고 불러야겠지.” ‘형님’이라는 호칭은 상혁이 하연을 따라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상혁은 술에 취하지 않았고, 적어도 80%는 맨정신이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하연이가 그러더군요, 이제 그만하자고요... 저는 강요할 수도 없어요.”그 말은 상혁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들며 아프게 했다.“내가 아는 부상혁은 이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야.”“일에 관해서는 포기하지 않죠. 삶에 관해서도 그렇고요. 하지만 사랑에서는요? 오랜 시간 버텨봤지만, 특별한 감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에요. 형님이라면 계속 버틸 수 있겠어요?”상혁의 눈빛은 진지했다. 연기가 그의 눈과 이마를 가리며 흐릿하게 번져갔다.그는 스스로 절대적인 사랑과 안정감을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사찰에서 하연과 이현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어떤 일들은 강요로 해결되지 않으며, 혼자만의 감정으로는 절대 진전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하민은 눈살을 찌푸리며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눈을 감으며 계속 말했다. “저도 지칠 때가 있어요.” 하민은 문득 조용히 물었다.“진숙 이모는 요즘 어떻게 지내셔? 여전히 하연이의 안부를 자주 물으셔?”최하민은 상혁 옆에 앉아 있었다. 더 이상 최고 권위자의 고집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정하고 친숙한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하민의 부모님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남매는 부동건과 조진숙의 따스한 보살핌 아래에서 자랐다. 조진숙은 특히 하연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진숙 이모는 늘 말씀하셨지. ‘하연이는 여자아이니까 아무리 뛰어나도 쉽지 않다’고. 나는 진숙 이모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해. 우리가 아무리 하연이를 아끼고 사랑해도, 부모가 주는 사랑과는 다를 테니까.” 하민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상혁아, 너도 잘 알겠지만, 하연이는 자립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이야. 사랑에서도 그렇고. 누군가가
밤이 깊었다. 실의에 빠진 하연은 차 뒤에 몸을 숨긴 채, 하민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없이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다음 날 아침 8시, DL그룹의 회의 시간이 되었다. “고경수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났고, 이제 사법 절차에 들어갈 것입니다. 관련된 인물들도 모두 법의 심판을 받았고요.” 부상혁은 회의의 주석 자리에 앉아, DL그룹의 상황을 간략히 요약한 뒤 참석자들을 향해 물었다. “의문이 있으십니까?” 부남준은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건강상의 문제’였다. 이사회의 이사들은 의견이 있건 없건 침묵을 지켰다. 부동건은 회의실의 가장 끝자리에 앉아 이 광경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비서실 수석 비서인 원신민은 즉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PPT 화면이 켜지며 커다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DL그룹 향후 5년 전략 계획] 아주 중요한 주제인 만큼, 상혁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기본적인 내용을 두 시간에 걸쳐 설명했다. 발표가 끝난 후, 물을 한 잔 마신 그는 한 손으로 테이블에 기대며 말했다. “질문 사항 있으십니까?” 오른쪽에 앉아 있던 동남아시아 지사장인 정규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상세한 일정과 계획이라니, DL그룹을 세계 1위로 만들겠다는 건가요? 부 대표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겉으로는 칭찬 같았으나, 그 속엔 조롱이 담겨 있었다. 상혁은 아직 공식적인 대표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임시로 관리하고 있을 뿐, 정식 직함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정규인은 상혁을 ‘부 대표님’이라 불렀다. 상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받아쳤다. “아버지께서 제게 이런 중요한 자리를 맡겨주셨으니, 저 또한 그 기대에 부응하며 이 자리를 지켜내야 합니다.” “금천파이낸스의 논란은 해결됐습니까?” 정규인은 일부러 질문을 던졌다. “정 사장님, 아직 모르셨나 보네요. 금천파이낸스는 이미 국제 IPO에 상장됐습니다.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