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 그룹의 수행 비서이자 비서실장인 강철우는 연미혜의 사직서를 받아 들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는 회사 내에서 연미혜와 경민준의 관계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고, 경민준이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마음을 준 적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결혼 후, 경민준은 줄곧 냉정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고, 집에도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연미혜는 남편과 가까워지기 위해 경문 그룹에 입사했고 그녀의 목표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바로 경민준의 수행 비서가 되는 것이었다.하지만 경민준은 단칼에 거절했고, 심지어 경무진이 직접 나서서 설득했음
경다솜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진짜예요?!”“그럼!”“지유 이모는 왜 저한테 같이 돌아갈 거라고 말 안 했을까요?”“이제 막 결정된 일이니까. 아직 말하지 않았어.”경다솜은 한껏 들뜬 얼굴로 활짝 웃었다.“아빠, 이거 당분간 비밀로 해 주세요! 우리 서프라이즈처럼 지유 이모 앞에 나타나요. 그러면 정말 재밌을 것 같아요!”“그래.”“아빠 최고예요! 아빠 진짜 진짜 사랑해요!”전화를 끊은 뒤에도 경다솜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연미혜의 얼굴
김태훈과 연미혜는 이 몇 년 동안 거의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의 짧은 만남만으로도 김태훈은 그녀가 예전처럼 당당하고 빛나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예전의 연미혜를 떠올리면, 그는 꿈에도 그녀를 보며 ‘자존감이 낮다’는 말을 떠올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김태훈은 그녀와 경민준의 결혼 생활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했지만, 대략적인 사정은 알고 있었다.그는 속으로 짐작이 갔지만 굳이 말로 꺼내진 않았다. 대신, 진심을 담아 말했다.“잠깐 뒤처지는 건 아무 문제 아니야. 너의 실력과 재능은 웬
다음 날 아침, 경민준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연미혜와 마주쳤다.그녀는 경민준과 경다솜이 이미 귀국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에 예상치 못한 조우에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경민준 역시 그녀를 보고 흠칫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그저 출장을 다녀온 줄로만 생각하며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마치 낯선 사람을 지나치듯 무심하게 그녀를 스쳐 지나가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예전 같았으면, 갑작스러운 경민준의 귀국 소식에 깜짝 놀라며 기뻐했을 것이다. 바로 뛰어가 안길 수는 없어도 환한 미소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침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그
연미혜의 두 동료는 임지유를 흘깃거리며 보다가, 자연스럽게 몇 걸음 물러나 벽에 바짝 붙었다.임지유 역시 연미혜를 보았지만, 곧바로 무심한 듯 시선을 돌렸다. 애초에 그녀를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듯했다.이어서 몇몇 임원들의 비위를 맞추는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임지유는 그들 사이에서 여유롭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연미혜의 동료들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속삭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그 사람이 대표님 여자 친구죠? 와, 진짜 예쁘네요! 게다가 입고 있는 거 전부
정범규의 곁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왜 그래?”“익숙한 사람을 본 것 같아서...”그들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경민준과 함께 자란 친구들이었기에 연미혜가 그를 좋아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솔직히 말해 연미혜는 예쁜 편이었다. 조용하고 단아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뚜렷한 개성이 없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그런 유형은 경민준의 취향이 아니었다.경민준이 친구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는 사람이었던 만큼, 친구들 또한 연미혜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를 본 적이 많지 않았지만, 우연히 마주친다고 해도 굳이 인사까지 건네지 않았다.
연미혜는 열여덟도 되기 전에 국내 최고 대학을 졸업하고 독자적으로 IT 회사를 창립해 몇 개의 특허를 획득했다. 그 정도만 해도 경이로울 지경이었지만 경민준은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경민준은 열세 살에 이미 대학을 졸업했고, 이후 곧바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여러 회사를 창립해 모두 상장까지 시켜 놓은 상태였다. 당시 그는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그가 손을 뻗은 사업 분야는 IT, 제약, 엔터테인먼트, 관광 등 다양했고, 이후 경문 그룹까지 접수하며 단숨에 그룹의 위상을 끌어올렸다.업계 사람들은
정시원의 표정이 굳어졌다.연미혜가 대표님의 아내라는 신분을 이용해 특혜를 받으려 한다고 생각한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연 비서님, 업무 태도를 좀 바로잡으시죠. 여기가 연 비서님 집입니까?”하지만 연미혜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가방을 챙기며 차분히 답했다.“불만이 있으시면 지금 당장 저를 해고하셔도 됩니다.”“연 비서님!”정시원은 이를 악물었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얼마 전 경민준을 따라 아이리스에 다녀온 후, 복귀하자마자 연미혜가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정시원은 경민준의 신뢰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