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김태훈은 연미혜에게 정말로 술값을 계산해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만약 자신이 연미혜를 술집으로 데리고 온 사실을 유명욱에게 들킬까 봐 겁났던지라 바로 술집 안으로 들어가 계산을 한 후 연미혜와 떠났다.다음 날 점심, 연미혜는 직접 운전해 유명욱의 별장으로 갔다. 유명욱이 그녀의 차에 올라타자마자 물었다.“교수님, 어디로 갈까요?”유명욱은 그녀에게 주소를 말해주었고 반 시간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어느 한 식당이었다. 두 사람은 직원의 안내로 룸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안에는 이
식사가 끝나고 집에 도착한 연미혜는 바로 김태훈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유명욱이 그녀만 찾은 이유를 알게 된 김태훈이 말했다.“그 두 분을 만났다고? 난 이미 아는 분들이야. 참, 염성민이 염용석 님 아들이야. 쯧, 아버지가 이렇게나 대단한 사람인데 아들은 왜 젊은 나이에 눈이 그 모양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연미혜는 염성민이 염용석의 아들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시간은 흘러 화요일이 되고 세인티 자율주행 자동차의 첫 테스트가 시작되었던지라 연미혜와 김태훈은 아침 일찍 세인티로 왔다. 그들이 도착했을
연미혜를 보는 임지유의 눈빛에는 영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과의 대상이 연미혜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인 것이 분명한 눈빛이었다. 염성민은 애초에 연미혜에게 관심이 없었던지라 당연히 이런 임지유의 눈빛을 발견할 리가 없었다.“고작 몇 분만 늦었는데 뭘요. 괜찮아요.”“염 대표님은 역시 너그러우세요.”김태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갑게 말했다.“왔으니 이제 더는 우리 시간을 낭비하지는 말죠. 얼른 시작하세요.”경민준은 정중하게 말했다.“늦은 저희 탓이에요. 김 대표님, 얼른 들어가시죠.”김태훈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연
세인티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을 때도 김태훈은 잔뜩 씩씩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뭔가가 떠올랐는지 연미혜에게 물었다.“참, 임지유 뒤에 서 있던 정장 차림의 여자는 누구야? 걔도 널 보는 눈빛이 만만치 않던데. 아는 사람이야?”“임지유 사촌 동생이에요.”“...”김태훈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경민준이 임지유를 세인티로 데리고 온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임지유 사촌까지 세인티로 끌어들이는 거야? 하, 참나. 곧 있으면 세인티가 임지유로 개명하겠다? 쯧.”연미혜도 경민준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게
“네. 알겠어요.”토요일 아침, 연미혜는 대충 아침을 먹고 연창훈에게 프로젝트에 관해 물었다.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오후 두 시가 넘어서 그녀는 차를 타고 캠핑장으로 출발했다. 도착했을 때 하승태와 수연이도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듯 하승태가 불러온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바비큐 그릴도 세우고 있었다. 며칠 동안 눈이 내렸던지라 캠핑장엔 온통 눈으로 가득했다.그녀를 발견한 수연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예전에 그녀는 자주 경다솜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던지라 눈사람을
하늘은 완전히 까맣게 되었고 산속이었던지라 추위도 점점 더 심하게 느껴졌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하승태는 몸을 돌려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연미혜와 수연을 보고는 텐트에서 두꺼운 겉옷을 두 개 꺼내왔다.그중 큰 옷을 연미혜에게 건네자 연미혜가 말했다.“전 안 추워요.”“그래도 덮고 있어요.”그는 옷을 펼쳐 연미혜의 어깨에 둘러주었고 이내 작은 옷을 수연에게 입혀주었다. 연미혜는 확실히 별로 춥지 않았지만 옷을 덮으니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어 따듯했던지라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바비큐 파티가 끝나고 캠프파
남의 차를 탄 연미혜는 몇 분간 졸게 되었지만 편하게 잠들지는 못했다. 눈을 뜨자 눈앞에서 사라지는 하승태의 손을 보았지만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도착했어요?”“네.”2분 뒤 차는 병원 입구에 멈춰서고 하승태는 수연을 안고 차에서 내려 연미혜에게 말했다.“운전 기사님 붙여드릴까요?”연미혜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제가 운전해서 가면 돼요.”하승태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집에 거의 도착하고 있을 때쯤 핸드폰이 울렸고 경민준이 보낸 문자가 화면에 떴다.[할머니께서 이따가 네 외할머님을 만나러 가시겠다고 하셨
경민준은 연미혜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경다솜의 콧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아빠는 일이 있어서 못 가니까 엄마 말 잘 들어. 알았지?”“네.”경다솜은 결국 삐죽 튀어나온 입으로 대답했다. 고개를 돌려 연미혜를 보더니 곁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어 손잡아달라고 했다. 먼저 화해하자는 의미기도 했다.아이의 손을 잡은 연미혜는 집사와 인사를 한 후 집을 나섰다. 연씨 가문으로 도착했을 때 노현숙은 이미 한참 전에 와 있었다. 두 사람을 본 노현숙은 경민준이 보이지 않자 바로 표정이 굳어졌다.“민준이는? 또 바쁘다고 하든?”“네.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