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사람들은 임지유가 겸손해서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했다.잠시 소란을 피우던 프로젝트팀 사람들은 이내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가 본격적인 업무에 집중했다.오늘 아침 넥스 그룹의 투자유치설명회가 있었다는 건 임지유도 알고 있었다. 다만 오전 내내 업무에 시달리느라 그 내용을 따로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잠깐의 여유가 생긴 틈을 타, 그녀는 휴대폰으로 관련 내용을 검색했다.“염 대표님, 오늘 아침 넥스 그룹 설명회에 다녀오신 거죠?”“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회 영상을 재생했다. 마침 화면에는 연미혜가 제품과 기술을 소개
임해철은 통화를 마친 뒤, 휴대폰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거실 대형 스크린에선 여전히 넥스 그룹의 투자유치설명회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과일을 먹으며 여유롭게 TV를 보던 손아림은, 화면 속 연미혜가 그런 중요한 무대에서 유창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리모컨으로 화면을 꺼버렸다.“왜 하필 연미혜가 발표해?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거잖아.”손수희는 그런 반응엔 별 감흥 없다는 듯 말했다.“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
“알겠어요.”연미혜는 짧게 대답하고는 이어서 말했다.“엄마는 이제 회사 가야 돼. 끊을게.”“엄마... 다음에 만나요 그럼...”전화를 끊은 연미혜는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뒤 회사를 향해 출발했다.어제 하루 종일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오늘도 만만치 않았다.다만 다행히 오후엔 비교적 일찍 퇴근할 수 있었고, 오랜만에 할머니와 저녁을 먹고자 연씨 가문으로 향했다.하지만 집에 도착하자 허미숙의 표정이 어딘가 썩 좋지 않았다.거실 안을 둘러봐도 경다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연미혜는 그녀가 경민준과 함께 있다는 걸 단번에
연미혜가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은 뒤, 계단을 올라가려는 찰나 막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던 경다솜의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에는 ‘아빠’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경다솜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아빠?”“지금 막 연락받았는데, 내일 오후에 할아버지께서 오신단다. 내일 너 학교 끝나면 아빠가 사람 보낼 테니까 집에 같이 가서 저녁 먹자. 엄마한테도 얘기해 둬.”경문세는 정부 고위직에 있는 인물로, 평소엔 워낙 바빠 좀처럼 집에 머물지 못했다.노현숙이 사고를 당했던 그날에도 새벽에 잠깐 들렀다가 해 뜨기 전에 떠났었다.이번엔
아직 법적으로는 이혼이 성립되지 않았으니, 지금의 관계로 보면 하승태가 했던 그 말은 연미혜에게 있어 조금 선을 넘는 행동일 수도 있었다.연미혜는 하승태를 1층까지 배웅한 뒤, 인사도 짧게만 건네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승태는 한참이 지나서야 시선을 거뒀다.곁에 조용히 서 있던 회사 핵심 기술자 유시안을 향해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시안 씨, 내가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대표님, 말씀하세요.”“내 친구 중에 코딩에 대해 깊이 배우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는데... 괜찮은 선생님
임지유는 잠시 멍해졌다가 곧 미소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일이 먼저지... 무리하지 마.”하승태는 고개를 끄덕였다.임지유가 차에 올라 떠난 뒤, 그는 자신의 차로 향했지만 바로 출발하지는 않았다.운전석에 앉은 채, 한동안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연락처 목록에서 연미혜의 이름을 찾아낸 뒤,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연미혜는 아직 회사였다. 하승태의 전화가 걸려 오자, 그녀는 화면을 슬쩍 본 뒤 별생각 없이 받았다.“하 대표님?”그녀의 주변에서 들려오는 자잘한 키보드 소리, 서류 넘기는 소
다음 날, 정오 무렵.연미혜는 약속이 있어 회사가 아닌 외출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수연이와도 제법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였다.수연은 연미혜가 들어오자마자 밝은 얼굴로 달려왔다.“이모!”연미혜는 미소 지으며 아이를 안아주었다.“수연아, 오랜만이네.”식사는 연미혜에게도 낯선 곳이었지만, 음식 하나하나가 전부 입에 잘 맞았다.그녀는 식사하며 느꼈다.‘승태 씨가 일부러 나한테 맞는 식당을 고른 걸까...’영화는 오후 1시 상영되었고, 하승태는 미리 예매해 둔 티켓을 챙기며 셋이 함께 영화관으로 향했다.매표소 앞에서 수연
우주는 경다솜 옆에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다솜아.”경다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오빠, 얼른 와. 같이 하자!”우주는 퍼즐 조각을 집어 들며 무심히 이야기했다.“아까 엄마랑 영화 봤어. 거기서 외숙모도 봤고.”경다솜은 퍼즐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엄마를 봤다고? 어디서?”“영화관에서.”경다솜은 입술을 꾹 다물고 눈살을 찌푸렸다.“그럴 리 없어. 엄마 요즘 진짜 바빠서 영화 볼 시간도 없어. 오빠 잘못 본 거야.”우주는 억울해졌다.“잘못 본 거 아니야. 분명 외숙모 맞았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
다음 날 아침, 경민준은 임지유, 경다솜과 함께 일찍부터 경기장에 도착해 있었다.잠시 후, 하승태와 수연도 도착했다.경다솜이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승태 삼촌, 안녕하세요!”“수연아, 와줘서 고마워!”수연이 경다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이제 곧 경기 시작되잖아. 다솜아, 많이 긴장돼?”경다솜은 고개를 저으며 또렷하게 말했다.“긴장되긴, 당연히 긴장 안 되지!”하승태는 다른 일정이 있어 경기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수연이를 데려다주러 잠깐 들른 것이었다.경민준이 그의 사정을 알고 먼저 말했다.
김태훈의 부모님이 자리를 뜬 뒤, 경민준이 물었다.“사모님이랑 얘긴 잘했어?”임지유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런 것 같아. 고마워.”임지유는 속으론 생각했다.‘방금 사모님 얼굴 보니까 연미혜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지는 것 같던데....’사실 세인티와 넥스 그룹 사이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연도 이미 알고 있었다. 김태훈이 미리 설명을 해뒀기 때문이었다.조금 전 임지유와 이야기를 나눌 때 울린 전화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대화를 미리 녹음해 두고, 자리를 비켜선 후 멀리서 경민준과 임지유 쪽을 슬쩍
임지유는 며칠은 기다려야 소식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 경민준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김 회장님이랑 사모님께서 내일 경매 행사에 참석하신대. 우리도 같이 가보자.”그 말에 임지유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좋아.”다음 날 저녁, 경매장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민준은 임지유를 데리고 곧장 김태훈의 부모님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직접 임지유를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김태훈의 부모는 이미 경민준과 연미혜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연미혜와 임지유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지현승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염성민이 다시 물었다.“성민아, 철호 아저씨나 아버지 말고, 네가 아는 사람 중에 유명욱 교수님 연락처 아는 사람 또 없어?”“없는 것 같아.”지현승이 대답했다.그렇게 말한 뒤,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말을 이었다.“근데, 너 전에 임지유 씨가 유명욱 교수님을 만난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 지유 씨는 교수님이 연락처를 갖고 있을 것 같은데? 교수님한테 직접 연락해서 해결될 일이라면, 임지유 씨가 알아서 연락하지 않았을까?”염성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