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영은 그녀의 눈빛을 보고 처음 만났을 때의 친밀함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느꼈다. 그녀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당신은 날 이용한 거야!”주소영은 말했다. “당신은 일부러 나에게 그 말을 했고 일부러 내가 행동하게 한 뒤 손을 뗐어. 잔인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노승아가 일부러 친근하게 접근하고 아기 옷을 사주며 그 말을 한 것은 주소영을 이용해 자신의 후환을 제거하려는 의도였다. 노승아는 진심으로 그녀를 관심한 것이 아니라, 주소영을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 한 것이다.“정말 연기 잘하는구나!” 주소영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은 나를 아주 좋아하는 척, 나를 위해주는 척, 착한 척, 너그러운 척했어.”노승아는 차분하게 차를 마시며 이런 말들은 그녀에게 칭찬에 불과했다.“지금도 내 아이를 해치려고 해.” 주소영은 배를 감싸며 말했다. “당신은 나와 이현 오빠의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당신은 잔인한 여자야!”주소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 돼, 여기서 머무를 수 없어. 당신은 날 구해주지 않을 거야!”그녀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밖에서 경찰차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공포에 질려 다시 노승아를 바라보았다. “경찰이 여기 어떻게 온 거죠? 어떻게 찾아낸 거죠?”노승아는 눈을 들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 신고했죠. 당신이 범죄를 저질렀다면서요? 당연히 경찰에 알려야죠.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요.”“노승아!” 주소영은 분노에 차 외쳤다. “너 이 나쁜 년아, 네가 날 망쳤어. 너 이 나쁜 년!”주소영은 격분하여 노승아의 목을 움켜잡았다. “당신은 날 대신 죽게 하려고 했어. 죽을 거면 같이 죽자. 너도 살지 못할 거야!”노승아는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살려줘! 살인이다, 살인!”그러나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미 노승아에 의해 밖으로 나가 있었다.주소영은 이성을 잃고 탁자 위의 과일 칼을 집어 들고 노승아를 찌르려 했다.노승아는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안 돼, 안 돼!”그녀의
죽을 때까지도 이런 집착이 남아 있었다.그녀는 아이를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었다.아이가 생기면 그녀도 안정될 줄 알았다.모친의 지위로 아이를 통해 자신도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결국은 한낱 헛된 꿈일 뿐이었다.이 말을 다 하고 나서, 주소영은 숨을 멈췄다. 눈은 크게 뜬 채로 전혀 감기지 않았다.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채 말이다.경찰이 내려왔을 때, 주소영은 이미 죽어 있었다.그들은 현장을 통제선으로 둘러쌌다.노승아는 경찰에 의해 부축을 받아 내려왔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온몸은 피투성이였다. 눈물은 눈가에 맺혀 있었고 겁에 질린 표정이었으며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경찰은 그녀를 위로하며 겁먹지 말라고 했다.노승아의 눈물이 서서히 흘러내리며 그녀는 공포에 떨었다.매니저는 그녀를 안아주며 위로했다.온지유가 도착했을 때, 사건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그녀가 본 것은 한 구의 시체뿐이었다.그 순간, 그녀는 매우 충격을 받았다. 주소영이 왜 추락해서 죽은 것일까?그녀는 다시 한 번 멀리서 노승아를 바라보았다. 노승아는 앉아서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있었다.“온지유, 용의자는 이미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온지유에게 말했다. “이 사건에 다른 의심스러운 인물이 없다면 사건은 일단락될 것입니다!”온지유는 듣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노승아를 향했고 의심이 생겼다.주소영과 노승아는 몇 번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왜 그녀를 찾아왔을까? 게다가 추락해서 죽었다는 것이 의심스러웠다.주소영의 시체는 운반되었다.그들은 다시 경찰서로 돌아갔다.이번에는 주소영의 사망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노승아는 코트를 걸치고 앉아 있었고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그녀는 떨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왜 그녀가 저를 찾았는지 모르겠어요...아마 제가 여씨 가문에서 그녀를 몇 번 보고 대화를 나눴을 때, 매우 즐거운 대화였어요. 그래서 그녀가 저를 찾아왔을 때 저도 친절하게 대접했어요. 제
삼촌을 죽인 범인이 없어졌다.이제 더 이상 조사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증거를 찾을 필요도 없다. 이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노 아가씨, 당신의 진술은 끝났습니다. 이제 상처를 치료하러 가세요.” 경찰이 말했다.매니저가 말했다. “노승아 언니, 당신은 너무 착해요. 자신도 다쳤는데 병원에 가지 않고 먼저 경찰서에 와서 일을 마무리하다니.”노승아의 눈가는 빨갛고 얼굴은 매우 창백했다. “그만 말해, 이미 끝났어. 이제 병원에 가자.”매니저는 노승아를 부축하며 걸었다. 그녀는 매우 허약해 보였지만 억지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그들은 바로 온지유와 마주쳤다.노승아는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 “정말 우연이네요, 경찰서에서도 만나게 되다니.”온지유는 노승아의 손이 다쳤고 옷이 피로 범벅인 것을 보았다. “우연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사람이 떨어져 죽었는데 하필 당신 집에서 떨어졌다고요?”노승아는 잠시 멈췄다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그 소녀 말하는 거예요?”그녀는 태연하게 서 있었고 다시 말했다. “그 소녀가 왜 날 찾아왔는지 모르겠어요. 나를 죽이려고 했던 거예요. 너무 무서웠어요. 그녀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들었어요. 아마도 도망치다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걸 거예요.”“맞아요, 그녀와 몇 번 만났어요. 항상 여씨 가문에서 봤어요. 그녀는 여이현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들었어요. 그녀는 내가 여이현과 관련이 있는 것을 알고 질투해서 나를 죽이려고 했을지도 몰라요.” 노승아는 모든 것을 명확하게 말하며 덧붙였다. “그녀는 여이현을 좋아했어요. 단 하룻밤의 관계였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을 여주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예요.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잘못된 길을 걸었어요.”노승아는 모든 책임을 자신과는 무관하게 돌렸다.“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온지유는 노승아를 주시하며 말했다. “주소영이 저지른 어리석은 일들은 당신이 뒤에서 조종한 거겠죠.”“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난 그녀와 친하지
“배 비서, 얼른 병원에 데려가요.”“네, 대표님.”여이현의 말에 배진호가 달려오자 노승아가 여이현을 향해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요?”“난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좀 있어. 일 끝나면 갈게.”나중에 온다는 여이현의 말에 노승아가 안심하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나 먼저 병원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말을 마친 노승아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온지유를 쳐다보았다.여이현이 노승아를 아끼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고 이번에는 다치기까지 했으니 걱정하는 게 당연했기에 온지유는 못마땅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너 괜찮아?”여이현이 그런 온지유를 눈치채고 묻자 온지유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갔을 때 주소영은 이미 죽어 있었어요. 경찰이 그러는데 다른 용의자가 없으면 삼촌 사건은 그렇게 종결 날 거래요.”“주소영이 확실하대?”“네. 사람이 죽어서 그냥 그렇게 끝낼 수밖에 없대요.”처음에는 다른 사람한테 당했다는 게 화가 났지만 사람도 다 죽고 나니 여기서 더 따져봤자 뭐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다 끝났으면 우린 그만 가자.”“어디로요?”“어디 가고 싶은데?”잠시 고민하다 묻는 여이현에 온지유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노승아 씨 다친 거 보러 가야 하잖아요. 내가 가려는 곳이랑은 다른 방향일 텐데 뭐하러 나한테 물어요. 얼른 거기나 가봐요.”온지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질투하고 있었다. 노승아는 온지유에게 넘지 못할 벽 같은 존재였다.여이현은 그런 온지유를 가만히 바라봤지만 더는 말하지 않고 자신의 등을 떠밀기만 하는 그녀에 여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혼자 어디 가려고?”“집에요.”온지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본가에 갈 거예요. 부모님한테서 연락 왔어요.”여이현의 집에 가지 않겠다는 대답에 여이현은 담담히 대꾸했다.“그래.”그런 여이현을 보고 있던 여이현이 주먹을 꽉 쥐며 생각만 해왔던 그 말을 내뱉었다.“일이 너무 딱
“회사에도 할 일이 남았잖아. 삼촌분 일 처리 끝났으면 이젠 회사 일에 집중해야지.”여이현은 온지유의 또 다른 신분을 상기시켜주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비서였기에 그에 따르는 업무가 존재했다.곧 이직할 거라서 일을 해야 하는 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지만 집에서 삼촌 일을 처리하느라 휴가를 다 써버려서 출근하지 않으면 월급이 깎일 수 있었기에 온지유는 출근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하던 일은 마무리 해야 했기에 온지유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네, 대표님.”만족스러운 대답에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향했던 눈길을 거두고 앞장서 걷자 온지유가 그 뒤를 따랐다.그렇게 둘은 예전처럼 부부가 아니라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로 돌아갔다.온지유는 여이현의 눈빛만 보아도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바로 가져다줬기에 여이현도 그렇게 많은 비서를 보아왔지만 맘에 드는 건 온지유뿐이었다.둘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온지유의 예상대로 병원이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이 노승아에게 정성을 쏟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마침 요즘은 노승아도 쉬고 있었으니 사랑놀이하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였다.노승아를 보러 가는 엘리베이터에 있는 게 온지유와 여이현이었기에 둘 사이에는 정적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둘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는 노승아가 이미 상처를 다 치료한 다음이었는데 의사 말을 들어보니 심신 안정을 취해야 해서 심리 상담을 받아보는 걸 추천하는 듯싶었다.안 그래도 위로가 필요했는데 이 와중에 마침 여이현이 들어오는 걸 본 노승아는 벌떡 일어나 여이현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며 팔을 잡아끌었다.“이현 오빠.”“나 너무 무서워요.”문에 기대어 있던 온지유는 이젠 둘이 안고 있는 모습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 저 자신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질투도 뭣 모를 때 얘기지 이젠 이런 일이 하도 자주 일어나다 보니 여이현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지 오래였기에 더이상 상처받지도 않았다.여이현은 그런 온지유를 신경 써서인지 노승아를 떼어내며 물었다.“상처는 다 치료한 것
그 말에 이상함을 느낀 여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십 분 동안이나 실랑이했다던데? 그동안 아무도 안 왔다고요? 그러다가 혼자 발을 헛디뎌서 떨어진 거예요?”“방안에 승아 언니랑 주소영 씨뿐이고 얘기만 하는 거니까 저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경호원 오빠들은 승아 언니가 하필 그날 다 휴가를 줘버려서...”김예진은 여이현이 저를 탓하기라도 할까 봐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노승아의 매니저씩이나 돼서 제일 위험할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건 업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탓해도 할 말은 없었다.“신고는 누가 했어요? 경찰이 엄청 빨리 왔던데.”사건이 벌어지자마자 거의 경찰이 왔으니 신고를 한참 전에 해야 가능한 일이었다.그런데 김예진도 누가 신고를 했는지 몰랐기에 그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었다.김예진이 노승아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경찰차의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내가 신고했어요.”그때 노승아가 나지막이 말하며 종이로 이따금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냈다.“주소영 씨는 그때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면서 자기가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경찰이 잡으러 올 거라고 했어요.”그러면서 노승아는 시선을 온지유에게로 옮겼다.“지유 언니, 나도 그날 소영 씨 말 듣고 나서 언니 삼촌이 그렇게 된 거 알았어요. 그리고 언니를 납치한 것도 다 소영 씨 짓이었어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못 될 수가 있어요? 법은 다 무시하고 나쁜 짓만 하니까 나도 화나서 바로 경찰에 신고한 거예요.”“그리고 내가 신고하는 걸 보더니 날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노승아는 그 일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었다.온지유는 그저 여이현을 따라온 것이기에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제 삼촌을 먼저 언급하는 노승아에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노승아의 말을 삼촌을 죽인 범인이 주소영이고 자신이 그걸 알고 경찰에 신고했으니 온지유가 고마워해야 된다는 뜻으로 들렸다.만약 정말 그런 거면 다행이지만 온지유는 그렇다고만 믿을 수가 없어 노승
여이현은 김예진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묻는 건 승아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승아가 지금 이 사건의 당사자잖아요. 기사만 봐도 이보다 더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 천지에요. 그런 사람들 입부터 막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노승아는 공인이었으니 그녀가 인질로 잡힌 일은 일반인이 인질로 잡힌 것과는 성질이 달랐다.일반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어도 보도는 됐겠지만 사건의 당사자가 노승아라면 여론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노승아도 일이 커지면 제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갈 거라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감히 여이현의 아이를 낳으려 한 주소영이 스스로 제 명을 단축한 것뿐이었다.노승아는 제가 아닌 다른 여자가 여이현의 아이를 낳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물론 여이현이 주소영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거고 주소영은 그저 제 대타일 뿐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여이현의 아이의 엄마 자리에 주소영은 어울리지 않았다.그리고 주소영은 호시탐탐 노승아의 자리를 노려왔기에 노승아는 그걸 지켜보다 당할 수는 없어서 먼저 손을 쓴 것이었다.하지만 일은 노승아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노승아는 레드카펫을 밟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에까지 올라가 여이현도 제 매력에 빠지게 만들어 그의 아내로 더 많은 명예를 쌓을 생각이었는데 하필 이럴 때 기사가 터져버린 것이다.노승아는 이미 여러 번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이슈 여왕이었다.문제는 매번 나는 기사마다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노승아는 아직 기사는 보지 못했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여이현을 보고 그의 기분이 별로임을 알 수 있었다.“이현 오빠, 내가 또 오빠 귀찮게 했죠? 미안해요.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알았으면 소영 씨를 집에 들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럼 소영 씨도 살아있었을 거고 나도 아무 일 없었을 텐데. 나 너무 후회돼요.”“언니 잘못 아니잖아요. 주소영이 나쁜 년이고 그 사람이 지옥 가야지 언니가 왜 사과를 하고 있어요!”여이현도 노승아를 탓하지 않고
적어도 배진호가 보기에는 여이현과 노승아는 아무 사이가 아닌 듯싶었다.물론 뭐 둘 사이에 감정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긴 했지만 배진호가 본 여이현은 늘 노승아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물론 둘 사이에 배진호가 모르는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사랑은 아니었다.배진호의 위로 아닌 위로에 온지유는 미소를 지었다.“진호 씨, 왜 갑자기 나한테 그런 말 해요? 진호 씨도 알잖아요 그날 봐서. 여이현 씨랑 나는 어차피 이혼할 사이었어요.”여이현이 노승아를 위해 엔터를 차렸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의미였기에 온지유는 배진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배진호는 그들의 결혼이 아무 의미도 없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개인적인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온지유 씨는 대표님이랑 이혼하고 싶으세요?”배진호의 질문에 온지유는 잠시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만약 예전에 온지유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대답은 당연히 부정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온지유는 갖은 노력 끝에 이뤄낸 여이현과의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보낼 거라고 다짐했었다.하지만 온지유가 마주친 현실은 그녀의 그런 바람을 짓밟아 버렸다. 이제는 온지유에게도 의미 없는 바람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마주할 때가 온 것이다.배진호는 쉽사리 대답을 못 하는 온지유를 보더니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말했다.“지유 씨도 이혼은 하기 싫은 거죠? 사실 대표님도...”“이혼할 거예요.”갑자기 입을 여는 온지유에 배진호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온지유는 그런 배진호를 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달력 보고 있었어요. 이틀 뒤면 이현 씨와 약속한 날이에요. 그날 법원에 가서 이혼하기로 이미 얘기 끝냈어요.”“저랑 대표님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온지유는 웃으며 배진호를 향해 말했다.“조용하게 왔다가 조용하게 가고 싶어요. 그래야 아무한테도 피해가 안 갈 것 같아요. 대표님도 유명한 분이신데 괜한 일에 이름 거론되는 거 싫어요.”온지유를 위로해주려던 배진호는 위로 따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