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일리가 있네.”백지희가 말했다.“일단 여이현이 약속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지켜봐. 만약 약속을 안 지킨다면 내가 알려주는 대로 하면 되니까. 어차피 이혼하면 서로 남인데 다른 건 신경 쓸 필요가 없잖아.”“응, 알았어.”그녀는 일단 약속 날짜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여이현은 여진으로 돌아왔다.“온지유, 커피 한잔 내려줘.”수많은 서류를 처리한 여이현은 피곤함을 느끼며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말했다.말을 내뱉은 순간 그는 문제를 깨닫게 되었다.온지유는 여진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백지희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공허한 사무실에 온지유가 없으니 더욱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뜻밖에도 그는 자신이 그녀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소한 커피 향이 울려 퍼졌다.심지어 계수나무 꽃차 향도 은은하게 났다.“대표님, 대표님께서 즐겨 마시는 커피를 가져왔습니다.”공손한 어투가 귓가에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이채현이 커피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이채현은 온지유보다 키가 조금 더 컸다.하지만 온지유보다는 피부가 하얗지 못했다. 이목구비도 온지유보다 예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옷 입는 스타일도 온지유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이채현은 오늘 정장을 입지 않았다. 롱 원피스의 어깨엔 동화 속에 나올 법한 퍼프가 있는 디자인이었다. 게다가 오프숄더라 그녀의 쇄골이 그대로 드러났다.옷에 신경을 쓴 것이 분명했다.여이현은 그녀의 옷을 훑어보더니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내가 커피 타오라고 시켰나요?”그의 입에서는 사람마저 얼려버릴 정도의 싸늘한 말이 흘러나왔다.이채현은 그럼에도 좋은 태도를 보이며 말했다.“대표님께서 꽤나 오랫동안 서류만 보고 계셨으니 피곤할 것 같아 타왔습니다. 온 비서님이 저한테 이런 상황이 오면 반드시 커피를 내려 가져다드리라고 하셨거든요.”이채현은 온지유를 언급했다.역시나 온지유의 이름을 들은 여이현은
여이현의 얼굴에 있던 차가운 웃음기마저 사라졌다.쿵!이채현은 다시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그녀의 모습은 다소 처참해 보였다. 너무도 아팠다.넘어진 순간 만화 속에 나온 것처럼 눈앞에 별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그러나 이채현은 얼른 여이현에게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발목을 삐끗하는 바람에 넘어졌네요. 전... 전 정말로 멍청한 사람인가 봐요!”“그래요, 정말로 멍청한 사람이군요!”여이현은 애초에 이채현에게 관심이 없었다.“고작 그 하찮은 수작질로 날 유혹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거예요?”“!”여이현은 그녀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인정해서는 안 되었다.“대표님, 정말 오해세요. 전 방금 실수로 커피를 쏟은 거예요. 보세요, 제 신발도 싸구려라서 넘어지게 된 거예요.”이채현의 목소리는 다소 갈라져 있었고 조금 난처해 보이기도 했다.그녀의 신발 뒷굽은 확실히 떨어져 있었다.여이현은 굳이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꿍꿍이가 없다면 다행이지만 이대로 넘어가도 괜찮다고 생각해요?”“죄송합니다, 대표님. 대표님의 인턴 비서로서 실수를 자주 하면 여진 그룹 이미지에 영향이 간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제 막 졸업하고 취직한지라 수중에 돈이 정말로 없거든요.”이채현은 점점 더 기세등등해졌다.여이현은 그런 이채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배 비서한테 가서 이번 달 월급 먼저 계산해 달라고 하세요.”“감사합니다, 대표님!”“이제 내 눈앞에서 사라져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채현은 온지유가 뽑은 사람이니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게다가 이번 일로 그는 이채현이 더 날뛸 것으로 생각했다....백지희의 집.백지희가 앱으로 고용한 아주머니가 주소에 따라 그녀의 집으로 찾아왔다.아주머니는 음식을 만들고 있었고 온지유는 소파에 앉아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마침 흘러나온 뉴스는 제목과 내용이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다.온지유는 자료를 찾아본 뒤 뉴스에
그날 이후, 백지희의 그림 전시에서도 한정민이 나타났다. 그는 그녀의 그림도 비싼 값에 사는 등 여러 행동을 보였다.상대가 분명히 거절했음에도 이렇게까지 한다면 이건 집착이었다.온지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띠링,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의 핸드폰에서만 문자가 온 것이 아닌지 백지희도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고 있었다. 대학 동기 단톡방에 도세원이 소식을 올린 것이다.[다음 주 월요일에 조교였던 박민재가 단풍 별장에서 아들 백일잔치를 열 거야. 그래서 그 김에 동창회도 할까 하는 데 참석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참석해줬으면 좋겠어.]“좀 어이가 없네. 박민재 아들 백일잔치 소식을 왜 박민재가 직접 알리지 않고 도세원이 대신 나서서 말해주는데?”문자를 읽던 백지희가 바로 투덜댔다.이때, 대학 동기 단톡방에 있던 사람들이 잇달아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고 도세원이 답장했다.[박민재는 지금 병원에 있어서 핸드폰 볼 여유가 없어. 난 박민재 대신 백일잔치 소식을 알리고 너희들을 초대하는 것뿐이야. 얘들아, 너희들 얼굴 보면서 할 말이 있어. 그러니까 될수록 다들 참석해 줬으면 좋겠어.]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지난번에 내가 병원에 가서 검진받을 때 우연히 도세원과 마주쳤었어. 걔가 그러는데, 박민재 아들이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대.”사실 도세원의 목적은 박민재를 도와 병원비를 조금이라도 마련해 주려는 것이었다.온지유의 말을 들은 백지희는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이제 막 백일 지난 아이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으니 병원비도 만만치 않게 들 것이다.그녀는 갑자기 온지유에게 기대었다.“지유야, 넌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제때 검진받고 의사가 주의하라거나 먹지 말라는 음식은 먹지 마, 알았지? 그리고 힘든 일도 하지 말고 앞으로 유독성이 있는 물건도 만지지 마. 혹시 갈 데가 없으면 그냥 우리 집에서 지내. 넌 임산부라서 뭐든 조심해야 한단 말이야.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 분윳값도 내가 전부 낼 거야!”그녀는 요즘 의료
온지유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래도 소용없을 거야. 나랑 이현 씨 사이엔 아무런 감정이 없거든. 네가 노승아 씨를 처리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나타났을 거야.”백지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럼 나도 할 말이 없지.”도우미 아주머니의 요리가 전부 완성되었다.온지유는 별로 많이 먹지 않았지만, 자꾸만 졸음이 밀려왔다.다음 날 아침.온지유와 백지희는 갤러리로 갔다.백지희는 조금 유명세가 있는 화가였던 터라 조금 변장을 하여 왔지만 그래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갤러리엔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백지희는 온지유의 팔을 놓아주는 수밖에 없었다.“지유야, 너 먼저 돌아가.”말을 마친 뒤 백지희는 다른 곳으로 갔다.백지희가 없으니 혼자가 된 그녀는 너무도 무료했다. 그러나 입구에서 여이현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다만 온지유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이현을 지나치려 했다. 그러자 여이현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온지유, 벌써 연기 시작한 거야?”“아니요. 전 그냥 이젠 회사도 그만두었으니 이현 씨 곁에 있기엔 부적절한 것 같아서 그냥 가려던 참이었어요.”온지유는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여이현이 나직하게 말했다.“난 널 찾아온 거야. 나랑 함께 가. 네가 처리해줘야 할 서류가 있으니까.”온지유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여이현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그는 자신이 이렇게 하면 온지유가 따라오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거절하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온지유는 확실히 그의 생각대로 따라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의문을 제기했다.“대표님, 그 서류들은 이채현 씨가 처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이채현을 멋대로 내 비서로 뽑은 것도 모자라 지금 내 사생활에도 간섭하게 하려는 거야?”여이현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가 내뱉은 말에서는 싸늘함이 느껴졌다. 심지어 그녀는 여이현의 찌푸려진 미간과 서슬 퍼런 눈빛도 상상이 되었다.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며 답했다.“
그녀의 모습에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병원에 가본다고 하지 않았어?”“네. 약 먹고 있어요.”온지유는 등골이 싸늘해지는 느낌에 침을 꼴깍 삼켰다.눈치 빠른 여이현이 발견하기라도 할까 봐 눈을 마주칠 수조차 없었다.여이연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병원에 가보겠다고 한지도 벌써 두 날이 지났어. 어떤 약을 받았는지 보여줘 봐. 석훈이한테 물어보게. 별 효과 없으면 석훈이한테 괜찮은 약을 부탁해야지.”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은 칼슘과 엽산이었다.의사인 지석훈에게 보여주면 바로 들킬지도 몰랐다.온지유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이현 씨도 두 날밖에 안 지났다고 했잖아요. 약 효과를 보려면 시간이 더 지나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저번에 저한테 위약을 주셨잖아요.”여이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온지유는 얼른 커피를 그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이번엔 시럽을 안 넣었어요. 맘에 들지 모르겠네요. 저는 방 좀 정리하고 있을게요.”“응.”여이현도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온지유가 급히 자리를 피하는 모습을 보고 의심이 들었다.온지유가 타온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온지유는 여이현이 뭐라도 발견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다 어제저녁 백지희 찾으러 간다고 엽산을 까먹고 안 먹은 것이 떠올랐다.딸깍.이제 막 엽산을 먹으려던 순간, 방문이 열렸다.이 소리에 온지유는 그만 손에 쥐고 있던 약병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이어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왔다.여이현의 눈빛은 예리하기만 했다.“약 줘봐.”원래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몰래 약 먹고 있을 줄 몰랐다.당황한 온지유는 여이현이 시키는 대로 약을 건넸다.흰색 알약과 기다란 약 두 가지였다.그냥 봐서는 몰랐기 때문에 설명서를 볼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이미 바꿔놓았기 때문에 설명서에는 비타민 A라고 적혀 있었다.“그냥 비타민인데 왜 그렇게 놀라?”여이현은 약병을 쥔 채 예리한 눈빛으로 온지유를 쳐다보았다.온지유가 입술을 깨물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불쑥 들어오면 당연
온지유는 멈칫하고 말았다.여이현이 지금까지 이렇게 다정하게 대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합의서에 3년이 적혀 있지 않았다면, 노승아가 없었다면 이런 행동 때문에 다시 그의 옆에 남고 싶은 충동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온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석훈 씨가 사람 안 잡아먹는 거 알아요. 그런데 정말 괜찮다니까요? 이현 씨, 왜 제 말을 못 믿어요? 제가 어디 아파 보여요? 아님, 제가 임신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온지유가 먼저 입 밖에 꺼냈다.여이현이 물어볼 때마다 부정했던 그녀였다.하지만 이번에 먼저 언급한 것은 여이현이 이 생각을 포기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다 며칠 전과는 달리 얼굴색도 안 좋아지고 살도 빠진 것을 발견했다.“이따 도우미 아줌마한테 기력 회복할 수 있는 음식 좀 준비하라고 할게. 며칠 동안은 일단 여기서 지내.”여이현이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녁. 샤워를 마친 온지유는 밝은 계열의 옷 대신 넓은 체크무늬 원피스 잠옷을 입었다.침대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이현도 그녀의 옆에 누웠다.온지유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안고만 있을게. 가까이 와봐.”어둠 속에서 여이현의 목소리는 더욱 묵직하게 들렸다.하지만 남자의 말은 믿으면 안 되었다.온지유는 그의 손이 배에 닿을까 봐 움직이지도 않았다.“됐어요. 내일이면 예약하러 갈 건데요, 뭐. 오늘만 지나면 내일부터 각방 쓰는 거예요. 저는 이현 씨가 참지 못하고 저를 임신시킬까 봐 두려워요.”여이현은 전처럼 막무가내는 아니었다.“어차피 이혼 숙려기간인데 임신하면 그냥 낳으면 되지.”온지유는 얼어붙고 말았다.‘이혼하기 싫은 건가? 나랑 애까지 낳고 싶은 건가?’노승아만 없었다면 이 말을 믿었겠지만 결국 거절했다.“저는 이현 씨랑 애 낳고 싶지 않아요. 이현 씨, 그냥 이대로 헤어져요. 어차피 각자 원하는 거 있어서 한 계약 결혼이잖아요. 아직 젊을 때 각자 살고 싶은 대
온지유는 야채수프도 끓이고 계란후라이도 준비했다.그리고서 도우미 아줌마와 함께 음식을 식탁으로 옮겼다.여이현도 2층에서 내려왔다.“얼른 와서 아침 먹어요.”이때 마침 햇살이 온지유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여이현은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에 잠깐이나마 행복했다.하지만 이것도 잠시, 아침 식사 이후 예약하러 동사무소로 가야 했다.여이현은 별로 아침 생각이 없었지만 안 먹을 수가 없었다.온지유의 음식솜씨가 워낙 좋아 맛이 괜찮았다.아침 식사 후, 이 둘은 함께 밖으로 향했다.여이현은 직접 운전하기로 했다. 온지유는 처음 혼인 신고했던 그날처럼 조수석에 앉았다.그날은 오늘처럼 날씨가 좋지 않았다.동사무소에 도착했을 때, 결혼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이혼하려면 줄 서야 했다.반 시간 뒤, 그제야 이들의 순서가 돌아왔다.직원은 날짜를 확인하고, 혼인신고서를 보더니 중재에 나섰다.“이제 결혼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왜 이혼하려고 하는 거죠? 혹시 외도 사실이 있었나요?”두 사람은 말이 없었고, 여이현의 표정은 유난히 어두웠다.온지유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직원이 먼저 물었다.“아이는 있나요? 재산은요? 어떻게 합의하신 거예요?”온지유가 말했다.“외도는 없었고요. 아이도, 재산도 없어요. 그저 단순히 감정이 식어서 이혼하려고 합니다. 이혼숙려기간은 언제쯤이면 끝날까요?”“두 달 뒤요.”온지유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왜 두 달이죠? 이혼숙려기간은 한 달이 아닌가요?”두 달 뒤면 배가 많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빨리 끝내고 싶었다.그때 가서 배불뚝이인 상태에서 여이현은 절대 이혼하지 않으려고 할 수 있었다.직원이 힐끔 보더니 말했다.“지금 예약이 꽉 차있는 관계로 제일 빨라야 두 달 뒤입니다. 이혼 분쟁도 없는데 법원까지 가봤자 해결해 주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이혼 안 하는 거 어떠세요?”‘법원까지 가봤자 해결해 주지 않을 거라고?’온지유는 머리가 어지러웠다.‘이혼하기 이렇게도 어려워?’온지유는 짜증이
온지유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네. 기뻐요.”일부러 반대로 말했다.여이현은 그녀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괜찮은 방법이라 하면 변호사를 찾는 거?”온지유는 부정하지도 않고 잠깐의 침묵 끝에 말했다.“대표님, 이제 각자 갈 길 가시죠.”온지유는 변호사 찾으러 가야 했다.여이현은 그런 그녀를 순순히 보낼 수는 없었다.“회사에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그래요.”온지유는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회사에 도착한 이들은 각자 자기 사무실로 들어갔다.이채현은 온지유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저는 온 비서님이 안 오는 줄 알았어요.”뒤돌아보니 깔끔하게 정장을 입고 있는 이채현이었다.여이현의 마음에 든 이채현을 직접 뽑은 것도 인수인계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정상이었다.하지만 정작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왠지 모르게 빨리 회사를 그만두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온지유가 진지하게 말했다.“아직은 아니에요.”이채현은 온지유한테 찰싹 붙으면서 말했다.“온 비서님, 언제 그만두는데요?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온지유가 대답하기도 전에 여이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채현 씨랑 상관없는 일인 것 같은데요?”이채현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분명 여이현이 대표님 사무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물어봤는데 결국 그의 귀에 들어갈 줄 몰랐다.이채현은 여이현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하지만 또 설명을 안 할 수 없었다.“대표님, 별다른 뜻이 없었어요.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여이현은 그녀의 설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오늘부로 해고에요.”이채현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그저 온지유한테서 인수·인계받고 싶어서 물어봤는데 여이현의 심기를 건드릴 줄 몰랐다.이채현은 온지유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온지유는 침묵을 지켰다.여이현이 결정한 일은 아무도 설득할 수 없었다.하지만 마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