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는 5년간 남편의 그림자였다. 나는 조향사다. 나는 천재다. 3년을 바친 내 시그니처 향수의 글로벌 론칭 무대, 전광판에는 남편의 첫사랑 이름이 박혀 있었다. “너처럼 연구실 냄새에 찌든 여자는 브랜드 얼굴이 못 돼.” 남편은 특허마저 강탈했지만, 그들이 훔친 것은 시한폭탄이었다. 내 이름을 지워버린 자들에게, 완벽한 파멸의 향을 선사한다.
View More파리 8구, 르 그랑 살롱의 백스테이지.
암막 커튼 너머로 플래시가 번쩍였다. 프랑스어와 영어, 한국어가 뒤엉킨 웅성거림이 얇은 벽을 타고 밀려왔다.
한여진은 테이블 위의 흑요석빛 보틀을 두 손으로 감쌌다.
〈NOIR 17〉.
베르가모트의 서늘한 첫 향 뒤로 다마스크 로즈와 스모키한 파출리가 겹쳐지는 향수였다. 3년 동안 배합을 바꾸고, 온도와 빛을 달리해 수천 번 안정성을 확인한 끝에 완성한 여진의 첫 시그니처.
처음에는 장미가 너무 빨리 무너졌고, 다음에는 파출리가 거칠게 남았다. 한 방울을 줄이고 반 방울을 더하는 작업을 반복한 끝에야 향은 여진이 그렸던 ‘비 내린 파리의 밤’에 가까워졌다.
그 과정에서 손등은 알코올에 갈라졌고, 휴일과 새벽은 사라졌다. 그래도 완성된 향을 맡을 때마다 견딜 만했다.
사전 블라인드 평가에서는 해외 바이어 최고점을 받았다. 초도 계약 협상액만 200억 원에 가까웠다.
오늘, 그 향을 만든 조향사의 이름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될 예정이었다.
“한 수석님, 5분 뒤 입장입니다.”
스태프가 무선 마이크를 내밀었다.
여진은 옷깃을 정리했다. 손끝에 남은 베티버와 앰버의 잔향이 가볍게 번졌다.
결혼 후 5년.
남편 강태혁이 회사를 키우는 동안 여진은 연구실을 지켰다. 투자 설명회도, 언론 인터뷰도 태혁에게 양보했다. 태혁은 늘 말했다.
‘조금만 더 버티자. 회사가 자리 잡으면 가장 먼저 네 이름부터 세상에 알릴게.’
그 약속을 믿었다. 향만 제대로 만들면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도 함께 빛날 거라 생각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인 줄 알았다.
‘드디어.’
여진이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
암막 커튼이 걷히며 스포트라이트가 무대를 갈랐다.
각국의 뷰티 에디터와 유통사 관계자들이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프랑스인 사회자가 미소를 지은 채 마이크를 들었다.
“여러분, 루시엘의 새로운 시대를 열 〈NOIR 17〉을 탄생시킨 주인공을 소개합니다.”
박수가 터졌다.
여진은 무대로 발을 내디뎠다.
“루시엘의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마스터 퍼퓨머, 윤서린 님입니다!”
발끝이 그대로 굳었다.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간 사람은 윤서린이었다.
석 달 전, 태혁이 해외 명품 마케팅 출신이라며 데려온 여자. 그리고 그의 오래된 첫사랑.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서린이 환한 미소로 마이크를 받았다. 무대용 조명에 맞춰 계산된 각도로 턱을 들고, 객석을 천천히 훑는 모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봉주르. 〈NOIR 17〉은 지난 3년 동안 제 감각과 인생을 쏟아 완성한 향수입니다.”
여진의 손에서 보틀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연구실 문턱도 제대로 밟지 않은 여자가, 3년을 말했다.
서린은 원료 산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했고, 관객은 감탄했다. 여진이 작성한 개발 노트를 그대로 외운 듯 배합 과정까지 읊었다. 단어 하나, 쉼표 하나까지 낯익었다.
여진은 VIP석 맨 앞줄을 바라봤다.
태혁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크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 순간 여진은 알았다.
실수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자신만 모르게 짜인 무대였다.
대형 LED 화면이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보틀 영상 아래, 금빛 영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MASTER PERFUMER ]
[ CREATED BY SEO-RIN YOON ]지난 3년의 밤을 삼킨 향수 위에, 다른 여자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여진은 손안의 보틀을 더 세게 쥐었다.
차가운 유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제야 향수보다 먼저 깨진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남편에 대한 믿음이었다.
1년 뒤, 파리 8구의 유서 깊은 프라이빗 살롱.[ HAN YEJIN PARFUMS ] [ FIRST SIGNATURE — 〈L’ORIGINE〉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로 세계 각국의 뷰티 에디터와 바이어들이 모였다. 객석 맨 앞에는 연구원들과 품질책임자들이 앉아 있었다. 여진은 누구의 공로도 숨기지 않았다.살롱을 채운 향은 고결한 아이리스와 맑은 화이트 티, 깊은 샌들우드로 이어졌다. 여진이 독립 연구소에서 완성한 안정화 기술을 적용해 빛과 온도 변화에도 잔향이 흐트러지지 않는 첫 작품이었다.6개월 장기 시험과 광노화 검증을 마친 뒤에야 생산됐다. 누구도 경고문을 지우지 않았다.〈L’ORIGINE〉.‘기원’이라는 뜻의 이름.잃어버린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누구의 그림자도 아닌 자신의 이름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선언이었다.사전 공개 물량은 파리와 뉴욕, 도쿄에서 매진됐다. 평론가들은 화려한 첫인상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해지는 구조를 높이 평가했다.보틀 뒷면에는 개발팀 이름과 생산번호가 새겨졌다. ‘마스터 퍼퓨머 한여진’은 최종 책임자의 정확한 표기였다.여진은 백스테이지에서 보틀을 들었다.처음 이 도시의 무대에 섰던 날, 여진은 다른 여자의 이름이 적힌 〈NOIR 17〉을 쥐고 있었다.오늘 보틀 전면에는 단 하나만 새겨져 있었다.누군가에게서 되찾아 온 이름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는 법을 배운 이름이었다.[ HAN YEJIN ]***서재현이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다.“한국에서 1심 판결 소식이 왔습니다.”강태혁은 업무상 배임과 전산 기록 조작, 허위 광고 및 명예훼손 관련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법원은 품질 경고를 알고도 삭제한 점과 여진에게 책임을 전가
다음 주 화요일, 남산이 내려다보이는 비즈니스 클럽.여진의 맞은편에는 오리온 에셋 투자총괄 서재현이 앉아 있었다.단정한 네이비 수트, 군더더기 없는 말투. 재현은 인사보다 먼저 여진이 건넨 시향지를 받았다.테이블에는 12주 가속 시험 중간보고서도 놓여 있었다. 재현은 그 문서부터 펼쳤다.아이리스의 투명한 첫 향 뒤로 샌들우드의 온기가 천천히 올라왔다. 그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향이 마르는 과정까지 확인했다.“좋군요.”과장 없는 한마디였다.“첫 10분보다 30분 뒤가 더 좋습니다. 중심이 흔들리지 않네요.”“아직 최종본은 아닙니다.”“그래서 더 믿음이 갑니다. 완성되지 않은 것을 완성됐다고 말하지 않으니까요.”여진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대부분의 투자자는 첫 향과 포장부터 물었다. 재현은 잔향과 안정성부터 봤다.“3년 전 그라스 엑스포에서도 그랬습니다.”재현이 시향지를 내려놓았다.“다들 화려한 원료를 골랐는데, 한 수석님은 산화된 샘플 하나를 찾아냈죠. 그때부터 기억하고 있었습니다.”“오리온은 루시엘의 2대 주주였죠. 왜 더 일찍 연락하지 않으셨습니까?”“기술의 주인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건 우리 책임입니다.”재현은 변명하지 않았다.“그래도 루시엘 소속 기술자를 빼오는 방식으로 바로잡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법적 정리가 끝나고 한 대표님이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맞다고 봤습니다.”짧고 분명한 답이었다.***재현은 투자 제안서를 펼쳤다.[ HAN YEJIN PARFUMS 설립안 ]초기 투자금은 미화 3,000만 달러. 연구소 구축과 제품 검증, 해외 진출 성과에 따라 단계별로 집행하는 계획이었다.지분은 한여진
태혁은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사랑했어. 지금도 사랑해.”그는 바닥을 기어오듯 다가와 여진의 바짓단을 붙잡으려 했다.“회사 때문에 잠깐 미쳤던 거야. 우리 처음 반지 맞추던 날 기억 안 나? 네가 만든 라벤더 향 맡으면서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했잖아.”여진은 손길을 피했다.“스스로를 속이지 마요.”낮고 평평한 목소리였다.“당신이 사랑한 건 내가 아니에요.”여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 문장을 말하기까지 5년이 걸렸다.“여진아.”“내가 밤새워 당신 손에 쥐여준 결과물이었지.”여진은 젖은 주식 양도 의향서와 합의안을 내려다봤다.“내가 만든 향, 내가 올려준 회사 가치, 그 덕분에 얻은 대표라는 명예. 당신은 그걸 사랑했어요. 그래서 내 실력은 마음껏 쓰면서도 내 이름은 지워도 된다고 생각한 거고.”“아니야. 난 네가 필요해.”“지금도 ‘사랑한다’가 아니라 ‘필요하다’고 말하네요.”태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래도 5년이야.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한순간에 버려?”“날 무대 뒤에 세우고, 발명자 이름을 빼앗고, 550억 원의 책임까지 뒤집어씌우려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네요.”여진은 휴대전화를 들어 경비업체 긴급 호출 버튼을 눌렀다.“1분 안에 보안요원이 옵니다.”“여진아, 제발.”“이제 당신 몫은 당신이 책임져요.”“내가 감옥에 가도 상관없어?”“그건 제가 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한 일과 법원이 정하겠죠.”여진은 결혼 내내 그의 문제를 먼저 수습하던 습관을 끝냈다.***보안요원들이 들어와 태혁을 일으켰다.그는 문밖으로 끌려가면서도 여진의 이름을 불렀다. 여진은
대표이사에서 해임된 날 밤.한남동 골목에는 장대비가 쏟아졌다.여진의 아틀리에 안은 따뜻한 조명과 아이리스, 샌들우드 향으로 고요했다. 막 마지막 시향을 끝내려던 순간 유리문이 거칠게 흔들렸다.“한여진!”문 앞에는 강태혁이 서 있었다.출입문 비밀번호는 바뀌어 있었지만, 예약 고객이 나가는 틈을 타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바닥에는 그가 지나온 빗물이 길게 번졌다. 여진은 즉시 카운터 아래 보안 버튼 위치를 확인했다.젖은 수트는 흙탕물로 얼룩졌고, 턱에는 며칠째 면도하지 않은 수염이 자라 있었다. 한 달 전 파리에서 샴페인을 들던 남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하지만 여진은 가엾다고 느끼지 않았다. 태혁의 몰골은 누군가가 망가뜨린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내린 선택들이 돌아온 모습이었다.여진은 스포이트를 거치대에 놓았다.“영업 끝났습니다. 나가세요.”태혁의 다리가 풀리듯 꺾였다.그는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제발 한 번만 들어줘.”품 안에서 젖은 서류 봉투를 꺼냈다.자신이 보유한 루시엘 주식 양도 의향서.가압류된 지분을 태혁은 당장 넘길 수 있는 선물처럼 내밀었다.특허 발명자 정정에 전면 협조한다는 확인서.이혼과 민사소송에서 여진의 청구를 수용하겠다는 합의안.“내 지분 전부 네게 줄게. 발명자도 바로잡고, 손해배상도 네가 부르는 대로 할게.”“당신에게 지금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게 얼마나 남았죠?”태혁의 얼굴이 굳었다.“방법은 만들 수 있어. 네가 동의만 하면 돼.”여진은 서류에 손대지 않았다.“이미 법원과 특허 당국이 처리할 일입니다.”“네가 회생절차에 참여하면 투자자들이 다시 검토하겠대. 한여진이 돌아온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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