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은 예전이고, 지금은 지금이야. 당신이 기억하는 건 예전의 여이현이고, 지금의 여이현은 여진그룹의 대표라고. 우리는 해외에 있어서 몰랐지만, 국내에 여이현 눈치 안 보는 사람이 없어. 여이현의 여진의 실세라는 말, 못 들어 봤나?”정연은 말문이 막혀 울기 시작했다.“그럼 하임이가 감옥 가는 걸 두고만 볼 건가요? 차라리 내가 대신해서 가는 게 낫겠어요!”강하임은 그들의 딸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강성훈에게는 금강그룹도 중요했다. 많은 사람이 그의 회사에 의지하고 있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강성훈은 상황을 좀 더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경찰서에서 온지유는 이미 진술을 마쳤다. 녹음기 역시 조작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세상에 완벽한 범죄는 없다.강하임은 CCTV를 고장 내고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했지만, 손을 댄 증거는 언제나 남아있다. 조사 결과 강하임의 기사가 CCTV를 고장 낸 것으로 드러났다.기사를 데려와서 묻자, 모든 진실이 드러났다. 강하임은 취조실에서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변호사를 부르겠다고 소리치고 부모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할 일을 마친 온지유는 그녀가 어떻게 되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마땅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여이현은 온지유가 모든 과정을 끝마칠 때까지 계속 곁에 있었다. 그 사이에 온지유는 그에게 하루 종일 피곤했을 텐데 늦게까지 자신과 함께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내일 또 출근해야 하지 않는가.온지유는 그에게 배려를 보여줬고, 그는 그녀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온지유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싸우기만 하던 두 사람인데 갑자기 분위기가 잠재워진 것이 이상했다.하지만 그는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잘 보살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경찰서에서 나온 시간은 새벽 2시였다. 백지희 등은 온지유의 요구로 먼저 돌아갔다. 여이현만 곁에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긴장이
온지유는 생각이 많았다. 어떤 면에서는 그녀와 강하임은 매우 비슷했다.둘 다 여이현의 도움을 받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강하임처럼 극단적이지 않았다. 만약 여이현이 그녀를 선택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누가 한 우물만 파고 싶겠는가?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지금의 수많은 일이 두 사람의 결혼을 전제로 일어난 것이었다.“난 의무적으로 사람들을 구해줬을 뿐이야. 내 개인과는 큰 상관이 없어. 누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싶겠어? 그때 했던 일은 단지 신념과 의무 때문이야.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난 아마 군대에 가지도 않았을 거야. 그러면 그렇게 많은 일들이 생기지도 않았을 테고.”여이현은 스스로 생각했다. 만약 그가 여씨 가문에 남아 있었다면, 위험한 일을 할 가능성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더군다나 그 시기는 영광과 거리가 먼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알아요.”온지유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모두 지나간 일이에요. 저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여이현이 그녀를 구해준 것은 명령과 의무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그가 그녀를 전혀 기억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여이현은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온해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반응이 자꾸만 위험하게 보였다.“너 오늘 정말 이상해.”“그래요?”온지유는 그와 팔짱을 꼈다.“죽었다가 살아나니 정신을 차린 게 아닐까요?”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여이현은 깜짝 놀랐다. 이토록 적극적인 태도 역시 놀라웠지만, 딱히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설명이나 했다.“오늘 시상식에 참석했어. 원래는 어제 말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어. 앞으로 내 핸드폰은 24시간 켜져 있을 거야. 다시는 너를 찾지 못하는 일은 없을 거야.”“이해해요. 우리 집에 돌아가요. 맞다, 전에 F국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요즘 시간 있어요?
여이현의 품에 안긴 온지유는 잠깐 멈칫했다. 잠시 후 그녀는 요리 중인 프라이팬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왜 그래요? 야식은 곧 먹을 수 있어요.”여이현은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으며 머리카락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향기가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너랑 같이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온지유는 담담한 눈빛으로 프라이팬을 뒤적였다. “부엌은 기름 냄새가 심해서 이현 씨한테 안 좋아요.”“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아.”예전의 온지유라면 무조건 가슴이 떨려서 어쩔 줄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여이현의 달콤한 말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기대했다가 실망한 날이 많아서인지, 그녀의 마음은 점점 무뎌지기 시작했다.온지유는 그를 밀어내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며 말없이 함께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이런 기회는 절대 없으리라는 것을 말이다.음식이 준비되자 온지유는 살짝 몸을 틀어 그를 돌아보았다. “이제 나가요. 예쁘게 담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어요.”“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 대충 담아서 같이 나가자.”“싫어요. 전 예쁘게 하고 먹을래요.”온지유는 그를 서둘러 밖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나가서 앉아 있어요. 누가 보고 있으면 민망하단 말이에요!”여이현은 마지못해 밖으로 나갔다. 머리를 돌려보니 온지유는 부엌문을 닫아서 그가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그림자 보면서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플레이팅까지 신경 쓰는 모습에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식탁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렸다. 깊은 밤의 은은한 조명 분위기를 더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부엌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순간 어둠 속에서 온지유가 천천히 다가왔다.그녀는 평소 입던 딱딱한 정장이 아닌, 흰색 스웨터와 넉넉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뽀얀 피부는 스웨터 덕분에 더욱 빛나 보였다.온지
그 말을 들은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봐도 자신을 비꼬고 있는 말로 들렸다.식탁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맞은편에 앉은 온지유와의 거리감이 왠지 마음 한편을 허전하게 만들었다.여이현이 말을 걸었다."좀 더 가까이 앉아."온지유는 그 말에 거절하지 않고, 의자를 끌어 그의 옆자리로 왔다. 그리고는 여이현에게 반찬을 덜어주며 말했다."시간이 꽤 지났는데 왜 아무것도 안 먹고 있어요? 요리가 입에 안 맞아요?"여이현은 온지유가 자기 그릇에 음식을 덜어주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젓가락을 집었다."요리하기 전에도 말했잖아. 네가 만든 거라면 뭐든 다 먹겠다고."그는 온지유가 덜어 준 음식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음, 맛있네. 요리에도 재능이 있나 봐?"그리고는 같은 반찬을 몇 번 더 집었다.여이현이 진심으로 요리를 즐기는 모습에 온지유는 마음속이 크게 요동쳤다.그러나 티 내지 않고 그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어머, 진짜요? 저도 먹어봐야겠어요, 정말 그렇게 맛있는지."그리고 다른 접시에 젓가락을 뻗어 맛보고는 말했다."음... 그냥 평범한데요. 도우미가 해준 요리가 더 맛있는 것 같은데."몇 끼를 굶기라도 했는지, 여이현은 가볍게 웃으며 요리를 집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난 네가 만든 게 더 맛있는 것 같은데."여이현이 자신의 요리 솜씨를 계속 칭찬해 주는 모습에 온지유는 기분이 좋아졌다.그 순간, 온지유는 두 사람이 진정한 부부로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여이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은 그저 국물을 마시는 모습조차도 남들과 사뭇 달라 보였다. 온지유의 얼굴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고, 여이현을 바라보는 눈빛에도 저도 모르게 따뜻한 감정이 실렸다."요즘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죠?"온지유가 당부했다."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거르면 안 돼요. 돈은 천천히 벌 수 있지만, 몸은 하나뿐이잖아요. 한번 무너지면 다시 회복하는 데 돈도 시간도 더
온지유가 계속 온 비서로 남았다면 분명히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욕심이 생겨버렸다. 여이현의 사랑을 갖기를 원했다.이대로 계속 함께 있으면, 둘은 점점 더 불행해질 것이고, 아름다웠던 추억은 결국 그림자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온지유..."여이현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약효는 점점 강해졌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뚫어져라 응시했다."설마 날 떠나는 이유가... 석이한테 가기 위해서야?"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이겨내며 여이현의 얼굴을 어루만질 뿐이었다.온지유는 그에게서 석이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하지만 눈앞의 그는 여이현이었다. 더 이상 그 젊고 패기 넘치던 소년이 아니었다.온지유는 강도의 손에서 자신을 구하려다 심하게 다쳤던 정의감 넘치던 그를 떠올렸다. 그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석이는 온지유를 위해 피를 흘렸고, 온지유도 여이현의 생명을 구하면서 그 빚을 갚았다.온지유는 석이와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 이후, 온지유의 시선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 그가 다니던 대학교에 따라갔다. 여이현에게 온지유는 7년 동안 존재 한 사람이지만, 온지유의 삶에 여이현은 14년 동안 존재했다.어느 한 무더운 오후였다.특별한 날을 맞아, 학교에서는 단체로 연극을 준비 하기로 했었다. 어떤 일이든 정성을 다하던 온지유는 다른 학생들보다 30분 일찍 강당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와서 대사를 연습하곤 했던 온지유는 그날도 평소처럼 강당에 들어섰고, 동시에 코를 찌르는 심한 피비린내를 맡았다.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온지유는 냄새를 따라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학교에서 사용하던 공연 의상들로 가득했다. 어딘가에서 무거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온지유는 도둑일 것이라 생각하며 두려운 마음에 문 뒤에 있던 야구 배트를 잡고 다가갔다.걸쳐있던 옷을 밀어내었을 때, 손에서 놓친 야구 배트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여이현의 얼굴이 먼저 눈
온지유는 마지막 한 모금 남은 잔을 여이현의 술잔에 가볍게 부딪혔다.나름 깔끔한 작별 인사였지 않을까.그 전에 함께 즐겁게 식사도 했으니 말이다.온지유는 떠나기 전에 이혼 서류를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 옆에는 두 장의 프랑스행 항공권도 있었다. 티켓의 주인은 여이현과 노승아였다.온지유는 이를 통해 여이현을 완전히 놓아주었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프랑스같이 로맨틱한 여행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니.모든 일을 마친 온지유는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이날 밤은 아무도 저택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다음 날."대표님!""대표님, 정신 차리세요!"여이현은 서서히 깨어났으나, 머리는 여전히 묵직한 돌에 짓눌린 듯 무거웠다.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으며, 엊저녁 온지유가 요리해 주던 장면을 떠올렸다.여이현은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빈 주위에 온지유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대표님, 괜찮습니까?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배진호는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걱정하며 물었다.이른 아침, 도우미가 여이현이 바닥에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 않자, 배진호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단호하던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온지유는 여이현에게서 떠나기 위해서라면 약물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여이현은 자리에 앉으며 허탈한 듯 웃었다."나에게서 떠나려고 이런 태도를 보였던 거야."“사모님 말씀인가요? 정말 떠나신 건가요?”배진호는 이미 눈치를 채고, 여이현을 보며 말했다.“바로 사람을 보내 데려오겠습니다!”“됐어!”여이현이 바로 그를 제지했다.배진호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여이현의 곁으로 돌아왔다.의자에 걸터앉은 채 이미 다 포기한 듯 공허한 여이현의 모습에 배진호가 다시 물었다."사모님이 갑자기 달라지셨을 때 이미 눈치채셨던 것 아닌가요? 어제는 일부러 사모님의 함정에 빠지신 거죠?"온지유는 떠나기 위
그 말을 듣고 여이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어떤 비밀인데?"상대방은 여이현이 여전히 관심이 있음을 확인하고 말했다."온지유씨는 여러 번 병원에 다녀왔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온지유씨에 대해서 철저히 함구하고 있었지만, 저희 노력 끝에 온지유씨가 간 곳이 산부인과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여이현은 충격스러운 사실에 한동안 정신 차릴 수 없었다.그는 병원에서 온지유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온지유는 생리주기가 불규칙하다며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했었다.여이현이 데려다주려 할 때마다 온지유는 매번 거절했었다.일부러 숨기려 한 것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사생활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아니, 생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와의 지난 3년 동안 항상 거리를 두었었다.그동안 온지유를 한 번도 건드린 적이 없었다.그가 원한다고 해도 온지유가 원치 않으면 강요하지 않았다.두 사람의 혼인에는 넘을 수 없는 울타리가 있었고,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최대한의 존중을 보이고자 했다.지금도 여이현은 함부로 짐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생각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보이지 않는 그물에 꽉 묶여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확실해?"여이현이 여전히 침착하게 물었다."확실합니다. 온지유 씨의 병원 행적을 녹화한 것을 복사해 두었습니다. 곧 대표님께도 보내드리겠습니다.""그래."여이현은 전화를 끊었다.이윽고,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영상이 벌써 여이현의 휴대폰으로 전송된 것이었다.그러나 여이현은 바로 열어 보지 않고, 사무실 의자에 앉은 대로 깊이 고민했다.해가 지고 밤이 되어, 회사 사람들은 이미 퇴근했지만, 그의 사무실의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그는 쭉 같은 자세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여이현은 용기가 없었다. 온지유가 산부인과에 간 것이 단순한 검진이 아니었을까 봐 두려웠고,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있을까 봐 두려웠다. 언제부터 이
그래도 여진숙은 이상함을 눈치챘다.온지유가 여이현과 함께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여진숙과 함께 지내며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여이현이 배려하여, 그동안 온지유와 그는 이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물고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이현 혼자 이 저택으로 돌아오고, 온지유는 보이지 않으니, 여진숙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게다가 온지유에 대해 여이현이 전혀 언급하지 않으려 했기에, 여진숙은 더더욱 가슴속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수소문해 보니, 온지유는 이미 회사에 출근하지 않은 지 한참이 되었다고 한다.‘아들과 결별한 것일까?’소식을 확인해 보려 해도, 여이현이 그리하게 내버려둘지는 모르는 일이었다.예를 들면, 수려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여진숙에게도 철저히 통제 되어있었다.여진숙은 여이현의 어머니로서, 이 집의 주인으로서, 수려원 역시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게 도리였다.하지만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직 여이현의 말만 따랐다.이에 여진숙은 줄곧 감정이 상해있었다.어찌 됐든, 지금은 온지유와 여이현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여진숙은 반드시 사실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여이현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여진숙이 물었다.“요 며칠 동안 지유를 보지 못했는데, 둘이 싸운 거야, 아니면 이미 이혼을 한 거니?”만약 이미 이혼했다면, 여진숙은 이 좋은 소식을 빨리 노승아에게 전하고 싶었다.그러면 여진숙도 그룹에서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지금의 노승아는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여진그룹의 아들이 대세인 여배우와 결혼했다고 알려지면 꽤 큰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여이현은 발걸음을 멈췄다.조금 전까지는 모자 사이의 체면을 유지했다면, 이제는 대놓고 면박을 줬다.“남 걱정할 시간에 차라리 어머니 남편이나 신경 쓰지 그러세요!”이 말에 여진숙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약점을 찌른 셈이었다.뭐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여이현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여이현은 이제 그녀를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다.온지유 그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