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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억울하면 네 부모를 탓해

정장을 차려입은 성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가 불편했던 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혜원의 약을 건넸다.

“저는 이미 혜원을 만나고 왔어요. 이 약은 저 대신 이모한테 전해줘요.”

성한은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

“같이 가자. 우리도 오래간만에 만났잖아.”

“아니에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

성혜인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병원에서 나왔다.

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성혜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성혜인이 들고 있던 약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연고를 들고 산부인과에서 나왔다라... 이 장면을 보고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성한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는 차가운 인상의 성혜인이 이토록 문란한 사생활을 즐길줄은 몰랐다. 남편이 3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독수공방에 지친 그녀가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급할 것 없어. 혜인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에게도 기회가 생길 테니까.’

성혜인은 차에 올라타고 나서고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

소윤이 자식 둘을 데리고 성씨 저택에 와서부터는 매일 성한과 마주쳐야 했는데 성혜인은 그가 상당히 불편했다.

성휘는 성한을 내보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난감한 표정에 도무지 그렇게 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

소윤과 성혜원에게 미안했던 성휘는 성한에게도 아주 잘해줬고, 그 속에 껴서 불편하게 지내기 싫었던 성혜인은 단호히 집을 나왔다.

이제 와서 보니 그녀야말로 성씨 집안의 제삼자 같았다.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혜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온 사람의이름을 확인하고 나자 안 그래도 언짢았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

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머니.”

전화를 건 사람은 반승제의 어머니인 백연서였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부터 재벌 집 출신인 ‘시어머니’는 성혜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반태승 앞에서만 손자며느리 역할을 했지, 다른 사람들은 최대한 멀리했다.

“조망한 집으로 오려무나. 이제 슬슬 이혼 얘기를 해야지.”

백연서는 아주 직설적이었다. 그녀는 성혜인의 거절을 미리 거절하기까지 했다.

“예전에는 회장님의 뜻이라 그냥 말없이 따랐지만 이제는 아니야. 앞으로의 일은 BH그룹의 새 주인인 승제의 몫이란다.”

구구절절 말이 길어지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이혼하라는 말이었다.

백연서는 성혜인이 울고불고 난리를 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자신의 아들처럼 훌륭한 남자를 쉽게 놔주려는 여자는 없을 테니까.

상대가 반승제라면 평생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말 몇 마디 나눠볼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성혜인은 백연서의 예상과 다르게 덤덤히 대답했다.

“네, 지금 바로 갈게요.”

의문 하나 없는 깔끔한 대답. 성혜인은 마치 이날만을 기다린 듯 빠르게 대답했다.

백연서는 기분이 찝찝했다. 버림을 당한 사람은 분명 성혜인인데, 그녀의 태도 덕분에 전세 역전을 당한 것만 같았다.

찝찝한 기분을 풀기 위해 백연서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래. 너는 애초부터 승제한테 어울리지 않았어. 승제는 더 좋은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그리고 승제는 이미 오고 있는 길이니 너도 빨리 오도록 해.”

성혜인은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녀는 반승제도 함께 만날 줄은 몰랐다.

어제 하룻밤을 보낸 여자가 자신의 부인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는 과연 어떤 반응을보일까? 반승제처럼 오만한 사람이라면 구역질을 할지도 몰랐다.

성혜인 피식 웃으며 반씨 저택으로 출발했다.

백연서는 역시 성혜인을 만나자마자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흔쾌히이혼을 허락한 걸 봐서 과하게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너도 나를 너무 미워하지는 마. SY그룹의 상황이 어떤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리고 네 아버지는 사업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언제까지 BH그룹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으니 얼른 접으라고 전해. 그리고 네 새어머니도 우리 집안의 돈을 호시탐탐 얼마나 노리는지 알아? 아무튼 우리는 너 같은 며느리를 남겨둘 이유가 없어. 정 억울하면 너를 이런집안에서 낳아준 네 부모를 탓해.”

성혜인은 소파에 앉아서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요, 어머니 말씀이 다 맞아요.”

사실상 두 사람은 혼인증명서만 갖고 있는 남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이혼은 성혜인에게도 일종의 해방이었다.

백연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솜뭉치를 향해 분풀이한 것만 같았고 성혜인의 반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이때 저택 밖에서 주차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도우미가 달려와서 말을 전했다.

“사모님,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백연서는 기쁜 표정으로 문 앞으로 걸어갔다.

성혜인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문 쪽을 바라봤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평온하던 마음이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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